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들의 연기축제] 언젠가 나는 천마산을 오르면서 숨이 턱에 찬다는 말을 실감나게 느낀 적이 있다. 불과 3년전의 이야기다.
이 고통은 군대에서 완전군장 10Km달리기에서 빛나는 소위를 달고 소대원을 이끌고 부대 선두에서 개거품을 물 정도로 달리던 인제에서의 경험과 흡사했다. 이 이야기는 29년전의 어느 여름날의 병영에서 있었던 일이다.
위의 두 경우에 똑같이 겪은 개거품 이지만 두 경우의 회복 주기는 아주 상이한 차이가 있었다. 후자의 경우는 물 한컵으로 말끔히 해소 되었지만 25년뒤인 전자의 경우는 완전히 병원 신세를 져야할 정도의 심한 신체의 변화였다.
그로부터 3년후 나는 어느날 담배를 자연스러울 정도로 느낌없이 끊었다. 나는 오늘 그 이야기를 할 모냥이다. 내 어렸을적 담배에 대한 신비로울 정도의 추억이다.
나의 할아버지께서는 시골 경기도 파주 한 시골 고향에서 동네 한문 글방을 하셨다. 동네의 학교 안간 학생들과 국민학교 졸업하고 진학 못한 젊은 이들을 모아 한문을 가르치시는 훈장 이셨다. 요지음으로 말하자면 문맹퇴치사업의 사회사업가라고나 할까~!!!
그 어르신의 담배는 곰방대 담배였다. 쌈지에서 담배를 꺼내 골방대에 우겨넣어 불을 붙여 피우는 담배 말이다. 그 담배 연기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독했다. 옆에서는 절대로 코를 댈 수가 없었다. 그보다 오래 전에는 장죽 대나무대로 담배를 피우셨다. 그래서 우리 시골 집앞의 큰 밭에는 담배가 심겨져 있었다. 담배를 심기전에 밭에는 뒤간의 재와 변이 배합된 거름을 깔고 오줌을 삭혀서 밭에 뿌리고 하는 모습을 익히 보아왔다. 그 냄새는 가히 시골을 대표하는 냄새였다. 지금도 구수한 향수의 냄새로 기억한다.
그 때만해도 담배는 어른을 상징할 정도의 대표적인 표시물이다. 그 모습이 정말 멋 있었다.
국민학교도 가기전의 그 담배에 대한 기억은 너무나 멋있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부터 할아버지께서는 골련이라하는 담배를 피우셨다. 물론 훈장님께 글방 학생들의 부모님이 선물한 귀한 담배이다. 지금 형태의 담배로 필터가 없는 담배를를 그 때는 쌈지 담배와 구분하여 골련담배라 하였다. 때로는 쌈지담배를 선물 받기도 하셨다.
그래서 내가 국민학교와 중학교 다닐 시절에 선생님께 담배 1보루를 선물했는가 보다. 동네 어른댁에 방문할 때도 그 때는 술, 담배, 쇠고기등의 세가지가 완전한 셋트 선물이었다.
이 골련(券煙:권련의 잘못된 표현) 담배도 정말 대단한 마약이다. 할아버지께서는 가끔 필터도 없는 그 담배를 피우셨다. 그러나 내가 본 그 모습은 너무 경박스러워 보였다. 그 장죽의 담배와 곰방대의 담배는 내게는 지금도 너무나 멋있는 모습이었고 어른의 상징물로 보였다.
지금도 그 것이 나의 담배에 대한 향수이다. 나도 어른이 되면 저렇게 멋있는 담배를 피워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 어린 나이에 그 때의 신선들의 모습이 기억난다.
