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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문학상에 대한 결정장애를 극복해야 한다
--임 성 용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1. 햄릿 증후군
지난 3월 10일, 헌법재판소 재판관 8인 전원일치 의견으로 대통령 박근혜 탄핵소추안이 ‘파면’으로 결정났다. 이정미 권한대행은 결정문에서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수호의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것이 주문인용의 가장 큰 이유임을 밝혔다. 결정적인 부분은 ‘피청구인의 법 위배행위가 반복되지 않도록 할 헌법수호 의지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대목이다.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 보수성향의 안창호 재판관조차도 ‘탄핵심판은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질서를 수호하는 문제로 정치적 폐습을 청산하기 위하여 파면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는 보충의견을 내놨다.
헌재 결정문에서 눈여겨 보아야할 키워드는 세 가지였다.
첫째, 대통령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이익’
둘째, 법 위배가 반복되지 않도록 할 ‘의지’
셋째, 이념문제가 아닌 정치적 '폐습청산'이었다. 친일문학상 반대에 임하는데 있어서도 위의 요지는 적용된다고 본다. 친일문학상을 반대하고 거부함으로써 얻는 이익, 친일문학상이 반복되지 않도록 할 작가들의 의지, 올바른 문학을 수호하기 위한 문학계의 폐습 청산, 바로 여기에 논의의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 헌재에서 만약 확고한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재판관 의견이 팽팽히 맞서 탄핵 기일 내내 소모적 심리와 변론으로 질질 끌다가 찬반 어느 쪽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양쪽 다 사유를 인정하면서도 어느 한 편을 들기 곤란하니까 무책임한 국가기관이 늘 그렇듯 절차나 과정이 더 필요하다며 ‘각하’ 결정을 내렸다면, 이 나라는 과연 어찌 되었을까? 이와 마찬가지로 친일문학상 역시 만인의 이익을 위하여, 작가들의 의지를 한 데 모아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문학이라는 예술적 가치를 앞서는 역사정의와 작가정신을 지켜내려면 그 첫걸음이 친일문학상 폐습 청산이기 때문이다. 이 목적과 뜻에 누구나 동의하고 공감할 수 있는 논의가 진행되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책임 있는 ‘결정’을 도출해야 한다.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성향을 햄릿 증후군이라고 한다. 결정장애를 말하는 것이다. 햄릿은 영국의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다. 햄릿 증후군은 박근혜 증후군이기도 하다. 하야를 하느냐 마느냐, 특검 대면조사에 응하느냐 마느냐, 이에 대한 결정을 못 내린 채 머뭇거리고 버티디가 결국 탄핵을 당했고 구속까지 되기에 이르렀다. 친일문학상 문제를 놓고 한국작가회의의 내부 딜레마도 이것이다. ‘결정’을 하지 못하는 장애요소가 있다. 친일문학상 참여자도 반대자도 모두 작가회의에 속한 내부 회원이라는 고민이 가장 큰데, 그건 고민의 지점이 될 수 없다. 친일문학상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 상의 심사자와 수상자를 염두하고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친일문학상의 대표 격인 동인이나 미당 ‘문학’ 자체를 비난하는 것도 아니다. 반대의 취지는 ‘기념 문학상’에 있다. 특히 동인문학상과 미당문학상을 문제 삼는 이유는 그 상의 주관사가 보수언론인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이기에 그렇다. 끊임없이 국민 분열과 갈등을 획책하는 그들의 의도적인 문화이데올로기가 동인과 미당문학상을 통해서 지배적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동인·미당상 수상자들 대부분이 한국작가회의 회원들이다. 그 전에는 일부러라도 작가회의 회원은 제외시켰지만, 보수언론의 노회함은 언제부터 한국작가회의로 향했다. 한국문단에서 역량 있는 작가들은 거의 한국작가회의 소속이기도 하거니와 한국작가회의를 빼면 막상 동인·미당상에 걸맞는 작가도 찾기 힘들다. 그래서 이들은 오히려 한국작가회의 회원들에게 그 상을 수여함으로써 친일문학상의 혐의를 희석화시켰다. 이것이 어쩌면 보수언론사의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한국작가회의에서만 동인·미당문학상을 거부한다면 이 상의 권위와 명예는 금방 땅으로 떨어져버린다. 친일문학상 청산을 위해서는 그만큼 한국작가회의의 역할과 입장이 중요한 것이다. 한국작가회의는 이도저도 아닌 결정장애를 과감히 극복하고 이제라도 친일문학상 거부를 분명히 선언해야할 때다.
2. 친일문학상은 ‘시지프의 신화’인가?
알베르 까뮈는 프랑스 소설가다. 한때 공산당에 가입하기도 했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저항운동에 참여했다. 그의 작품엔 부조리와 저항이 관통하고 있다. 그는 확고한 도덕적 기반에 신념을 두었으며 집단적 폭력의 공포와 인간의 실존문제를 형상화한 ‘페스트’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방인’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는데, ‘이방인’은 삶과 현실 앞에 놓인 인간 존재의 한계를 운명의 불합리에 반항함으로서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 수 있다는 까뮈의 의도가 투영되어 있다. ‘허위를 강요하는 인간에 대한 거부’이다.
