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세계 100회 강연 중 48번째 강연이 버지니아주 뉴폿뉴스에서 열리는 날입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에서 자동차로 3~4시간 달리면 버지니아 남동부 지역에 페닌슐라(Peninsula) 지역을 만나게 되는데, 이 지역은 요크강, 제임스강, 햄튼로드, 체사픽만을 잇는 세계 최대의 자연항구 지역으로 관광지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페닌슐라 지역은 윌리암스버그(Williamsburg), 제임스타운(Jamestown), 요크타운(Yorktown), 뉴폿뉴스(Newport News), 햄튼(Hampton)지역을 말하며, 이 페닌슐라 지역으로부터 지하 터널이나 다리를 통해 바다를 건너면 노폭(Norfolk), 버지니아 비치(Virginia Beach). 포츠머스(Portsmouth), 체사픽(Chesapeake)과 같은 도시들이 모인 타이드워터(Tidewater) 지역으로 연결되는데, 페닌슐라 지역과 타이드워터 지역 전체를 햄튼로드(Hampton road)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햄튼로드 지역에는 거대한 조선소와 공군부대, 해군부대, 육군부대 그리고 나사(NASA)가 어우러져 있어 미국의 전략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푸른 바다와 빽빽이 들어 선 나무들을 통해 신선한 공기를 호흡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요크타운은 역사적으로 남북 전쟁의 장소로 유명하고, 제임스타운은 콜럼버스가 처음에 미국에 들어 왔을 때의 배도 볼 수 있으며 윌리엄스버그는 미국 독립의 중심지로서 영국 식민지시대, 즉 18세기 시대를 재현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노폭에는 해군 본부와 공군본부가 있으며, 오늘 강연이 열리는 뉴폿뉴스는 북미에서 가장 큰 해양박물관 중의 하나인 국립해양박물관 Mariner’s Museum이 있고, 미해군 항공모함 및 잠수함을 제조하는 Newport News Shipbuilding이 있어, 도시 경제가 군대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펜닌슐라 지역에는 펜닌슐라 한인회가 존재하며, 이 지역의 한인들은 약 7,000 여명인데, 그 중 뉴폿뉴스에는 약 1,200명 정도 산다고 합니다.
스님께서는 아침식사 후 원교 교정 등의 업무를 보시고 휴식을 취하시다가 간단히 점심식사를 하고 1시 30분 경에 미주정토회관을 출발하여 6시에 행사장에 도착했습니다. 워싱턴DC에서 이곳으로 내려오는 길은 정말 깨끗하고 조용했으며, 오늘 강연이 열리는 장소인 크리스토퍼 뉴폿뉴스 대학교(Christopher Newport News University, CNU) 역시 아주 깔끔하고 깨끗한 대학교였습니다. 학교 외관만 깨끗한 것이 아니라 건물안으로 들어오니 학교가 하나의 호텔처럼 아주 멋진 모습이었습니다.
▲ 오늘 강연장, Christopher Newport News University
작은 도시로 오면 스님의 강연이 한바탕 마을 전체의 축제가 되는 느낌인데, 이곳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특히 행사를 주관한 분이 아이들이 있는 가정이다 보니 아이들도 모두 부모와 함께 자원봉사를 해서 훈훈한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아이들도 ‘내가 희망입니다’ 로고를 프린터하여 단체 티셔츠를 맞춰 입고 안내를 하고 있었는데 정말 가족 잔치처럼 따뜻한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스님께서 강연장으로 들어서니 자원봉사자들이 반갑게 인사를 하고, 스님과 스텝진은 2층 대기실에서 호법심님과 장효전님께서 준비한 김밥으로 저녁식사를 하였습니다.
잠시 후 7시에 스님께서 연단에 오르시니 많은 분들이 이곳까지 방문한 스님을 큰 박수로 환영해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뉴폿뉴스에 방문한 첫 느낌을 이야기하면서 강연을 시작하셨습니다.
