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여서 기도하고, 나가서 선교하자! 저는 천주교가두선교대학을 수료한 법동성당 선교분과장 박대성 니꼴라오입니다. 저는 강사가 아닙니다. 저의 직업은 열쇠장수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 열쇠장수인 제가 왜 이제 천국의 열쇠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거리를 다니며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오늘 어느 열쇠장수의 가정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야기에서 주님은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며 어떠한 방법으로 당신의 사랑을 나누어 주시는지 한번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저는 태어남과 동시에 어머니가 두 분이셨습니다. 한 분은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요, 또 한 사람은 산수골이라는 곳에 살고 있는 무당인 수양 어머니였습니다. 신들린 할머니가 저를 무당에게 수양아들로 팔아먹었던 것입니다. 언제나 나의 가정은 무당인 수양 엄마의 꽹과리소리와 할머니의 치성 소리에 해가 뜨고 저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30대 젊은 아버지가 하늘에서만 내려준다는 한센병(문둥병)이 걸려 고향에서 살수 없어 소록도라는 섬으로 젊은 어머니와 어린 자식을 남겨두고 돌아올 기약조차 없이 길을 떠나셨습니다. 아버지의 등 뒤에 대고 4살짜리 어린 저는 아빠 장에 가시면 사탕 사다 달라는 작별의 인사를 하였답니다. 소록도 도착할 때까지 자식 생각에 울며 가셨던 아버지를 하느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셨는지, 수녀님 교리반에 입교시켜 가롤로라는 세례명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2년 만에 혈액검사를 하니 기적같이 나병이 깨끗이 완치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예수님의 기적이 2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 가정에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버지를 당신의 도구로 삼으시어 천주교 신자가 한 명도 없었던 고향 마을 과우리 가정인데, 매일같이 휘감고 돌아가던 무당 옷자락과 꽹과리 소리와 함께 굿판이 벌어지던 마루는 어느새 주님의 제단으로 바뀌고 은은한 성가소리에 맞추어 마당에는 수백 명의 신자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사제와 함께 바치는 미사성제의 기적을 저는 보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국 냉담자로서 기나긴 타락의 길로 들어서서 유흥업소 종업원으로, 요정 지배인으로 전전하며 세상 좋은 것에 푹 빠져 살면서 지속적으로 권면하는 아버지의 말씀은 듣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성당에 가면 밥 먹여 주나요. 돈을 대어 준답니까. 벌어먹을 시간도 없는데 성당은 무슨 성당이요.”하고 대들면 호인이라는 아버지께서는 자식에게 모진 말씀을 하시곤 합니다. 그래서 저는 시골 부모님 댁에 다녀온 날은 아내와 말다툼하는 날이었습니다. 왜 아버님은 사랑하는 자식에게 저렇게 모진 소리만 하느냐고요. 하느님께서는 아버지를 통하여 집회서 5장 4-7절의 말씀을 전해 주신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지만 아무 탈도 없지 않느냐고 말하지 마라. 주님께서 오래 참아주시는 것뿐이다. 하느님의 용서만 믿고 방심하면 죄를 또 짓고 또 짓게 된다. 한번 노하시면 죄인들은 살아남지 못하리라. 하루하루 미루지 말고 한시바삐 주님께로 돌아오너라.” 하느님 아버지 예측은 정확했습니다. 저는 영세한지 46년이 되며, 23년간 냉담자의 보속이 이렇게 힘든 줄 정말 미처 몰랐습니다.
