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請諡疏
시호를 청하는 소장
疏首幼學金相閏製疏進士金在田 三南合疏○純廟庚寅二月日
소수는 고령 유학 김상윤, 제소는 진사 김재전이며, 삼남의 합소이다.○순조(純祖) 경인년(1830) 2월 일.
伏以崇賢獎節 有國之令典 勵世之要道 慶尙道淸道郡故吏曹正郞臣號濯纓金馹孫及其祖故南臺持平臣號節孝金克一及其姪故正言臣號三足堂金大有三賢 道學文章 忠孝節義 咸萃一室 擧世尊仰 而至今照人耳目 允合於節惠之典
신(臣) 등이 생각하건대, 현인을 숭상하고 절의를 장려하는 것은 국가의 좋은 법이며 세상을 격려하는 중요한 길입니다. 경상북도 청도군의 고 이조 정랑(吏曹正郞) 호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과 그의 조부인 고 남대 지평(南臺持平) 호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과 그의 조카인 전 정언(正言) 호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등 삼현은 도학과 문장, 충효와 절의가 모두 한집안에 모이어 온 세상이 높이 우러러보고,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이목에 비쳐지고 있사와 참으로 시호를 내리기에 적합하다고 하겠습니다.
蓋馹孫 以先正臣金宗直之高弟 早年登第 賜暇湖堂 校讎綱目 而爲遼東質正官 得小學集說而來 我東之有小學集說 自此始焉 爲功斯文 不亦大乎 噫 當昏朝戊午 竟以史獄 身棄東市 時年三十有五 至今說之者莫不流涕
일손은 선정신(先正臣) 김종직(金宗直)의 수제자로 이른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호당에서 독서하고, 《강목(綱目)》을 교정하였으며, 요동 질정관(遼東質正官)이 되어 중국에 가서 《소학집설(小學集說)》을 구해 와 반포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소학집설》이 이때부터 있게 되었으니 사문(斯文)에 역시 공이 크다 하지 않겠습니까. 아, 혼조의 무오년(1498)에 화를 당하여 마침내 사옥(史獄)으로 처형되었으니 그때 나이 35세였습니다. 지금도 그 사실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先正臣文正公宋時烈序遺集曰 先生生乎程朱之後 與寒暄 一蠹諸老先生 磨礱浸灌 則其擇之精而無駁 先賢臣南孝溫曰 先生以希世之姿 有廟堂之器 論議之正 識見之明 可此於靑天白日 先賢臣曹植曰 濯纓生有凌霜之節 死有通天之寃 觀此先正先賢之言 而馹孫之姿稟節行 槩可見矣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지는 유집의 서문에 “선생은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과 주자(朱子) 이후에 태어나 한훤(寒喧), 일두(一蠹)와 같은 노선생과 함께 학문을 갈고닦았으므로 그 택함이 정하고 잡되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며, 선현신(先賢臣) 남효온(南孝溫)은 말하기를 “선생은 세상에 드문 자질을 타고나 묘당의 그릇이 될 만하며 논리가 바르고 식견이 밝아 청천백일(靑天白日)과 비교할 만하다.”라고 하였으며, 선현신(先賢臣) 조식(曺植)은 말하기를 “탁영은 살아서는 서리를 능멸할 절개가 있었고, 죽어서는 하늘에 사무치는 원통함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선정과 선현의 말을 보면 일손의 자품과 절행의 대강을 엿볼 수 있습니다.
