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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도 사람이 그리워 굽이져 누웠는가 | |||
진도 고뱅이마을을 찾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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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다렸지만 홍선생님은 부러 찾아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산티아고의 어느 언덕을 넘고 계시겠지요. “길이 있어 내게 걷는 즐거움을 주었다”하신 홍선생님과 함께 이곳 진도 호구동 돌담길을 지나 산길을 오르던 그 겨울의 새벽이 떠오릅니다. 납부닥에 시리게 닿아 붙든 날선 바람에 움찔 어깨를 움츠리다가도 6학년하고 5반에 진입한 홍선생님의 의연한 눈빛과 거친 세파를 감싸 막은 은빛 수염으로 따사로운 은혜로 다시 한 걸음 굽이진 길을 넘을 수 있었습니다. “차가 다니지 않는 길이 나는 좋아”하시던 홍성훈선생님. 작년까지 벌써 히말라야를 열 네 번째 다녀왔다는 맹익장이 아니십니까? 그래도 “언저리만 돌다 왔는데 뭘 그러시냐”며 겸손을 잊지 않으시다가도 “도움이들 없이 이번엔 제대로 갔다 와야지”하면서 열정을 감추지 않으셨지요. 십리길도 허우적거리며 좀체 마음을 잡지 못하는 저에 비하면 ‘높은 구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여 지금도 또 이 지상의 어느 낮은 길을 걷고 계신지요. 그날은 유난히 공기가 차가왔습니다. 홍선생님과 함께 전날 마신 술로 인해, 아니지요 제가 늘 절제 못하는 음주벽 때문에 제대로 잠을 못 주무신 탓도 있었던지 동네 밖을 나서기도 힘겨웠습니다. 세상은 얼마든지 따스한데 새가슴처럼 옹졸한 이 마음이 더 노곤한 삭신만 황폐하니 이끌기에 모처럼 찾아오신 선생님께 누를 끼쳐드린 드린 듯합니다. 길을 한참 나서자 산등성이 밑에서 까만 염소들이 무리 져 마른 풀 속을 더듬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굽이진 곳에 자리를 튼 마을 고뱅이라는 말이 강원도에선 ‘굽이지는 곳’ 또는 굽어진 무릎의 형태를 일컫는다고도 한답니다. 물이 휘어가는 곳을 흔히 ‘물굽이’ 굽이굽이 흐른다고도 하지요. 고뱅이마을도 그렇게 몇 굽이 산길을 돌고 돌아 다시 내려가면 만나는 곳입니다. 누구에게나 삶의 고단한 길이 다가오지만 오히려 그 가파름과 팍팍한 노정속에서 우리는 숭고한 땀과 분명한 확신을 바탕으로 거뜬히 넘어서 새로운 세상과 조우하지 않습니까? 주제 넘는 이야기라 얼른 접겠습니다. 호구동에서 서쪽으로 길게 놓인 임도는 피오동(이제 6가구만 남았다)을 멀리 내려다보며 고방리와 봉상리로 이어집니다. 봄은 멀었지만 산길 걷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운동 겸해서 이곳을 다닐 만 하지요. 중간 쯤에 재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잠시 쉬어가고 싶었던 곳입니다. 바람이 너무 재촉하는 겨울이라 결국 앉지 못한 채 우리는 길을 재촉했지요. 옆에 선 소나무가 어찌나 늠름하던지 감탄했습니다. 그 앞에는 돌무더기가 쌓여있어 성황당 자리임을 알게 합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저마다 간절한 기원을 맡겼을 저 낙락고송. 십일시 열흘장터 사람들은 즐겨 이 길을 걸어 다닌다고 합니다. 이 호젓한 길 속을 걷다보면 어느 시인 누군가의 시 한 구절이 절로 떠오를 듯 합니다. 걷는 그 보폭이 운율로 놓이기도 하지 않나요? 그래서 자연 속에 사는 이들은 모두 시인이 되나 봅니다. 고뱅이마을은 임회면 소재지가 있는 석교(돌다리)리 동남쪽에 자리합니다. 고방리라 하여 행정지명으로 높을 고(高), 꽃다울 방(芳)자를 쓰지요. 촌장격인 주민 하윤식(74)씨는 모방(方)자가 맞다고 했습니다. 이곳의 지형을 본딴 이름이기 때문이라는 해석입니다. 하씨는 마을의 형상이 “우산을 쓰고 있는 자리”라고 해 ‘잠시 비를 피하기에 좋은 곳’이라 알립니다. 어려운 시절을 만나면 들어와 살다 오래 머물지 않고 가세가 안정되는 대로 곧 바깥으로 이사가는 경향이 많았나 봅니다.
