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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라 … 위로하라
이사야 40:1~2 / 고신일 목사 / 2009-12-13 / 주일 낮 4부
할렐루야!
미국 심리학자 매슬로우(A.H. Maslow, 1908~1970)는
인간의 욕구를 5가지로 설명했습니다.
① 생리욕구 ② 안전욕구 ③ 소속감과 사랑에 대한 욕구
④ 인정받으려는 욕구 ⑤ 자기실현의 욕구
- 생명유지에 가장 기초적인 식욕, 성욕, 수면욕 … 등의 생리 욕구가 충족되면
- 다음 단계로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안전 욕구를 추구하게 되고
- 그 다음에는 소속감, 인정 욕구 충족을 거쳐
- 자기실현이라는 인간 최고의 경지를 추구하게 된다는 이론입니다.
가정에서도 자녀가 부모에게 …
배우자가 상대방에게 … 인정을 받지 못하면
상처를 입고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상대방을 인정해주는 것은 돈이 많이 들거나 큰 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색한 마음을 버리고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화목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따라합니다.
‘당신이 최고예요’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네가 최고다, 네가 있어 행복하다, 네가 자랑스럽다’
‘장로님/권사님/집사님 참 멋있습니다. 최고입니다’
저도 잘 하지 못해 문제인데 …
우리 모두 상대방을 칭찬하고, 인정해주고
높이는 말을 자주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위로하라 위로하라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멸망당하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중에도 살아남기는 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포로생활로 지칠 대로 지친 상황입니다.
좌절에 빠져 있는 그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본문 1절에, “ …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고 했습니다.
본문 2절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역의 때가 끝났다고
선언해 주셨습니다.(사 20:2)
노역이란 말은‘노예나 전쟁 포로로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을 말합니다.
온갖 힘든 일을 강제로 해야 하는 것이 노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는 것을
「쉬운 성경」과「새번역성경」에는 복역 기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복역 기간’은 의무적으로 가야 하는 군대나
강제로 갇히는 감옥 같은 곳에 있는 기간을 말합니다.
복역을 다른 말로 ‘고생’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시설이 좋고 먹을 것이 좋아도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은 힘든 것입니다.
감옥에 시설이 좋고 TV도 나온다고 가고 싶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이 청년들이 군대에 가려고 하면
‘요즘 군대가 군대냐 먹는 것도 잘 나오고 …
너무 좋아졌다더라 … ’고 말하지 마세요.
요즘 군대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장비가 좋아지고 식단이 바뀌었을 뿐 …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고생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은 것입니다.
군대 간 청년들이 입대하자마자 기다리는 날이 전역(제대)하는 날입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이 군대 가기 전에 제게 기도를 받고 갑니다.
제가 손을 잡고 ‘하나님 어디에 가든지 평안케 하여 주시고
좋은 상관, 좋은 동료, 후배 만나게 하여 주옵소서.
건강하게 입대한 모습 그대로 제대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첫 휴가 때 제게 오라고 하고 첫 용돈을 줍니다.
제가 첫 휴가 나온 젊은이들에게
‘제대 얼마나 남았느냐’고 물으면 다 압니다.
그만큼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군대에 가셨던 분들은 다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후임 중에 한 명을 정해 자신의 전역 날짜를 항상 계산하게 합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물으면 제대가 며칠 남았는지 말하게 합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며칠 남았냐?’물으면,
후임은‘20일 남으셨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제가 군대에서 제대가 거의 다 되었을 무렵
곱게 생긴‘홍철선’이라는 신병이 들어왔습니다.
그 신병은 매일 아침에 제가 눈뜨면 “○○일 남으셨습니다”했습니다.
1977년 3월 제대하고 1985년 목사가 되어
어느 날 이은숙전도사님하고 심방을 다녀왔더니
사무실에 그 ‘홍철선’이라는 후배가 찾아왔더군요.
양복 입고 성경가방 들고 있는 저를 보더니
‘목사 됐다며, 회개 했나?’얼마나 당황스럽던지 …
수원에서 지물포를 한다는 그를 다음에 보자고 떠밀며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강제로 하는 복역 기간은 빨리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그 노역의 때, 복역의 기간이 이제 끝났다 …
그러니 이제는 고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고난의 시간에 고통의 세월이 끝난다는 것,
그것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와 위로의 메시지가 선포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사40:27)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연 그 말이 실현될까 의심했습니다. 낙담했습니다.
70년 동안 포로로 지내왔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도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면
과연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가를 의심하지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들이 공허한 메아리로 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40장 8절에 보면 그들을 향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 ”(사 40:8)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실현된다는 선언입니다.
