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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교회 길자연 목사님 목회자 세미나 강의 내용-
영성 목회 현장이라는 주제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떤 신학자가 이런 말을 한 것을 책에서 읽어보았습니다. "30년 동안 많은 신학자들이 신학을 탐구하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내가 도달한 신학의 피어리드(정점)는 영성 신학(Spiritual Theology)은 신학의 꽃이다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신학의 기저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영성 문제가 놀랍게도 20세기말인 오늘의 시점에 와서 겨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말은 영성 신학, 영성 목회가 그 동안 한국 교회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잊혀져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그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영성 목회를 한 번 짚어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영성 목회를 우리 목회 현장에 접목시켜서 정체된 오늘 한국 교회 상황 속에서 어느 교단보다도 발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신학자 에드워드 트루나이젠은 목회를 정의할 때, "영혼을 돌보는 것이다" 라고 간단하게 말했습니다. 그의 말 대로라면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성' 이라는 것입니다. 영혼을 돌보는 것을 목회라고 할 때 목회자에게 있어서 영성이 결여되었거나 영성이 아주 없다고 하는 것은 목회를 불가능 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저는 지난 27년동안 목회를 해 오면서 송구스럽지만 제 개인이 받은 은사와 은혜에 입각해서 영성 목회에 주력해 왔습니다. 그 결과 제가 한가지 제 개인적인 입장에서 목회자로서, 합동측 목사로서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영성 목회는 교회 부흥을 보장한다' 라는 사실입니다. 나무를 심어 열매를 먹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씨앗을 뿌려서 열매를 먹기까지의 과정에는 관심이 없고 열매 자체가 '다냐, 쓰냐' 그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 되고, 교회로서 부흥과 발전을 양적으로 질적으로 하는데에는 부단한 영적인 고난과 투쟁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 목회의 지나간 27년을 요약해서 '영성 목회 현장' 이라는 주제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영성 목회 현장이라고 하는 말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목회는 반드시 영성이 필요하다' 입니다. 이 영성(Spirituailty)이 목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요, 본질입니다. 두 번째는 이러한 영성 목회가 진리였다는 것입니다. 이 영성 목회를 지난 27년 동안 실혐해 보았더니 진리였습니다. 여기서 저는 영성 목회가 필연성과 필요성을 함유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필연성이라고 하는 것은 영성 목회는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모든 목회자는 반드시 영적이어야 하며 영성을 소유해야 하고, 영성 목회를 지향해야 할 사명과 임무와 본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필요성을 말씀드리면 목회란 하나님의 사역으로, 영적인 목회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서 필요성을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럼 왜 우리가 영성 목회를 해야 되는냐?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적 관점에서 영성 목회는 반드시 필연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4:23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라는 말은 헬라어 원문을 보게 되면 '하나님은 영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100% 발견할 수 없고 그 하나님의 뜻을 100% 증거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목회적인 측면에서 이 목회자의 기량에 따라서 목회가 나타납니다. 영성 목회를 하게 되면 반드시 목회가 영적인 목회가 되어 기막힌 은혜와 사랑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래서 왜 우리 목회자가 영성을 소유해야 되겠는가의 당위성을 거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영적인 세계에 계시며 영적으로 역사하시며, 영을 통하여 우리에게 접근하시는 그 하나님을 육신적인 안목으로 볼 수도 없고, 육신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이해할 수도 없고 인간의 지식이나 세속적인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완벽하게 소화해서 목회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영성은 소유되어야 하며 또는 목회는 영적인 사역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목회의 방법론을 선택하는 것은 누구나 자유입니다. 학구적으로 목회를 하는 것도 자유이고, 정치에 관심이 있어서 접근하는 것도 자유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우리는 목회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사역을 완수하는 목회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영성입니다. 학문. 중요합니다. 이론도 중요합니다. 논리가 중요하고 합리적인 사고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이 시대는 점점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그리고 지식적인 목회로 기울어 가고 있습니다. 어디인지 영성을 소유하고 영성만 강조하는 목사는 무식해 보이고 신앙에 가서도 좀 학구적인 사람은 높아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성을 소유하지 못한 학구적인 목회는 서기관의 목회는 될지는 몰라도 진정한 목회는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성을 소유하게 되면 몇 가지 중요한 목회의 일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영성이 있으면 하나님의 일과 모든 일에 대한 판단력이 정확합니다.
