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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리더십 관대. 인자. 겸손(寬大· 仁慈· 謙遜)
○ 士로서 훌륭한 사람은 남을 앞지르지 않으며 잘 싸우는 사람은 노여움 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부하를 잘 부리는 사람은 자기 몸을 낮춘다
. -老子-
○ 지나치게 엄히 사람을 책망하는 것은 좋지 않다. 또 스스로는 청렴하더라 도 불초한 자를 배척하여 그 설 곳을 잃게 하지 않고, 정직하더라도 자신 을 척도로 하여 타인을 공격하지 않으며, 지위가 높고 세상으로부터 존경 받고 있더라도 그 빛을 굳이 세상에 자랑하지 않아야 한다.
-韓非子-
○ 급히 서둘러서 밝혀지지 않던 일도 너그럽게 하면 혹 절로 밝혀질 수가 있으니 조급히 서둘러 그 忿을 부르지 말 것이며, 부려도 응하지 않 던 사람을 놓아두면 혹 따르는 수가 있으니 심하게 부려서 그 완고함을 더하지 말라. -菜根譚-
● 周 公
周公의 이름은 旦이다. 기원전 1100년경의 사람으로 후세에 孔子가 이상형으로 삼았던 인물이다.
周公은 周文公의 아들이며 殷나라를 멸하고 周時代를 열었던 周武王의 동생이었다. 武王이 죽고 그 아들 成王이 아직 어렸으므로 周公이 섭정이 되었다.
周公은 섭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한편 어린 조카인 成王을 가르치고 지도 하였는데 간혹 成王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성왕을 꾸짖지 않고 자신의 아들인 伯禽이 성왕을 상대하는 방법이 잘못되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서 아들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렸다.
成王이 자라 성년이 되니 주공은 국사를 성왕에게 맡기고 물러났다. 주공의 아들인 백금 역시 성년이 되어 魯나라의 제후로 봉해져 노나라로 떠나게 되었는데 주공은 아들을 경계하여 이렇게 훈계했다.
“나는 文王의 아들이요. 武王의 동생이며 지금의 王인 成王의 숙부가 된다. 이러한 존귀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번 머리를 감는 동안에도 세번이나 감던 머리를 움켜잡으면서 또는 한번 밥을 먹는 동안에도 세 차례씩이나 입에 물고 있던 음식을 도로 뱉어내면서까지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일어나 찾아온 손님들을 접견하는 등 조금도 잘난체 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어린 王의 신하들을 잃을가 두려워하였다. 너는 노나라에 당도하거든 행동을 삼가고 또 삼가야 한다. 제후라고 해서 거만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사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 楚莊王
楚莊王은 중국의 춘추시대 楚나라의 임금으로 春秋五覇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어느때 초장왕이 이웃나라와 싸워 크게 이기고 난 후 신하들과 잔치를 벌였다. 잔치는 해가 서산에 떨어진 뒤에도 계속되었다. 초장왕은 촛불을 밝히게 하고 계속 술을 마셨다. 잔치가 무르익자 초장왕은 그의 애첩인 許姬에게 분부하여 신하들에게 술을 따르게 했다.
허희가 일일이 大夫들에게 술을 따르며 잔치자리를 반쯤 돌았을 때였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잔치자리의 촛불이 꺼지고 장내는 일시에 지척을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암흑 천지로 변했다.
아직 내시들이 불씨를 가지고 오기 전이었다. 그때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나이의 억센 손이 허희의 허리를 슬며시 끌어안았다. 놀란 허희는 그 억센 손을 뿌리침과 동시에 그 사나이가 쓰고 있는 冠의 끈을 잡아 끓었다. 그제서야 사나이는 크게 놀라 허희의 허리를 놓았다.
허희가 초장왕의 곁에 돌아와 왕에게 말했다.
