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라 하면
우리 고향 진도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이 있는 이름으로
우리 진도인들에게는 짠하고 아련한 아픔이 남아 있으면서도 친근한 이름이다.
그 삼별초를 이곳 제주도에서 다시 만났다.
강화도에서 진도로 그리고 제주도에서
급기야는 일본 오키나와의 류큐왕국으로까지 이어진
장장 43년에 걸친 항몽과 민족혼의 역사를 이곳 제주도에서 다시 새겨 본다.
그간에 서너번 들려 구경하고 갔었던 곳이었지만
고향 어르신들과 함께 한 이번 여행은 또 다른 감상을 갖는 뜻 깊은 자리였다.
<유적지를 둘러보는 진도 노인회 회원들>
깨끗하게 정돈되고 잘 단장된 유적지의 모습은
우리 진도의 항몽유적지를 다시금 되 돌아 보게 했다.
<순의비 전면>
<순의비 뒷쪽의 비문>
<순의비 앞에서 바라 본 정문(순의문)>
< 항몽 유적 전시관 >
전시관 안에 있는 강화도에서 진도로 제주까지 이어진 삼별초의 <대몽 항쟁 요도>
* 세계 정벌을 꿈꾸는 징기스칸의 원나라 몽고군이 1231년에 고려를 침략했다.
이에 고려 왕조는 강화도로 천도하면서까지 40년간 항전했으나
1270년 원나라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했다.
그리고 삼별초에 해산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에 불복한 삼별초군은
배중손 장군을 중심으로 해서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반(反)개경정부의 깃발을 올리고
몽고에 대항하기 위해 1270년 여름에 진도로 옮겨와 용장산성에 궁궐을 짓고
남해안 일대를 공격하면서 그 세력을 넓혀갔다.
그러나 1271년에 원나라와 개경정부군 6,000여명이 진도를 공격해와서 용장산성은 함락되었으며
황제로 추대됐던 승화후 온과 배중손 장군은 진도에서 전사했다.
진도의 왕무덤재가 그 비운의 왕 온이 묻혔다고 전해져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 살아남은 김통정 장군은 병력을 이끌고 제주도로 건너왔고,
이들은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에 6km의 항파두리성을 쌓았다.
이곳은 삼면이 하천으로 둘러싸이고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요새였으며,
애월읍 바닷가에는 환해장성을 쌓기도 했다.
<당시 과녁으로 사용했던 화살을 맞은 돌을 비롯해 주춧돌과 배의 파편등 유물들>
그리고 2년여를 여기서 지냈으나
급기야 1273년 4월 고려 개경정부와 원의 연합군 1만2000여 명이 제주도를 공격했다.
삼별초의 병력은 불과 700여 명. 전투는 치열했지만 수적 열세는 극복할 수 없었고,
김통정 장군은 남은 병사 70여 명을 이끌고 항파두리성을 탈출해
한라산 중턱으로 숨어든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한다.
흉포한 몽고군의 침략에 굴복하지 않고 그에 맞서서
대의를 지키며 줄기차게 항쟁을 해 온 우리의 삼별초군은 여기에서 끝이 났지만
그 삼별초의 얼과 민족혼은 오늘에 남아 우리를 일깨워 주고 있으며
멀리 오키나와의 류큐왕국까지 이어져 그 후손들은 이 곳을 찾아 정성스레 분향하며
옛 역사를 되새긴다고 한다.
그곳에서 출토된 기와에는 ‘癸酉年高麗瓦匠造(계유년고려와장조)’라고 새겨진 암기와와
연꽃무늬 수막새도 출토되었는데 이는
용장산성의 기와와 똑 같은것들로
일본 고고학계는 오키나와에서 출토된 류큐왕국의 유물들중에
기와와 함께 출토된 유물들에 대한 탄소연대측정을 실시하고 다양한 연구를 진행한 결과
계유년은 1273년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결론 내렸다.
이는 1270년 이후 진도와 제주에서 패전한 삼별초군이 오키나와로 건너가
1273년에 고려식 기와를 만들고 건물을 지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 전시관에 걸린 그림과 중간중간의 제 글과는 직접적 연관성은 없습니다.
그냥 띄엄띄엄 글을 나눠 넣은것 뿐입니다. ***
조병현(진도읍 송현리)
첫댓글 삼별초군의 항쟁의 역사를 다시한번 새겼습니다. 진도에 삼별국을 세우고 려,몽군에맞선 삼별초군의 마지막 항쟁지인 제주의 유적들을 새롭게 느끼며 잘보았습니다.
제주도에서 애들 데리고 참 많이 간 곳인데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