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도 아련한 거제도 풍경
푸른 바다 넘실대는 남쪽의 섬 거제도, 남쪽 산기슭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어촌 고기잡이하며 약간의 밭농사에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가난 속에서도 평화롭게 사는 어촌 마을, 거제 지세 포에서 서쪽 방향 4Km 떨어진 해변 가 협만으로 잘록 들어간 망치부락, 1964년도 가을 망월 국교 첫 발령지이다.
저녁이면 바닷가 자갈 굴리는 소리 산가마귀 우짖는 뒷동산 정경이며 자경쯤이면 멸치잡이 배들이 불을 밝혀 바다에 수놓은 듯 떠있는 진풍경 갈매기 떼들 자유롭게 날며 갯가에 개 팔자란 개들의 느림보의 동작, 섬 처녀들의 개발 솜씨 뛰어난 그들의 인정어린 눈빛이 왠지 지금도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농촌 산골짝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저에게는 해변이 환상의 세계에서 그림에서나 보아온 풍경이 현실로 다가온 것일까!
어느 날 하늘에서 내린 반가운 소식, 교사 발령장이었다. 실업자란 딱지를 떼는 순간이었지. 민주당 말기 무질서 속에서 몸부림치는 젊은이들 교사 자격증이 있어도 갈 곳 없는 이들에게 밝은 불빛이었다. 군사 혁명이 성공한 후 받은 저에게 큰 선물이었지.
부임 날짜에 맞추어 찾은 거제도 마산 항 부두에서 배를 타고 거제 성포 포구에 하선하여 지세포가는 시골 버스에 몸을 의지하여 비포장 도로 따라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 고갯길 있는 산등성이에서 하차하여 바라본 전망, 남쪽바다 아기자기 떠있는 넓은 바다에 섬들 꿈에서 보아온 정경이 한 눈에 찬다. 잠시 쉼 호흡하고 꼬불꼬불한 내리막 산길을 헤쳐 내려가는 오솔 길은 내 고향 뒷동산이나 별 다를 바 없다. 망개 능쿨 사이에 산 접동새 우짖는 소리는 어릴 때 들어본 가락들이다. 밭이랑 사이 길로 접어들어 마을에서 서쪽으로 언덕을 거슬려 올라 찾은 교정 자그마한 운동장 계단 위쪽 6칸 교실, 한 교실 반쪽으로 갈라진 교무실에 가방하나 들고 찾아 들어갔다.
때는 11월이라 난로 가에 앉아있는 3,4명의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의 소개로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검은 테를 두른 교장님은 핼쑥한 얼굴에 서민적인 인상을 풍겼으며 다정하고 무직한 편이였다.
교무실 내부에는 캐비넫 몇 개 초라한 어촌 학교임을 숨길 수 없었다.
교장님께서는 먼 길 오시느라고 피로 할 건데 급사를 시켜서 아랫마을에 내려가 문어 몇 마리 중국집 안주를 시킨 후, 30분 쯤 지난 후에 그릇에 담긴 큰 문어를 보았다. 다리가 움직이는 모습은 산촌 마을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이 아닌가. 난로 위에 냄비를 올려 즉석에서 끓으니 잠시 후에 꺼내어 나무 도마에 큰 칼로 절벅절벅 잘라 초장에 찍어 먹어 본 맛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허기에 지친 저로서는 최고의 대접을 받은 셈이다. 이곳이 내가 첫 둥지를 트는 곳인가, 첫 정이 이 난로 가에서부터 싹트기 시작되었다.
미리 일러준 바닷가 파도 소리 들리는 언덕바지에 위치한 가옥 아래 채 하숙방으로 안내되었다. 주인 어르신께서 인정으로 맞이하는 것이 매우 인상적 이였고 첫 저녁 식사의 반찬은 거의 모두가 해초에다가 밭에서 이룬 채소가 전부였다. 물고기는 바람이 불어 잡히질 않은 모양이다. 위채에는 따님으로 보이는 아가씨의 짧은 머리 묵은 뒷모습, 치마 자락이 나부끼며 왔다 갔다 한다. 육지에서 온 선생이라 호기심 찬 모습일까 뒤에 알고 보니 동료 선생의 약혼녀라니. 그때 만 해도 섬 출신 교사들이 대 다수였으며 육지에서 온 총각 선생은 보기 힘든 때이다. 그 즈음에는 섬으로 발령받는 경우는 귀양살이 정도 느끼며 어찌하였던 섬을 벗어나기를 바라던 터이라 1년 후면 섬을 떠나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있었다. 교통편으로 보면 동선인 통통배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교통이 두절되는 것이 예사이며 생활 습성 하나하나 너무나 이색적이니까. 그래서인지 육지에서 총각선생님이 부임하면 한 달 내 총각 선생을 낚아채어 섬을 못 벗어나게 꾀는 예가 허다하단다.