“첩이 대왕의 명을 받고 여러 大夫들에게 술을 따르는 중에 어떤 무례한 자가 첩의 몸에 손을 대었습니다. 지금 그 자의 관끈이 첩의 손에 있으니 속히 불을 밝혀 그자가 누구인지 살피십시오”
허희의 말을 들은 초장왕이 황급히 말했다.
“아직 불을 밝히지 마라. 과인이 오늘 이렇듯 잔치를 베푼 것은 경들과 함께 서로 기뻐하기 위해서다. 경들은 우선 그 거추장스러운 관끈을 일제이 끓어 버리고 진탕 마셔라”
이에 신하들은 모두 관끈을 끓었다. 그제야 초장왕은 불을 밝히게 했다. 이리하여 결국 허희의 허리를 안은 자가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다.
잔치가 끝나 초장왕이 내궁으로 들어가자 허희가 불평을 늘어놓았다.
“남녀는 함부로 서로 범하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더구나 임금과 신하의 사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습니까? 그런데 왕은 그 무례한 자를 잡아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상하의 예의를 밝히며 남녀의 구별을 바로 잡겠습니까?”
초장왕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는 부녀자가 알바 아니다. 자고로 君臣간에는 한자리에서 술을 마실떄는 서로 석잔 이상을 못 마시며 그것도 낮에만 마시게 되어있다. 그런데 오늘 과인은 신하들과 촛불을 밝히면서까지 그것도 서로 취하도록 마셨다. 누구나 취하면 탈선하는 것이 인정이다. 만일 그 신하를 찾아 처벌하여 그대의 절개를 표창하고 그 대부의 마음을 괴롭힌다면 모든 신하의 흥취가 어찌 되었겠는가? 그렇게 되면 오늘 과인이 잔치를 차린 의미가 없지 않은가?”
허희는 이말을 듣자 초장왕의 큰 도량에 감복했다.
훗날의 일이다. 초장왕이 秦나라와 싸울 때 위기게 처하여 바야흐로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이때 한 장수가 용감하게 포위망을 뚫고 피투성이가 되면서까지 싸워서 초장왕의 목숨을 구했다. 초장왕이 크게 고맙게 여겨 상을 주려고 하자 그 장수는 상을 거절하면서 오히려 엎드려 전날의 잘못을 비는 것이었다. 그가 바로 잔칫날 허희의 허리를 안았던 그 무례한 자였던 것이다. 초장왕은 그를 일어나라고 하면서 말했다.
“천하에 미인은 많으나 훌륭한 신하는 없기 힘든 법이다”
● 晏 子
晏子의 이름은 嬰이고 字는 平仲이다. 春秋戰國時代 齊나라 사람으로 수십년 동안이나 재상으로 있으면서 齊의 靈公(BC581~554재위), 莊公(BC554~548재위), 景公(BC548~490재위)을 섬겼다.
안자는 재상이 되어서도 밥상에는 육류 한가지로 그치고 그 첩은 비단옷을 입지 못하게 했다. 이것은 그가 인색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절약해서 남은 것을 생활이 곤궁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제나라에서는 그의 도움을 받아 생활을 꾸려 나간 사람이 70여가구나 되었다.
조정에 나아가 있을때에는 君主의 下問이 있으면 성의를 다하여 답변하고 하문함이 없을때는 정당하게 행동하려고 했다. 국정이 정당할때는 윗사람의 명령을 따르고 정당하지 않을때는 명령의 옳고 그름을 가려서 옳다고 생각되는 바를 실행했다.이렇게 해서 안자는 영공·장공·경공의 3대를 통해서 그 이름이 제후사이에 유명해졌다.
재상이 된후 어느때 안자가 외출을 했다. 그때 그의 마차를 끄는 마부의 아내가 문간에서 남편이 끄는 안자의 마차를 내다보고 있었다. 마부는 그것도 모르고 수레를 끄는 네필의 말에 채찍질을 가하면서 의기양양하게 신바람이 나서 달렸다.