亦粤持平臣克一 幼有至行 事親極孝 母疽吮血 父病嘗痢 前後丁憂 廬于墓側 晨夕號哭 若在始殯 誠感殊類 至有虎馴之異 事聞 光廟特命旌閭 事在三綱行實
그리고 지평(持平) 극일(克一)은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등창을 앓을 때 피고름을 빨아내고, 아버지의 이질에 혈변(血便)을 맛보았으며,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때는 묘 곁에서 시묘하며 조석으로 통곡하기를 빈소를 처음 차린 때와 같이 하였으니, 그 정성에 짐승들도 감동하여 호랑이가 길들여지는 기이한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세조(世祖)께서 특명으로 정려(旌閭)를 내리셨고, 이 사실은《삼강행실(三綱行實)》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而一自親沒之後 絶意世事 潛心性理之學 行誼日彰 鄕鄰宗黨 莫不薰化 及卒 鄕人私諡曰節孝先生 先正臣文忠公金宗直嘗稱曰 其純孝實行 可與曾 黔 頡頑千載 就此觀之 克一可謂盡人倫之至 而樹風聲於百代者也
그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세상일에 뜻을 버리고 성리학에 몰두하여 행실이 날로 드러나 그 고을 사람과 친척들은 그 덕(德)에 감화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후 세상을 떠나자 그 고을 사람들이 사시(私諡)하여 절효(節孝) 선생이라 불렀습니다. 선정신 문충공(文忠公) 김종직(金宗直)은 일찍이 말하기를 “ 그 순수한 효행은 증삼(曾參), 검루(黔屢)와 천추토록 선후를 다툴 만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까지 보건대 극일은 인륜을 지극히 이행하여 백대에 전할 미풍을 심었습니다.
至若正言臣大有 孝友出天 學問淵博 中廟改玉之初 始除蔭職 旋擢賢良科 召以諫官 輒辭不就 固窮自守 樂以終年 曹植又言辦局宏深 勿勿乎其仁 言論激昻 僩僩乎其義 容容大雅 討論經史之弘儒 仡仡偉表 射御不違之豪士 好善而獨善 弘濟而自濟 至謂之遯世无悶 則儒賢贊美之盛 於斯至矣
뿐만 아니라 정언(正言) 신 대유(大有)는 선천적으로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고 학문이 해박하여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비로소 음직을 받았다가 곧 현량과(賢良科)에 발탁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간관(諫官)의 직임을 제수하여 불렀으나 문득 사양하여 나아가지 않고 곤궁한 생활을 고수하며 즐기다가 여생을 마쳤습니다. 조식(曺植)은 그를 일컬어 “국량이 넓고 인자한 마음이 지극하며, 언론이 격앙하고 의리에 당당하였다. 우러러보이는 청아한 선비요 경사(經史)를 토론하는 큰 선비였으며 흘흘(仡仡)한 장신에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한 호방한 선비였다. 착한 것을 좋아하되 혼자 착하였고, 널리 세상을 건질 역량을 가졌으되 자기만을 건졌다.”라고 하였으며, 심지어 세상에서 숨어 살면서도 번민함이 없었다 하였습니다. 어진 선비들의 찬미가 이와 같이 무성하였습니다.
夫一門三賢 在古唯罕 眞所謂德不孤而世濟其美者也 逮我顯廟朝 正郞臣馹孫 贈都承旨兼直提學 持平臣克一 贈執義 正言臣大有 贈應敎 並宣額 餟享於淸道紫溪書院 紫溪 則三賢臣桑梓之鄕 而從多士之請也
대체로 한 가문에 세 사람의 현사(賢士)가 난 것은 옛날에도 드문 일이라 참으로 덕이 외롭지 않고 대대로 그 미행을 계승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현종(顯宗) 때에 정랑 신 일손(馹孫)에게 도승지(都承旨)겸 직제학(直提學)을 증직하고, 지평 신 극일(克一)에게 집의(執義)를, 정언 신 대유(大有)에게는 응교(應敎)를 증직하고 아울러 사액을 하여 청도 자계서원(紫溪書院)에서 제향을 받들게 하였습니다. 자계는 세 현신의 고향이니 이는 많은 선비들의 간청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其宣額文 若曰 蔚爲國器 夏瑚魯璠 正氣不泯 撑柱乾坤 且馹孫之謂也 有若曰 行感神明 化及鷄豚 猛獸且格 來衛兵原 此克一之謂也 有若曰 賢良策士 善類是援 與奪何頓 時有亨屯 此大有之謂也
그 사액 문에는 “훌륭한 국가의 그릇이 되어 하(夏)나라의 호련(瑚璉) 및 노나라의 번옥(璠玉)과 같고 정기가 민몰하지 않고 천지를 떠받치고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일손을 두고 한 말입니다. 또 이르기를 “행실이 신명을 감동시키고 그 감화가 짐승에까지 미치어 맹수가 와서 묘소를 지켜주어다.”라고 한 것은 극일을 두고 한 말이며, “현량과로 선비를 발탁한 일은 선류(善類)들이 한 일인데 주고 빼앗는 것은 어찌 예상이나 했겠는가. 시운은 통할 때와 막히는 때가 있다.”라고 한 것은 대유를 두고 한 말입니다.