할아버지께서는 십리밖의 동네 노인들의 모임처인 초당을 지어 그 곳에서 가끔 주연을 베푸셨다. 그 초당은 선조들의 묘소앞에 큰 은행나무 밑에 지었다. 대여섯평 정도의 초당으로 할아버지깨서 직접 동네 소작인들을 데리고 지으신 전형적인 초당이다. 그 곳은 내 할아버지 신선들의 휴식처이고 놀이터였다. 그 노인들은 그 곳에서 시조를 멋드러지게 읊조리며 자신들의 목청을 뽐내셨다. "청산~언리 ~~벽계~수야~~~~~~" 궁상각치우의 음률을 따라 읊조리며 집에서 담근 약주를 걸른 독채 놓고 드시다가 나오는 시조의 풍류는 요지음은 거의 찾을 수 없는 기억이다. 이 때 그 모임을 가장 즐겁게하는 것들이 술과 담배이다.
갓을 벗어 놓고 모시 바지저고리의 시원함을 맘껏 느끼며 약주로 얼큰한 목을 달래려 큰 대나무장죽에 담배름 넣어 지퍼라이터로 불을 붙이면( 당시에 지퍼라이터는 귀한 보물처럼 모셔지는 시골의 중요한 어른들의 소지품이다) 허연 연기가 살짝 나고 이내 빨아드리면 붉은 불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놋쇠로 만든 빨뿌리로 연기가 빨려나와 입속에 가득 찬다. 이 때 입은 완전히 다물지 않고 1/3정도 입을 실룩하게 열어놓고 빨아드리는 담배 연기의 일부를 자연스럽게 배출하고 일부의 연기는 목구멍을 통해 콧구멍으로 올라와 이내 밖으러 퍼져 나는 모습이란 완벽한 신선만이 할 수 있는 행위로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이 지금도 아련하다. 그 때 담배는 나의 꿈이었다.
나는 내가 다시 담배를 피우면 그 아름다운 자태로 신선처럼 그 기억되는 모습으로 피울 것이다. 우격다짐이 아닌 멋있는 모습으로~
내 할아버지의 담배의 역사는 내가 나이먹는 역사를 따라, 문명의 이기에 따라 장죽에서 곰방대로 곰방대에서 골련으로 골련에서 필터담배로 이전하여 그 어르신이 90이시던 때는 최고급 필터담배중 최고인 손주가 선물한 청자를 피셨다. 그 분은 85세에도 소를 몰고 밭을 갈아 배추를 심으셨다. 그리고 그분의 인생을 정리하시며 섯달 그믐에 후손들을 생각하시며 돌아가셨다.
이 것이 내가 어렸을 적의 추억이다.
나는 국민학교 시절 할아버지와 떨어져 교편을 잡고 계신 아버님을 따라 읍내에서 거주하였다. 그 곳에서 방학 때만 되면 이뻐 해 주시는 할머님댁에 와서 줄창 지냈다. 그 때도 모두가 그랬지만 놀이라는 것이 특별한게 없다. 깡통차기, 술래잡기, 구슬치기, 사방치기, 집지키기, 자치기, 연날이기, 팽이치기, 외발 썰매타기등 사내아이들은 그렇게 놀았다. 저녁 때만 되면 동네 방네 돌아다니며 꼬마들을 불러낸다. 소리소리 고함지르며~ 그 누구도 애들이 빰에 떠들고 노는 모습을 간섭하지 않았다. 공부하라고 성화를 부리는 부모도 없었다. 그게 그 시절 아이들의 놀이 문화다.
그러다가 놀다 지치면 우리 집 사랑방에 모두 모인다. 화로에는 이미 뜨겁게 저녁에 담아 놓은 불이 가득하고 그 불속에는 몰래 밤구덩이에서 꺼내온 싹이 나올 듯한 탱탱한 밤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잘 못해서 껍질이 덜 벗겨진것이 터지면 방바닥은 이내 재와 불꽃으로 가득하다. 이내 놀라던 아이들도 느긋하게 불을 쓸어모아 화로에 되 넣는다.
그러다가 능청이 생기면 대포탄 통의 뚜껑으로 만든 재떨이에서 우리의 호기심 대상물을 발견한다. 요지음의 표현으로 "꼬바리"이다. 그 때부터 우리들의 호기심은 시작이다.