“이곳으로 오는 길이 너무 조용해서 좋았어요. 지금까지는 도시에서 강연을 하니까 복작거렸는데 여러분들은 조용한 좋은 곳에 사시네요. 작년에 패어팩스에서 한분이 참석해서 ‘노폭 지역에도 와주세요’ 라고 해서 제가 ‘가면 밥주고 재워주나?’ 하고 물었더니 해줄 수 있다고 했어요. 그 말이 씨가 되어서 제가 여기에 오게 되었습니다. 여기는 작은 도시가 여러 개 붙어 있는 것 같네요. 그리고 학교가 아주 깨끗하고 깔끔해서 좋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고뇌가 있다면 대화를 나눠봅시다.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 자기가 중심이 되어서 잘 산다고 사는데 삶의 결과를 보면, ‘정말 내가 중심이 되어서 살았나?’, ‘그냥 세상에 휩쓸려서 여기까지 왔나?’ 이런 의문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얘기하실 분 있으면 얘기해 보세요.”
그러면서 편안하게 질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총 7명이 스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하고 있는 일과 하고자 하는 일이 달라서 자존감이 떨어졌는데 다시 자신감을 가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분, 가족들에게 감정조절이 안되고 쉽게 짜증을 내고 좋을 때도 좋다고 표현을 잘못해 고민인 대학생, 집안 전체가 불교를 믿지만 자신은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오빠가 한 집에 종교가 둘이면 집안이 망한다고 해서 어떡해야 할지 고민인 분, 미국에 온지 27년 되었고 돈도 좀 벌어서 은퇴를 했는데 남편은 한국에 가고 싶어 하고 자신은 손주가 미국에 있으니 여기 있고 싶어 갈등인 분, 유튜브란 문명이 있었기 때문에 스님과 인연이 닿았는데 불교의 무소유 정신이 무척 마음에 닿기도 하지만 발전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고민인 분, 공항 장애를 앓고 있는데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 묻는 분, 친한 친구가 가출을 하고 사이비 종교에 들어갔는데 친구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한 분 등 다양한 질문에 대해 스님께서는 정성껏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왜 108배를 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소유의 의미에 대해 궁금해하는 분의 질문에 대한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유튜브를 통해서 보다가 이렇게 직접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제가 스님 말씀을 듣다 보니 108배를 하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왜 108배를 하는지에 대해서 기초 상식이 없어서 질문을 드립니다. 108배가 형식적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육체적인 운동으로서가 아니라 왜 내가 절을 해야 되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사람 두 명이 누워서 서로 얘기를 나누다가 다투면 계속 누워서 다툴까요? 벌떡 일어나 앉을까요? 일어나 앉겠지요. 앉아서 얘기하다가 또 다투면 계속 앉아서 얘기할까요? 서서 얘기할까요? 서겠죠. 서서 얘기하면서 성질이 나면 고개를 숙이고 얘기할까요? 고개를 쳐들고 얘기할까요? 고개를 쳐들겠죠. 눈을 감고 얘기해요? 눈을 부릅뜨고 얘기해요? 눈을 부릅뜹니다. 어깨에 힘을 주고 고개를 쳐들고 눈을 부릅뜨고 얘기합니다. 이것이 ‘내가 옳다’는 생각이 가장 강할 때 몸이 나타내는 동작입니다.
화가 났다는 것은 누가 옳다는 것입니까? 내가 옳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가면 동그랗게 치뜬 눈이 내리깔리고 쳐들었던 고개가 약간 숙여집니다. 그러면서 ‘아이고, 미안해요’ 이렇게 됩니다. 그러다가 더 잘못했다 싶으면 ‘죄송합니다’ 그럽니다. 진짜 내가 죽을 죄를 지었다 싶으면 무릎을 꿇고 ‘잘못했습니다’ 그럽니다. 진짜 내가 더 죽을 죄를 지었다 싶으면 이마를 땅에 댑니다. 이것이 마음에 따른 인간의 표현이에요. 그래서 내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댄다는 것은 ‘내가 옳다’는 생각을 완전히 내려놓았을 때입니다. 그래서 절을 하는 의미는 ‘내가 옳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절의 효과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고 절하는 전 과정에서 전신 운동이 됩니다. 어떤 운동보다도 전신 운동에 효과가 좋습니다. 같은 20분 안에 어떤 운동을 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으냐? 절이 가장 좋습니다.
