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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대 |
담 당 관 리 |
품 목 |
문 헌 | ||
서기 |
왕 |
년/월 | |||
1273 |
원 종 |
14/6 |
· |
모시포 100필 (歲貢) |
新元史 |
1276 |
충렬왕 |
2/6 |
林惟幹, 阿室迷里 |
진주 100여 개 (민간소장품) |
高麗史 |
1280 |
〃 |
6/5 |
· |
선박 건조용 재목 징발 (3천 여척 분) |
元 史 |
1281 |
〃 |
7/4 |
· |
白紵 (당년분 면제) |
〃 |
1283 |
〃 |
9/1 |
伯刺介 |
香 樟 木 |
高麗史 |
1291 |
〃 |
17/11 |
· |
東 紵 100필 |
元 史 |
1294 |
〃 |
20/5 |
曲怯大, 蒙古大, 塔思撥都 |
말 400필 |
高麗史 |
1295 |
〃 |
21/3 |
伯帖木兒 |
말 |
〃 |
1295 |
〃 |
21/윤4 |
中郎將 趙琛 |
토산물(저포 100필, 木衣 40葉, 脯 6籠, 오소리 가죽 76領, 삵괭이가죽 83領, 족제비 가죽 200領, 노루 가죽400領, 말안장 5副) |
〃 |
1296 |
〃 |
22/5 |
將軍 李 連 松 |
皮貨 |
高麗史,高麗史節要 |
〃 |
〃 |
〃 |
大將軍 南挺 |
말 |
〃 |
1297 |
〃 |
23/1 |
郞將 黃瑞 |
牛 肉 (쇠고기) |
〃 |
〃 |
〃 |
23/11 |
上將軍 金延壽 |
소유(소·양의 젖을 달인 기름) |
〃 |
1298 |
〃 |
24/5 |
· |
方物 |
元 史 |
1298 |
〃 |
24/11 |
將軍 李白超 |
牛肉 |
高麗史 |
1303 |
〃 |
29/9 |
· |
土産物아닌 貢物면제 |
耽羅紀年 |
1309 |
충선왕 |
1/7 |
宦者 李三眞 |
牛肉 면제 |
高麗史 |
1324 |
충숙왕 |
11/ |
· |
소 83두 |
新元史 |
1332 |
충혜왕 |
2/8 |
· |
소유 |
高麗史 |
1347 |
충목왕 |
3/8 |
李家奴帖木兒, 安伯顔不花 |
말 |
〃 |
1348 |
충정왕 |
1/8 |
· |
소유 |
〃 |
위 표에 의하면 元에의 공헌 상황은 원종으로부터 충정왕에 이르는 시기까지 행해졌으며, 공민왕 때에 와서는 그에 대한 기록이 단절되고 있다. 이것은 이 무렵에 와서 원의 내부에서 내란이 빈발했을 뿐만 아니라 또 이에 편승하여 공민왕이 배원 정책을 취한 때문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나타난 기록은 그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며, 이러한 元과 고려에 대한 貢獻은 탐학한 관리들의 횡포와 더불어 제주도민의 생활을 더욱 곤궁케 할 뿐이었다. 따라서 이후 계속된 민란의 발생은 이러한 이중·삼중적인 노예적 수탈에 대한 제주도민 스스로의 생존권 수호를 위해 나타난 자구책이라고 볼 수 있다.
● 참고문헌
① 濟州道, 『濟州道誌』第一卷, 1993.
② 高昌錫, <高麗朝 濟州民亂의 性格(補}>,『濟州史學』第3號, 1987.
③ 陳祝三(吳富尹 譯), <蒙元과 濟州馬>,『耽羅文化』第8號, 濟州大學校 耽羅文化硏究所, 1989.
첫댓글 元에의 貢獻 실태인데 좀 이해하시려면 시간이 좀 길 것 같습니다.^^*
솔정수님 말씀 : "몽골놈의 새*"라는 욕설이 남아있는 걸 보면... 대학교 1학년 때 교양과목으로 제주향토사를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원의 수탈이 한창일 때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사람이 변을 보면 너댓사람이 달려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고 들었던 기억도 나네요. 물론 전언되는 과정에서 과장이 입혀졌겠지만 수탈이 심하긴 심했던 모양입니다. 08.12.26 22:21
때에 따라서 스스로 시공을 초월한 인간이 된다면 말 그대로 역사(力士 = 힘있는 선비)가 될 수 있을 겁니다. 08.12.27 0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