"누가 먼저 할래~?" 이미 한 번쯤은 경험한지라 선뜻 나서지 않는다. "상훈아 네가 할래~?" 상훈이는 나보다 한 살아래지만 동네에서 유일한 비슷한 나이의 친구이다. 지금은 포천 이동에서 갈비집을 크게해서 성공한 친구이다.
그래도 꼬마들 중에 대장이고 주최자인 내가 시범을 보인다. 나도 이 짓을 여러번 했기에 크게 두렵지는 않지만 한 모금후의 고통은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고통을 이겨 내는 것이 마치 용감한 대장인냥 한모금을 빨아들인다. 이런 행동은 요즘의 애들도 다를바 없을 것이다.
"크윽~!!!" "헉~!켁~!흑~!" 콧물 눈물이 범벅이 된다. 그게 그시절 담배였다. 그걸 어른들은 젊쟎게 피우니~ 지금의 그 담배와는 비교가 않되는 최고의 독종이다. 아마 그 담배가 "파고다"인지"아리랑"인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이 때가 1962~6년 전후일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담배가 지독하다는 것을 어려서 체험한 나는 아주 늦게 어느날 바람이 시원한 산꼭대기에서 나의 담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는 1978년이다. "화랑담배"의 역사이다.
금연 1주년에 쓴 '금연기1' 에 이은 2는 젊은 시절의 담배에 대한 추억과 소견을 쓴다. 이 글은 담배를 권장하거나 금연하라고 권유하는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담배에대한 편견과 마약성을 버리면 언제든지 해방할 수 있으며 다시 그 신선놀이를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판단은 여러분 본인의 몫이다"
[화랑담배 한개피] 1978년 2월 빛나는 소위 계급장을 달고 연병장에서 임관식을 할 때 나는 세상을 얻고 대장이 된듯한 기분이었다. 비록 육군 소위에 불과하였지만~ 그리고 지옥의 훈련을 받으려 광주보병학교에 입소했다. 그 때 용산기차역에는 눈이 많이 내리고 있었다. 마중나오신 어머님뒤로 몰래 숨어있는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은 지금도 나와 함께하고 있다. 그 여인이 몰래 숨어 우는 새가 된 사연은 후일에 "하얀꿈의 일기"라는 글을 쓰면서 소개하기로 한다. 그렇게 하얀꿈을 뒤로 한 체로 따블빽을 메고 군용열차를 타는 나의 모습은 방금이라도 전선에 투입되는 병사처럼 착찹한 기분이었다.
그 힘든 훈련중에도 나는 담배와 인연을 맺지 못했다. 거기에는 성장기의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 가야한다.
요지음도 그렇지만 그 때도 고등학생들 중에 제법 담배 피우는 골통들이 많이 있었다. 그 시절 우리들은 그들을 꼴통이라 부르고 그들을 부러워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일부의 겉으로만 어른의 행세를 하려던 아이들이 하는 짓거리로 밖에 보지 않았으며, 도덕적으로 크게 잘 못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젊쟎은 내 아들이 그러는 것을 보아 요지음 아이들은 조금 다를지 몰라도 말이다. 내 아들중 큰 놈을 보면 말이다. 그 놈이 옛말로 하면 꼴초구릅의 꼴통일 정도로 담배를 피워댄다.
나는 우연치 않은 기회에 동네에 있는 친구들과 어울려 교회라는 데를 가게된다. 그로부터 나는 엄청난 변화를 맞이한다. 우리집안에서는 처음으로 교회에 미치도록 다닌 자가 되었다. 이 때 즈음 나는 중학교 시절의 쓰디쓴 패배감을 맛본 수렁에서 재수를 통해 도심 한 복판을 드나들면서 심리적 변화를 맞이하였다. 도시는 크고 나는 무한히 뒤쳐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도시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나는 너무나도 나약할 정도로 촌놈이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촌 놈을 탈피하려는 몸부림의 초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시절 나는 시골에서 서울 상계동으로 이주한지 4년정도 경과한 뒤였을 때다. 이 곳 역시 시골과 다름없을 정도였지만 서울로가는 나의 경유지 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고통속에서 재수를 통한 고등학교 진학이 새로운 도약이 아닐 수 없었다. 샘솟는 나의 의지는 벽이 없을 정도로 밀고 나갔다.