둘째, 다른 운동은 육체적으로만 효과가 좋은데, 절은 심리적으로 자기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해소됩니다. 스트레스는 ‘내가 옳다’고 고집할 때 받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할 때는 스트레스가 없어져요. 현대인들은 ‘내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 때문에 절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셋째, 여기에 자기 암시문을 가지고 하면 더 좋아요. 자신의 무의식 세계에 영향을 주는 암시문을 ‘수행문’ 또는 ‘기도문’이라고 합니다. 만약 내 심리가 불안해서 ‘하나님 내 마음 편안하게 해주세요’ 이렇게 하는 것은 도와달라는 얘기잖아요.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절을 하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마음이 편안합니다’ 이렇게 자기 암시를 주어야 해요. 108배를 하면서 기도를 하면 108번 자기한테 암시를 주는 것이 됩니다. 남편과 갈등이 심할 때는 남편에게 ‘당신이 옳습니다. 제가 부족합니다’ 이렇게 절을 하는 겁니다. 상대가 어떤 주장을 할 때 ‘저건 틀렸다’는 생각이 항상 들었는데, 이렇게 계속 자기 암시를 주면, 남편이 얘기할 때 남편 얘기를 그냥 그대로 들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절을 하는 것입니다.
100배 절을 하든 103배 절을 하든 110배 절을 하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108 번뇌’라고 불러 왔잖아요. 그래서 ‘108 번뇌’를 없앤다는 뜻에서 108배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한테 절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참회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부족함을 참회하는 절이기 때문에 제가 볼 때는 기독교 교리에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교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면 103배를 하면 됩니다. 천주교가 박해를 받을 때 순교해서 성인의 위치에 오른 사람들 103명이 복위가 되었잖아요. 그분들 한분 한분께 절을 하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천배나 만배는 굉장히 힘이 듭니다. 이것은 약간의 극기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 정도 하려면 너무 힘들기 때문에 중도에 포기하게 돼요. 절을 하는 과정에서 힘이 들면 여러 생각이 많이 일어납니다. 처음에 남편한테 참회기도 하다가 힘들면, ‘내가 뭐 잘못했는데, 니가 더 잘못했지’ 이런 분노도 일어나고, 또 그러다가 ‘아이고, 내가 잘못했다’ 싶기도 하고, 마음이 열두번도 더 바뀝니다. 이렇게 마음이 바뀌어 가면서 절을 계속 하면 ‘내가 옳다’ 하는 생각이 이 과정에서 조금 놓여집니다. ‘아이고, 남편이 그래서 그랬구나’, ‘아이고, 아내가 그래서 그랬구나’ 이렇게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합니다. 절을 하면서 상대가 이해되면 스트레스가 풀리거든요.
예를 들어 ‘니가 왜 그런지 모르겠다!’ 하면 목소리도 커지고 마음이 답답하잖아요. 모르겠다는 이 무지가 스트레스의 원인입니다. 그런데 ‘아, 그래서 그랬구나’ 이렇게 상대를 이해하게 되면 스트레스가 풀리잖아요. 그래서 이해받으려 하지 말고 이해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해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입니다. 이해하는 마음을 내면 스트레스가 해소가 돼요. 그래서 절을 하는 겁니다.
땀이 뻘뻘 나고 하기 싫은 마음이 일어나는데도 계속 절을 한다는 것은, 성질을 고쳐보겠다는 각오가 굉장히 굳건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을 계속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108배를 하라고 말하는 겁니다. 절을 108배 하는 것은 종교와 아무런 관계없이 심리 치료에 굉장한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정리하면, 첫째, 그냥 절만 해도 육체 운동에 아주 좋다. 둘째, 절을 하면 자기 아상이 좀 허물어진다. 셋째, 기도문을 가지고 절을 하면 무의식 세계에 변화가 오면서 스트레스 해소에 굉장히 도움이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스님께서 절을 하는 의미에 대해 명쾌하게 정리를 해주시니 질문자도 참 좋아했습니다. 그러자 앞서 질문한 이 분은 궁금한 것이 또 있다며 질문을 한가지 더 하였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가 무척 마음에 닿는 반면에 또 한편으로는 무소유로 살면 세상에 아무런 발전이 없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유튜브란 문명이 있었기 때문에 저도 이렇게 스님과 인연이 닿았는데, 무소유와 발전의 개념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무소유라는 것은 존재 자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발전을 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불만족을 느껴야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만족스러워서 무엇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요. 불편한 사람이 편리를 찾을 때 무엇을 만듭니다. 불만족스러워 불평하는 것은 주로 파괴의 에너지이지 창조의 에너지가 안 됩니다.”