까뮈의 부조리에 대한 생각은 ‘시지프의 신화’라는 철학 에세이에서 드러난다. 철학적 자살이나 부조리한 인간의 분석은 사실 ‘인생이란 모순의 연속’이란 말에 다름 아니다. 인생뿐인가? 인간의 역사와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모순이다. 불의와 불평등과 부조리가 반복되고 있는, 인간에게 주어진 시공간을 채우고 있는 대부분의 세계는 ‘모순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시지프의 신화’는 바로 이러한 부조리와 저항의 정신이다. 삶의 주체인 나와 모순된 세계가 맺는 관계의 비합리성-나와 세계를 묶어놓는 유일한 관계, 즉 ‘부조리한 관계’인 권위에 도전하였다는 벌로 커다란 바위를 산 정상에 밀어 올려야하는 반복행위, 그 무한정의 죄는 단지 철학의 모티브가 아니라 인간의 일상생활에서도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바위가 다시 굴러 떨어지는 모순과 그 바위를 다시 올려야하는 노력의 허망 속에서, 까뮈는 부조리한 모순의 상황을 직시하고 허망에 맞서서 ‘대적’하는 인간상을 그렸다. 인간의 근원적인 삶을 지탱해주는 최초의 바탕이면서, 그러나 최후의 의미를 가능케 하는 도달점인 부조리로부터의 자유, 반항, 정열! 그것들의 결과를 느낌으로써 인간은 삶의 궁극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바위를 끊임없이 밀어 올리도록 저주받은 시지프는 무기력한 절망과 무관심, 허영과 욕망에 빠진 현대인의 반성을 생각하게 한다.
작가들은 어떠한가? 작가들은 자신의 삶을 규정하는 외부의 현실 문제를 자기 내부의 문학적 철학적 이성의 질서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의 통일된 의미로, 그럴 듯한 세계의 가치로, 문학이라는 논리로 파악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순된 세계를 자신의 문학체계 안에서 형성된 확고한 진리로 정리함으로써 작가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리 밝히려고 해도 모순의 합리화가 그 수단이 될 뿐이다. 세계는 인간(나)의 이성적 욕구와는 거리가 너무도 멀다. 불합리한 세계는 결국 작가의 침묵으로 인간의 정당한 요구를 외면하면서, 잠시 살아있는 동안에 나의 존재론적 가치의 밖에서만 작품으로 존재할 뿐이다. 까뮈는 부조리를 느낀 인간이 자살을 선택할 방도 밖에 없으므로 자살을 부정한다. 자살도 나와 세계의 대립관계이며 나를 말살시키고 포기하는 것이기에 인간이 취해야할 진정한 태도는 저항이라고 말한다. 시지프는 신을 거역한 죄로 형벌을 받고 죽을 때까지 산 정상으로 바위를 밀어 올린다. 그의 목적은 영원히 달성되지 않는다. 달성될 수 없는 목적을 향해 그는 한순간도 쉴 수 없는 존재이지만, 좌절하지 않는다. 협력하지 않는다. 만일 문학의 자살행위가 있다면! 그는 도망치지 말고 부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모순된 세계와 끊임없이 대결하라고 할 것이다.
친일문학, 또는 친일문인기념 문학상은 시지프의 바위와 같다. 시지프는 ‘권위적’인 무엇을 거역했고, 무슨 죄를 안고, 왜 형벌을 받아야만 했는가? 모순덩어리의 산 정상에는 ‘신화적인’ 그 무엇이 있고, 시지프의 반항은 왜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친일문학상 토론회의 발표문을 준비하면서 나는 오래도록 ‘시지프의 신화’를 생각했다. 그것은 한국문학의 원죄이자 태생적 업보인 친일문학의 거대한 바윗돌이었다. 그 바윗돌에 깔려 해방 이후에서 지금까지 70년 넘게 이어져온 문학인들의 자살행위를 생각했다.
3. 한국작가회의의 방침이 정해져야 한다.
먼저 오늘, 한국작가회의 본회 차원에서 열리는 ‘친일문학상 내부 토론회’의 성격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지난 2월 18일, 한국작가회의 정기총회에서 친일문학상 문제가 다루어졌다. 2017년 한국작가회의 사업계획 제10항의 ‘친일문학상 성찰 내부 토론’(주최: 한국작가회의 사무처) 안건으로 공식화 되었다. 홍기돈 대변인이 발표한 2016년 사업평가 보고서에도 총회 자료집 한쪽 전면을 할애해서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폐지운동에 관한 논의의 점화’라는 평가서를 통해 이 문제를 집중 제기했다. 잠깐 요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016년 7월 한국문인협회에서는 춘원문학상, 육당문학상을 제정하기로 했다. 춘원과 육당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친일문인인 까닭에 논란이 뒤따랐다. 이에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민족문제연구소 등과 함께 <춘원, 육당문학상 규탄 기자회견>을 진행했고, 사회적 여론 환기에 성공하여 문인협회로 하여금 제정 계획을 철회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친일문인을 기리는 문학상은 이미 널려있는 실정이며, 대상 문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따라서 춘원, 육당문학상 제정 논란은 다른 친일문인의 사례로까지 확장될 여지가 충분했다.
그리하여 자유실천위원회는 11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동주관으로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반대 긴급토론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동인문학상과 미당문학상은 ‘친일문인을 기리는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되었으며, 동인문학상과 미당문학상이 한국문단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근거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와 같은 보수재벌언론권력과 결합되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었다. 종합토론에서는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반대와 폐지를 위한 구체적인 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분출하였다. 특히 진보적인 작가조직으로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한국작가회의’에 소속된 회원들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동인문학상, 미당문학상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수가 수상자로 선정되고 있다는 비판이 불거졌다. 이는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폐지운동이 펼쳐질 경우, 외부적으로 해당 문학상을 주최하는 측과 마찰을 기꺼이 감수하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한국작가회의 자신의 ‘진지한 성찰과 결단’이 요구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드러낸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기실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을 둘러싼 논란이 한국작가회의 내부에서 갑작스럽게 돌출된 사안은 아니다. 2001년 중앙일보에서 미당문학상을 제정할 때, 여러 지역에서 반대운동을 벌인 바 있으며 지회장들은 연명으로 <미당문학상 반대 성명서>를 채택한 바 있다. 또한 2016년 한국작가회의 정기총회 때는 회의장 밖에서 이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하는 회원의 피켓시위가 진행되기도 했다. 그러니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에 관한 한국작가회의의 방침이 정해지지 않는다면, 이후 이에 대한 논란은 언제라도 불거지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작가회의는 친일친일문학상 반대를 어떻게 효과적인 결집을 통해 꾀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작가회의는 어느 정도 수위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회원들의 동참을 이끌어낼 것인가. 2016년은 이러한 자성의 물음을 문면으로 끌어올린 해였고, 2017년 1월 21일 열린 이사회에서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3월 내 ‘친일문학상 내부 토론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2017. 2. 18. 제30차 한국작가회의 정기총회 자료집, 153p에서
위에서 보듯 2016년 한 해 동안 한국작가회의 사업을 결산하는 사무처(본회) 평가서에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성찰과 반성, 일회적인 고민이 아닌 ‘한국작가회의의 방침이 정해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명확히 역설하고 있다. 총회 자리에서 대변인의 입을 통해 명문화된 공식 보고서로 발표한 이 평가서는 논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렇게 적시하고 있다.