#2 저를 냉담에서 풀어준 사람은 다름이 아닌 개신교 신자인 해병대에서 함께 지냈던 전우였습니다. 군에서 제대 후 10년 만에 부산에서 찾아온 전우는 저의 사는 모습을 보고는 월급 얼마나 받느냐고 물어 오면서 신앙생활을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린시절 성당에 다닌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그의 아내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부산을 출발하여 대전에 오면서 대전 전우가 잘 살면 자기들의 직업을 바꿔보고, 대전 전우가 못 살면 떠돌이 열쇠장사지만 가르쳐주어 먹고 살게 하고 전도해 보자고 둘이 이야기하며 올라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이 주일이라 저와 아내는 친구를 따라서 성당이 아닌 복수동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냉담 23년 만에 첫 미사가 아닌 첫 예배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부산에 내려가 전우의 집에 머물며 세상살이 열쇠장수와 천국 열쇠장수 수업을 받으며,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 예배를 보았고 저녁이면 철야 기도원을 따라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린시절 다닌 성당이 가보고 싶었고 저의 이야기를 들은 전우가 부산에 있는 성당을 소개해주어 기쁨에 넘친 미사를 드리게 되었? 윱求? 부산에서 돌아온 저는 전우와 신앙생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도마동성당을 찾았지만 성당을 들어갈까 그냥 갈까 하는 고민 속에 빠져있는데, 아내가 우리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 들어가 보자?하여 대전에서 첫 미사를 드리고 제일 먼저 도망치듯이 나오려는데, 문 앞에는 수녀님 한 분이 기다리고 계시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하시는 수녀님께 어렵게 처음 성당에 나온 이야기를 하였고 수녀님께서 김병재 신부님께서 하시는 교리반에 안내해 주셨습니다. 아내를 두 번 영세시켜 안나, 알비나라는 본명을 두 개 만들고 마는 웃기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어느 날 장모님께서 오셔서 “사위, 내가 성당에 나가지 않아서 사위집이 이렇게 힘든 것 아닌가?” 하시기에 저는 깜짝 놀라 장모님의 교적을 떼어 보니 거기에는 제 아내의 세례명이 안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의 짝까지도 예비하여 놓으신 것을 모르고 조당 걸린다고 관면혼배하고 교리반에 넣어 세례를 또 한 번 시켰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아내를 두 번 영세시키면서 저도 다시 주님 품으로 돌아왔지만 문제는 다음이었습니다.
#3 성당에 나가니 헌금은 그렇다 치고 교무금은 내어야 한다고 하여 교무금 책정 하고나니, 이번에는 대전신학교를 건립한다고 신학교 건립금을 또 내야한다는 신부님 말씀을 듣고 저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야! 얼어 죽을 신학교 건립금은 또 뭐냐?” 다음 주일 성당에 가니 신부님께서 3명씩 들어와 면담을 하고 가라고 하시기에 저는 할 수 없이 아내의 등을 대신 떠밀어 보내놓고 밖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바로 나온 아내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기가 막혔습니다. “얼마나 신립을 했어?” 하고 물으니 아내가 “50만원” 하기에 “야! 너 돌았냐. 미쳤구만. 너 우리 전 재산이 저 고물 자동차하고 사글세 보증금 100만원이다. 이제 어쩔래?” 하고 닦달 하니 아내는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사실은 당신 몰래 만원씩 아들의 장학 적금을 들었어요. 다음 달에 적금을 타는데 그 돈을 타면 낸다고요.” “그래도 그렇지, 이 사람아.” 사실 저는 그 돈이 정말 아까웠습니다. 방 한 칸에 4식구, 시골에서 올라온 처제, 처제친구까지 방 한 칸에 6명이 살고 있는 저의 처지에 정말 크나큰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들의 장학 적금을 타서 신학교 건립기금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떼어먹은 것도 아닙니다. 