猗我祖宗朝 褒獎三賢臣之擧 非不盛矣 而馹孫無嗣 伯兄直提學臣駿孫第二子縣監臣大壯 奉其祀 而子姓零替 士氣浸降 未遑上徹 式至于今矣 噫 戊午名賢 皆蒙加贈易名之恩 而獨以馹孫卓異之蹟 尙稽節惠之典者 豈非朝家之關典 而士林之齎恨乎
아, 우리 조종조에서 이 세 현신을 표창한 것은 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손은 아들이 없으므로 백형인 직제학 준손(駿孫)의 둘째 아들 현감 대장(大壯)이 그의 제사를 받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손들이 미약하고 선비들의 사기가 저하하여 이 사실을 주상께 아뢸 겨를이 없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아, 무오사화를 당한 명현들은 모두 시호를 받는 은혜를 입었으나 오직 일손은 특이한 공적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시호가 늦어지고 있으니 어찌 국가 전례(典禮)의 결함이 아니며 사림(士林)의 여한이 아니겠습니까.
方今睿聰臨下 凡係儒賢之事 褒隆備至 臣等聞風遐遠 欣躍鼓舞 裏足千里 齊聲號籲於蹕路之前 伏願禽明 俯垂鑑諒 亟命攸司 上項金馹孫 特施加贈節惠之典 金克一 金大有 一體施以加贈易名之恩 以彰國家崇賢獎節之德 俾伸多士積年抑鬱之忱事 伏蒙 睿恩之至
바야흐로 전하의 밝으심이 아래에까지 미치어 어진 선비들의 일에 관련하여 두루 표창하고 높이시는데, 멀리서 이 소문을 듣고 기뻐하여 춤을 추다가 험한 천리 길을 불고하고 달려와서 대궐 앞에서 호소하오니,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밝게 굽어 살피시어 속히 유사에게 명하여 위에 열거한 김일손(金馹孫)에게 증직과 시호를 베풀어 주시고 김극일(金克一)과 김대유(金大有)에게도 같이 베푸시어 국가에서 현인을 숭상하고 절의를 장려하는 덕을 드러내어, 많은 선비들이 여러 해 동안 얼울해하던 마음을 펴게 하소서. 주상의 은혜가 이르기를 기다리옵니다.
再疏
두 번째 상소문
疏首星州幼學李浚 製疏上同○同年八月日
소수는 성주 유학 이준, 제소는 위와 같다. ○같은해 8월 일
伏以崇賢獎節 有國之令典 貤爵褒諡 勵世之要道 慶尙道淸道郡故吏曹正郞臣金馹孫號濯纓 卽成廟朝名臣也 其祖故南臺持平 臣金克一稱節孝 其從子故正言臣金大有稱三足堂 俱以道學文章 忠孝節義 爲百世之師表 享一之堂俎豆
삼가 생각하건대, 현인을 숭상하고 절의를 권장함은 나라의 훌륭한 법이며, 관작을 더하여 주고 시호를 내리는 것은 세상을 다스리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경상도 청도군의 고 이조 정랑(吏曹正郞) 신 김일손(金馹孫)은 성종조(成宗朝)의 명신이며, 그의 조부인 고 지평 사시(私諡) 절효(節孝) 신 김극일(金克一)과 그의 조카인 고 정언 신 김대유(金大有)는 모두 도학과 문장, 충효와 절의로 백세의 사표가 되어 한 서원에서 제사를 받들고 있습니다.