그 때 친구와 함께 우연히 교회를 방문하고 그 학생회에서 친구를 만나면서 전혀 새로운 신비의 세계로 몰입히게 된다. 전통적인 유교가정의 내게는 엄청난 개혁이다. 할아버님이 가르쳐주신 명심보감에서 인간의 살아야하는 도리만을 배웠지만, 기독교에서는 전혀 다른 세계에 나를 몰입시키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착실한 크리스쳔이 되었으며 이로인한 부모님의 핍박도 컸었다. 그 때 나는 목회자가 될뻔할 정도로 열심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정반대일 정도로 가족은 크리스챤이고 나는 유교로 돌아왔다.
그 영향으로 고교시절과 대학시절에 담배를 피울 기회가 없었다. 이런 내가 군에 입대하게 되었으니 연장선상에 있다 아니 할 수 없다.
한편 내집의 가족들은 대를 이은 골초부대이다. 돌아가신 형님은 바둑을 두실 때 담배 두갑정도는 피우시는 것 같았다. 그 형님의 아버지이시고 나의 아버지이며 내 할아버지의 아드님인 우리 아버님은 담배 배급소를 하시는게 나을 정도로 담배를 피우신다. 일발이 연발 7탄일 정도라면 담배를 피시는 것이 아니라, 겨울철 아궁이에 군불을 지핀다고 할 정도이다. (천국에 계신 아버님 죄송합니다. 표현이 지나쳤습니다~!!!히히~예전에 아버님 담배 몇가치 슬쩍해다가 피운 것 사과드립니다.극적극적~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갑체는 아니고 개피로만~흐흐!!!)
이런 우리집은 내가 고등하교 다닐 때만 하여도 곰잡는 집이었다. 굴속에 있는 곰을 잡으려고 불을 피운다는 말에서 나온 말이랍니다. 그래도 피워야할 당위성을 가지지 않고 어릴 적의 신선으로 피우는 할아버님의 담뱃대를 기억하며 이런식의 담배는 멋이라도 있지만 , 지금의 담배는 뭐야~?하는 식의 사고가 있고 종교적인 압력이 있어 담배는 나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 혹독한 장교 훈련에도 담배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지급되는 담배가 희망자에 한하여 나오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다. 훈련뒤의 담배 맛이 좋다는 전우들의 말에도 별 반응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담배와의 인연을 끊고 있었다. 그렇다고 담배를 피우는 동료들을 비하 하지도 않았다.
아! 보리이삭이 필 때면 시작되는 훈련이 보리이삭이 누렇게 되면 우리도 끝난다는 선배들의 보살핌에 유격훈련장까지 행군시 본 보리는 탐스럽게 이삭을 내밀고 있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들려~"를 부르며 죽을 정도의 핏똥싸는 지옥의 동복유격장으로 발이 부르트면서 걸어갔다.