다음날 정말 신기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날도 대전 석교동 주택가 골목길에 저는 열쇠 고치라고 외치고 있었는데 저의 고물 자동차 앞을 가로막는 어느 중년의 아저씨가 저의 자동차에 올라타 자기 집으로 안내를 하였습니다. 그 집에 도착해보니 도둑놈이 다 털어가 집주인 아저씨의 요구대로 집 전체의 열쇠를 바꾸고 달아주었답니다. 첫 개시에 20여만원, 오후에 10만원 이렇게 30여만원을 벌어 가지고 집에 돌아오니 반겨줄 아내는 돈을 보며 근심스러운 얼굴이었습니다. 혹시 이 양반이 도둑질을 한 것은 아닐까 하면서 말입니다. 너무나 큰 돈이었기에 말입니다(당시 근로자들 한 달 임금이었습니다). 다음날도 십만원 그 다음날도 10만원 정확히 3일 만에 약속한 신학교 건립금 50만원을 가지고 아내는 어린 딸을 등에 업고 아들 손을 잡고 안영리 쪽에 있는 복수동 산동네에서 도마동성당까지 한 시간을 걸어 돌아오면서 처음으로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를 하였답니다. “하느님, 남편이 활동성 간염에 걸려 힘듭니다. 주님, 한 평! 이라도 좋으니 편안히 앉아서 벌어먹을 조그만 가게 하나만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4 어느새 아들이 자라서 5학년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성당에서 복사를 서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길을 건너다 사고를 당했습니다. 달리는 250cc 오토바이에 치어 대학병원 응급실에 의식 없이 누워 있는 자식을 부둥켜안고 울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뇌를 다쳤다는 이야기만 들려올 뿐 아빠인 제가 자식에게 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하느님, 성모님 살려달라는 기도 뿐, 그런 저의 앞에 가해자와 제가 세를 살던 그 집의 가해자의 사촌형이 나타났습니다. 당장 죽이고 싶은 마음인데 더더욱 기가 막힌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찰서에서 합의서를 가지고 오지 않으면 구속을 시킨다고 하며 1000만원이 입금된 통장을 내어 놓으면서 합의서를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갈등하는 저에게 하느님 아버지께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돈 받으면 저 녀석 죽는다. 한 푼도 받지 말고 합의서 도장 찍어 주거라.” 하시며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라. 저 녀석 데려가시면 우리 가정에 성인 하나 나오는거다. 저 어린 영혼 하느님께서 데려가시면 얼마나 깨끗하겠니?” 하셨습니다. 저는 합의서에 도장을 찍어주었고! 삼일 만에 아들은 “아빠 오줌 마려워” 하며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꿈결 같은 그 소리가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꿈결 속에 부르시는 천사의 목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저는 밖으로 뛰어나가 미친 사람처럼 소리치며 “주님, 성모님 고맙습니다.” 기쁨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더더욱 이것이 주님의 은총의 순간이었다는 사실은 퇴원 후 사고 장소를 찾은 저에게 목격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알았습니다. 실은 매일 새벽길에 복사하러 가던 저의 아들이 그 시간마다 산성동성당의 힘든 오르막길을 리어카를 끌고 올라가는 청소부 뒤를 밀어주었답니다. 마침 사고가 나던 시간에 지나가는 그 청소부 아저씨가 택시를 잡아 병원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이것을 누가 감히 우연의 일치라고 하겠습니까? 합의서를 가지고 왔던 사촌형이 그 후 영세해서 저의 대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모님께 기도 많이 하십시오. 성모님은 우리의 소망을 예수님께 전구해주시어 꼭 들어주십니다. 특별히 9일 기도의 소망은 정확히 들어주십니다.
