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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록雜錄」-- 해제
박종훈(태동고전연구소 전임연구원)
1. 「잡록」의 체제와 구성
「잡록 상」에서는 효행(孝行),충의(忠義), 정렬(貞烈), 강직(剛直), 인후(仁厚), 수재(守宰)의
6항목을 두어 관련 인물들의 행적을 소개했다. 「잡록 하」는 소항목을 따로 두지 않았다.
「잡록」에 실린 항목과 관련 인물을 표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雜錄上
孝行(14건)
向德(新羅), 孫順(新羅), 崔婁伯(高麗), 金遷(高麗), 知恩(新羅), 尉貂(高麗),
孫順興(高麗), 車達(高麗), 林光廉(高麗), 釋珠(高麗), 長州 乞兒(明),
鄭良玉(朝鮮), 吉再(朝鮮),吳伯周(朝鮮)
忠義(6건)
王邦衍(朝鮮), 關東 權氏(朝鮮), 進士 李某(朝鮮),
諸末(朝鮮), 金莫發(朝鮮), 徐甄(朝鮮).
貞烈(13건)
薛氏(新羅), 平岡公主(高句麗), 湖南 巫女(朝鮮), 羅州 某氏(朝鮮), 趙 處子(朝鮮),
玄風朴某妻(朝鮮), 洪某妻(朝鮮), 羅季文 妻 尹氏(朝鮮), 康好文 妻 文氏(高麗),
咸興 韓氏婦(朝鮮), 關東 李某妻 金氏(朝鮮), 金遇秋 女奴(朝鮮), 都雲峯 妻 徐氏(朝鮮)
剛直(8건)
金彦辛(朝鮮), 朴以昌(朝鮮), 睦天任(朝鮮), 田霖(朝鮮), 成廟朝 左承旨(朝鮮),
呂必善(朝鮮), 金壽彭(朝鮮), 朴安信(朝鮮)
仁厚(4건) 尹淮(朝鮮), 鄭弘濟(朝鮮), 宋有元(朝鮮), 權以鎭(朝鮮).
守宰(26건)
丙吉(漢), 楊繼宗(明), 盛昶(明), 高定子(宋), 何文淵(明), 朱喜(宋), 杜正獻(宋),
仇泰然(宋), 林孝澤(宋), 孫伯純(朝鮮), 玄德秀(高麗), 李寶林(高麗), 河允源(高麗),
孫忭(高麗), 鄭云敬(高麗), 崔碩(高麗), 忠烈王(高麗), 尹基慶(朝鮮), 李瀅(朝鮮), 李躋熙(朝鮮),
具鳳瑞(朝鮮), 梁灌(朝鮮), 奇虔(朝鮮), 崔潤德(朝鮮), 李允憲(朝鮮), 李志元(朝鮮)
雜錄下(11건)
寶育(高麗), 朴震龜(朝鮮), 許積(朝鮮), 阮莊(安南), 劉太監(明), 尤侗(明),
壬辰亂(朝鮮), 柳應秀(朝鮮), 柳渆(朝鮮), 東國衣制, 金坵(高麗), 報恩, 矗城, 陜川.
<표 2> 「농가총람」의 구성과 내용분류
우선 각 항목의 등장인물을 살펴보면,
신라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인물이 망라되어있다.
그 뿐만 아니라 중국 한(漢)나라의 병길(丙吉)을 비롯하여 명(明)나라의 양계종(楊繼宗),
성창(盛昶) 등과 송(宋)나라의 주희(朱喜), 두정헌(杜正獻) 등도 포함되어 있다.
안남국(安南國)의 사신(使臣)이었던 완장(阮莊)도 눈에 띈다.
이처럼 국내뿐 아니라, 국외 인물들까지 두루 포함하여 각 항목과 관련된 인물의 행적을 소개했다. 또한 각 인물의 행적을 소개하면서 뒷부분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놓은 것도 특징적인 일면이라 하겠다.
「잡록 하」에는 특정 인물과 관련 없는 기술도 보인다.