今道州紫溪書院 是耳 以若三賢臣卓立之行 尙未蒙加贈易名之恩者 豈不爲朝家之關典乎 臣請據實而條陳之
지금 도주(道州)의 자계서원(紫溪書院)이 바로 그곳입니다. 그러나 세 현신(賢臣)의 뛰어난 행실이 이와 같은데도 시호를 받지 못하였으니 국가 은전의 결함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실상을 조목조목 열거하여 아뢰고자 합니다.
噫 馹孫年十七 遊文忠公臣金宗直之門 與文敬公臣金宏弼 文獻公臣鄭汝昌 爲道義之交 伉勵奮發 期以遠大 及夫大闡 衆望蔚然 在玉堂六七年 史筆直截 動法春秋 應旨撰四十八詠跋 譪然有納牖之意 懇懇乎玩勿喪志衣戒
아, 일손은 17세 때 문충공(文忠公) 신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문경공(文敬公) 신 김굉필(金宏弼), 문헌공(文獻公) 신 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도의로써 사귀어 서로 학문을 격려하고 분발하여 원대한 포부로 기약하면서 마침내 문과에 급제하여 많은 사람들의 중망(重望)을 받았습니다. 그 후 호당(湖當)에서 독서하였고, 십여 년 관직에 있었는데 그의 사필(史筆)은 간단명료하고 항상 춘추필법(春秋筆法)을 본받았으며, 임금님의 뜻을 받들어〈사십팔영(四十八詠)〉과 발문을 지어 올렸는데, 그 안에 완물상지(玩物商志)를 경계하는 뜻을 담아 간언하니 임금께서 쾌히 가납하셨습니다.
而至鄭汝昌釋褐之日 乃曰 代我掌史者此人 仍薦翰苑代之 此可見淵源之正也 爲遼東質正官 得小學集說而來 我東之有集說 自此而始 其於斯文 爲功甚大
그리고 정여창이 과거에 급제하자 바로 “나를 대신하여 사필을 잡을 사람은 이 사람이다.” 하고 그를 한원(翰苑)에 추천하여 자신의 대직을 받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어진 선비를 천거하는 올바른 자세를 가히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요동 질정관으로 가서는 《소학집설(小學集說)》을 가지고 와서 반포함으로써 우리 동방에 비로소 《소학집설》이 있게 되어 사문(斯文)에 끼친 공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嘗隷綱目校讎之役 論議正直 出乎等夷 紫陽筆意 煥然益明 是以馹孫 又配享於朱文公公忠道木川縣道東書院矣
일찍이 《강목(綱目)》을 교정하는 일에 임하여서는 그의 논리가 정직하여 동료들 가운데 뛰어났으며, 주자(朱子)의 지은 뜻을 환하게 꿰뚫어 더욱 명확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연고로 일손은 충청도 도동서원(道東書院)에 주자와 함께 배향되었습니다.
先正臣宋時烈迺於遺集弁卷之文 以爲先生生乎程朱之後 與寒暄一蠹諸老先生 磨礱浸灌 擇之精而無駁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유집의 서문에서 “선생은 정주(程朱) 후에 태어나 한훤(寒喧), 일두(一蠹) 등 여러 노선생과 학문을 닦아 그 택함이 정(精)하고 잡되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文正之於濯纓 推詡之如彼其懇摯 則馹孫之節義道學 無復餘蘊 而其他先賢臣之語 多有折節相下者
문정공이 탁영(濯纓)을 그토록 간곡하고 진지하게 칭송하였으니 일손의 절의와 도학은 더 이상 부연할 필요가 없습니다만 그 외의 현신들도 굽혀 칭찬한 자가 많았습니다.