그리고 보리이삭이 누렇게 되는 어느날 우리는 각자의 명령받은 임지로 갔다. 그 곳이 악명높은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다" 의 정통파 인제였다. 지금이야 관광코스의 여유로운 길목이지만 당시만하여도 아주 오지중의 한 곳이다. 힛뿌연 먼지를 내고 치렁치렁 광치령고갯길을 굽이굽이 절벽돌아 선배장교의 간장이 서늘한 간첩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의 묘를 지금도 누가와서 벌초를 한다던가~ 마을에는 고정간첩이 있어서 매복중인 소대장만을 골라서 목을 베어간다는 둥 별 씨나락 까먹는 소리들을 듣고 도착한 곳이 나의 영원한 인생의 전환점 367고지의 좃칠연대이다.(군인들의 표현그대로의 표기임을 강조 함)
전입신고를 마치고 도착한 부대는 1대대 4중대 2소대 기관초소대장이다. 당시에는 삼각편제로서 중화기중대에 기관총소대가 있었다. 지금은 각 소총중대에 있지만~ 그렇게 시작한 나의 소대장 생활의 첫 시작은 최초로 모든 책임을 내가 지는 내 수하의 부하 30명 남짓이다. 몸은 작고 체구도 왜소한 나는 눈만 바짝이는 빛나는 멸치 한마리일 뿐이었다. 당시 나의 모무게는 58Kg이었다. 지금은 그 반대이다. 소대원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초라했을지 모르지만~ 그로부터 2년후엔 나의 제대 1주일을 남기고 내 BOQ(장교숙소)에는 나의 제대를 축하하는 타 중대로 전속간 옛소대원들이 모여 밤을 세운 파티가 유일하게 있었다.
나는 그 들과의 이야기를 하려한다. 그 들은 나에게 꿈괴 희망을 가르쳐 주었고, 대장의 역활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었다.
갓 들어온 소위가 무엇을 알까. 소대원들은 전임 소대장의 깐깐한 핍박에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져 말 그대로 쫄병들이었다. 그 쫄병들이 날 만나고 타 소대들이 부러움을 샀다. 그들에게 군생활의 즐거움을 주었고, 훈련에서는 용장으로 독종이지만 내무반으로 돌아오면 완전히 친구이며 형님의 역활이 전부였다. 그래서인지 어느 초가을 벙커공사장에서 연대의 호출을 받고 부대로 복귀하여 사단장 표창을 받게되는 일이 발생했다. 임지에 간지 4개월만의 일이었다.
그게 내인생에서 나에게 새로운 전기를 주는 계기가 되었다. 남들이 나를 인정하여 줬다는 사실이다. 지극히 단순하게 자신의 책임하에 있는 병력을 책임지고 건사한 것이 제대한 그 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던 것 같다. 소원수리라는 것 때문에 겪은 일이다. 이 때 부터 일약 연대내의 스타가 되었다. 지금 나는 이런 건전한 사고로 책임을 다하는 영세사업가가되고 있다.
그 소대원들과 부임한지 1개월 후인 7월 폭염에 760고지인 지역에서 중대 지원사격 업무를 위한 훈련을 받기위해 500고지 이상 지점까지 이동하여 10분간 휴식을 하게 되었다. 이미 온 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는 상태로 뒤로 벌렁 누었다. 능선인지라 시원한 바람이 불어 몸을 이내 싸늘하게 식힌다.
아!!! 이 때부터 나의 흡연인생이 시작된다.
어디에선가 한줄기의 담배연기가 내 코를 찌르고 그 담배 연기는 사정없이 내 폐부로 파고든다. 달콤~ 향긋~ 스위트~ 이브의 꼬임인가~?
"염일병 어디 담배 한 대 줘 보겠어!" 염성옥 그는 당번 전령병이다. 그의 넓적한 얼굴의 큰 입에서 나오는 담배 연기가 사정없이 내 콧구멍을 유린하고 그 화랑담배 연기 한 뭉치가 나의 담배 인생의 문을 열었다.
염일병이 건네 준 그 화랑담배 한 개피가 물축인 입술위로 주욱 빨려오며 날 황홀경에 이르게 한다. 그 잊지 못할 화랑담배 한 개피~ "주우욱~ 푸우~!!!" 빠끔담배 한 대의 맛~
지금으로부터 25년전 1978년 어느 여름날 500고지 능선의 시원 바람 속에서 내 어릴 적 신선할아버지들이 피우시는 멋드러진 그런 담배를 만나게 된 것이다. 내 나이 스물다섯의 꽃다운 나이에~
그 때가 그립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