임진왜란 때 명(明)나라 구원병의실상에 대해 언급한 항목이 있고,
신라 때부터 전해진 우리나라의 의제(衣制)에 대해 소개한 항목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잡록 하」의 끝 부분에는 보은(報恩)과 진주(晉州) 촉성(矗城)의 지세에 대해 소개하면서, 이곳에 대한 방비를 철저히 하는 것이 적의 침략을대비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합천읍(陜川邑)의 물난리에 대해 안타까워하면서그 대책을 수립할 것을 제언했다.
이 부분은 『천일록』권3의 「관방」에 해당하는데,
『천일록』을 엮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로 생각된다.
2. 「잡록」의 저술 의도
1796년(정조 20) 조정에서 구언교서(求言敎書)가 내려지자,
우하영은 구언상소를 올린바 있는데, 이는 시무책(時務策)의 일환이었다.
이후 1804년(순조 4) 우하영은 구언상소를 보완하여 『천일록』을 저술했다.
그렇기에 『천일록』 자체가 당대 시무책과 관련이 있으며,
『천일록』권9에 실린 「잡록」 역시 당대 시무책과 연관되어 있음이 자명하다 할 것이다.
우하영은 「잡록」을 편찬하게 된 동기를 서문에서 분명하게 밝힌 바 있는데,
다음 인용문이 그 주요 대목이다.
잡록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온 나라에 전해지는 철행(哲行)과 의범(懿範) 가운데
그기록이 사라졌거나 드물게 전해지는 것을 잡다하게 모아놓은 것이다.
좀 더 넓게 채집하지 못한 것은 내 견문이 넓지 못해서이다.
그러나 옛 사람이 “한 마디의 좋은 말씀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죽을 때까지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고 했으니,
만일 이 잡록을 읽는 사람이 책을 펼쳐보는 사이에 이러한 내 뜻을 알아준다면,
백성들의 윤리를 바로잡고 세교(世敎)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서문에서 확인되듯이, 우하영은 백성의 윤리를 바로잡고 세교에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의도에서 효행, 충의, 정렬, 강직, 인후, 수재 6항목으로 나누어 인물열전을 편찬했다.
특히각 항목에는 인물들의 행적을 소개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개진하고 있어 흥미롭다.
덧붙인 사견(私見)을 통해 세교(世敎)의 본보기로 삼고자 했던우하영의 의도는 더욱 명료해진다.
또한 『천일록』이 시무책과 관련이 있으니,
저자 우하영은 특히 당대에 이 6항목에 대한 계도(啓導)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있다. 결국 「잡록」 역시 당대 사회에서의
필요성에 의해 저술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한 (大韓)
3. 「잡록」의 특징적 일면
‘효행’ 항목은 자신의 부모에게 효행을 다한 14인의 행적을 모아둔 것이다.
대부분 부모에게 효성을 다했으며,
그러한 행적이 알려져 온 나라 사람들이 칭송했다는 내용이다.
신라와 고려, 조선의 인물뿐만 아니라,
중국 장주(長州)에서 구걸하며 자신의 어머니를 봉양했던 한 아이의 행적까지 소개했다.
‘충의’ 항목에는 어지러운 때를 만나 나라에 충성하고,
자신의 의리를 지킨 6인의 행적이기록되어 있다.
왕방연(王邦衍)이나 관동(關東) 권씨(權氏)는 단종(端宗)과 관련된 인물이고
영남(嶺南) 진사(進士) 이모(李某)는 연산군(燕山君)의 난국에 충의를 지킨 인물이다.
효행이나 정열 등 다른 항목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충의’ 항목에서는 각 인물의 행적을 소개하고 뒷부분에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덧붙였다.
영남 진사 이모에 대해서는 곧은 마음과 꼿꼿한 절개를 칭송하면서,
자신의 이익만을 쫓는 무리들을 질타한 바 있다.
이는 당대에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제말(諸末)은 천민으로 임진왜란 때에 의병으로 활약했고,
김막발(金莫發)은 합천(陜川)의 옥졸로 이인좌의 난 때 의로움을 발휘했다.
천민의 이러한 행적을적극 소개한 것은 이들의 행적을 알리자는 일차적인 의도 이외에,
당대 선비들을 질타하려는 속내가 있었음을 말미에 덧붙인 우하영의 사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교에 도움을주고자 했던 우하영의 의도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정렬’ 항목에는 정조를 지키고 열행(烈行)했던 13인의 행적이 소개되어 있다.