號南冥曹植曰 先生生有凌霜之節 死有通天之寃 號秋江南孝溫曰 先生以希世之姿 有廟堂之器 又曰 濯纓之節義 如靑天白日
징사(徵士 임금이 불렀으나 나아가 벼슬하지 않은 선비) 신 조식(曺植)은 “선생은 생전에는 서리를 업신여길 절개가 있었고 죽어서는 하늘에 사무치는 원통함이 있었다.” 하였으며 진사 신 남효온(南孝溫)은 “선생은 세상에 보기 드문 자질을 타고나 묘당의 그릇이 될 만하며, 그의 절의는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다.” 하였습니다.
就此而見之 則節義道學之造詣 槩可知矣 嗚呼 戊午群小黨惡之禍 禍慘東市 至今思之 莫不氣塞而哽咽 尙忍言哉 尙忍言哉
이와 같은 말들로 미루어 그의 절의와 도학의 조예를 대강 엿볼 수 있습니다. 아, 무오사화 때 군소(群小)들이 일으킨 화는 참혹한 처형에까지 이어졌으니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기가 막히고 목이 메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亦粤克一 生有至行 母疽吮血 父病嘗痢 廬墓號哭 誠感殊類 至有虎馴之異 事聞 光廟特命旌閭 昭載于三綱行實 及卒 鄕人私諡曰節孝先生 金宗直嘗稱以純孝實行 可與曾黔 頡頑千載
그리고 극일(克一)은 태어나면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등창을 앓을 때 피고름을 빨아내고, 아버지의 이질에 혈변을 맛보았으며, 묘소에 여막을 짓고 호곡할 때 짐승들이 감동하여 호랑이가 길들여지는 특이한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세조(世祖)께서 정려(旌閭)를 내렸으며, 그 사실은 《삼강행실(三綱行實)》에 소상히 실려 있습니다. 그가 죽은 뒤에 고을 사람들이 사시하여 절효선생(節孝先生)이라 불렀습니다. 김종직(金宗直)도 그 순효(純孝)와 실행은 천년이 가도 증삼(曾參), 검루(黔屢)와 우열을 다툴 것이라 하였습니다.
至若大有 孝友出天 學問淵博 中廟改玉之初 經術才行 爲文正公臣趙光祖之所推詡 薦拜持平 不就 旋擢賢良科 召以諫官 又辭不就 固窮自守 樂而終年
뿐만 아니라 대유(大有)는 선천적으로 효성과 우애가 있었고 학문이 해박하여, 중종반정(中宗反正) 초에 경술(經術)과 재행(才行)으로 문정공 신 조광조(趙光祖)의 추천을 받아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다시 현량과(賢良科)에 발탁되어 간관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한 채 곤궁한 생활을 한결같이 즐기다가 여생을 마쳤습니다.
曹植又云 辦局宏深 勿勿乎其仁 言論激昻 僩僩乎其義 好善而獨善 弘濟而自濟 至謂遯世无悶 儒賢贊美 斯其至矣
조식(曺植)은 “국량이 넓고 깊어 성실하게 인(仁)을 행하고 언론이 격앙하여 엄격하게 의(義)를 지켰다. 선행을 좋아하되 혼자 선행을 행하였고, 널리 세상을 건질 역량을 가졌으나 자신만을 건졌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피해 살며 번민함이 없었다고 한 데 이르러서는 유현들의 찬미가 실로 지극하여다 할 것입니다.
噫 一門三賢 在古唯罕 眞所謂德不孤而世濟其美者也 逮我顯廟朝 吏曹正郞臣馹孫 贈都承旨兼直提學 持平臣克一 贈執義 正言臣大有 贈應敎 並賜院額
아, 한 집안에서 현인이 셋씩이나 난 것은 옛날에는 드문 일이니, 참으로 덕은 외롭지 않은 것이어서 대대로 그 아름다운 행실을 계승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 현종조(顯宗朝)에 와서 이조 정랑 신 일손(馹孫)에게 도승지 겸 직제학을 증직하였고, 지평 신 극일(克一)에게 집의를, 정언 신 대유(大有)에게 응교를 증직하고, 아울러 서원에 사액을 내리셨습니다.