1. 한국작가회의는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폐지운동을 추진할 것인가, 방관할 것인가?
2. 추진한다면 어떻게 효과적인 결집을 꾀할 수 있을 것인가?
3. 어느 정도 수위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회원들의 동참을 이끌어낼 것인가.
바로 여기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친일문학상 내부 토론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때문에 평가서 문건에서 밝혔다시피 토론회가 결정된 배경은 한국작가회의 회원들을 논의대상으로 하는 ‘자성의 물음’ 이었다. 이번 토론회를 논의의 출발로 하여 차후, 또 다른 형식의 토론회를 열거나 쟁점과 대상을 확산시키려 한다면 나는 그런 계획을 반대한다. 그 이유는 ‘친일’은 찬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친일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친일문학’ 역시 마찬가지다. ‘친일문인 기념문학상’도 그들의 반민족 행위와 직결되므로 찬반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친일문학상은 ‘정의’의 문제이다. 친일문인들은 강제징용에 동원된 부역자가 아니라 반민족 범죄행위를 저지른 일제의 전범이다. 따라서 토론회 자체가 사실은 필요 없는 일이다. 반대이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면 그만이다. 토론회를 하는 목적은 반대총론을 모으자는 게 목적이고 그에 대한 방법을 결정하자는 것이므로 한국작가회의 내부 절차와 과정이 필요함은 동의하지만, 찬반의 의견에 따라 ‘공과론’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옹호와 반대로 갈라선 논쟁은 소모적이다. 옹호는 작가 개인적인 의지와 선택의 몫이지만, 반대는 개인을 넘어선 한국작가회의라는 단체의 정체성 확립이 우선이다. 친일문학상에 대한 문제 제기는 애초부터 개인-심사자 및 수상자와는 별개의 것이었고, 단체-조직적 차원의 대응 요구에서 비롯되었다. 비판의 지점도 한국작가회의의 방관적 태도에 있었다.
4. 문학계의 적폐, 청산하지 못한 친일문학
총회 자료집 평가서에 나온 대로 친일문학상 문제가 한국작가회의 내부 회원들에게 본격 대두된 건 지난해 여름에 있었던 춘원, 육당문학상 제정 논란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당시 ‘역사정의실천연대’ 이름으로 발표한 <규탄 기자회견>에는 민족문제연구소, 민주언론시민연합, 사월혁명회,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등 465개의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했다. 한국작가회의 40년 역사성이 한국작가회의 회원들에겐 있다. 민족민중문학의 담론을 형성하고 반독재민주화투쟁과 더불어 문학의 사회적 가치와 실천을 담보해온 이력이 한국작가회의의 정신임을 뚜렷이 증거하고 있다. 하지만 친일문학상 규탄 기자회견에 한국작가회의에서 오지 않고 자실위원 10여 명이 개인적으로 참석하는데 그쳤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한국작가회의의 현주소를 보여준 것이었다.
최남선과 이광수는 친일행적만 모아도 따로 전집을 낼 수 있는 정도인데, 설령 한국문인협회에서 이들을 기리는 문학상을 제정한다고 해도 한국작가회의에서 선뜻 나서서 할 말이 없다. 왜냐면 똑같은 ‘민족의 죄인’으로 단정할 수밖에 없는 동인과 미당문학상을 한국작가회의 회원들이 심사하고 수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인협회는 육당, 춘원문학상을 자신들이 직접 제정하려 했고, 동인과 미당문학상은 보수언론사가 주관하고 있으므로 한국작가회의가 친일문학상을 주고 받는 단체는 아니다. 그렇다고 상을 주관하는 책임이 없다고 작가회의가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조선일보나 중앙일보에서 동인상과 미당상을 폐지하라고 한들 폐지하겠는가마는, 논란의 핵심은 심사자와 수상자들이 속한 단체에게 비판의 화살이 향할 수밖에 없다. 한국작가회의 회원들의 심사와 수상은 곧바로 단체의 존립근거라 할 수 있는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문인협회 문효치 이사장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증조부 문종구의 후손이다. 그가 선대의 친일에 대해 반성의 뜻을 밝혔음에도 ‘조선의 괴멜스’였던 육당과 춘원문학상을 만들려고 한 의도는 익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결코 참다운 대속이 아니었던 것이다. 문인협회의 철회를 이어받아 육당학술상과 춘원문학상을 기어코 제정하여 아무도 몰래 시상식(2016년 12월 2일)을 하고 두 달이 훨씬 지나서야 발표(2017년 2월 21일) 한 동서문화사 대표 고정일 씨는 박정희 미화소설 ‘불굴의 혼 박정희’를 펴낸 사람이다. 문효치와 고정일은 결국 동질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단체도 이와 같은 정체성에서 예외일 수 없다. 단체의 존재가치와 존립근거가 개인보다 우위에 있으므로 구성원 개인의 정체성을 단체가 바로잡아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미용실협회나 공인중개사연합회와 같은 이익단체로 전락하고 만다.