‘내가 너희를 용서하겠다’
‘내가 너희를 붙들어 주겠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신실하여 변함없고 영원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화목하고 … 평안하라 … 복이 임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지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
노역 기간, 복역 기간이 끝났기 때문에 …
고국에 돌아갈 자격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포로로 잡혀가서 고생하는 징벌을 견딘 것으로
죄 값을 다 치룬 것이 아닙니다.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이 있더라도
그것을 단순히 죄의 댓가라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얼마간의 고난을 당하면
자기가 죄에 대한 댓가를 치룰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설 때 …
하나님의 용서와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욥기 22장 21~23절 말씀에 보면
인간의 표현으로 그 안타까움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통당하는 욥에게 그의 친구 엘리바스가 충고하는 말이 나옵니다.
엘리바스는 욥에 대해 정확히 모르는 사람이었고
욥이 당하는 고통과는 상관없는 말로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엘리바스가 욥에게 한 말은
우리 모두가 귀담아 두어야 할 중요한 말씀입니다.
욥기 22장 21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여기 보면 하나님과 화목하라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오늘을 살게 생명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굴복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삶이어야 합니다.
시간, 물질, 재능 … 모든 것을 하나님이 기쁘시게 써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화목이고 하나님과 화목해야 평안이 옵니다.
교회에 불을 켜지 않으면 캄캄할만큼
외부의 빛을 차단하여 교회를 지었습니다. 전기를 켜야 환해집니다.
발전소에 연결된 줄이 교회 건물 어딘가에 있습니다.
그 줄이 바르게 연결되어 있을 때 환해집니다.
그 줄이 끊어지면 캄캄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성경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지고 화목하고 우리가 평안해 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끊어버리면
자연히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고 우리의 평안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평안한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이루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복종하며 하나님 뜻대로 살 때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리하면 복이 임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요14:27)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평안의 복이
참 평안이며, 참 복입니다. (요14:27, 욥 22:21)
하나님과 화목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복을 누리는 방법이 욥기 22장 22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음에 두라 … 흥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라 입니다.(욥22:22)
-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 두고
-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향수병을 집에 두었다고 해서 집안에 향내가 나는 것이 아닙니다.
뚜껑을 열어 향이 나오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라고 해서
성경을 가슴에 품고 다니거나 집에 두거나 가방에 넣거나
자동차에 두고 다닌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듣고, 배우고, 익혀서
말씀대로 살려고 순종하는 삶이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삶,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21절 말씀대로 복이 임하고 23절 말씀대로 다시 흥하리라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8~10절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8~10)
이 말씀을 쉽게 풀이하면
"우리가 고난에 둘러싸여 난타를 당했지만, 사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찌할 바를 몰라도, 우리가 알기로,
하나님은 어찌해야 하는지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위협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넘어뜨림을 당했지만, 꺾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께 한 일--재판과 고문, 조롱과 살해--을 우리에게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 가운데서 행하신 일을 우리 안에서도 행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를 위해 끊임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보다 분명히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어 구원 받아 천국의 소망으로 사는 우리는
환란이 있어도 … 고난과 핍박이 있어도 …
비록 거꾸러지는 일이 있어도 … 망하지 않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망하는 것은 끝나는 것을 말합니다. 회복불능, 죽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이미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
망함이 없습니다. 다시 흥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혼자 착한 척, 거룩한 척 다하지만 사실 늘 죄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깨끗하게 살려고 해도 우리 몸에는 때가 있습니다.
목욕하고 때를 밀어도 계속 나옵니다.
다 긁어내면 피부에 좋지 않다고 합니다.
아침에 깨끗한 옷을 입고 나왔어도 목에, 소매에 때가 끼게 되어 있고, 더러워집니다.
안씻어서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 몸에는 늘 때가 묻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깨끗하게 살고, 죄짓지 않으려고 해도
‘나 같이 살아라, 난 깨끗하다’라고 말하는 사람 그 사람이 제일 문제입니다.
우리가 깨끗하게 살려 해도 세상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는 은총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돌보심을 지금도 계속해서 받고 있습니다.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고 …
예수님은 우리의 용서를 위해 /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어 구원 받은 우리 삶에 용서를 실천하는 것이 없다면
우리가 예수님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고후1:3~4)
용서 받은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위로 받은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한 번도 용서 받아본 적이 없거나
용서 받았음에도 자신이 용서받은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남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남의 죄를 용서하고
내가 남을 위로하는 것은 스스로 내가 용서 받고
위로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위로가 무엇인지
먼저 알게 된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용서를 모르고, 하나님의 위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위로를 전할 의무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줘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2장 15절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롬 12:15) 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우리 곁에서 함께 하신 것이 위로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하나로 조건 없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용서하고 우리를 조건 없이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고 …
외로울 때 같이 있어 주며, 기쁠 때 함께 웃고,
슬플 때 함께 울어 주는 것이 위로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인터넷에서 좋은 글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오다가 우리 가족은 큰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그 사고로 나는 두 개의 보조다리(목발) 없이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나보다는 덜했지만 아빠도 보조다리 없이는 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사춘기를 보내며 죽고 싶을 정도의 열등감에 시달렸다.