고전2:15절에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영성은 생명 운동을 가져옵니다. 요6:33절을 보면 '살리는 것은 영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목회자는 영혼을 살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이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영성을 소유하게 되면 신령한 세계에 관심이 저절로 갑니다. 저는 많은 병을 앓았습니다. 선배 목사님, 친구 목사님들이 저를 만나면 불쌍한 듯이 "길 목사 건강 지키라우" 그렇게들 말씀하십니다. "요새, 건강해!" 그럴 때마다 제가 "썩은 작대기 3년 가는 것 모릅니까?" 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아주 건강하며 테니스하고 골프 하는 사람이 하루 아침에 죽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그러나 저는 안 죽었거든요. 영성을 소유하면 생각이, 운동이나 영화나 레저나 세상적인 것에 관심이 안 갑니다. 자연히 자고 깨면 꿈속에서라도 주님과 교통하는 것에 대해 사모하는 마음이 자꾸 생기고 신령해집니다. 결국 목사의 생명은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는데 그 능력은 신령한 생각의 산물입니다.
네 번째로, 기도의 깊은 세계를 수시로 드나들 수 있습니다. 신령한 기도의 세계가 남의 것이 아니고 내 것이요, 어려운 일이 아니라 매우 쉬운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란 사실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영성의 사람 엘리사, 도단성의 아람 군대가 에워 쌓지만 "하나님이여 저 게하시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할 때 눈이 열려 보는 그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영성의 사람은 기도한 대로 응답 받습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요한이 쓴 계시록을 보면 1장부터 마지막장까지 가장 중요한 문맥이 '내가 보니, 내가 보니...' 이런 문구가 수십번 나옵니다. 그 다음 가끔 나오는 것이 '내가 들으니, 내가 들으니...' 사도 요한의 별명은 '내가 보니, 내가 들으니' 입니다.
우리가 환상을 한 번 보려면 얼마나 힘이 듭니까? 우리는 보아야 하며 들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영성을 소유하면 목회자로서의 영적인 권위가 생깁니다. 영적인 권위가 생기면 목회는 영적인 권위에 의해서 되어져 갑니다. 마차가 바퀴만 달려 있으면 저절로 굴러가듯이, 목회가 어렵습니까? 영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성을 소유하면 말씀의 능력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말씀의 능력이 생긴다는 것은 곧 목사의 재산 목록 제 1호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영성을 소유한 베드로가 설교할 때에 삼천명의 사람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감동의 역사 눈물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영성을 소유하면 교회에 질서가 있습니다. 컴퓨터를 들여놓지 않고 목사가 행정력이 좀 떨어져도 영성을 소유하면 교회가 당회로부터 주일학교까지 성가대로부터 모든 지회까지 목사 중심의 질서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영성은 목회자의 재산목록 1호입니다. 충만한 영성을 소유하고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은 시대가 너무도 급박한 환경에 처해 있기 때문에 성령의 단회성과 계속성에 대해서 논쟁을 벌일 틈도 없고 시간도 없습니다. 이 문제를 논하고 따지고 싸우기 전에 성령을 받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단회적으로 역사 하느냐, 계속적으로 역사 하느냐는 것을 체험을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영성을 소유한 목사가 되려면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전14:1절에서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예언하기를 힘쓰라" 고 했습니다. 여기에 말한 '예언' 이라는 말은 고전 12장에 예언의 은사를 말하는데 ' 너 내일 죽을 것이야' 라는 이런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 영성,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예언하기를 힘쓰라에서 신령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입니다. 영성입니다. 우리는 영성을 사모해야 되고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 하는데 '사모' 라는 말이 헬라 원문에 '젤로' 라는 말입니다. 이는 '애정을 갖고 헌신한다' 라는 말입니다. '열심을 낸다' 라는 말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예수님의 생애가 영적 생애였고, 예수님의 운동이 영적 운동이었고,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영적인 말씀이었기 때문에 마태복음5장 28~29절에 '서기관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 고 말한 바울은 그 '사모한다' 라는 말을 유기정 박사는 '체험한다' 라는 말로 해석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성령 체험을 말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체험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캐네츠릿츠라는 사람은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 체험의 방법에는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첫째는 기도요, 둘째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접근하고 그 은혜에 매달릴 수 있는 두 가지 끈은 기도와 말씀의 끈입니다.