각 인물의기이한 행실과 뛰어난 절개의 소개가 주된 내용이고,
덧붙인 사견을 통해 그들의 정렬을칭송했다.
나아가 우하영은 나라의 신하된 자들도 이들의 행적을 본받아
부끄럼 없게 살아가라고 일침을 가했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 「온달전(溫達傳)」은
“溫達, 高句麗平岡王時人也. 容貌龍鍾可笑, 中心則睟然. 家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平岡王少女兒, 好啼. 王戱曰,
汝常啼, 聒我耳, 長必不得爲士大夫妻, 當歸之愚溫達.……”로 시작되어
온달이 중심인물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잡록」에서는 “高句麗平原王有小女, 好啼.
王常戲曰, 汝每啼聒我耳, 長必不得爲士夫妻, 當歸之愚溫達. 蓋其時國中有溫達,
貌龍鍾,家甚貧, 常乞食養母, 破衫弊屨, 往來於巿井間. 時人目之曰, 愚溫達.……”
이라고 시작하여,온달보다는 공주에 초점을 맞추었다.
공주의 정렬에 초점을 맞춘 우하영의 의도가 그대로 반영된 대목이다.
‘강직’ 항목에서는 총 8인의 행적을 소개했다.
해당 인물은 모두 벼슬아치들로 임금을 대면하거나
사신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강직한 행실을 보인 이들이다.
이 항목에서는 우하영 자신의 사견을 덧붙이지 않은 채 인물의 행적만을 소개했다.
‘인후’ 항목에는 백성을 인덕으로 다스렸던 4인의 행적이 소개되어 있다.
이 부분 역시 각인물의 행적만이 소개되어 있고 사견은 덧붙이지 않았다.
‘수재’ 항목은 공정하고 지혜로움으로 백성의 교화에 앞장섰던
지방 관리에 대한 일화이다. 중국 인물 9인과 고려 인물 7인 및 조선 인물 10인 등
총 26인의 행적이 담겨 있다. 대부분 각 인물의 명민함과 지혜로움,
그리고 이로 인한 백성의 교화가 주된 내용이다.
반면충렬왕이 신하들에게 홍대(紅帶)를 하사했던 일을 거론하면서,
“지금 수령들이 두르고있는 붉은 인끈은 모두 백성의 피로 물들여 만든 것이다.”라고 하는
당시 사람들의 말을옮기고 있다. 충렬왕의 혹정(酷政)에 대해 비판한 기사이다.
이 부분에도 우하영의 사견은 보이지 않는다.
이상 「잡록」에 실린 항목과 대략적인 내용을 살펴보았다.
앞선 「잡록」의 편찬 의도에서살폈듯이, 윤리를 세우고
세교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위해 우하영은 각 인물의 행적을 소개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이에 대한 자신의 사견을덧붙였다. 특히 사견을 통해
당대 사회의 부정적인 모습에 일침을 가한 대목은 주목할만하다.
「잡록 하」에는 보육(寶育), 박진귀(朴震龜), 허적(許積) 등 국내 인물도 있지만,
안남국(安南國) 사신으로 북경에 왔던 완장(阮莊) 및
명나라의 유태감(劉太監)과 우통(尤侗)의일화도 소개되어 있다.
특히 유태감과 관련해서는 중국 사신이 안남국으로 사신 갔다가뇌물을 받았고
그것 때문에 탄핵 당했다는 일화를 소개한 바 있다.
또한 우통의 작품을 인용하면서 안남국 왕조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고,
중국 사신이 안남국에 와서 뇌물을 받은정황을 소개했다.
결국 안남국 사신인 완장이나 중국 사신인 유태감 및 우통의 일화를
소개한 것은 뇌물이 오가는 상황에 대해 비판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구원병의 정황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다.
장수가 370여명,징발된 군인은 221,500인, 식량으로 소비된 은이 약 5,832,000냥 등이라고
당시 구원병의인적, 물적 현황에 대해 상세히 언급했다.