“조금 더 앞으로 가고자 하는 욕심이 있을 때만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무언가를 만들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죠.”
“배고플 때 밥 먹고 싶다, 졸릴 때 잠자고 싶다, 이런 것들은 욕심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본적 욕구라고 합니다.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욕구는 오히려 보장해 줘야 합니다. 이것은 기본 권리에 속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욕심이라고 하는 것은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 데도 욕심을 내는 것이 있습니다. 100만원 있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데도 상대가 1,000만원을 가지면 그때부터 빈곤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내가 저 사람보다 더 잘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욕구를 욕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욕망은 긍정적인 요소도 있고 부정적인 요소도 있고 두 가지 다 작용합니다. 욕망의 성격은 끝나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욕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옛날에 GDP가 100불일 때도 살았는데, 지금 2만 6천불이거든요. 그러면 앞으로 26만불이 되면 물질적인 욕구가 끝이 날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옆 사람이 어떤가의 문제이거든요. 그래서 상대적인 것은 끝이 안 납니다. 일정한 수준에서 멈추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절제’라고 하죠. 기본적인 욕구는 충족이 되어야 하고, 상대적인 욕구는 절제를 해줘야 해요. 그래야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어요.
그리고 ‘탐욕’이라고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과다한 욕구는 버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술을 더 마시고 싶다고 해서 과음하게 되면 건강을 헤치지 않습니까. 과식을 해도 건강을 헤치죠. 이런 것은 오히려 멈추어 줘야 합니다. 혓바닥 조절을 못해서 과체중인 경우가 많잖아요. 혓바닥의 집착이 건강을 헤칩니다. 그래서 비만은 영양실조보다 훨씬 치유가 어렵습니다. 영양실조는 음식만 있으면 치유가 되기 때문에 값이 얼마 안 들어요. 그런데 비만은 치유하는데 돈이 엄청나게 듭니다. 아마 100명의 영양실조를 치료하는 것보다 1명의 비만을 치료하는 것에 돈이 더 들 거예요. 제일 간단한 치료법은 안 먹으면 되는 것인데, 문제는 혓바닥이 중독되어 있기 때문에 안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즉, 자기 통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옆에서 도와줘야 하는데 이건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런 것은 다 과욕에 해당합니다.
욕구는 기본적 욕구, 상대적 욕구, 과한 욕구 이 세가지가 있습니다. 과한 욕구는 버려야 하고, 기본적 욕구는 기본 권리로서 충족시켜야 되고, 상대적 욕구는 절제가 필요하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무소유라는 것은 실재가 어떠냐 하는 것에 대한 얘기이지 발전이다, 발전 아니다, 욕구다, 욕망이다, 이런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공기가 누구의 것입니까?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내 것이라는 생각이 소유욕입니다. 이건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럼 니 것이냐? 니것도 아니예요. 그럼 우리 것이냐? 우리 것도 아니에요. 그럼 하나님 것이냐? 하나님 것도 아니에요. 자연의 것이냐? 자연의 것도 아니에요. 있는 그대로 보면 누구의 것이 아니에요. 그냥 존재할 뿐이예요. 천하만물은 그냥 존재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 것이다’ 하는 의식을 일으킨 것입니다.
항상 우리가 인식을 할 때는 무엇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인식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작아요’ 할 때는 그 사람은 머리 속에서 이것보다 큰 것을 연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커요’ 라고 할 때는 이것보다 작은 것을 연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크다, 작다, 새것이다, 헌것이다 말하지만 그것은 다 상대적인 개념이예요. 존재 자체인 이것 하나만 놓고 보면 크다고도 할 수 없고 작다고도 할 수 없어요. 이것을 선불교의 용어로 말하면 ‘다만 그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크다 작다, 새것이다 헌것이다, 옳다 그르다, 맞고 틀리고가 아니고 다만 그것일 뿐입니다. 이것을 대승불교의 용어로는 ‘공(空)’이라고 그래요.
존재는 그냥 공(空)이에요. 다만 그것일 뿐이지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식을 할 때 크다고 인식하기도 하고 작다고 인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다 소리를 듣기도 하고, 작다 소리를 듣기도 하는 것입니다. 본래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기에 또 다른 측면에서는 크다고 인식할 수도 있고 작다고 인식할 수도 있는 겁니다.