실천 목회를 통해서 영성 목회에 대한 제 생활의 일부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리는 것으로서 이 강의를 마칠까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기도' 라는 단어가 18번, '빈다' 라는 단어가 2번나옵니다. 제가 찾아 세어 본것이라 확실치는 않습니다. 또 '금식' 이라는 단어가 1번나옵니다. 사도행전에만 해도 벌써 21번에 기도 운동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1:14절에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렇게 기도에 힘쓰다가 2:1절부터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중 한 중요한 성경 구절이 4:3에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성령에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기까지 빌기를 다해야 합니다. 기도한다고 금방 성령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임재하시는 순간까지 우리의 기도는 완전히 계속 되어야 하고 또 그때까지 충족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웨슬레는 "기도는 기독교 신앙의 열쇄다"라고 했고, 스펄젼은 "내 자신과 설교를 위해 지하 기도실에서 수백 명의 성도들이 교회 부흥과 나의 설교, 그리고 교회를 위해 부르짓고 있다" 라고 했습니다. 헬린유는 "기도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삶이다" 라고 했습니다.
토레이 박사는 목회가 기도하면 3가지 중요한 역사가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영혼을 사랑하게 됩니다. 저는 지금도 사랑이 안가는 교인이 있습니다. 제 숙제입니다. 미워하지 않는데 사랑이 안 갑니다. 기도하면 영혼을 사랑하게 됩니다. 둘째는 성경말씀을 100%믿게 됩니다. 세 번째는 설교에 대한 자신감과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여러분! 저는 합동측 친구 목사님도 많지만, 통합측 친구 목사님들이 더 많습니다. 명성 교회 김삼환 목사님을 위시해서, 요즘 예배당 잘지은 이용남 목사님, 도림교회 유위웅 목사님, 남대문 교회 조 목사님, 박종순 목사님들 입니다. 이런 분들이 한결같이 영적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통합측을 자유주의 신학에 감염되었다고 보지만 통합측에도 보면 영성 목회에 치중하는 목사님들도 많습니다.
김삼환 목사님 같은 경우는 제목 설교입니다. 25분합니다. 모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부흥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 분 시골에서 목회할 때 새벽에 매일같이 종을 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밤에 비가 우박같이 쏟아질 떄 예배당 천장에 비에 녹아 가지고 진흙이 뚝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 양반이 예배당 보호한다고 그 밑에 엎드려서 밤새 '주여, 주여' 하면서 기도했답니다. 그 진흙은 다 덮어쓰면서도 주님의 교회를 지켰습니다. 정말 기도 많이 했습니다. 비록 목회에 두 번씩이나 실패했지만, 하나님께서 일시적인 실패를 통해서 대 성공을 거두게 하셨습니다.