내가 밥도 먹지 않고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을 때, 위안이 되어준 사람은 아빠였다.
아빠는 나와 똑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아픔을 낱낱이 알고 있었다.
아빠의 사랑으로 나는 무사히 사춘기를 넘기고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대학 입학식 날, 아빠는 내가 자랑스럽다고 하시며 눈물을 글썽였다.
입학식을 끝내고 나올 때였다. 눈앞에 아주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차도로 한 아이가 뛰어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 눈 앞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빠가 보조 다리도 없이 아이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며 아빠가 그 아이를 안고 인도로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빠?” 나는 너무 놀라 소리쳤지만
아빠는 못 들은 척 보조다리를 양팔에 끼고는 서둘러 가버렸다.
“엄마 ! 엄마도 봤지? 아빠 걷는거!”
하지만 엄마의 얼굴은 담담해 보였다.
“놀라지 말고 엄마 말 잘 들어.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되리라 생각했어.
아빠는 사실 보조다리가 필요 없는 정상인이야.
그때(그 사고 때) 아빠는 팔만 다치셨어.
그런데 사년동안 보조다리를 짚고 다니신 거야.
같은 아픔을 가져야만 아픈 너를 위로할 수 있다고 말야.”
“왜 그랬어? 왜 아빠까지.”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울지마. 아빠는 너를 위로할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을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셨는데 …
오늘은 그 어린것이 교통사고로 너처럼 될까봐서 … ”
앞서 걸어가는 아빠를 보고 있는 나의 분홍색 파카 위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마음이 아픈 날이면 나는 늘 아빠 품에 안겨서 울었다.
그때 마다 소리 내어 운 것은 나였지만
눈물은 아빠 가슴 속으로 더 많이 흘러 내렸다.
<인터넷 블로그에서 퍼온 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사람 되어 예수로 우리에게 오신 것은
우리의 부족함을 친히 아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위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멀쩡한 아버지가 장애자가 된 딸의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
스스로 장애를 가진 사람의 모습으로 살았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 낮은 자리에 오셨습니다.
예수님 오심을 기다리는 강림절은
온 세상에 하나님의 위로를 선포 하는 기간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6절 봅니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 1:6)
우리는 이 하나님의 위로를 기억하며
이 세상을 하나님의 위로로 따뜻하게 바꾸어 나가는
하나님의 사람, 위로의 사람으로 오늘을(현재를) 살아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는 시간을 모두 현재로 설명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세 가지 현재만 있을 따름이다.
과거의 현재와 현재의 현재와 미래의 현재이다.
-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라는 형태로 존재하며,
- 현재의 현재는 통찰하는 것이며,
- 미래의 현재는 기대감으로 존재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개념을 빌려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기억하며, 무엇을 보고 있고, 무엇을 기대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에게 짐이 있을 것입니다. 아픔이 있을 것입니다.
‘왜 나만, 왜 내게 이런 고난이 … ’라고 하면서 불평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여러분의 삶의 이유일 것입니다.
1919년에 세상을 떠난 미국의 26대 대통령 루즈벨트는
항상 두 개의 안경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선거운동 중 슈렌크라는 사람이 루즈벨트를 암살하기 위해
총을 쏘았습니다. 그가 쏜 총에 맞고 루즈벨트는 쓰러졌습니다.
병원에서 루즈벨트의 가슴을 보니 멀쩡했습니다.
다만 가슴 안주머니 안경집이 산산조각이 나 있었습니다.
그 안경집이 총알각도를 꺾어서 생명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무거운 안경집이 항상 귀찮은 짐인 줄 알았는데 나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선교사 한 명이 아프리카에 선교를 갔습니다.
원주민들과 함께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원주민이 큰 돌을 선교사 가슴에 안겨주었습니다.
자신들은 큰 돌을 머리에 이거나 가슴에 안고 강을 건넜습니다.
선교사는 그 이유를 강 중간쯤 왔을 때 알았습니다.
중간쯤에 급류가 흐르고 있었는데
만약 무거운 돌이 없었다면 급류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돌은 무거운 짐이었지만 생명을 살리는 것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짐이 있습니까? 어떤 아픔이 있습니까?
어떤 귀찮은 것이 있습니까? 정말 벗어던지고 싶은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삶의 이유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보며 어떤 마음으로 그 짐을 지고 가십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좋았던 것을 기억하고
좋은 것을 보고, 좋을 것을 기대하며 좋게 말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하나님의 돌보시는 은총의 날개 아래 사는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과 평안한 관계를 유지하며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을 향한 삶,
위로하고 위로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런 삶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러움 없는
믿음의 사람으로 사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무엇을 보며 어떤 짐을 괴로워하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여 주옵소서.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것을 기대하며,
좋은 것을 바라보는 성도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위로와 돌보시는 은총을 받은 성도들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과 평안한 관계를 유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사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09년 12월 13일 주일낮4부예배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