돌이켜보건대 1945년 해방이 되고 나서, 4년이 지난 뒤에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1949년 1월 5일)가 설립되었다. 반민특위는 국권피탈에 협력한 자, 독립운동가를 고문하고 탄압한 자,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 일본에게 직간접적으로 협력한 자! 이들을 처벌하고 징역형에 처하자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지지기반인 친일파를 보호하려고 했다. 이승만 정부는 국회프락치사건을 기획하여 반민특위 위원들과 국회의원들을 ‘빨갱이’로 몰아 구속했다. 그리고 친일파 경찰들을 동원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했다. 이승만의 조직적 방해로 반민특위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 해체되었고, 그로부터 친일파 청산의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만일 반민특위가 최소한 제대로 된 활동을 했다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는 물론이고 ‘일본에게 직간접적으로 협력한 자’들이 과연 온전할 수 있었을까? 육당과 춘원, 동인과 미당이 “친일행적 때문에 그들의 문학적 자산이 가려져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이른바 “친일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작품에 대해서는 평가해야 한다.”면서 그들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릴 수 있었을까. 미당 서정주가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고 죽을 때까지 제자들을 양성할 수 있었을까. 더 나아가 그가 죽고 나서 정말 그의 문학적 공로를 기리는 ‘기념 문학상’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조선의 일제 식민지 36년과 프랑스의 나찌 지배 겨우 3년 하에서, 우리는 반민특위가 잡아들인 400여명의 친일파 중에 처벌받은 자는 0명이었다. 프랑스는 나찌 부역자 체포 70만 명, 사형집행 8천명이었다. 프랑스는 특히 문화예술인과 언론 부역자들에게만큼은 처절하리만치 가혹했다. 단 한 줄이라도 부역혐의가 있으면 용서하지 않았다. 그런데 친일부역자 ‘처단’은 고사하고 여태껏 친일문인 이름으로 된 기념 문학상이 버젓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헌재에서 파면당한 박근혜의 탄핵을 두고 ‘적폐청산’이라는 말이 가장 큰 화두였다. 적폐는 단지 권력형 부정부패와 무능한 대통령의 헌법위반 사항을 심판해서 법적 형사적인 처벌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잘못된 폐단과 부조리가 쌓이고 쌓여온 구조를 청산하는 하나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국민들의 절실한 뜻이 모아졌고, 바로 그 적폐청산은 과거에 대한 청산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 건설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는 지적이었다. 친일문학상은 문학계의 적폐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한일위안부 합의로 상징되는 박근혜 정권의 뿌리는 오로지 친일세력에게 있다. 친일문학상의 뿌리도 이들과 결연하게 맞닿아 있다. 책에서나 보고 말로만 듣던 ‘대통령 탄핵’이라는 적폐청산의 감격적인 역사를 일천 오백만 시민들이 켜든 촛불의 힘으로 이끌어냈다. 바로 이 시점에서 한국문학의 새로운 미래는 문학계의 적폐인 ‘친일문학상’ 청산에서부터 출발하고 다시금 문학의 정신사적 불을 밝혀야 한다.
5. 구분하려야 구분할 수 없는 문학과 삶
우리들의 귀가 닳도록 들어온 말이 ‘문학과 삶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문학주의자들의 옹호논리였다. 어찌 ‘문학과 삶’을 지배문학의 힘으로 구분하고 문학의 순기능만 강조하면서 문학정신의 기초인 삶의 역기능은 외면한단 말인가. 처음부터 거짓인 주장을 참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논리는 ‘아무리 타당하다’ 할지라도 논증 자체가 모두 궤변일 따름이다. 그럴 듯한 형식논리는 모두 궤변이다. 문학만이 아니고 우리는 궤변의 시대를 살고 있다. 궤변은 진리일 리 없다. 최대한 양보해서 그것은 상황적 진리일지는 모르나 보편적 진리에는 어긋난다.
성경에서의 진리는 그 속성상 항구불변성을 가지고 있지만, 획일적으로 한 가지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진리와 상황적 진리로 나누어진다. 어떤 진리가 시대를 초월하여 적용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보편진리(Universal Truth)라고 한다. 한편 시대와 비교하여 여러 가지 달라진 상황 때문에 그대로 적용하지 못하면 그것은 상황진리(Situational Truth)라고 한다. 상황진리는 성경 기록 당시의 역사적 특수성(Historical Particularity)으로 인하여 보편적인 적용을 요구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달라졌을지라도 진리로서 깨달아야 할 부분이 있기에, 그 속에서 가르치는 어떤 진리 때문에 상황진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보편성(Universality)이란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모든 것에 다 통하는 예외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성경에서의 상황진리나 보편적 진리는 모든 시대에서 지킬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교파나 교리에 따라 좌우되는 주관적인 내용은 보편적 진리가 될 수 없다. 보편진리는 누구라도 의심하지 않고 동의하는 객관성을 확보하여야 한다. 역사적 특수성을 초월하여 영원한 가치를 인정한다면, 앞으로도 같은 죄를 지었어도 얼마든지 더 악한 진리가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친일문인에게서 우리는 어떤 진리를 배워야할 것이 있는가? 친일문학은 상황에 따른 특수성일 뿐이고 이를 초월하여 문학의 보편적 가치가 진리라고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 신문학사에서부터 현대문학에 이르기까지 친일문학의 영향력과 지배하에 놓인 사람들이 친일문인들의 ‘작품’을 마치 마땅히 지키고 따라야할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문학에서 어떻게 이러한 규범적 가치가 가능한가? 이것은 문학을 매개로 한 자기합리화, 또는 전도된 문학의 가치를 정당하게 만드는 문학합리화를 위한 지나친 변명이다. 문학을 넘어서는 역사적 소양이 부족한 ‘지식인’들의 자의식, 내지는 소시민 근성에 사로잡힌 ‘문학의식의 과잉’이다. 이들은 사람이나 사회, 민족, 집단, 그 어떠한 대상과 작용하여 형성되는 ‘공동체적 인식’이 아니라 언어와 표현예술과 자아에 몰입한 개인의 사상, 감정, 개인의 자유주의적 견해를 항시 앞세운다.