그런데 저녁이 되어 마부가 집에 돌아오니 그의 아내가 성이 나서 이혼을 하자고 말하는 것이었다. 마부가 놀라 그 까닭을 물으니 마부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주인인 안자는 몸이 齊나라의 재상으로 명성이 천하의 제후사이에서 드날리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겸손하고 근신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겨우 남의 말이나 부리는 주제에 잘난체하고 거만을 부립니다. 오늘은 정말로 정이 떨어져서 친정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마부는 그뒤로 사람이 완전히 바뀌어서 힘써 태도를 겸손하게 하였다. 안자가 이상하게 여겨 하루는 그 연유를 물은즉, 마부가 사실을 아뢰었다. 이에 안자는 마부의 아내를 기특히 생각하고 그녀의 남편인, 마부 또한 쓸만한데가 있는 인물이라고 여겨 그를 大夫의 신분으로 추천하였다.
안자에 관해서는 이외에도 재미있는 일화가 많다. 어느때 안자가 楚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초왕은 안자의 키가 5척도 안된다는 것을 알고, 안자를 골려주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성문 바로 옆에 5척정도의 구멍을 뚫어 놓고는 안자가 오면 성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분부했다.
이튿날 안자가 떨어진 갓옷을 입고 털이 벗겨진 당나귀가 이끄는 수레를 타고 초나라의 성문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마부를 시켜 성문을 열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성문위에 나타난 수문장이 아래를 보며 말했다.
“제나라 大夫는 성문옆에 뚫어 놓은 저 구멍으로 들어오시오. 그런 조그만 몸으로는 넉넉히 들어오고도 남습니다. 하필 이런 성문까지 열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런 소리를 듣고 안자가 태연히 대답했다.
“저것은 개구멍이지 사람이 출입할 곳은 못된다. 개(犬)나라에 왔다면 모르되 사람이 사는 나라에 왔다면 사람이 드나드는 문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말을 전해들은 초왕은 얼른 성문을 열어주라고 했다. 안자가 궁에 들어가 초왕에게 인사하고 초나라 대신들과 문답을 하는데 변설이 도도하고 모두가 이치에 맞아 막힘이 없었다. 초왕이 속으로 놀라면서도 그래도 골려주려고 물었다.
“그대 제나라엔 인물이 없소? 어째서 그대처럼 조그만 사람이 사신으로 왔는가?”
안영이 태연히 대답했다.
“우리 제나라는 다른 나라에 사람을 보내는데 법도가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현명한 나라로 보내고 못난 사람은 못난 나라로 보냅니다. 또 大人은 큰나라로 보내고 小人은 작은 나라로 보냅니다. 臣은 제나라 인물들 중에서 小人에 불과하며 가장 못난 축에 속합니다. 그래서 우리 상감께서 신을 초나라에 보낸 것입니다”
초왕은 부끄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그때 마침 무사 3~4명이 한 죄수를 결박지어 가지고 전각 밑을 지나갔다. 초왕이 물었다.
“끌고 가는 죄수가 어디 놈이냐?”
“예, 제나라 사람입니다. 도적질을 했기로 잡은 것입니다”
초왕이 득의에 찬 표정으로 안자를 보고 물었다.
“제나라 사람은 모두 도적질하는 버릇이 있는가?”
안자는 초왕이 연극을 꾸며 자신을 희롱한다는 것을 알았다.
“신이 듣건대 강남에는 귤이 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강북으로 옮겨 심으면 귤이 열리지 않고, 탱자가 열립니다. 그것은 토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나라 사람들은 원래 도적질을 모릅니다. 그런데 제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오면 도적질을 합니다. 초나라 기후와 토질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제나라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초왕은
“과인은 본시 그대를 욕보이려 했는데 이제 그대에게 오히려 모욕을 당하는구려”
하고 예로서 안자를 후대했다.
