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treme mountain
홀드는 그대로인데
세월은 잡히지 않네
설악산 천화대 리지
글•사진 유 학재 _ 휠라스포트 고문 협찬 휠라스포트
희야봉을 오르고 있는 유학재씨
‘산을 가서 뭘 빌어먹겠다고 싸돌아다니는지 모르지만 그거 하나
는 알고 있습니다. 산은 동경과 존중과 흠모의 대상이라는 것. 주
는 것은 없는 짝사랑처럼 반기는지 안 반기는지 모르면서 죽어라
오르던 산! 인수봉 정상에 떡볶이와 번데기 장사가 있다며 탐욕
스런 나를 거짓으로 꼬드겨 산을 다니게 한 선배. 정상에 장사꾼
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아니, 정상에 오를 때 이미 그 물욕이
사라진 후인 것입니다. 선배님 책임지셔야 합니다. 순진한 아이를
광적인 신도로 만들어 다른 일들 못하게 만든 것에, 산을 가기 위
한 하나의 전제조건이 물질과 여유의 활용인데 실제 물질이 많은
삶은 산에 오질 못합니다. 세상에 쓸게 많아서, 산은 쓸게 없고 몸
뚱이만 잘 써야 본전이었습니다. 그래도 등짐 지고 오르다 닦는 이
마의 땀방울은 누구도 가져다 줄 수 없는 자연의 선물입니다. 그
땀을 그리며 또 다시 발길을 회색 콘크리트에서 푸른 숲과 갈색의
낙엽이 깔린 산으로 들어갑니다. 자연의 기운 몸으로 호흡하려 갑
니다.’
얼마 전 산에 가며 어렸을 적 기억을 살려 선배에게 보낸 편지다.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선배들을 따라 산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중에 설악산은 누구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나에게
도 각별하다. 산 보다는 자연이란 것과 학교의 규율에 제약 받지
않고 자연에서 나를 볼 수가 있다는 것에 더 매력을 느껴서인지 모
르겠다.
산에 빠진 이유가 그 나이에 남들이 감히 상상도 못하는 암벽등반
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열심히 다닌 이유 중에 하나다. 교련복 입
고 다방 드나들기, 술집 가서 대놓고 술 마시기, 극장구경 제약 없
이 들어가기 등등 당시 고등학생의 제약이 많던 시절에 나는 선배
들 덕에 책가방에 로프와 안전벨트를 넣어 들고 마음대로 활개를
치고 다녔다. 책가방에 책은 없었고 항상 장비로 가득 찼다. 그때
나를 데리고 다니던 선배가 있다. 소공원 비룡교 밑에서 가리비에
헬멧을 베고 자는, 머리의 놀라운 밸런스와 엉덩이만 붙이면 잠을
자는 적응력, 인수봉 슬랩을 걸어가듯이 올라가던 그런 선배와 20
여 년 만에 같이 천화대를 간다. 나도 작년 석주길을 한 후 천화대
를 처음부터 가본지가 근 30여 년이 된다.
산에서 힘들 때나 즐거울 때 항상 생각나는 어렸을 적 선배들에게
마음속으로 윗글과 같은 심정으로 혼자 매달리던 그런 선배 중 한
분과 대구의 후배와 함께 산을 다시 간다. 천화대로.
느지막하니 비선산장에서 들어서니 시끌벅적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모두 조용히 취침 모드에 있다. 술꾼들이 없는 거다. 만약 여
기에 술꾼들이 끼어있다면 분명 밖의 베란다에 나와 열심히 소주
잔을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우리도 올라와 열기를 잠시 시키고 조
용히 침낭 속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술의 유혹을 같이 잠재운다.
아침에 깨어보니 산장 안에는 반가운 얼굴들이 있어 인사와 함께
각자의 갈 길을 물어보곤 안전하게 재미있게 잘 다녀오라는 덕담
으로 이어진다.
아침에 올라온 포항 후배를 한 명 더 합류시켜 나는 벅찬 가슴을
두근거리며 천화대로 향한다. 우려 반 걱정 반으로 아주 오래된
흐린 기억을 끄집어내어 올라가는 것이 더 골치 아픈 것 같아 그냥
보이는 느낌대로 산을 오르려 한다. 자연이 주어진 제약을 극복해
나가면서 설악의 가을 정취를 즐기면서 다시 시작하는 마음가짐
으로 오르는 것이 더 신선하고 날것이다.
설악골 초입에서 천화대 능선으로 접어드는 들머리에는 예전 이
곳에서 야영을 하면서 외설악 일대를 누비고 다니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진짜 추억으로만 남은 계곡의 야영장들이다. 술이 떨어지
면 비선산장으로 와선대 가게로 한달음에 뛰어 내려가 술을 사가
지고 올라오던 기억. 소뼈를 고아 국물을 우려먹는데 우린 지가
한참 지나 멀건 육수가 되어도 아까워 버리지 못하고 뼈다귀는 찌
개로 국으로 옮겨 다니게 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어린
나이에 산을 향한 꿈을 태우고 지내던 곳이다.