이들은 자꾸 문학일반화 관점에서 이야기 하는데, 일반화처럼 쉬운 게 없다. 하지만 금에 이물질이 섞이면 그것은 이미 금이 아니다. 순금이 아닌 18k 금가락지가 왜 있겠는가. 누가 18k를 순금이라 하는가. 강철에 니켈이 조금만 섞여도 철의 자성을 잃고 스텐레스로 성질이 변하는 것과 같다. 인간의 사유능력으로 생산된 문학이라는 것도 물질적 산물과 무엇이 다른가. 인간세계에서 그것을 정신적 문화적으로 소비하고 사용한다는 측면에서는 같다고 볼 수 있다. 문학에서도 그 작가의 문학성은 질량보다는 성분이 중요하다.
문학과 삶의 구분을 최대한 인정한다고 해도 한계에 부딪친다. 예컨대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었다손 치더라도 ‘시의 진경’을 보여주는 시를 썼다면, 그의 죄는 꾸짖어 마땅하지만 그의 시는 손색없는 문학예술로 찬양할 만하다면! 그러면 ‘이완용문학상’도 만들어져야 한다. 더 극단적으로 전 세계를 전쟁의 불구덩이로 몰아넣고 수백 만 인류을 살상한 히틀러도 전쟁의 광기가 아닌 ‘자연인으로서’ 훌륭한 문학작품을 남겼다면 노벨문학상 대신에 ‘히틀러문학상’도 만들어야 하는가?
친일문학상 문제에 있어 사실 미당이 논쟁거리의 중심이 될 수 없다. 더더욱 친일문학상 존폐는 심사자 및 수상자와는 관계없다. 작가들의 형편이 곤궁하기도 하니, 솔직히 “돈이 없어 상금이 필요했다”고 하면 그거야말로 인간적이다. 미당 서정주를 비판하는 것도 ‘솔직함’의 결여에 기인한다. 인간적인 진실을 발견할 수 없는 홀로 고결한 ‘인간’의 문학을 도무지 받들 수 없는 노릇이다. 인간에게 진실은 얼마나 소중한가?
신경숙 소설가의 표절사태에서도 작가의 진실, 문학의 진실은 여실히 드러났다. 진실은 작가의 기본 품성이며 문학적 토대이며 사상이기도 하다. 신경숙 씨가 표절대상으로 삼은 일본 극우작가 ‘마시마 유키오’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일본 유수의 문학상을 휩쓸고 노벨문학상 후보로까지 거론되었지만, 천황제의 복원과 자위대 봉기를 주장했다. 극우조직을 만들고 우익행동대장을 했다. 그의 소설 ‘금각사’는 탐미주의 문학의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의 문학이 좋다고 한들 사상이 틀렸다. 왜곡된 사상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해악이다. 작가의 순정한 영혼이 파괴된 문학은 버림받는다.
미당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는 일제 대동아전쟁의 선전대원이었고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독재, 심지어는 군사쿠데타로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을 위해서 TV지지연설을 했다. 생일 축시를 지어 바쳤다. 즉 그의 친일행적이 단 한마디의 반성이나 사죄도 없이 그대로 친독재 행적으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이 가장 큰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의 시들이 ‘겨레의 시인’이라 칭송할 만한 한국시의 총량이라고 한다면, 겨레를 죽음으로 내몬 ‘마쓰이 오장 송가’나 ‘전두환 탄신 56회 축시’는 그가 남긴 시들이 아닌가? 동네 이발소 액자로 걸어놓기에도 창피한 수준의 시들에 대해서도 감히 ‘시적 경지’의 유산으로 언젠가 평가를 받아야할 일인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문학상이라고 규정한 기념 문학상이 10여 개가 넘는데, 채만식 같은 경우는 스스로 죄과를 반성하는 글을 썼다. 미당은 주변에서 사과하라고 해도 끝까지 사과는커녕 반성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친일문학상에 단죄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고 정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친일에 내몰린 문인들은 오히려 그 문학과 생애가 더 아프다. 하지만 김동인, 서정주와 같이 자발적, 적극적 친일문인은 용서할 여지가 없다. 죽어도 반성이 없었던 자, 미당 서정주의 떳떳한 모습은 한마디로 악행이었다. 친일 수구언론이 이러한 동인과 미당을 한국문당 최고문학상의 당상에 올려놓고 있는 행위는 현재진행형의 친일부역이다.
6. 미학적 분리주의를 넘어서
우리가 어떤 작품과 인물(작가)를 기리고 기념하는 것은 그것이 지닌 문학적 가치가 사회적, 공공적 가치 형성에 긍정적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한대로 작품과 인물을 분리해서 이해해야 하느냐(미학적 분리주의) 아니냐(사실주의)의 쟁점이다. 작품의 미적 가치와 친일이라는 반민족 윤리가 충돌할 경우, 이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가 항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와 같은 양단의 논리로 미당문학상을 철회할 경우 윤리적 가치는 챙길 수 있지만 미적가치는 포기해야 하느냐, 하는 물음은 본질적으로 틀렸다. 미당문학상은 미당 기념사업이다. 기념상이 없어진다는 것은 그의 작품에 깃들어 있는 도덕적 윤리 문제를 제거하자는 것이지 미당문학의 전부를 매장하는 게 아니다. 정말 그의 문학에 버리기 힘든 미적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작품으로 남아 있다. 친일문학상이 미당과 동인만 있는 게 아닌데(최남선, 이광수, 김동인, 노천명, 모윤숙, 서정주, 유진오, 이무영, 이헌구, 조연현, 채만식, 유치환 등) 극단적으로 이것을 모두 없애자면 한국문학사의 상당부분을 헐어내야 한다. 더구나 이들 문학상들은 추진 주체가 지자체이거나 지역 언론사이기도 하다.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이 지역 마케팅과 홍보 차원에서 활용되고 있는 실정이므로 지역 문화자원을 소거해야 하는 문제에까지 봉착한다.
