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어영부영’의 유래
뚜렷하거나 적극적인 의지가 없이 되는대로 행동하는 모양의 부사어인 ‘어영부영’이란 말은 어영청에서 유래되었는데, ‘어영청(御營廳)’은 병자호란을 격은 뒤에 효종의 명령으로 설치된 조선시대 최정예 야전군으로, 가장 군기가 센 부대였습니다.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포로가 되어서 심양에 끌려갔다가 8년 만에 돌아오게 되는데, 봉림대군은 왕[효종]으로 즉위한 후에 야심찬 북벌계획을 세웁니다.
3만 명의 정예 병력을 키우고 아직도 저항중인 명나라의 잔존세력과 연합하면 능히 청나라를 정복 할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만, 하지만 수전증이 있는 신귀라는 어의가 왕의 얼굴에 생긴 종기를 없애기 위해서 놓은 침 때문에 왕은 피를 토하고 급사하게 됩니다.
북벌계획은 중단되고 이미 중국을 장악하여 갈수록 융성해지는 청나라를 인정하고 현실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영청은 삼군문(三軍門)의 하나로 군대의 기강이 엄격한 정예 부대였던 것이 조선 말기로 오면서 이 어영군의 군기(軍紀)가 풀어져서 형편없는 오합지졸(烏合之卒)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이 어영청은 군대도 아니라는 뜻으로 어영비영(御營非營)이라고 쑥덕쑥덕한 데서 이 말이 나왔다는 겁니다.
어영비영이 뒤에 의미가 불분명하게 되면서 발음의 편리를 따르다 보니 어영부영으로 바뀌었습니다.
실제로 고종 때에는 어영청을 비롯한 군졸들의 군기가 문란하고 병기마저 너무 낡아 도저히 군대라고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으며, 여기에 1881년(고종 18) 4월에 일본의 도움을 받아 신식 군대를 조직하면서 이들은 후한 대우를 받고 구식 군대는 봉급조차 받지 못하자, 이듬해인 1882년 6월에 구식 군대의 군인들이 봉기하여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