미주 포교의 첫 발을 디딘 서경보 스님의 샌프란시스코 선원 모습.
1972년 숭산스님 渡美, 국제포교 新紀元
미주 지역에 한국 불교가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964년 6월 서경보 스님이 미국을 방문하면서다. 서경보 스님은 포교가 목적이 아니라 교환교수로 미국을 방문, 1969년까지 머물며 미국 필라델피아 주립 템플대학에서 연구 및 교수로 생활했으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경보 스님은 캘리포니아 대학 교환교수로 있을 때 샌프란시스코에 조계선원을 열어 현지인을 대상으로 포교했다. 1966년에는 필라델피아에 세를 얻어 조계선원이란 간판을 붙이고 한국선을 전파했다. 그러나 스님의 목적은 포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현지에서 지속적인 포교가 전개되지는 않았다.
1964년 서경보 스님 한국불교 미주 포교 첫 발
유학생 중심 활동하다 맥 끊겨, 교포 자체 신행
지난 2004년 <미주현대불교>가 미주 포교 40년을 맞아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서경보 스님의 미국 포교는 버지니아주로 스님이 이주하면서 끝나고 주로 보살들에 의해 한국불교의 맥이 이어졌다. 1969년 최명심행 보살 등이 가정법회 형식으로 원각사를 시작해 1971년 구윤각 스님을 모시고 맨하탄에서 법회를 했다. 이를 미주 한국불교계에서는 최초의 한국불교 사찰로 본다.
서경보 스님을 이어 1967년 삼우 스님이 미국 뉴욕으로 간다. 일본을 거쳐 뉴욕에 도착한 스님은 맨하탄에 방1개 짜리 아파트를 얻고 일을 하며 탁발을 해보았지만 통하지 않아 캐나다 몬트리올로 가서 4년을 살다 1973년부터 참선을 통한 본격적인 포교를 시작한다.
이어 1969년 박성배 교수, 이장수 법사, 강건기 교수, 이한상 거사 1970년 고성 스님 등이 미국에 입국하거나 방문했다. 이들은 이한상 거사를 제외하고 모두 유학차 미국을 방문했다. 이장수 법사는 1960년 동국대 불교학과에 특별 장학생으로 입학한 재원으로 불교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있다가 미국 시카고로 유학을 떠났다.
서양의 백인 이민은 받아들이면서 동양인은 유학생 외에 이민을 가로막던 미국은 1968년 7월1일부터 발효된 '케네디 이민법'에 의해 한국을 비롯한 동양인의 이민자가 급증한다. 미국 내 한국불교도 이처럼 급증하는 이민자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들어가게 된다.
한국에서 대표적인 기업인으로 성장하던 덕산 이한상 거사는 1969년 미국으로 들어간 뒤 미국 샌프란시스코 근교의 경치 좋은 카멜에 터전을 잡고 1970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73년 1월에 개원법회를 가졌다. 사찰의 형태를 한 미국내 최초의 한국사찰 카멜 삼보사다. 개원법회에 송광사의 구산 스님이 처음 방문한 이후 LA를 여러 차례 방문한다.
구산 스님은 한국에서 외국인을 제자로 맞은 최초의 한국스님이다. UCLA에서 한국학과 불교학을 연구하는 세계적인 불교학자 로버트 버스웰을 비롯, 구산 스님의 출가제자로 한국에서 만났다가 환속해서 결혼한 성일(마르티네 배철러)과 법천(스티븐 배철러)이 그들이다. 구산 스님은 로스엔젤레스, 카멜, 제네바에 송광사 분원을 세웠으며 1976년에는 불일 국제선원을 세워 외국인을 따로 교육했다. 스님이 송광사에 주석하던 14년간 50명의 외국인 스님들이 참선을 배웠다.
이 때까지 미주 한국포교는 주로 개별적이고 한시적으로 진행되었다. 도미 이유가 대부분 유학이었으며, 스님들 중에 현지인을 대상으로 포교에 나서기도 했지만 지속적이지 않았다.
조계종이 본격적으로 미주 포교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1972년 4월 숭산 스님이 미국에 발을 디디면서다. 스님은 그 전에 일본 홍법원을 건립, 해외 포교 경험을 쌓은 터였다. 미국을 한번 구경이나 하자는 마음에 들렀던 스님은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만난 로드 아일랜드 주립대 동양사학과 김정선 교수와 맨하탄에서 목격한 미국인들의 참선 공부를 보고 보스턴으로 가서 본격적인 포교를 준비한다.
새 이민법 발효 후 한인 이민 늘면서 활기 띠어
숭산스님부터 본격화, 미 지식인 중심 급속 확산
김교수의 도움으로 로드 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 근처에 방을 얻고 세탁소에 들어가 일하면서 영어를 배우며 포교를 준비했다. 세탁소도 김교수가 운영하던 가게였다. 스님은 이곳에서 기계 고치는 일을 하고 함께 간 정달 스님은 옷을 다리면서 현지인들을 포교했다. 인근 브라운대학에서 동양문명사를 가르치는 리오 프루덴 교수가 세탁소에 손님으로 왔다가 스님을 알아보아 그 때부터 학생들과 접하게 되었다. 리오 교수는 일본에서 공부해 일본어가 능통했다.