따라서 ‘친일문인 기념상’과 ‘문학’을 양립불가의 문제로 볼 게 아니다. 미적가치는 미적 감수성의 훈련이나 언어 감각의 발달이라는 문학교육의 측면에서 볼 때 중요한 공공적 가치가 될 수 있다. 누차 말하지만 기념상과는 별개다. 문제는 미적가치를 앞세워 기념 문학상이 그들의 유지를 받드는 상징이 되고, 그 상징이 문학의 권위가 되고, 당대의 작가들에게는 명예를 부여하는 결과이다. 이로 인해 문학을 공부하는 창작자들에게 친일문인의 문학이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절대성을 공고히 하는 현실을 만들었다.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을 반대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많은 친일문학상 중에서 전통이 가장 오래되고 소설 영역의 상징이 된 동인문학상, 그리고 친일문인 가운데 영향력이 가장 막대한 미당문학상이 남아있는 한 그것은 영원히 친일문학 비판의 중심 타켓이 된다. 이미 죽은 미당이 속죄의 마음을 품을 리 만무하고, 도덕적 잘못을 속죄의 뜻으로 작품에라도 남겼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럴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는 한국시의 왕이면서도 친일문학의 왕으로도 참칭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작가에게 의분을 요구할 필요도 없고 작가들이 그런 의분을 굳이 실행할 당위도 없지만, 치욕을 모르는 작가는 대체 본성이 어떻게 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미물에게도 수오지심이 있거늘 하물며 작가에게 부끄러움이 없다는 건 작가라고 이름 짓기 힘들다.
그동안 친일문학상에 대한 문학인의 논의가 너무 부족했다. 논의라고 해봐야 ‘미학적 분리주의’에 빠지기 십상이었다. 미학주의는 예술의 자율성에 뿌리를 둔 문학옹호론자들의 단골메뉴다. 칸트 미학에 입각한 예술의 자율성은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 칸트 미학에서 주장하는 아름다움의 무관심성, 무목적성, 합목적성 또한 진화생물학자들에 의해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점점 더 깊게 밝혀지고 있다.
글로벌 시대를 맞아 민족주의는 이미 끝났는데도 왜 그것도 모르는 시대의 지진아들이 친일문제를 거론하고 있는가? 하고, 묻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친일문학상 반대운동을 하면서도 그와 같은 비판을 들었다. 그들은 ‘친일’ 하면 민족문제로 생각하고 친일문학상 반대를 편협한 민족주의로 여긴다. 물론 친일문학은 민족문제와도 연관되긴 하지만, 친일문학상은 단순하고 어설픈 민족주의 관점이 아니다. ‘민족’ 개념은 국가, 인종, 소수자에 대한 차별성을 내포하고 있고 인류사의 모든 전쟁과 파시즘, 반혁명의 근저에는 민족주의가 개입되어 있다. 나는 민족주의를 죄악시하며 배척하는 입장이다.
‘친일문학상’은 문예미학을 넘어선 것이다. 아니, 민족과 역사의 배반을 넘어 ‘계급문제’이기도 하다. 일제의 지배 아래서 수탈의 대상은 조선의 민중들, 노동자·농민이었다. 항일독립운동에서 조선의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이 감옥에 갇혀 언도받은 형량이 도합 6만 년이 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조국해방투쟁은 계급해방투쟁이었다.
해방 되고, 친일세력이 득세하면서 독재정권과 산업화,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도 노동자와 농민계층을 비롯한 민중들이 가장 많은 탄압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친일세력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친일문학상 철폐는 반민족·반역사·반계급의 잔재인 친일과의 싸움이다. 문예미학에는 계급미학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친일은 계급의 적이었고, 친일문인에게 계급적 예술미학의 접근이 허락된다면 친일문학상은 제1순위 척결대상이다.
7. 지속과 반복, 망각의 종식은 문단 원로들의 각성으로부터
한국작가회의 내에서 친일문학상 심사자들이나 수상 작가들이 ‘친일’을 옹호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모두가 문학적 성취와 업적을 이루었고 누구나 인정하고 평가하기에 주저함이 없는 작품세계를 존중받고 있다. 또한 그들 중에 누구 한 사람도 자본가의 편에 서 있거나 부정한 지배권력을 옹호하거나 반민족적, 반민중적인 글을 쓰고 있지도 않다. 정치의식도 올바르고 사회의식도 뚜렷한 사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문학적인 평가만이 아닌 인간적 평가도 그릇됨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가치관의 척도로 자칫 가늠될 수도 있는 친일문학상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수용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미루어 보건대 그것은 가치문제가 아니다. 실로 단순하다. 작가들의 세속적인 욕망이 어느 문학상이든 작용하기 때문이다. 단테는 ‘신곡’에서 인간이 저지르는 세 번째 죄악을 ‘탐욕’이라고 했다. 탐욕을 버리기란 쉽지 않다. 친일문학상이 탐욕의 죄가 아니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상을 받고 주어지는 권위와 명예도 탐욕이 아니므로 쓸데없는 자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동인과 미당의 친일행위와 민족, 역사, 문학의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새 그런 무의식은 그 어떤 문제의식도 없는 탐욕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만다. 급기야 비슷한 탐욕을 채우고 싶은 작가들은 더욱 협력하여 서로가 동업자로서 뭉친다. 유수의 문학상 수상이 대학 강단에 서거나 문학 활동을 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물질적, 본능적 탐욕은 어느 시대이고 어느 역사이고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근대국가에 이르도록 반역자는 용서하지 않았다. 고구려 율법에도 ‘나라와 민족을 배반한 사람은 먼저 불로 지진 다음 목을 베고, 그의 전 재산을 빼앗는다.’고 되어 있다. 지금에도 제 나라와 제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를 두둔하는 나라는 이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나라는 ‘반역자를’ 두둔하고 있고 ‘친일문학상’이 별 탈 없이 지속되고 있을까.