● 斑 超
반초는 중국의 後漢때 사람이다. 章帝 때는 서역지방의 長史라는 벼슬을 하였고, 和帝때에 이르러서는 서역 최고의 지휘인 都護가 되어 서역의 여러나라를 평정했다.
그는 서역에서 30년동안을 활약하면서 공을 세웠기 때문에 定遠候에 봉해졌다. 그러나 나이 늙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청하니 和帝가 이를 허락했다.
반초의 뒤를 이어 서역도호가 된 任尙이라는 사람이 취임하기전 반초를 찾아와 서역을 통치하는 방법을 물었는데 반초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인품은 너무 엄격하고 성미가 급하다. 물이 너무 맑으면 큰 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이치로 인심을 얻는 정치를 베풀기 위해서는 초조하지 말고 침착하게 대범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오”
이런 말을 들은 임상은 물러나 사람들에게 넌즈시 말했다.
“나는 반초에게 서역을 평정하는 기묘한 정책이 있는 것으로 기대했는데 반초의 말은 지극히 평범한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임상은 과연 뒤에 서역에서 사람의 화합을 어지럽히고 인망을 잃어 반초의 말과 같이 되고 말았다.
● 呂蒙正
여몽정은 중국 宋나라 太宗때 재상을 지낸 사람이다.
어느날 태종이 여몽정에게 말했다.
“나라를 다스리는데는 寬과 猛의 중간을 취하는 것이 중요하오. 너무 너그러우면 政令이 헤이해지고 너무 엄격하면 백성들이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게 되오”
태종의 말을 들은 여몽정은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예, 폐하 老子의 말에 ‘大國을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냄비에 넣고 삶는 것과 같다’ 하였나이다. 작은 생선을 삶는데 계속해서 냄비속을 휘저으면 모두 부스러져 버리고 마옵니다.”
한번은 水運에 종사하는 자들이 官의 물품을 빼돌려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는 상주문이 올라오자 태종이 侍臣에게 말했다.
“맛있는 즙을 빨아먹으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야. 쥐구멍을 막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니 악질적인 자만 조사하여 조처하도록 하라. 약간의 橫流는 공무에 지장이 없는 한 엄하게 추궁하지 말도록 하라”
옆에 있던 여몽정 역시 찬성의 말을 했다.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살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사람 또한 너무 책망하면 친구가 모여들지 않는 법이옵니다. 君子는 소인배들의 행동을 보고도 못본체 하는 수가 있습니다. 큰 도량으로 대처하는 것이야말로 만사를 잘 풀어가는 방법입니다. 추궁이 심하면 奸人들이 몸둘바가 없어집니다. 모른체하며 주의는 하되 일부러 휘저을 일이 아닙니다”
여몽정은 남의 과실을 나무라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執政에 등용되어 궁정에 들어갈때의 일로서 궁정 관리가 발 너머에서 그를 가리키며 못들을줄 알고 작은 목소리로 비웃었다.
“저따위 인간이 집정이 되다니……”
여몽정은 이 소리를 들었으나 못 들은척 하며 지나가려는데 동행하던 동료가 가만있지를 못하고 그 관리의 관등성명을 알아보려고 하자 여몽정은 당황하며 말렸다.
“만약 상대방의 이름을 알게 되면 평생을 두고 잊을수가 없게 되네. 애당초 모르는게 낫지, 상대방을 문책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쪽이 별로 손해될 것도 없지 않는가?”
● 黑齒常之
흑치상지는 삼국시대 백제사람으로 키가 7척이 넘었으며 날쌔고 억새며 지략이 있었다.
백제가 멸망하자 병사들을 규합하여 임존성으로 가서 굳게 지키니 열흘만에 모여든 자가 3만이 넘었다.
唐나라 蘇定方이 군사를 정비하여 그를 쳤으나 이기지 못하니 마침내 2백여성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얼마뒤 백제 부흥군내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부득이 당나라에 항복했다.