其宣額文若曰 正氣不泯 撑柱乾坤 此馹孫之謂也 行感神明 化及鷄豚 此克一謂也 賢良策士 善類是援 與奪何預 時有亨屯 此大有之謂也
그 사액문에 “정기가 민몰하지 않고 천지를 떠받치고 있다.” 라고 한 것은 일손을 두고 한 말이며, “행실이 신명(神明)을 감동시키고 그 감화는 짐승에게까지 미쳤다.”라고 한 것은 극일을 두고 한 말이며, “현량과로써 선비를 발탁한 것은 선량한 이들이 추진한 일인데 주고 빼앗는 일을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시운은 통하고 막힐 때가 있다.”라고 한 것은 대유를 두고 한 말입니다.
猗我祖宗朝 褒獎三賢臣之擧 非不盛矣 竊惟戊午諸賢 皆蒙節惠之典 而獨以馹孫卓卓之節 炳炳之蹟 尙稽易名之恩者 實爲士林之齎恨
아, 훌륭합니다. 우리 조종조에서 세 분의 현신(賢臣)에게 포상한 일은 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무오년에 화를 당한 현인들은 모두 시호를 받았으나 오직 일손은 높은 절의와 빛나는 공적이 있음에도 아직까지 시호가 늦어지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사림의 묵은 한이 되고 있습니다.
且馹孫無嗣 伯兄直提學臣駿孫第二子縣監臣大壯 奉其祀 而子姓零替 士氣浸降 迄未上徹矣
일손에게는 후사가 없어 백형인 직제학 준손(駿孫)의 둘째 아들 현감 신 대장(大壯)으로 그 제사를 받들게 하였습니다만 그 자손들이 미약하여 선비들의 사기가 떨어져 아직까지 이 사실을 위에까지 아뢰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今春 仰籲於蹕路之前 前特蒙達下稟處之令 而尙此寥寥 遠道輿情 不勝紆苑 玆又齊聲號籲於法駕之前
금년 봄에 대궐 앞에서 전하께 호소하여, 전하께서 아래 유사에게 알려 처리하라는 특명을 내리셨으나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어 멀리 시골 선비들은 울적한 심정을 가눌 수 없사옵니다.
伏願聖明 俯垂鑑諒 亟 命攸司 金馹孫 特施超贈節惠之典 金克一 金大有 亦施以加贈易名之恩 俾伸多士積年抑鬱之忱事
이에 다시 전하께 호소하오니 성상께서 굽어 살피시고 속히 유사에게 명하시어 김일손에게 증작과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베푸시고, 김극일과 김대유에게도 같은 은전을 베풀어 주시어, 선비들의 오랫동안 쌓인 억울한 마음을 펴게 하소서.
출전 : 탁영선생문집 중간본, 역주본
편집 : 2015.01.27. 죽산
吏曹回啓
임금의 물음에 대한 이조의 회답
判書徐能輔
판서 서능보
金馹孫危行直節 備著於前後儒賢之稱述 至今炳郎 照人耳目 褒贈之典 極其崇顯 夫孰曰不可 而旣與死節人稍異 則八座正卿加 贈 事係特典 臣曹有難擅便 議于大臣處之何如
김일손의 고결한 행실과 곧은 절개는 전후 유현(儒賢)들의 진술에 갖추어 드러나 있으나 지금까지 사람들의 이목에 밝게 빛나고 있으니, 포창하고 증직하는 은전을 극진히 한다 하여 누가 옳지 않게 여기겠습니까. 이미 절사(節死)한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달라서 팔좌(八座)의 정경(正卿)[1]으로 증직해야 하는데, 이 일은 특전(特典)에 해당되므로 신의 조(吏曹)에서 간단히 전결하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대신들의 논의에 부쳐 처리함이 어떠하겠습니까.