6.25 이전까지만 해도 40여 호에 달해 제법 마을세가 컸으나 이제는 12가호 정도로 너무 호젓한 곳이 되었습니다. 여기 저기 대밭이 들어서고 새로 단장한 묘지들이 또 다른 주소로 군락을 이뤘습니다. 이 동네를 몇 번 찾은 적이 있지만 저와 같은 40대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더더욱 그림자도 비치지 않습니다. 연두빛으로 불쑥 부풀어 오른 청보리와 양지녁에 푹신하니 자리를 깐 쑥잎이 조금 더 머물러달라고 애원하는 듯 합니다. “너도 얼마나 먹먹한 시간들을 물어뜯던 시절이 있었지 않으냐” 슬쩍 흘겨보는 듯해 합니다. 이곳 출신 향우들의 고향사랑이 크다는 것을 인터넷 카페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기억은 나눌수록 더 선명해지기 마련이지요. 이 마을은 예전에 석교리의 들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사방이 정겨운 산으로 둘러싸여 따뜻하고 토지는 비옥하며 물길이 좋아 아주 옛날부터 사람이 산 흔적이 있었다고 임회면지 초고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에 약한 민족”이라는 자괴감을 갖기 쉽지만 우리의 조선왕조실록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인류의 보물이 아닙니까? 진도 또한 수많은 외침에 시달렸지만 남도석성과 진도향교, 진도읍성을 보존해 왔습니다. 용장산성 행궁지는 불에 탔지만 망금산 강강술래터와 용장산성은 아직도 남아 만호바다를 지키고 있습니다. 수백척의 왜선을 단 열 두척의 배로 이 물목을 막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은 진도의 지형과 물길에 더해 진도사람들의 강열한 “지킴이 의식”을 앞세워 불멸의 전사를 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고방리는 지난 86년 석교리 4반에서 분구되어 현재의 부락으로 승격되었습니다. 당시 초대 이장으로 김방식씨가 임명되었습니다. 현재는 오성식(73)씨가 고령임에도 이장을 맡아 하고 있습니다. 최고령자는 김방식(79)씨이며 부녀회장은 이명실(76)씨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귀산(女貴山) 자락에 옹기종기 들어선 마을이 남쪽으론 강계, 죽림, 탑리, 귀성 상만(국립남도국악원) 등이 자리했다면 뒤쪽으론 여기 고뱅이와 피오동, 뱀골 매정, 고산 등입니다. “상식기 파하득하다” 구전에 의하면 마을 앞이 십일시 교에서 200m 상단에 자리한 상석교(상식기)들이라고 합니다. 십일시 조수현씨 밭 386-1번지 주위이며, 이곳 386-5와 385-1 사이에서는 지금도 쇠똥과 쇠를 녹일 때 쓴 숯의 재가 나온다나요. 그래서 이곳을 ‘부릿점’ 자리라 부른답니다. 예전에 지산면 일대에 사는 사람들이 말을 키우다 잡아먹고 일부러 이곳 들녘에 뼈를 파 묻어두고 시치미를 뗐다고 합니다. 하윤식씨는 “제대로 안하고 하는 일”을 일컬어 비유한 말로 해석했습니다.