숭산 스님이 일본어로 강의하면 리오 교수가 영어로 통역하는 식으로 의사 소통을 했다. 세탁소에서 생활하면서 두 스님과 학생들은 새벽 예불 참선 등을 준수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반야심경 예불을 미국식으로 간단하게 모시고 108참회를 한 다음 참선을 했다. 그리고 미국 사람들의 문화에 맞춰 인터뷰 형식의 법문을 했다. 오후 7시에 예불하고 참선을 했으며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일요일은 용맹정진을 했다. 처음에 10명 15명에서 점차 불어나 1972년 첫 해 여름 40~50명이 모여 장소가 비좁을 정도였다.
당시 미국과 유럽의 젊은이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잔혹 행위를 보며 문명에 염증을 느껴 히피문화나 동양의 명상에 빠져들 때였다. 동양에서 온 낯선 선사의 출현에 환호하는 지성적 분위기가 충만하던 시대였다. 널리 알려진 대로 스님은 미국에서 한국불교와 전혀 다른 불교를 갖고 포교한다. 그래서 1981년 관음선종이라는 새로운 종파를 설립한다. 스님은 재가자 중심의 미국 환경에 맞춰 재가불자도 가사를 입을 수 있도록 하고 기혼 미혼 구분없이 스님의 계를 내렸다. 임제선의 공안을 12개로 단순화 하여 학생들이 각 단계를 차례로 통과하면 법을 내렸다.
1972년 9월 프로비덴스 홍법원 발대식을 하고 현판을 건뒤 10월에 문을 열었다. 이어 11월8일 미국에 온지 6개월 정도 지나서 숭산 스님은 5계 수계식을 하였다. 일본 스즈키 순류 제자였다가 숭산 스님을 만난 폴란드인 우봉선사(Jacob Perl), 숭산 스님의 첫 제자이며 간호사로 말기 암환자를 돌보는 호스피스 일을 하던 성향 스님(Barbara Rhodes)을 비롯해 래리 로젠버그(Larry Rosenberg) 스테픈 미첼(Stephen Mitchell) 죠지 바우만( George Bowman) 린콜른(Lincoln) 등이 이들이다.
숭산 스님의 포교는 로드아일랜드 주를 거점으로 삼아 미국전역으로 확대됐다. 대상도 미국인 한국인을 가리지 않았다. 숭산 스님의 뒤를 이어 온 스님들이 주로 한 사찰에서 한국 신도들을 대상으로 포교한 형태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 속도도 엄청났다.
<사진>1973년 1월 문을 연 한국 최초의 미국 사찰
LA 삼보사 개원식 모습.
미국에 온지 1년도 안된 1973년 2월3일(음력 1월 1일) L.A.에 달마사 개원 법회를 열었다. 숭산 스님이 보스톤으로 가기 전에 L.A를 들렸는데 이때 인연 맺은 사람들이 1972년 10월에 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 이들은 숭산 스님 문하인 한계정 스님을 초청하여 주지로 모시고 개원을 준비한 것이다.
이한상 거사가 설립한 삼보사가 이보다 앞서 개원했다. 삼보사 개원법회에 참석한 구산 스님은 달마사 개원법회에 참석했다. 달마사는 캘리포니아에서는 삼보사에 이어 두 번째, L.A.에서는 가장 먼저 설립된 한국사찰이었다.
1973년 5월 6일에는 숭산 스님, 계정 스님을 계사로 미국에서 최초로 수계법회를 봉행해 25명이 보살계를 받았다. 이어 1974년 5월 프로비덴스 선원 장의사 건물을 사서 확장 이전했다. 시카고에서는 1974년 5월 부처님 오신날 행사 때 불타사에서 손지학 스님이 숭산 스님에게 출가했다. 숭산 스님이 미국에서 맞이한 첫 출가자였다. 이 해 카나다 토론토, 보스톤 케임브리지에 잇따라 선원을 개설했다.
1974년 6월 25일 원광 김창식 심검도 총재가 숭산 스님 초청으로 미국에 입국했다. 김총재는 화계사에서 숭산 스님의 제자로 불교 무술을 연마하던 인물이다. 속가에서 배운 무술과 불교의 가르침을 접목해 심검도를 창시했다. 왕십리 등지에서 도장을 열고 문하생들을 받아들였는데 이때 배운 나한일 등이 김총재가 미국으로 가고 난 뒤 해동검도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문파를 조직했다. 1976년 6월 보스턴에 불교와 심검도를 가르치는 심광사를 개원했다. 앨고어 전 미국 부통령의 아들이 심검도에 심취해 화계사를 방문, 숭산 스님을 만난 적이 있다.
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이 글은 진우기의 ‘달마 서쪽으로 가다’(불교시대사), 미주현대불교에 2004년 수록된 ‘미주 한국불교 40년의 발자취’ ‘미주 현대불교 김형근씨의 미주포교사, 동국대학교 석림동문회 편찬’ ‘한국불교현대사’(시공사)의 도움을 받았다.- 편집자주
[불교신문 2704호/ 3월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