섬 처녀는 육지로 시집가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 별별 수단 방법을 동원을 다 한단다. 처녀들 끼리 서로 다투면 성사가 잘 안 되니까 마을 유지님, 처녀 부모들이 합의하여 마을 아가씨들을 순위를 매겨 다투지 않고 동네 규율에 맞게 처녀 1순위가 도전하고 실패하면 2위가 최선을 다한단다. 저녁이면 바다에서 개발한 맛 좋은 해산물을 가져 가기도하고 귀중품을 선물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실패하면 3위에게 도전장을 넘기는 예로 되어있다. 총각치고 안 넘어가는 총각이면 G라 포기하고 그 마을을 여러 수단으로 떠나게 만든다는 것이다.
저의 동기 친구는 거제 외포하면 김영삼 고향 어촌 마을 대구 멸치잡이로 부촌 마을 외포 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아 5년 동안 처갓집에서 공짜로 먹고 자고 봉급은 모두 저축하여 육지로 나올 때 큰 놈 걸리고 막내 업고 3자녀 거느리고 마누라 앞세워 육지에 상육 하니 어떤 부자 부럽지 않고 부인은 사모님 대우 받으니 섬 처녀의 최고 출세라 여겼으며, 그들은 최고의 희망이 아니었겠는가.
저가 부임 후 곧바로 며칠 후에 고향이 전북 전주 사범을 나오고 서울에서 음악대학 다니다가 가정 형편으로 제대 직후 이곳에 발령을 받아 마침 저의 하숙 집 옆방에 기거하게 되었다. 전공이 기타 연주가로 인물도 곱살스럽게 생겼으며 역시 총각 선생이었다. 이렇게 조그마한 어촌 마을에 미술 전공한 저와 같이 근무하게 되니 학교의 영광이요 지역 주민에게도 자녀 교육을 위해서도 큰 수확이었으며 마을 처녀들에게는 큰 희망의 대상이었다. 하늘에는 총총 별빛 하늘 아래서 고향을 그리며 타향 객지 몸으로 고향의 향수를 달래며 저녁이면 바닷바람 씌우면서 동료 친구의 기타 음악에 밤 가는 줄 모르게 시간을 보냈다. 이런 오지 섬 마을에서 듣기 힘든 기타 소리를 들으려고 섬 처녀들은 기를 쓰고 저녁 상 빨리 물리치고 하숙 방 앞마루에 몰려오는 것이다.
친구 이 선생은 깔끔하고 상량한 얼굴 가짐과 곧곧한 성격에 처녀들이 접근하기에 부담스러웠는지 몇 주일 후에서야 방으로 불러들어 재미있는 이야기며 놀이도 하면서 웃음 꽃 피우며 밤 가는 줄 모르게 지냈던 기억이 귓가에 맴돈다. 전교생 합쳐 60명 정도 2-3학년 담임을 맡아 교실 반으로 잘라 반쪽 칸막이로 이쪽저쪽으로 다니면서 가르치는 수업이 복식 수업이란다. 예능 수업시간은 으레 바닷가에서 실습을 한다. 그때만 해도 바닷가에는 해삼 군시 조개 고동 미역 등 많이 잡혀 학생들은 자랑삼아 잡아 건져 올려 내에게로 가져온다. 며칠 안주 가리는 풍족하단다.
주말을 이용하여 이부자리를 챙기기 위하여 고향에 갔다 오기로 했다. 일요일 오후 차 시간에 맞추어 어린 학생들이 지개를 지고 자갈길을 따라 정유소까지와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짐을 내리면 지게에 짐을 지워 운반하는 제자들, 신학기 이동 때면 의례히 학생들이 선생님의 이삿짐을 운반하는 게 상식으로 되어있다. 사제의 정이 이렇게 다 할 수 있나 하고 지금도 그 어린 제자들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 변치 않으리라.
임시교사 6개월 짧은 기간 머물면서 느낀 참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았고 자연 속에 어울려 사는 인간의 삶을 터득한 추억어린 감상이 지금도 떠나지 않아 그때 사긴 처녀 S양과 짧은 동안 추억을 잊을 수 없구나. 혜여지기가 아쉬워 눈물을 흘리면서 성포까지 차에 올라 따라 오기에 같이 가자고 타이르기도 했다. 육지에 가면 식모라도 당분간 하면서 시집보내 주겠다면서 타일러면서 배를 타자고 권했으나 홀로 계시는 아버지 장애자 남동생이 있다면서 끝내 승선을 거부하였다.
성포 부둣가에서 도선이 사라질 때까지 먼눈으로 멍하니 서있는 그녀의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봄이면 동백꽃 우거진 숲 사이를 배회하면서 진달래 한 아름 꺾어 들고 상양하게 전해주는 아가씨들, 밖 섬(외도)에서 잡은 개발 바구니에 담아 하숙집 문 앞에 갖다 놓아 주던 인정 많은 처녀들의 모습, 해삼 잡아 올리는 제자들의 얼굴, 갈매기 떼들 우굴 거리는 해안가, 조약돌의 속삭임.
50년이 지난 이 순간, 추억 아련한 거제도 풍경을 그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