사실 요즘은 강해 설교가 아니면 교회가 안 되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금란 교회 김홍도 목사님의 설교도 제목 설교입니다. 강해 설교가 아닙니다. 단 하나 영성은 충만합니다. 영성은 메시지를 증거하는 방법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저는 제 목회에 대해서 충분한 시간이 없어서 다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지만 제 목회의 핵심은 기도 목회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 목회를 통해서 우리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역사 하셔야 되겠다고 믿습니다. 저는 제가 기도하는 것보다 교인이 기도하도록 유도하는 방법을 지난 23년동안 왕성교회에서 적용해 왔습니다. 현재 저희 교회 기도 프로그램은 다양합니다. 매일 밤 심야 기도, 불침번 기도를 합니다. 지난 23년동안 왕성 교회를 시무하면서 오늘날까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이 심야 기도와 철야 기도를 생명처럼 관리해 왔습니다. 교인은 쿨쿨 잠만 자는데 목사만 40일 금식 기도한다고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가 경건 생활을 통해서 영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교회로 하여금 기도에 동참케 하는 것입니다. 기도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제 개인기도 생활을 주로 골방에서 합니다. 제 당회장실에도 기도 골방이 있습니다만 저는 집에도 기도 골방이 두 개 있습니다. 2층에 하나, 묵상하고 성경 읽고 기도할 떄 쓰는 지하 서재에 골방이 하나, 과거에는 금식 기도를 하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주로 교인들을 기도하게끔 합니다. 지난 23년간은 금식 기도를 릴레이식으로 해 왔는데, 요즘에는 하루 세사람씩 금식 기도를 합니다. 이처럼 교회에서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음악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듯이 기도가 있는 곳에 부흥이 있습니다.
여러분 다른 것은 다 못해도 목사를 위한 기도꾼들, 기도 응원 부대만이라도 만들어 보십시오. 교회가 가만 있어도 장로 중심에서 목사 중심으로 옮겨오게 됩니다. 목사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 해석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기록자인 성령이 해석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성령이 충만하여 성경의 기록자인 성령이 나를 영성 충만하게 하여서 성령의 뜻이 들어 있는 성경을 가장 정확하게 볼 수 있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국민소득 몇만 불이 되는 시대에는 교회는 모이지 않을 것입니다. 연보도 떨어질 것이고 교인들을 불러들일 방책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처럼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온갖 세상적인 쾌락과 즐거움을 추구하던 사람도 결국에는 허전한 마음을 가지고 돌아오는 곳이 교회일 것인데 그때에 각광받는 교회가 영성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부흥이란 말이 히브리어 말로 '카이야'라는 말입니다. 재생한다는 말이고 기운을 북돋는다는 말이고, 생기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카이아'는 영어에는 '부활' 이라는 말로 해석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엡1:23절에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 이라' 하였습니다. 교회를 충만하게 채우려면 영성 충만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 부흥은 양적 부흥만이 아니라 질적 부흥입니다. 120명이 변해서 3천명이, 5천명이, 수만 명이 모였는데 이는 양적 부흥만에 그치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중요한 말 중 3가지 말이 있는데 1:15절에 보면 '모인 무리의 수가 120명이었더라', '무리' 라는 단어가 4장과 5장에서는 '믿는 사람' 이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6:1절에 드디어 '제자' 라는 말로, 무리가 신자로 신자가 제자로 질적 부흥이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영성 운동만이 살길입니다. 얼마나 영성 목회에 충실했느냐에 따라서 교회가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 얼마나 목사들이 귀족화 되었습니까?! 지금 기도원이요?, 무릎 꿇는 기도원은 잘 안 갑니다. 의자를 놓고 편안히 대화할 수 있는 그런 기도원만 잘 갑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도저희 들어갈 수 없는 정체 현상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 영성 목회, 기도 목회, 말씀 목회를 평생 유지하셔서 연부년 부흥하는 교회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목회자와 영성
-구리영락교회 김성기 목사
성도가 병이 들어 목사님이 안수를 해주어 그 성도의 병이 나았다. 그 때 육체의 일부인 손을 갖다 머리에 대고 기도 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치유의 능력을 손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고 하지 않고 성령이 주신 영적인 은사라고 말한다. 쉽게 설명하면 그 치유의 능력이 손의 근육에서 나오는 육의 힘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영적인 능력의 결과라고 보기 때문이다.