무소유의 뜻은 ‘존재 자체는 그 누구의 소유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식을 할 때는 ‘내꺼다’, ‘니꺼다’ 이렇게 인식을 하죠. 무소유는 본질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니꺼’ ‘내꺼’ 하지만 그것은 우리들의 일시적인 인식의 문제이지 본질에는 ‘니꺼’ ‘내꺼’ 하는 건 없습니다. 이 본질을 꿰뚫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컵은 그 무엇도 아닙니다. 다만 그것일 뿐입니다. 이렇게 공(空)이라고 인식을 할 때는 물 담으면 물컵이 되고, 커피를 담으면 커피 잔이 되고, 주스 담으면 주스 잔이 되고, 술을 담으면 술잔이 되고,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 되고, 국 담으면 국그릇이 되고, 오줌을 누면 요강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커피잔이라고만 딱 상을 지어서 인식을 하면 이 잔은 커피 먹을 때 밖에 못 씁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소유’라는 상을 짓기 때문에 풍요 속에 빈곤이 있는 것입니다. 물질이 아무리 많아도 사용을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면 우리는 문제를 훨씬 더 원활하게 풀 수가 있습니다. 본래의 존재는 더럽고 깨끗함을 넘어서 있습니다. 그것을 탁 깨치면 자유로워집니다. 언어는 어떤 상황을 설명하는 도구입니다. 언어를 절대화하면 안됩니다.
무소유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만물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인식하는 세계에서는 누구의 것도 될 수가 있습니다. 본질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고 현상은 그 누구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건에 대해 집착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집착을 함으로해서 온갖 고뇌가 생기고 불평등이 생깁니다. 무소유를 아무것도 갖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돼요. 무소유는 내가 아무것도 안 가지고 있다 이런 뜻이 아니라, 내가 어떤 것을 쓰고 있어도 본래 내것이 아니다 이런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쓸 때는 소중하게 쓰고, 다른 사람이 쓸 수 있도록 항상 돌려줘야 합니다. 그래서 무소유의 정신이 있어야 천하 만물을 공평하게 공유할 수가 있습니다. 서양철학에서는 이것이 굉장히 깊은 철학에 들어가지만 불교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기본에 해당합니다. 무소유는 존재 그 자체의 진실상을 말하는 것이고, 소유는 우리의 인식 상의 오류를 범한 의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질문자는 궁금함이 풀렸는지 “잘 알았습니다” 하고 웃으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깊은 내용을 쉽게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해주시니 스님의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께서는 몸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마음의 행복을 위해서도 매일 조금씩 투자를 하라고 당부하시면서 이렇게 정리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성인의 말씀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지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주일마다 한번씩 성당에 가서 예배를 하는 것도 자기 행복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몸을 위해서만 밥을 먹이지 마시고, 나의 행복을 위해서도 늘 소중한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매일 아침 일어나서 1시간씩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감사 기도를 해보세요. 그래야 여러분들의 인생이 행복해집니다. 미국에 왔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고 결혼한다고 해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늙는다고 행복해 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행복과 직접 관계가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행복하게 할거냐 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것만 여러분들이 알면, 혼자 살아도 행복하고, 둘이 살아도 행복하고, 미국에 와도 행복하고, 한국에 돌아가도 행복하게 됩니다. 그렇게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뉴폿뉴스강연은 약 70-80명 정도가 참석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봉사자들 포함하여 100명 이상이 참가했습니다. 스님께서는 5명의 질문자에게 답변을 하고 나니 목소리가 탁해지고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7명까지 답변을 하고 나니 마칠 시간이 되어 더 이상 질문을 받지 않고 강연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참가한 모든 분들이 스님의 정성스런 답변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페닌슐라 지역에서는 흔치 않게 많은 분들이 모인 행사로서, 북쪽의 리치몬드, 뉴켄트 지역뿐만 아니라, 타이드워터 지역인 버지니아비치, 노폭, 체사픽지역에서도 많이 오신 것 같았습니다. 지난 4월 이번 강연의 준비를 위해 기획 강연을 이곳에서 영상으로 미리 열어 보았는데 그때는 약 30여명이 참가했었습니다. 그때 오셨던 분들을 다시 보게 되어 참 반가웠고, 다들 스님께서 여기까지 방문하여 강연을 해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해 했습니다. 베이커리를 운영하시는 분은 행사장에서 스님과 자원봉사자들이 먹을 빵을 준비해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펜닌슐라 한인회장을 역임하였던 이상석 전 한인회장님도 오셔서 끝까지 스님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어떠했냐고 질문을 하니 “참 좋았고 재밌고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강연을 마치고 스님께서는 책 사인회가 마련된 곳으로 자리를 옮겨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분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강연 준비를 위해 수고한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오늘 강연을 준비한 윤학순님, 이영범님께도 각각 새로운백년, 인생수업에 사인을 하여 선물로 드리고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 행사를 총괄한 윤학순님(왼쪽)과 이영범님(오른쪽)
그리고 이틀 동안 펜실베니아와 뉴폿뉴스에서 운전 봉사를 한 미국인 마이클님께 사인을 한 영문 기도책을 선물로 드리니 마이클님도 기뻐하였습니다.