흑치상지는 당나라에 들어가 여러번 전쟁에 종군하여 전공을 세웠으므로 절도사에까지 올랐으나 반란을 음모한다는 무고를 당하여 옥에 갇히고 교형을 받아 죽었다. 그후 측천무후때 억울함이 인정되어 복권되었다.
흑치상지는 평소 아랫사람들을 은의로 대하였다. 한번은 그가 타는 말이 병졸들에게 매를 맞았는데 어떤자가 그 병졸에게 죄를 주라고 청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흑치상지는 이렇게 말했다.
“어찌 개인의 말에 대한 일로 하여 경솔하게 나라 군사에게 벌을 주겠느냐?”
흑치상지는 전투가 끝난 후 상을 받는 일이 있으면 부하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어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그가 나중 죽게되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억울함을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렸다.
● 朱 悅
주열은 고려 충렬왕때 사람이다. 아전의 신분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洲와 府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가는곳 마다 업적이 많아 명성이 높았다.
元宗때는 충청, 경상, 전라도의 안렴사를 역임하며 위신과 명성을 크게 떨쳤다. 국가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신을 뽑게 되면 반드시 주열이 첫 손가락에 꼽혔다.
안렴사로 있을 때 內官·崔仲卿이 왕의 사명을 받들고 왔는데 화려한 의복으로 사람들에게 과시했다. 주열은 헤진옷을 입은채로 다리를 뻗고 앉아서 옆에 아무도 없는 듯한 태도로 상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이에 최중경은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졌다.
주열은 성격이 엄중하면서도 까다롭거나 잘지 아니하였다. 한번은 어느 고을에서 자는데 밤중에 아궁이에서 불이나서 자는 자리에까지 불이 붙었다. 주열이 놀라서 일어나니 고을의 관리들이 크게 두려워 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묻지 않았다. 또 어느 고을의 수령이 뇌물을 먹었다고 고발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주열은
“욕심 많은 무식한 자가 뇌물을 먹었댓자 개가 똥을 먹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문제 삼을 가치가 있겠느냐?”
하면서 벌을 주지 않았다.
주열은 성격이 관후하며, 잡안 살림을 돌보지 아니하여 높은 지위에 올랐을 때에도 생활은 항상 가난했다. 문장에 능하며 글씨도 잘 써서 왕은 언제나 그의 훌륭함을 칭찬했다.
주열은 얼굴이 못 생기고 코가 썩은 귤과 같았다. 원나라 공주가 왕비가 되어 와서 여러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었을 때 주열이 일어나 축배를 올렸더니 공주가 질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어디서 늙고 못생긴 귀신을 내게 가까이 하느냐”
그러나 왕이 왕비를 보고 달래며 말했다.
“이 늙은이가 얼굴은 귀신같이 못났어도 마음씨는 물같이 깨끗한 사람이요”
왕비는 그제야 존경하는 마음으로 술잔을 받아 마셨다.
● 太 宗
태종은 조선조 세번째 임금이다. 태종은 왕자의 난 때 이복 동생을 죽이고 나중 임금이 된 후에는 처남 넷을 죽인 무서운 사람이지만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남 달랐다.
어느해 경상도의 漕運船 34척이 쌀을 싣고 한양으로 오는 도중 서해에서 침몰했는데 죽은 사람이 대단히 많았다.
萬戶가 사람을 시켜 수색하니 요행히 섬으로 헤엄처 가서 살아난 한명이 이들을 보고 도망쳤다. 쫓아가서 붙잡아 도망간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말했다.