이어 명나라 구원병의 구체적인 실상에 대해서도 거론했다.
천하의 풍기(風氣)는 서북쪽이 강건하고 굳세며,
동남쪽은 여리고 나약한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남쪽 오랑캐의 강인함이 북쪽 오랑캐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 명나라가 우리 조선을 구원해주려 한 일에 대해서 말하자면,
산동지방의 강인한 병사들을 제쳐두고 멀고먼 남쪽 고을 만 리 밖에 있는
군사들을 징발했으니,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계책이다.
또한 예로부터 병사를 잘 부리는 사람은 적의 동태를 잘 살피기에 전쟁에서 패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과 우리나라의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은
모두 적을 사로잡는 공을 세우려는 생각으로 다만 적의 동태만 알았지,
왜구의 병사를 부리는 기술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이로 인해 이여송은 혜음령(惠陰嶺)에서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고,
신립은 달천(㺚川)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진실로 개탄할 만하다.
명나라의 구원병이 중국 산동 지방의 강인한 군사보다는
중국 남방의 나약한 병사들이었다고 하면서, 이것부터가 잘못된 계책이었다고 질타했다.
이어 공을 세우려는 명예에만집착하여
왜구의 병술에 대해 알지 못했기에 대패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다음으로 조선과 왜구의 장단점에 대해 얘기하면서,
승산이 있었는데도 패한 것은 결국 조선에 문제가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이러한 논리는 다음에 언급한 유응수(柳應秀)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유장군전(柳將軍傳)〉은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왜구를 소탕했던 유응수에 대한 기록이다.
다음으로 〈유연전후서(柳渆傳後敍)〉에서는 유연(柳渆)과 관련된 사건을 소개했다.
앞부분은 이항복(李恒福)의 『백사집(白沙集)』권16에 실린 〈유연전(柳渆傳)〉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뒷부분은 이 사건과 관련된 우하영의 사견이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죽은 유연의 사건을 소개하고 장문의 사견을 붙인 것은,
실제 세상의 변고는 끝이 없으니,
옥사를 판결하는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난 실상에 얽매이지 말고
세밀하게 살피고 신중하게 처리하기를 바란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선의 의제(衣制)에 대한 언급했다.
고려가 신라의 것을 이어받았고 조선이고려의 것을 그대로 따랐다고 하면서,
삼대(三代)의 의제가 우리나라에 남아 있다고 칭송했다.
이 부분은 당시 청(淸)이 다스렸던 중국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결국 명(明)에 대한 의리에서 출발하여 소중화(小中華) 의식이 발현된 대목으로 이해된다.
이어 고려 말기의 문신인 지포(止浦) 김구(金坵)의 유집(遺集)과 관련된 글을 소개했다.
「잡록 상」은 전해지지 않는 인물들의 열전을 소개한다는 일차적인 의도 외에,
백성의 윤리를 바로잡고 세교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의도에서 편찬했음을 서문에서 밝혔다.
이를위해 효행, 충의, 정렬, 강직, 인후, 수재 등의 소항목으로 나누어,
각 항목에 맞는 인물들의일화를 소개하면서, 뒷부분에 자신의 사견을 덧붙이는 형식을 취했다.
신라와 고려 및 조선의 인물뿐만 아니라, 중국 송과 명의 인물까지도 적극 소개했다.
특히 「잡록 하」의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구원병과 관련된 사항은 주목할 만하다.
「잡록 상」에서는 효행, 충의, 정렬, 강직, 인후, 수재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세분하여 소개했는데, 「잡록 하」에서는 따로 항목을 세분하지 않고
인물 및 임진왜란의 실상을 거론했다.
수많은 항목 중에서 이 6개 항목만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는 것은,
우하영이 판단하기에 조선 후기에 특히 이러한 부분이 강조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더욱이 『천일록』 자체가 시무책의 일환으로 작성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잡록」의 편찬이당대 사회상과 일정 정도 연관이 있었다는 것은 더욱 자명해진다.
이는 당대 이러한 덕목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거나 희미해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한 사회에 대한 진단과 처방책을 제시하기 위해 「잡록」을 편찬한 것으로 이해된다.
민국(民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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