동어반복일 테지만 친일문인들의 ‘문학적 성과’를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고, ‘작품’에 대한 평가는 긍정이든 비판이든 문학연구자들이 감당해야 할 당연한 몫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으로 된 ‘문학상’으로 그들을 기리는 것은 반역자들에게 결코 어울리지 않다. 이에 대한 책임은 한국문학의 지배적 위치에 있는 평론가와 대학 교수들, 문학지식인 집단, 그리고 문단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원로 문인들에게 있다. 그들이 제 역할과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결과이다.
2001년 미당문학상 제정 시에 ‘미당담론’을 통해 서정주를 비판한 고은 시인 이후, 작가들의 각성을 불러일으킬 만한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 당시에 민예총을 비롯한 전국의 시민단체가 항의 집회를 하고, 민족문학작가회의 각 지회 회원들이 반대 성명서를 발표했음에도 본회에서는(이문구 이사장) 조직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반발은 금세 사라졌다.
작년 한국작가회의 총회에서는 ‘자기성찰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신경숙 표절사태로 말미암아 조직된 것으로 알고 있다. 문학과 시대와 미래의 전망을 향한 작가들의 성찰기구로서 보다 진지한 고민을 다하겠다는 취지로 설립되었다.(위원장 김사인 시인) 그런데, 김사인 시인께서도 미당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미당상을 심사했다고 그분들이 시인으로서 이룩해놓은 입지에 누가 된다거나 항의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그런 단계를 뛰어넘은 분들이고 한국문단에서 누구보다 존경받는 분들이다. 하지만 자기성찰위원회에서 성찰의 문제로 삼아야할 숙제들을 생각하면 곤혹스럽기도 하다. 표절과 같은 작가의 도덕성 문제나 한동안 시끄러웠던 문단성폭력과 같은 작가의 품위손상만이 성찰의 대상이 아니며, 친일문학상 문제도 매우 중요한 성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친일문학상 토론회가 한국작가회의 내 자기성찰위원회에서 다루어질 문제로 알았는데, 평론분과 주관으로 넘어간 것을 보고 한편으론 의아하기도 했다. 토론회가 학술적, 비판적 논쟁으로 흐르지 않을까하는 기우에서였다.
친일문학상 반대 입장에서 어차피 뻔한 반대 주장에 앞서 꼭 한 가지 묻고 싶은 말이 있다. 왜 유독 친일문인에게만큼은 작가들이 이렇게 관대한가? 우리말과 우리글을 깨우치고 우리 역사를 배우는 어린 자녀와 학생들에게, 아니 세세손손 후대에게, 친일문인을 기리는 문학상을 작가들이 이대로 남겨줘야 하는가? 과연 후대에게도 미학이라는 구실로 ‘사랑은 눈물의 씨앗’과도 같이 “문학과 삶은 다른 거야!“라고 가르칠 것인가?
존경하는 시인 아저씨들께 안녕하세요?
저는 신성초등학교 4학년 4반(서울 관악구)에 다니는 김미수라는 어린이입니다.
10명의 유명한 시인 아저씨들이 중앙일보에서 주는 문학상후보로 추천되셨다고 들었습니다.
문학상을 받게 되면 상금도 30,000,000원을 받게 된다고 들었습니다.
한용운 선생님 같은 민족 지사님들을 기념하는 문학상후보가 되셨다면 아저씨들 이름이 더욱 빛날 수 있었을 텐데 서정주 같은 민족반역자를 기념하는 문학상이라서 아쉽습니다.
마치 서정주 문학상 후보 아저씨들은 민족반역자를 지지하고 추종하는 시를 잘 써서 민족반역자를 기념하는 문학상의 후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시인 아저씨들!
민족반역자 서정주 문학상후보를 멋있게 거절하세요.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목숨을 지키는 것보다 더욱 값진 일이라고 배웠습니다.
돈에 눈이 멀어 서정주 문학상을 받기를 기다린다면 아저씨들은 시인으로서의 자존심도 한국 사람으로서의 양심도 저버린 민족반역자의 지지자로 추종자로 비판을 받을 것입니다.
저는 아직 10세도 안된 어린 나이이지만 일본의 역사왜곡을 항의하러 저금통장을 털어서 지난 7월 12일에는 일본의 국왕한테 역사왜곡 항의편지를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그 일본에 충성한 민족반역자 서정주의 문학상을 중앙일보에서 준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화가 나서 7월 22일에는 중앙일보 앞에서 민족반역자문학상 제정을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시인 아저씨들은 아들딸들에게 서정주처럼 민족을 배반해도 시만 잘 쓰면 괜찮다고 가르치시지는 않겠지요.