“도망하여 머리를 깎고서 이 고생스러운 일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이걸 보면 조선시대때 水軍役은 물론이요 조운에 종사하는 것이 얼마나 고생스럽고 위험한 일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 소식을 듣고 태종이 길이 탄식하면서
“책임은 내게 있다. 만 사람을 몰아서 死地에 나가게 한 것이 아닌가. 닷새날은 음양에 受死日이고 또 바람이 심하여 배를 띄울수 없는 날인데, 바람이 심한것을 알면서도 배를 출발시켰으니 이것은 실로 백성을 몰아서 사지로 나가게 한 것이다”
하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몇명이나 죽었으며 쌀은 얼마나 잃었는가?”
“쌀은 만여석이고 죽은 사람은 천여명입니다”
신하들의 대답을 들은 태종은 슬픈 얼굴로 말했다.
“쌀은 비록 잃은 것이 많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지만 사람이 죽은 것이 몹시 애처롭다. 그 부모와 처자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조운하는 고통이 이와 같으니 船軍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해 흩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좌우의 어떤 사람이
“육로로 운반하면 어려움이 더 심합니다”
하니 태종은 이렇게 말했다.
“육로로 운반하는 것의 어려움은 牛馬의 수고뿐이니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
● 黃 喜
황희는 조선 세종때의 名臣으로 오랫동안 영의정을 지낸 사람으로 조선조 역대 정승 중 최고로 꼽히는 인물이다.
황희는 총명이 뛰어났으며, 아울러 도량이 매우 넓어 기쁨이나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나 조정에 임해서는 불의를 보면 임금에게 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평시에 거처가 담박하였으며 비록 손자들과 그 친구들이 앞에서 울부짖고 떠들어도 꾸지람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정승의 수염을 건드리고 올라타는 녀석까지 있어도 역시 제멋대로 하게 두었다.
어느 때 창밖에 늦 복숭아가 무르익어서 이웃 아이들이 몰래 따는 것을 보고 정승이 나즈막이 말했다.
“다 따먹지는 말아라 나도 좀 맛보아야 할게 아닌가?”
그리고는 조금 있다 나가보니 나무에 가득하던 열매가 다 없어져 버렸다.
또 어느때는 황정승이 배 나무밑을 거닐고 있는데 이웃에 살고 있는 버릇없는 젊은이가 돌을 던져서 배가 돌에 맞아 땅에 가득히 떨어졌다. 황정승이 큰 소리로 侍童을 부르자, 그 젊은이가 놀라 달아나 숨어서 가만히 들어본즉 정승이 그 시동을 시켜 그릇을 갖고 오게 하여 배를 담아서 그 젊은이에게 주라고 하되 끝내 아무런 말이 없었다.
황정승은 일반 사람들에게만 관대할 뿐 아니라 심지어 부리는 노비들에게도 항상 부드럽게 은혜로 대하여 성내거나 매를 대는 일이 없었다.
어느 때 下官들과 함께 집에서 일을 의논할 때 붓을 들어 글을 쓰려고 하는데 종의 아이가 방에 들어와 놀면서 종이위에 오줌을 싸도 정승은 노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황희정승은 일찍이
“노예도 역시 하늘의 백성이니 어찌 함부로 부리리요”
말하고는 붓으로 훈계하는 글을 써서 자손에게 전하여 주기까지 하였다.
하루는 正言 李石亨이 뵈러 갔는데 황정승이 강목과 통감을 내어서 책표지에 제목을 쓰게 하였다. 얼마 안되어 추하게 생긴 여종 한 사람이 안주를 가지고 와서 정승에게 물었다.
“곧 술을 드리리까?”
정승이 조용히
“조금 있다가”
하였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던 여종이 큰 소리로 정승에게 말했다.
“어찌 그리 꾸물거리십니까?”
정승이 웃으면서
“그럼 들여 오렴”
하였더니 술상이 들어오자마자 아이들이 맨발로 뛰어들어와 안주를 다 집어먹고 또 정승을 두들기곤 하였다. 그래도 정승은 웃으면서 아무런 꾸지람이 없었다. 그 아이들은 모두 노비의 자식들이었다.