3~4분 정도 걸어 올라가니 첫 번째 피치가 나온다. 대부분 리지
하는 사람들은 이곳이 쉬워 그냥 지나 다음 피치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쉽다고 지나칠 일이 아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다시 처음
부터 천화대를 시작하기로 했다. 예전 처음부터 암벽등반에 고생
한 흔적이 내 기억 저편에 남아 있기에 3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들과 만나고 싶다. 아니 다시 느껴보고 싶어 초입 부분부터 시작
한다.
하지만 이미 나는 다 커 버리다 못해 이제는 중년의 나이로 다시
꺾어지는 놈이 되어 첫 번째 침니가 나의 기억을 변질시켰다. 힘들
게만 생각했던 코스를 간단하게 넘어간다.
울산암처럼 줄줄이 바위 구간으로 있다고 생각했던 천화대는 바
위 구간보다 걷는 구간이 더 많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자니 괜시리
배낭을 탓한다. 너무 무겁게 진 모양이다. 어깨에 부담을 느낀
다.. 생각했던 것보다 바위구간의 오름 짓이 짧은 것 같다. 힘쓸만
하면 오르다 다시 하강이다. 우리보다 앞서간 팀과 만났다 헤어지
다를 반복하며 간다. 두 번째 바위 구간에서 낯익은 로고의 헬멧
이 땅바닥에 뒹굴고 있다. 앞 팀이 숲 속에 처박혀 있던 것을 주워
올렸다. 다 내게 추억이 있는 헬멧이다. 헬멧을 만들던 기억이 난
다. 지금은 사출 형태의 헬멧이지만 처음 내가 제작한 헬멧은 화
이버글라스로 틀을 만들어 일일이 손으로 만든 헬멧인 것이다. 아
직도 그 헬멧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쓸만하게 만든 것만은 확실
한 것 같다. 막내인 진일이가 앞서서 다시 리지를 이어간다. 어렵
지 않은 크랙을 지나 순서를 바꿔 내가 나머지 피치를 올라간다.
이곳을 올라서서 뒤를 돌아보니 나무 사이로 달마봉과 울산암이
보인다. 언제 보아도 두 덩치 큰 바위는 설악의 입구를 굳건하게
잘 지키고 있다. 두 개의 바위는 수문장처럼 속초 앞바다를 막고
서서 산을 보호하고 있다. 울산암과 달마봉을 내려다보는 기회가
있다면 생각나는 것이 저 두 봉우리 사이에 등산로를 만들어 양쪽
을 오갈수 있게 한다면 대청에 몰리는 인파를 조금이나마 해소시
킬 수 있을 만하다는 것이다.
하강을 세 번 하고 나니 사선 크랙이 나온다. 앞 팀의 초보자 두어
분이 이 구간을 지나가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보이기에는 어려워
보이지만 실제 등반을 하면서 밸런스와 홀드를 잘만 찾아서 올라
가면 어렵지 않다. 우리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는데 30여 년 만에
바위를 다시 하는 선배 형이 이 구간에서 자세가 나오질 않아 애를
먹는다. 역시 클라이밍은 자주 접하지 않으면 그 실력도 녹슨다는
것이 선배를 통해 증명이 된다.
다른 곳에 비해 피치 거리가 길다 보니 한 사람씩 올라가는데 시간
을 많이 소비한다. 만약에 다른 사람들이 이곳을 온다면 좀더 효율
적인 시스템과 등반 능력이 있어야 한다. 잘못하면 초반에 시간을
죽이는 등반 코스이다.
사선 크랙을 지나 봉우리에 올라서니 비로써 사방이 트인다. 외설
악의 비경이 사방으로 들어온다. 아직 설악의 단풍은 이른 것 같
다. 멀리 왕관봉의 화관이 보인다. 참 어릴 적 기억은 저 왕관봉을
오르기 위해 무척 힘들었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마 그 구간이 이 크
랙인 것 같다. 한여름 국산 라이프 알루미늄의 빨간수통에 더운 날
씨로 인해 미지근하게 덥혀진 물은 갈증은 해소해주지 않고 더 많
은 물을 달라고 몸에서는 요구한다. 배낭에 암벽에 천대받고 다닌
수통은 다 찌그러져 그것을 다시 펴느라고 막걸리를 담아 부풀게
했다. 그러고 2~3일 놔두면 수통은 길쭉한 모양이 아니라 똥똥하
게 동그란 모습을 하고 있어 다시 바닥을 두들겨 납작하게 한 수통
이 기억난다. 어떻게 그런 기막힌 생각을 했는지 신기했다. 하지
만 그 신기했던 수통의 변신은 내가 술을 알게 되면서 등산의 기술
중에 별일 아닌 것으로 치부돼버렸다. 그것보다 더 많은 신기함과
즐거움을 선배들은 마구 쏟아내었다.