오늘날 영성이란 말을 자주 듣고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확히 영성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설명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사실 영성은 한마디로 영적인 성향이다.
창 2:7절에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흙으로 인간의 몸을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 넣어 온전한 인간이 탄생되었다고 성경은 인간 구성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다. 여기 몸의 재료인 흙은 육의 성향을 나타내고 생기는 영의 성향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인간은 육과 영의 특성이 결합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영혼이라는 것은 단순히 정신적인 혼의 기능만을 말하지 않는다. 혼이야 모든 동물들이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 경우에는 혼과는 또 다른 신의 형상인 영의 기능이 있다고 본다. 이 하나님의 특성인 영적인 성향을 추구하는 것을 영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요한과 바울은 영의 특성을 여러 가지로 말하는데 그 몇가지만 이해하면 영성이라는 말을 정확히 이해할수 있게 된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여기에서 ‘신령과 진정’이라는 말은영어로 [in spirit and in truth]이다. 즉 성령과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는 바로 토라[모세오경]라고 부르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신령과 진정은 겉 모양새를 말하지 않고 본질을 의미한다.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바울은 영을 초월성으로 이해한다. 세상에 매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영적이신 예수님은 그래서 당시에 세상 권세자들이나 종교적인 율법주의자들로부터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셨던 것이다.
(고후 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영의 차별성을 말한다. 즉 다양한 영이 있다는 것이다.
(왕하 19:7) 『내가 한 영을 저의 속에 두어 저로 풍문을 듣고 그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 본국에서 저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영이 생각과 육을 움직인다는 것이다.
(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영이 육과 마음까지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신자들의 세상 사람들과의 차별성이다. 겉모양은 같지만 그 내용과 질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렇게 영성은 인간을 구별시키고 초월케하며 동시에 성향과 본질을 의미한다.
오늘날 영성목회라는 말을 우리가 자주 듣는데 여기서 어떤 이는 반발할 수도 있다. 목회가 다 그러면 영성목회지 아니면 다른 목회가 또 있냐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일반적인 목회자들은 성령이 내 안에서 함께 계셔서 그 분이 설교나 기도나 치유나 심방이나 모든 부분에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도와주신다고 동의하기는 하지만 실제 성령의 능력을 사용하고 도움을 구체적으로 받는 사람은 흔치않다. 그래서 영성목회라는 말을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구체적으로 말하면 바울처럼 교회가 선교사를 성령의 계시에 의해 파송하거나[행전 13장], 선교의 방향을 결정하거나,병자를 안수하여 고치며 전도하거나, 예언하거나,예언적인 설교를 하는 목회자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과 사도들은 어떠했는가? 그야말로 영성목회였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수 증인이 되어 목숨걸고 복음 전하러 나갔던 것이다.
필자가 처음 맡은 교회는 나환자 교회였다. 어느 날 심방하는데 심방설교 카드를 20장쯤 밤새워 만들어가지고 그 날 심방하였다. 그 후에도 설교준비는 언제나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자유롭고 쉽게 준비한다. 바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늘 받기 때문이다. 성경도 영으로 보니 모든 것이 새로웠다. 밥법은 간단하다. 바로 성령 받으면 된다. 성경말씀 그대로 이다. 우리가 성령을 받고 그 분이 우리안에서 역사하게 삶과 사역을 맡기면 그 분이 행하시는 것이다.
어떤 중진 목사님이 TV 대담프로에 나오셔서 말씀하시길 부정적인 한국 교회의 미래를 연구하기 위하여 미래학을 공부하고 한국 교회의 암담한 미래를 열고 교회를 다시 부흥시킬수 있는 그 대안을 영성에서 찾으셨다 하셨다. 바로 정답이라고 생각하였다. 오늘 날 유럽교회와 미국교회를 비교해보면 한국교회의 나아갈 길이 훤히 보인다. 바로 영성을 살려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