김씨 친정은 임회면 귀성마을로 김해김씨 경파에 속합니다. 친정아버지 석암(石巖) 김태준(작고)씨가 시골에서는 한학에 조예가 있는 분으로 대접받고 특히나 산서(山書) 지리책을 탐독하고 풍수지리에 능했다고 합니다. 종이가 귀한 시절이라 담배 곽 안쪽에 아주 꼼꼼하니 일기를 쓰기도 했답니다. 사위된 하윤식씨 또한 이런 분야에 관심이 높아 없애지 않고 모아두었습니다. 친정아버지는 주로 묘자리를 잡아주고 우물터도 찾아내며 당신이 죽을 날짜까지 예언했다고 알렸습니다. 유물은 제대로 보관할 수 있는 사람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추사 이래 서예의 대가로 알려진 소전(素田) 손재형선생은 폭탄이 난무하던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일본 동경에서 세한도를 얻기 위해 몇 달을 죽음을 무릅쓰고 문안을 하던 정성에 탄복한 일인 소장가가 기어이 “이 그림은 당신밖에 보관할 사람이 없다”며 천하의 세한도를 우리 고국으로 찾아온 비화가 잠시 떠오릅니다. 김씨 할머니는 술을 내리는 데도 솜씨가 뛰어납니다. 아직도 몸이 성치는 못하지만 밤샘기도를 끝내고 첫버스를 타고 돌아오면 잠시도 쉬지 않고 들녘으로 나갑니다. 집안은 하씨의 복고풍 사랑만큼이나 물씬한 옛정이 손떼로 고루 묻은 풍경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소 여물을 쑤어주던 외양간이며 동쪽 처마 귀퉁이에 가득 쌓인 장작들이 가지런하니 ‘오랜 불기운’같은 아랫목 사랑을 다짐하는 듯합니다. “19년이 지날 때까지 남편께서는 독수공방 하셨겠는데라. 지금은 그렇다 치드라도 어떻게 밤을 참고 살았을 것이라?” “자슥들이 여섯인디라 다 아들이요” “우리 양반은 그런 것 안 졸라댑디다” 장성한 자식들은 모두 대처에 사는데 두분은 직업군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이웃 아주머니가 귀띰을 해 줍니다. 하노인의 여동생 하인순씨는 지난 해 진도군보건소장이 되었습니다. 그 덕분인지도 모르지요. 지극한 정성은 천지의 감응을 받기 마련이 아니겠습니까. 부인의 친정은 귀성리로 옛 전적들을 가져와 잘 보관하고 있답니다. 또 집에서 손수 빚은 동동주는 그 맛이 일품이지요. 대대로 내려온 가양주로 한 번 맛을 보면 좀체 자리를 뜨기 어렵습니다. 이날도 미리 연락하고 찾아가니 벌써 술을 걸러내 산에서 나온 산두릅과 미나리를 데처 맛을 보여줬습니다. 홍선생님도 산나물을 무척 좋아하실텐데 아쉬움이 남습니다. 고요가 적막을 누르니 투명한 시간 여행길로 “쌀 3되로 누룩 3되해서 일주일 지나면 술이 되지라” “옛 집이라 마래가 선선해서 술이 더 잘 되는 갑이지라” 부엌은 어두침침하지만 땔나무 그을림과 몽돌흙이 정겨움을 더합니다. 옛 여인들에게 주방은 바깥 사람들에게 쉽사리 보여주지 않는 내밀한 공간이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이웃에 살던 이명원씨의 어머니도 두 달 전까지도 20년가량 진도 홍주를 내렸다고 하는데 지금은 몸이 좋지 않아 서울로 가 자식집에서 살고 있다 합니다. 고적해도 세속의 떼를 털고 사는 곳 마을인구는 현재 여자 13명, 남자 11명으로 겨우 24명이 살고 있을 뿐입니다. 전부 농가로 12가구에 논이 14.7ha, 밭이 6.2ha가 됩니다. 또 저수지가 있는데 유역면적이 63ha이고 지난 60년에 준공했으며 길이 119m에 제방높이 가 9.5m입니다.