어느덧 왕관봉에 오르니 뾰족한 왕관바위에 와이어와 슬링들이
다발로 걸려 있다. 좀 안쓰럽게 보인다. 네팔에서 아주 반가운 손
님이나 먼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걸어 주는 가타가 생각난다. 다
음에 기회가 된다면 저 녹슨 와이어나 달아 헤진 슬링 위에 노랑 가
타나 우리 오색 색동을 걸어 주고 싶다. 그래야 왕관의 모습이 살
아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설악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 꿋꿋
하게 버텨 온 장고의 세월을 품어 안은 왕관의 모습으로 살려주고
싶다.
미안함을 뒤로 하고 나도 왕관에 로프를 걸어 다시 내려간다. 대부
분 등반 시간이 늦으면 이곳에서 하산을 많이 한다. 가는 나이프
리지를 넘어 올라서면 본격적인 천화대를 암봉을 두루 볼 수 있는
희야봉으로 오른다. 여기서부터 범봉까지가 천화대의 암릉과 어
우러진 설악의 아름다운 경치를 두루 볼 수 있는 봉우리다. 희야
봉에 올라서니 조금씩 1275봉과 대청에서 단풍이 내려오고 있다.
확실하게 드러내지 않고 수줍은 듯 살포시 나무 색깔을 푸른 단청
에서 장구의 세월을 이루어내며 변하며 노숙한 미를 만들어내는
그런 단풍이다. 노랑물감이 진하지도 않고 중간 채색을 한 듯 따
뜻한 미소가 보이는 색깔로 단풍은 아래로 내고 있다. 붉은색보다
누런 황금색으로 먼저 변하고 있다. 경치 좋은 자리에는 많은 것
을 눈으로 보고 가슴에 담고 몸으로 천화대의 숨결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린 희야봉 정상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좀더 많은 자연의
<메아리쳐 가는 요델 소리와 함께 젊음에 사라져간 岳友 엄홍석,
신현주. 이 아름다운 설악의 山陵에 한 송이 에델바이스로 피어나
영원히 山情을 마시며 편안한 영혼의 깃 펴소서. 이 길을 故 岳友
의 영전에 드림>
희야봉을 하강하다 보면 거의 다 내려가서 왼쪽에 동판이 있다.
요델산악회는 69년도에 암릉을 개척하면서 산행을 같이했던 악
우의 이름을 빌어 위의 비문을 남기며 석주길로 명명했다. 설악
천화대의 지천이 에델바이스였는데 이제는 찾아보기가 힘들 정
도로 멸종되어간다. 돌아가신 두 분의 의미 부여를 에델바이스에
넣어 설악에 오래 남을 수 있도록 했는데 그 풀조차 이제는 귀해졌
다. 석주길의 에델바이스를 살려야 한다. 그 꽃은 우리가 산을 보
는 그리는 그리고 따라가는 곳의 항상 앞에 서 있었다. 우리보다
먼저 산에서 살았고 산을 지켜왔던 꽃이다. 그 꽃은 척박한 바위
틈에서 잡초처럼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바위쟁이인 우리 곁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풀이다. 설악의 방방곡곡에 에델바이스가
퍼져 우리의 산행과 동행할 수 있는 그날이 있으면 좋겠다.
하강을 하면 다시 암벽등반을 어렵지 않게 한다. 범봉을 가면서 이
제 천화대의 경치는 더욱 깊숙이 몰입된다. 숨가쁜 마라톤의 마지
막 여정을 끝내고 허기에 지친 몸이지만 마지막이라는 기대감에
더욱 더 분발하듯,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경관의 여정도 막바지에
치닫는다. 범봉까지 대충 우회를 한다. 우회하는 구간은 올라가기
에는 작은 암릉들이어서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시간을 많이 걸려
돌아간다. 범봉을 오르려면 오직 이 침니 구간을 지나야 한다. 하
지만 침니 등반을 가지 않는다. 왼쪽의 벽을 이용해서 오르다 오른
쪽 벽을 잡고 일어서서 오르다 다시 왼쪽 벽으로 건너가면 등반은
끝난다. 이 침니 구간의 스탠스와 홀드는 침니 등반을 안하고도 오
를 수 있도록 여기저기 교묘히 홀드들이 잘 발달되었다. 천화대를
통해 범봉을 오르는 자의 배려인가. 그 구간을 오르면서 잠시 만물
이 주는 혜택에 감사한다. 범봉 정상에서는 화채능선을 비롯 대청
봉에서 이어지는 공릉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30여년 만의 추억
은 뒤로 하고 다시 새로운 추억을 가슴에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