#5 어느 날 저는 청주 모충동 골목길을 누비고 있었습니다. “열쇠 고치세요. 열쇠 고치세요.”외치며 막다른 골목을 돌아 나오려는데 길 옆 둥그런 바위 위에 묵주 한 꾸러미가 놓여 있었습니다. 어느 분이 놓고 갔을까 하며 얼른 주어 묵주를 들고 돌아오는 길에 성모님께 묵주기도를 하고 오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제 평생 그렇게 울어보기도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3일 후 청주 운천동 골목길을 누비고 있는 저의 차창 밖으로 성모상이 담벼락에 기대어 있었습니다. 누가 버렸는지 밤새 비를 맞아 흙투성이가 된 성모상이 100리길을 장사하러 간 저의 눈에 띄인 것입니다. 얼른 성모상을 싣고 장사를 하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부르기에 따라가 보니 청주 사직동성당 꾸리아 단장님 댁이었습니다. “자매님, 제가 오늘 성모상을 길에서 주었는데 어느 분이 버렸을까요?” 하니 자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성모님이 형제님 댁에 가시려 하는가 봐요. 목욕 깨끗이 시켜 형제님 댁에 모시세요.” 하였습니다. 저의 아내와 저는 성모님을 목욕을 시켜 모셔놓고 어린 자식들과 함께 성모님께 9일 기도를 올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떠돌이 열쇠장수인 저의 간장병만도 힘든데 이번에는 사랑하던 아내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심장병인 승모판막 협착증으로 성모병원에서 판명되기를 기다리며 9일 기도를 시작하는 저녁이었습니다. 문화동에 살고 있는 아내의 대모님이 불쌍하다고 저녁이나 한 끼 지어 주신다기에 대모님 댁에 가서 정말 맛있는 저녁을 얻어먹고 집에 돌아온 저희 부부는 문을 여는 순간 불길한 생각에 휩싸이었습니다. “아! 무엇이 잘못 되었구나!” 분명히 집에 있어야 할 아들과 딸이 없어진 것입니다. 시간은 자꾸만 흘러 밤 11시를 지나 12시가 다 되어 가는데 아들은 찾았지만 어린 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쁜 숨만 헐떡이던 아내는 울다 실신하고... 아! 이제 모든 것이 무너지고 포기상태에 들어가 다리난간을 잡고 울고 있던 저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멀쩡하던 배가 아파왔고 딸 찾는 것보다도 화장실이 급해서 길옆에 있는 4층짜리 건물을 찾아 올라갔는데, 2층에 화장실이 있었고 불이 켜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잠겨 있지 않은 화장실이 왜 그리 반가운지요. 살았구나 생각도 잠시, 그 화장실 아래로 작은 운동화 하나가 보였습니다. ! 저는 자신도 모르게 딸의 이름을 불렀고 순간“아빠!” 하면서 뛰어나오는 어린 딸 뒤로 서 있는 또 다른 중학교 2학년의 사내아이가 있었습니다. 칼을 옆구리에 대고 못된 짓을 하려고 어린 딸을 끌고 간 그 화장실에서 저는 사랑하는 딸을 구해낼 수가 있었습니다. 정말 순간 저는 그 중학생을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의 순간을 체험한 저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저희 부부는 파출소 안에서 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리는 중학생의 아버지와 함께 괴로운 시간을 겪어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머리를 떨구는 그 학생의 아버지와 제 여동생 뻘에게까지 몹쓸 짓을 한 중학생을 보고, “어찌하여 자식을 저렇게 키우십니까? 우리에게 맡겨 주십시오. 우리는 천주교회에 다니는 신자인데 저희에게 보내주시면 착한 학생으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하면서 말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을 돌로 쳐라.”(요한 8,1-11)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저 역시 주님 앞에 더 큰 죄인인 것을 어찌 하겠습니까. 용서해! 야지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렇게 세상은 어둡고 캄캄합니다. 이렇게 캄캄하고 어두운 세상에 우리 모두가 나서서 예수님의 사랑,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만 할 때가 지금이 아닐까요? 저만 예수님께 사랑을 받으면 그만인가요? 저만 천국에 가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까요? 아닐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성사로 구원을 받지 않았습니까? 고백성사로 깨끗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이제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아직도 예수님이 함께하고 계심을 의심합니까? 우리 모두 이 어두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기쁨에 넘쳐 세상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듯이 우리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이런데도 주일만 지키는 신앙인으로 살겠습니까? 여러분, 거리에서 직장에서 예수님을 알리는 선교사가 되어봅시다.