이명원씨는 석교중 20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총무에 이규열, 김형자(김장근씨 딸)씨가 맡고 있다. 또 고방청년회 회장에는 김재형, 총무에 채기봉으로 회원들은 오진일, 김태현, 조형률 채기춘 채기열씨 입니다. 사당으론 고방사라는 현판이 붙은 창녕조씨 사우가 유일하답니다. 진도는 수년 전부터 사당 제각 신축바람이 불어 어느 마을을 가거나 사는 집보다 처마가 높이 올라간 제각이 위세를 부립니다. 씨족들의 성세를 자랑하고 별도 제사모시기를 싫어하는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고방사는 마을 앞의 잿등자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1955년 초설해 조호묵의 주벽으로 27위를 모시고 있습니다. 음력 10월 첫주 일요일에 제사를 하는데 예전에 진도읍으로 출근하는 조씨 아전이 있었다고 귀띰을 합니다. 의제 허백련 화백의 직계 제자이며 대가인 옥산 김옥진화백의 선고 묘가 있는 밖골 앞에 창녕조씨 제각이 있습니다. 진도읍 소방대장 조규남과 의학박사 조은도 조삼현 등이 그 후손이라고 합니다. 효행표창에 하태량이 있습니다. 40여 년 전 진도향교전교가 주었습니다. 하인순씨는 진도군청에서 여성으론 유일한 사무관이기도 합니다. 진도는 여자가 드세기로 유명한데 관청에선 아직도 봉건 잔제가 남아 그런지 갸우뚱해지기도 합니다. 저도 아내에게 쥐어사는 처지라 더 나불거릴 용기도 없습니다. 기우제와 충제 지내던 “젯등” 마을의 주요 지명을 살펴보겠습니다. △ 음지몰 : 고방의 옛터이며 50년 경까지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그 안에 연벽이고장이 있고 산 위에서 기우제와 충제를 지내 산 위를 “젯등”이라 부른다. △ 청동골 : 마을의 남방이다. 그 동쪽으로 큰 골이 있다. 동편으로 노루목이 있는데 이곳에는 돌샘이 있고 옛날 초군들이 쉬었던 도리장도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만 남았다고 한다. △ 당재 : 고방재에서 약 200미터 가량 광석쪽으로 가면 당이 나오고 큰 당솔나무가 있다. 이 길로 계속 가면 광석정이 나오고 꿀재가 나온다. 옛날에 남도석성의 남도만호가 다니던 길이라 한다. △ 무덤골 :무당골이라고도 한다. 마을 북동쪽 뒷산으로 이곳에서 옛 그릇(古器)을 팔았다고 한다. 주요건물로는 새마을회관이 있습니다. 마을회관은 이제 사랑방구실에 적합합니다. 고방리출신들이 모여 인터넷카페를 만들었는데 회관 준공식 사진이 실려 있더군요. 휴가철이면 향우들이 찾아와 너른 마당에서 돼지고기 잔치를 열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어린아이 울음소리는 끊어진지 오래. 사령마을과 피오동 등 여귀산 등줄기에 기댄 깊은 골짜기로 둘러쌓인 전형적인 산동네라고 볼 수 있어 귀농을 하는 이들에겐 더없이 적합한 곳이기도 합니다. “선상님이 잘 얘기해서 우리 동네까지 버스 잔 오게 해 주쇼. 딴 거 안 바라요” 김씨 할머니는 달짝지근한 술 한 잔을 더 권하면서 제게는 너무 버거운 주문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마을 입구에는 석교중학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상점은 다 없어지고 인근 십일시 상가를 주로 이용하는 편입니다. 마을은 늘 고요합니다. 쓸쓸함은 그 적막이 외부의 바람을 차단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너무 급하게 또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기대이고 싶지 않은 신 구도자(求道)들의 거처로는 더할 나위 없다는 생각이 스칩니다. 너무 빤하게 속내가 보이는 이해문제를 지우고 점잖이 부러 굽이져 한복을 잘 여민 조선의 아낙처럼 자리한 고뱅이마을 산길을 다시 더듬습니다. 홍선생님! 지금 스페인의 산티아고 성지를 순례하고 계시겠지요. 저는 오늘 ‘가는골’ 방죽을 돌아 작약골 산길을 따라서 어머니가 계시는 사천리를 찾았습니다. 산 벚꽃이 너무 흐드러지게 피어 눈이 어질어질합니다. 아이도 ‘으아으아’ 소리를 질러댑니다. 십여 년 전부터 진동의 온 산에 벚나무가 무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눈사태가 벌어진 듯합니다. 저는 아직도 제가 걸어야 할 길이 어디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세 살배기 우리 해인이한테 더 부끄럽지 않은 ‘아비’로서의 자격을 든든히 다지는 노력을 하겠습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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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뱅이 고뱅이 오늘 새삼 잊어가던 어린시절 추억이 떠오르네요
하윤식 어르신 모습도 뵙고 저는 봉상리에서 살았기때문에 고뱅이 그길을
고등학교 1학년때(1977년)광석에서 봉상리까지 걸어온 아름다운 추억이 있답니다
고뱅이에는 우리문중 선산이 있어 조상님들이 잠들어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