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및 초기 사역
프랜시스 애즈버리(Francis Asbury)는 영국의 버밍햄 근교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영국 성공회 신자로 감리교 신도회(Methodist Society)의 맴버였다. 애즈버리는 정규교육에 적응하지 못해 일찍이 학교를 그만두고 여러 가지 세속적인 일을 하다가 16살에는 대장장이의 견습생으로 일했다. 그 무렵 애즈버리는 자신 속에 내재한 충만한 은혜를 깨닫고 회심을 경험한 후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다. 일주일에 5번씩 수 마일을 걸어서 지정되어진 감리교 신도회 모임에서 설교를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아침 4시에 일어나 자정까지 사역을 하였는데, 이러한 습관은 그가 사역하는 일생동안 지속되었다. 애즈버리는 마침내 1767년에 개최된 웨슬리안 회의(Wesleyan Conference)에서 순회 설교자로 파송 받았다. 한편 미국에서 감리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많은 교인들이 증가함에 따라 그들을 위한 목회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1771년 존 웨슬리는 영국의 감리교 설교자들에게 “누가 갈 것인가?” 하며 도전을 주었다. 이 때 애즈버리는 웨슬리의 권면을 주님의 말씀으로 듣고 자원하였다. 미국으로 가는 배에 승선했을 때, 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신대륙으로 간다. 무엇을 하려는가? 명예를 얻으려고? 돈을 벌려고? 아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하기 위해서다.” 애즈버리는 다른 사역자인 리차드 라이트(Richard Wright)와 함께 그 해 10월 필라델피아에 도착하였다.
미국에서의 사역
공격적이고 열정적인 복음전도자였던 애즈버리는 그 당시 많은 목회자들이 한 교회에, 특히 도시 지역에만 머물러 사역하는 것을 보고 매우 실망하였다. 그는 지역 교회 중심의 목회를 하던 다른 교파들과는 달리 감리교의 체계를 “순회제도”로 바꾸었다. 그는 감리교 설교자들이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찾아가 감리교 메시지인 자유 은총과 기독교인의 완전에 대한 설교를 하도록 격려하였다. 애즈버리의 이 “순회 제도”는 미국 감리교의 부흥에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감리교 순회 설교자들은 말을 타고 다니면서 개척민들을 따라 어떠한 개척지든지 찾아가 복음을 증거 하였으며, 외딴 곳에 떨어져 살고 있는 정착민들을 찾아가 회심시켰다. 무엇보다 애즈버리 자신이 이러한 감리교 순회 제도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45년 동안 거의 쉬지 않고 순회 여행을 하였으며, 30만 마일(50만 킬로미터)의 광대한 지역을 다니며 1만 6000여 이상의 설교를 하였다. 애즈버리는 순회를 하는 동안 편안하게 거처할 수 있는 처소를 찾지 않았다. 그는 교인들 집의 빈방이나 여관, 더러운 오두막이나 과수원, 제지 공장의 창고나 떠돌아다니는 포장마차 등 잠잘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았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1923년에 애즈버리 신학교(Asbury Theological Seminary)가 세워졌다.
미국 감리교회의 지도자
애즈버리는 미국 감리교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영국의 존 웨슬리가 직접 보낸 미국 선교사들 중 전쟁의 와중 속에서도 유일하게 남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독립전쟁을 반대하는 웨슬리의 입장으로 인해 미국의 감리교인들은 영국의 앞잡이라는 오해와 핍박을 받게 되었는데, 애즈버리는 영국으로 도망가지 않고 미국에 남아 있으면서 (때로는 숨어 있으면서) 계속적으로 흩어져 있는 감리교인들과 접촉하였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애즈버리는 명실상부한 미국 감리교회의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그의 지위는 웨슬리가 보낸 토마스 콕(Thomas Coke)을 통해 미국 감리교인들에게 성례전을 집례할 총리사(general superintendent)로 안수하고 임명함으로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그러나 애즈버리는 웨슬리의 임시적인 임명을 거부하고 대신에 1884년 12월 24일부터 1885년 1월 3일까지 소위 “크리스마스 회의(Christmas Conference)”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미국의 감리교회는 영국감리교회에서 독립된 “감리교 감독교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라고 결정하였으며, 애즈버리와 콕은 종신직인 총리사(general superintendent)로 피택되었다. 얼마 후에 애즈버리는 웨슬리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총리사보다는 감독(bishop)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였다.
열정의 복음 전도자
애즈버리는 감리교회가 그의 사후(1816년)에도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감독으로서의 그의 직책과 영향력을 사용하면서 총력을 기울였다. 애즈버리는 텐트 집회(Camp Meeting)의 초창기 창시자였으며, 이 텐트 집회를 감리교의 중요한 기관으로 만들어 복음을 증거하고 감리교를 부흥시켰다. 험산 준령인 애팔래치아 산맥을 무려 60회 이상을 넘나들으며 복음을 증거한 애즈버리는 224번의 연회(annual conference)를 집례하였고, 4000명 이상의 설교자들에게 안수를 주었다. 심한 비가 올 때나 살을 에는 듯한 바람과 추위 속에도 쉬지 않고 순회 전도 사역으로 행한 애즈버리는 결국 류마치스로 인해 고생하였다. 그의 왼발은 심하게 부어올라 누군가가 그를 말 위에 올려주어야만 했다. 천식과 늑막염까지 가중되어 불구의 몸이 된 그의 마지막 2년 동안은 어디를 가든지 어린 아이와 같이 데리고 다녀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즈버리는 젊은 사역자들을 가족같이 사랑하였으며, 하나님께 그들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애절한 기도를 하였는데, 특별히 그들이 피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그 어려움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다.
그리스도의 의로움(義)에 선 존재
한편, 애즈버리는 감리교인들에게 교회학교(Sunday school)를 활성화시키도록 독려하였고, 가장 먼저 감리교 교육을 위해 모금을 하였다. 그는 “독서 운동”(Book Concern)을 일으켜 감리교 목회자들과 교인들에게 독서를 장려하였으며, 결국 미국의 다른 교단보다 먼저 감리교 출판소를 설립하게 되었다. 애즈버리는 그가 죽기 일주일 전에 식탁 테이블에서 베게를 의지하고 마지막 설교를 할 정도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복음을 증거하였다. 애즈버리의 지도 아래 1776년에 5000명에 불과 했던 감리교인들은 그의 사망 당시에는 214,000명으로 부흥되었다. 그의 목회 여정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감당해야 할 가장 큰 어려움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었을 때, 애즈버리는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이루어 놓았느냐,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내가 얼마나 어려움을 당하고 고생하였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는 내 자신이 홀로 변함없이 그리스도의 의로움(義)에 서 있느냐 하는 사실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볼티모어(Baltimore)에 있는 올리브산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