#6 두 번째 아들의 사고 앞에는 정말 주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두개골이 다 깨어진 아들의 모습을 보며 주님을 원망했습니다. 수술비조차 받을 수 없는 가해자의 형편을 보며 기가 막혔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이 함께 하는 순간임을 의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알았습니다. 뇌 수술하다 말고 나오신 의사선생님이 보호자를 찾았습니다. 이마가 18센티가 찢겨져나가 두개골이 함몰되어 3조각의 뼈가 없어졌다고 머릿속에 박혔는지 한번 찾아보겠다고 했습니다. 저 녀석은 하늘이 살려준 놈이라고 의사생활 수십년 만에 처음 보는 신기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뇌를 싸고 있는 뇌수막까지 하나도 손상이 되지 않았다고 할 때, 저는 수년전 하느님께서 받지 말라고 하던 천만원이 입금된 통장을 머릿속에 그리며 그 돈 받으면 저 녀석 죽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래도 자녀들을 학원에 보내고 성당에는 보내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렇게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 그리고 예수님 당신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은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죽을 자리에서도 살려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지금 듣고 ? 饔쳅?않습니까? 당시 저의 아들은 성당에서 복사 단장이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런데 없어진 3조각의 뼈가 속으로 안 들어가고 밖으로 다 튕겨져 나갔으니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저는 모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나 사랑의 예수님은 절대로 고통만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인 우리에게 어찌 고통만을 주시겠습니까? 고통은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보약인 것입니다.
#7 이제는 더 이상 장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힘들어진 저에게 어느 날 전임 본당 총무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형제님, 학교에 열쇠 좀 만들어 주세요.” 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저는 난생 처음으로 대학교문을 들어가 보았습니다. 경비아저씨들은 잡상인 왔다고 난리가 났고 학교에서 내어 놓는 열쇠를 만들려는 순간 어디서인가 웅성거리는 학생들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야! 열쇠장수 왔다.” 하며 학생들은 몰려들었고 몇 겹을 둘러싼 학생들을 보면서 ‘아, 여기에 가게를 하나 얻으면 살겠구나.’ 하여 그 형제께 부탁을 하였고 주님께서는 그 형제를 통하여 한 평짜리 가게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3월, 새 학기가 개학하는 날 수십 미터씩 늘어선 학생들을 보면서 우리 부부는 기가 막혔습니다. 학생 2만명이 수강 신청서에 도장을 다 찍고 사물함 열쇠를 만들어야 했으니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10년 전 아내 알비나가 약속한 신학교 건립금을 내고오며 하느님께 기도한 한 평짜리 가계의 청원 기도를 이렇게 정확히 들어주셨습니다. 정말 마지막으로 지친 저와 가정에 신학교 건립금의 수백 수천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아내의 수술비가 없어 쩔쩔매던 일도 없애주셨습니다. 물질적인 축복은 주님께서 덤으로 주시는 선물이었습니다. 그것은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에서부터 주시는 은총입니다. 아무리 많은 물질적 축복을 주셔도 감사할 줄 모르면 죽을 때까지 부족한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께 감사합시다. 날마다 숨이 차 힘들어하던 아내도 대학병원 우리 형제 의사님께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수술도 잘 되어 성당 산악회를 따라 설악산 지리산 등산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딸은 밝게 자라서 “사랑의 집에서” 사회복지사로 장애 형제들을 돌보는 천사가 되었습니다. 아들의 이마에는 훈장처럼 달려있는 18센티의 흉터를 보면서 죽지 않고 살아 있음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이처럼 진정한 행복은 아주 작은 곳에 있음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조금 부족하면 어떻습니까? 조금 힘들면 어떻습니까? 조금 아프면 어떻습니까? ‘왜 우리? ?예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해야만 하는지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여러분, 저와 함께 이웃에게 선교하면서 ‘천국의 열쇠장수’가 되어 보시지 않겠습니까? “열심히 기도하고 천국열쇠장수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