한번은 정승이 밖에 나갔다 들어오는데 여종 둘이 말싸움을 하다가 정승을 보더니 달려와 서로 자기가 옳다고 하면서 시비를 가려줄 것을 호소했다.
이에 정승이 한 여종을 보고
“네 말이 옳다”
고 하자, 다른 여종이 정승에게 항의하니 그 여종을 보고도
“네 말이 옳다”
고 하였다.
이 때 마침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정승의 아들이
“시비를 가려 주셔야지 아버지의 말씀이 어찌 그러십니까?”
하니 정승이 아들을 보고 웃으면서
“네 말도 옳도다”
하였다.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관대한 황희정승이었지만 국사에 임해서는 매우 엄정하였는데, 특히 김종서에게만은 가혹하리만큼 엄하게 대했다. 이런 황정승을 보고 하루는 동료인 맹사성이 그 연유를 물었는데 황정승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죽고 나면 그 다음에는 김종서가 나라를 이끌어 가야 할 것인데, 그러나 그는 너무 강합니다. 너무 강하면 부러지는 법이라 내가 그의 강함을 꺾어 부드럽게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 孟思誠
맹사성은 조선조 세종때의 명신으로 벼슬이 좌의정에까지 오른 사람이다.
맹사성 역시 황희정승과 마찬가지로 인품이 관후하였으며 특히 청렴결백하여 그가 살고 거처하는 집에는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였으며 매양 출입할때는 소(牛)타기를 좋아했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그가 재상인줄 알지 못했다.
맹정승은 청결하고 簡苦하여 살림살이를 일 삼지 않고 식량을 늘 祿米로 하였는데 어느 날 부인이 햅쌀로 밥을 지어 드렸더니 어디에서 쌀을 얻어 왔느냐고 물었다.
“녹미가 심히 묵어서 먹을 수 없기에 이웃집에서 빌렸나이다”
하고 부인이 답하니 정승이
“이미 녹을 받았으면 그 녹미를 먹는 것이 의당한 일인데 무엇 때문에 빌리었소?”
하면서 부인을 나무랐다.
맹정승은 음률을 알아서 집에 있을 때는 항상 피리를 갖고 날마다 곡조를 불고, 문을 닫은 채 사사로이 찾아오는 손님은 맞이하지 않다가 공무에 관한 일을 보고하러 오는 사람만 맞았다. 여름이면 소나무 그늘에 앉고 겨울이면 방에 앉되 좌우에는 다른 물건이 없었다.
집이 매우 협소하고 낡았지만 그대로 지냈는데 어느 날 병조판서가 일을 보고하러 왔다가, 마침내 소낙비가 내려 집이 곳곳이 새어서 의관이 모두 젖었다.
병조판서가 돌아와 탄식하기를
“정승의 집이 그러한대 내 어찌 바깥 행랑채가 필요하리요”
하고는 짓고 있던 바깥 행랑채를 철거해 버렸다.
맹정승이 온양에 覲親하러 오가는 때에는 각 고을의 관아에 들리지 않고 늘 간소한 행차를 차렸으며 더러는 소를 타기도 하였다.
한번은 陽城과 振威 두 고을원이 맹정승이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서는 육방관속들을 거느리고 長好院에서 기다렸더니 두 고을 원들이 있는 앞으로 소를 타고 지나가는 늙은이가 있는지라 하인을 시켜 심히 꾸짖게 하였다. 그러자 정승이 그 하인더러
“네 가서 온양에 가는 孟古佛이라 일러라”
하였다. 그 하인이 돌아와 원들에게 고했더니 두 고을 원들이 크게 놀라서 달아나다가 그만 당황해서 언덕 밑에 있는 깊은 못에 官印을 떨어뜨렸다.
또 어느 때 역시 온양에 갔다가 한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비를 만나서 旅院에 들렀는데 행차를 성대하게 꾸민 웬 젊은 사람이 먼저 와서 누상에 앉았으므로 맹정승은 아래층에 앉았다.