시인 아저씨들을 존경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2001년 8월 14일 신성초등학교 4학년 4반 김미수 올림
2001년 미당문학상 제정 당시에 김미수 어린이가 위의 편지를 써서 보낸 시인들은 열 살 난 어린이의 편지를 읽어보았을까? 후보마저도 거절하라는 어린이의 호소에 어른들이 뭐라고 답을 해야 하지 않을까? 2001년이면 벌써 16년 전이니, 김수미 어린이는 이제 청소년기를 훌쩍 지나 스물여섯의 어엿한 성년이 되었을 나이다. 30년, 40년이 지난 후에도, 이 어린이가 어른이 되고 늙고 세상을 떠난 후에도 편지에 대한 응답이 없어서는 아니 된다. 시인들은 편지를 까마득히 망각한다 해도 이 글을 쓴 김수미 어린이는 결코 편지에 담았던 마음을 망각하지 않을 것이다.
8. 친일문학상 반대와 심사 및 수상 거부를 결의하자!
한국작가회의는 작가단체로서의 존재가치와 존립근거를 명시한 정관이 있다.
제2조 목적에서 "본 법인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정신을 계승하여 한국 문학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정관에서 명문화한 ‘목적’은 한국작가회의의 조직 강령이다. 2007년 12월, 민족문학작가회가 (사)한국작가회의로 개명할 때, 창립 선언문에서 이렇게 공표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는 저항의 가치가 있고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싸운 결의가 ‘민족문학작가회의’에 들어 있다.
즉 한국작가회의는 이러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정신과 역사를 온전히 계승한다는 강령을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선언문 서두에는 이 점을 더욱 구체화시켜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언어로 말하지만 언어로만 말하지 않고 한 생애를 다 던져 말한다. 사단법인 한국작가회의는 단순히 언어를 다루고 글을 쓰는 작가들의 모임이 아니다. 그 속에서 고문과 투옥과 모멸을 견뎌온 세월이 있고, 저항과 고난의 역사가 있으며, 온몸으로 온몸을 평생 밀고 온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애가 있다.’
‘그동안 우리는 작가로서 인간을 억압하는 제도와 폭력에 맞서 싸워왔고 인간해방을 위한 문학적 실천의 길에서 비겁하지 않았다. 시대정신을 잃지 않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지켜나가기 위해 고뇌하였고, 문학작품으로 창조하여 한국의 문학사를 알차게 채워오고 이끌어왔다. 그러한 한국문학의 역사 속에서 이제 우리는 저항하는 소수가 아니며 당당한 주체이며 주인이 된지 오래다. 우리가 한국작가회의로 이름을 바꾸는 것은 우리가 명실상부하게 한국의 문학을 대표하는 문인들이 모여 있는 단체이기 때문이다.’
-2007년, 한국작가회의 창립 선언문에서.
한국작가회의 성격을 규정한 정관의 목적은 물론 창립선언문 어디에도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이 위치할 자리는 없다. 저항이 아닌 협력과 고난이 아닌 일신의 안위를 택한 친일문인은 한 생애를 던지지 않았다. 오직 던졌다면 비겁의 언어에 던졌고 인간해방과 실천의 길에서 고뇌하지 않았다. 한국작가회의가 한국문학의 역사 속에서 당당한 주체임을 자부한다면, 그리고 시대정신을 잃지 않고 그것을 문학으로 지켜나가는 주인임을 선언한다면, 한국작가회의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는 ‘친일문학상’은 한국작가회의의 강령 위반이다.
일각에서는 친일문학상 존속에 대해 찬성하는 의견도 있다. 그분들의 의견을 존중한다. 반면 친일문학상을 반대하고 거부한다는 의견도 존중해주어야 한다. 찬성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선택이고 자유다. 그러나 반대와 거부는 개인이 아닌 한국작가회의 조직에 대한 문제다. 조직의 공식적인 입장에서 친일문학상 반대요구를 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보다 조직의 정당성이 절대적인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회원들로 구성된 회원 조직의 성격상 흔히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명목으로 찬과 부의 서로 다른 입장을 모아 하나로 일치된 총론을 결정짓기는 어렵다. 그래서 흔히 공론화의 필요성을 제시하며 의견수렴 과정으로써 ‘결정력 없는 토론회’를 마련한다. 그리고 ‘성명서 발표’나 ‘결의문’ 등으로 논란을 정리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성명서 발표는 2001년에도 작가들이 수십 장 냈다. 무슨 효력이 있었는가? 그것은 선언적인 의미일 뿐이며 종잇장에 불과하다. 이젠 실제적이고 단언적인 조치가 요구되며, 조직 정관에 명시된 강령이 곧 조직의 규정이다. 한국작가회의의 정체성은 작가회의의 역사와 문학의 정당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그 당위적 책무를 오늘의 토론회에 참여한 모두가 부여받고 있다.
문학의 존엄은 자신이 언어로써 책임진 영역을 삶의 용기로써 더욱 숭고하게 만들기도 한다. 문학의 위엄을 하루아침에 짓밟은 어느 미당문학상 수상자의 성추행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의 문학은 삶의 추문으로 끝났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로 부터 민족문학작가회의 30년 역사를 뒤로 하고 한국작가회의가 명칭 개명으로 거듭 도약의 시대를 끌어당긴 지 올해로 43년! 존경하는 최원식 이사장님과 안상학 사무총장님, 그리고 각 분과장, 각 위원회 위원장, 지역 지회장님들의 의지를 결집하여 작가회의 선배 입장에서 후배들의 뜻을 따라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토론회를 열면서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미 잘못된 길을 바꾸거나 되돌아가려고 하니까 멀다고 하는 것이지 그 잘못된 길을 끊고,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결심은 먼 길이 아니다. 새롭게 개척하는 새길이다. 마찬가지로 토론회도 이제 시작이라고 하는데, 이건 찬반논리가 대립하는 현실에서 어떤 적절한 모색을 통한 방법을 찾자는 게 아니다. 한국작가회의의 정체성에 맞는 작가정신을 바로세우고 문학정의를 실현하자는 결의를 도모하는 것이다. 옳고 그름에 무슨 논란이 있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