▲ 운전 봉사를 해준 마이클님
그리고 오늘 저녁 식사준비를 해주신 호법심님과 장효전님께도 감사의 선물로 스님의 사인을 한 ‘깨달음’ 책을 드렸습니다. 이후 자원봉사자에게는 한국에서 선물로 가지고 온 단주를 한명 한명에게 손목에 끼여주시면서 “수고하셨어요” 하며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자원봉사를 한 아이들도 스님께서 단주를 끼워주니 너무 기뻐하고 좋아했습니다.
▲ 자원봉사를 함께한 아이들에게도 단주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뒷마무리 후에 묘덕 법사님과 총무님은 봉사자들과 함께 마음나누기를 하였고, 스님께서는 뒷마무리를 하는 자원봉사자들에게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먼저 숙소로 출발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10시 10분 경에 숙소인 윤학순, 이염범 부부 댁에 도착하여 원고교정 및 업무를 보셨습니다.
오늘 페어팩스 강연은 워싱턴정토회 유주영 총무님과 자원봉사자들도 함께했지만 뉴폿뉴스 지역에서 많은 분들이 후원금을 내고 자원봉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리치몬드에서부터 버지니아 비치까지 포스터를 붙이며 홍보를 하였고, 신나고 행복하게 서로 합심하여 강연준비를 하였다고 합니다.
행사를 마치고 묘덕법사님과 나누기에 함께 한 분들은 17명이었는데, “스님께서 이 지역으로 강연을 오셔서 너무 감사드리고, 준비하면서 힘들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고, 준비과정에서 아이들도 부모님들과 함께 매주 만나서 노래연습도 하고, 율동도 배우고 같이 모여 놀기도 하면서 자연스레 정기적인 모임이 될 것 같다”며 다들 좋아하였습니다. 불교에 관심있는 사람들도 그동안 이런 모임이 없어서 서운했는데 오늘 이런 행사를 해서 좋았다고 하고, 또한 자원봉사 신청자도 적어서 우려도 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봉사자도 늘어나고 행사도 원만히 잘 치룬 것 같아 기쁘다고 하였습니다.
▲ 행사를 마치고 묘덕법사님과 함께 마음나누기를 하고 있는 모습
그리고 마이클은 "그동안 자주 나오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많았는데 이번에 5개 강연장에서 자원봉사를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 나사(NASA)에 근무하고 있는 한 분은 “20대였던 93년도에 깨달음의장 수련을 했었는데, 스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봉사 신청을 하여 행사를 준비하게 되어 기뻤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튜브를 통해서 스님 강연을 듣고 한국에서 수련을 한 후 이번에 자원봉사까지 합류했던 분도 정말 기뻤다고 하였고, 오늘 질문을 했던 봉사자는 본인 성격에 대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많았는데 오늘 스님의 답변을 통해서 자기를 인정하게 되어 좋았다고 하였습니다. 자원봉사자 모두는 "스님께서 내년에도 꼭 방문해주셔서 강연을 해주시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오늘도 많은 분들의 정성과 자원봉사로 48번째 버지니아 뉴폿뉴스 강연도 잘 진행되었습니다. 내일 49번째 강연은 North Carolina, 랄리(Raleigh)의 North Carolina State University(노스캐롤리나 주립대학교)에서 열립니다. 그럼 내일은 랄리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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