그 젊은이는 영남에 사는 사람으로 의정부 錄事 取才에 응하러 가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맹정승이 차림새도 허름하고 시종도 없으니 정승인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조금 있다가 젋은이가 정승을 불러서 위층에 오르게 하여 함께 이야기도 하며 장기도 두었다. 그러나 한참을 지나도 비가 그치지 않으니까 무료한 나머지 젋은이가 정승을 보고 물었다.
“영감님은 능히 글을 지을 줄 아십니까?”
“예 조금은 압니다”
“그럼 우리 심심한데 ‘공’자와 ‘당’자를 넣어 서로 문답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소?”
맹정승이 웃으면서 그러자고 하였다. 그래서 맹정승이 먼저 ‘공’자를 넣어 물었다.
“무엇하러 한양으로 가능공?”
“벼슬을 구하러 올라간당”
“무슨 벼슬인공?”
“녹사 취재하러 간당”
“내가 주선해주면 어떤공”
“천부당 만부당”
조금있다가 비가 그쳤으므로 두사람은 헤어졌다.
며칠뒤에 맹정승이 정부에 앉아있는데 바로 그 젋은이가 취재차로 들어왔다. 정승이 웃음을 띄고 물었다.
“요즈음은 어떠한공?”
젋은이가 올려다 보고는 깜짝 놀라 엎드리면서
“죽어지당”
하였다. 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물으매 맹정승이 그 까닭을 이야기하자 모든 재상들이 크게 웃었다.
맹정승이 그 젋은이를 녹사로 삼고 그 후 여러 번 추천하여 고을의 원을 지내게 하였다. 그 사람도 그후부터 크게 겸손해져서 맹정승의 뜻을 저버리지 아니 하였다.
● 金藎國
김신국은 조선조 인조때의 명신이다. 임진왜란중에 과거에 급제했고 두번이나 평안감사를 지냈다. 사람이 강직하면서도 어질었다.
승지로 있을 때 일이다. 內侍중에서 대신을 비방한 자가 있어 승정원이 내시를 처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광해군이 특명으로 용서하였다. 이에 김신국이 광해군에게 아뢰었다.
“하찮은 내시가 대신에게 불경하여 함부로 거만스런 말을 하였음은 참으로 한심한 일인데 이제 또 용서하시니 臣은 이로부터 내시들이 더욱 교만하여 조정의 체통이 무너질 것을 두려워 합니다”
정승 이원익이 이 말을 듣고
“승정원에 사람이 있다”
하였다.
김신국이 호조판서로 있을 때 궁중의 발을 드리우게 하면서 초록 비단 굽도리를 하고 채색실로 끈을 하게 하였는데 이를 보고 김신국이 임금에게 간했다.
“명주로 비단을 대신하고 삼으로 실을 대신하여 검소함을 숭상하는 뜻을 밝히소서”
임금이 이 말을 듣고 곧 따랐다.
어느 해에 중국에 銀을 보내는 일이 있었는데 김판서가 그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아래 관원에게 맡기지 않고 손수 봉하는 것을 감독하였다.
그런데 한참 일을 하는 도중에 어떤 算員 하나가 김판서가 잠깐 다른데를 보는 틈을 타서 은 한 덩어리를 가만히 훔쳐가지고 일어나 나가서는 용변하는 것처럼 꾸미고 몰래 다른 곳에 두고 왔다.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했어도 김판서 혼자만 알았으나 짐짓 모른체 하였다. 그리고 잠시 있다가 일어나면서
“평소에 지병이 있어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다”
고 말하고 여러사람에게 오늘은 일을 파하고 내일 다시 계속하자고 했다. 그리고는 그 산원을 보고 은을 지키라고 지시했다. 이튿날 보니 과연 은이 축난것이 없었다.
김판서는 그 죄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뒤에 다른 작은 일로 그 산원의 직책을 변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