[1] 팔좌(八座)의 정경(正卿) : 중앙부처의 8개 중요 직위에 있는 정경 즉, 정2품관인 육조 판서와 대제학 등이 이에 속한다.
議政府三大臣獻議
의정부 삼대신의 헌의
領議政獻議 南公轍
영의정 남공철의 헌의
金馹孫 在燕山朝 慘被史禍 積忤群小 後人之尙論有在 然而師友淵源 百世可徵 文章氣義 照耀至今 眞希世之姿 卓異之人也 加贈正卿 施以節惠 允合聖朝崇儒獎義之道 而愚見未敢自信 伏惟上裁
김일손이 연산조에 참혹하게 사화를 입은 것은 뭇 소인배들의 미움이 쌓였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후인들의 논란은 있으나 사우(師友)의 연원이 백세에 입증하고 있습니다. 문장과 의기(義氣)가 지금까지 빛나고 있으니 참으로 세상에 드문 자질을 타고난 특이한 사람입니다. 정경(正卿)으로 증직을 더하고 시호를 내리는 것이 진실로 성조(聖朝)에서 선비를 높이고 절의(節義)를 권장하는 도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어리석은 견해를 감히 자신할 수 없으니,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재가하소서.
左議政獻議 李相璜
좌의정 이상황의 헌의
金馹孫 其死則人至今悲之 其文章氣節道義之盛 則人又至今誦慕不已 况師友之間 淵源有自 與文敬文獻兩先生正 麗澤相契 有功斯文 今此士林齊籲 知出於公議 加贈許諡之爲 朝家崇獎之政 愚見亦無異同於領相 然事係特典 伏惟上裁
김일손의 죽음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슬퍼하며, 그의 문장과 기절(氣節)과 도의(道義)는 훌륭하여 지금도 사람들이 칭송하고 사모하기를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더욱이 사우간(師友間)의 연원(淵源)이 알려져 있으니, 문경(文敬), 문헌(文獻) 두 선현과 더불어 사귀며 학문과 덕을 서로 도와 닦았고, 사문(斯文)에 공이 있습니다. 지금 사림(士林)에서 일제히 호소하는 것은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인 줄 압니다. 증직을 더하고 시호를 내리는 것은 모두 조정에서 어진 이를 높이고 절의를 권장하는 바른 처사입니다. 저의 견해도 영상(領相)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일은 특전(特典)에 해당되니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재가하소서.
右議政獻議 鄭晩錫
우의정 정만석의 헌의
金馹孫道學之醇正 文章之灝噩 冠冕當世 膾炙中州 此先賢所稱宇宙間間氣 而卓節竟罹奇禍 其死也絶悲 士林齎恨 至今未已 加贈節惠 儘合慰幽獎義之道 而事係特例 未敢質對 伏惟上裁
김일손은 도학이 순정(醇正)하고 문장은 깊고 넓어 당대에 으뜸이었고, 중국에서도 회자(膾炙)되었습니다. 이에 선현들은 우주의 간기(間氣)를 타고난 사람이라 칭송하였는데, 그 뛰어난 절개는 결국 별난 화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매우 비통하여 사림(士林)에서는 지금까지 탄식하고 한스러워하기를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증직을 더하고 시호를 내리는 일은 모두 명계(冥界)의 영혼을 위로하고 절의를 권장하는 도리에 합당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특례(特例)에 관계되므로 감히 결정하여 대답할 수 없사오니,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재가하소서.
吏曹覆啓
이조에서 다시 올린 복계
判書徐能輔
판서 서능보
贈都承旨金馹孫加贈事 議于大臣處之事 允下敎郎官收議于諸大臣 則議政府領議政南公轍 以爲金馹孫 在燕山朝 慘被史禍 專由於積忤群小 後人之尙論有在 蓋其師友淵源 百世可徵 文章氣義 照耀至今 眞希世之姿 卓異之人也 加贈正卿 施以節惠 允合 聖朝崇儒獎義之道 而愚見未敢自信 伏惟上裁云
증 도승지 김일손의 증직 건은 대신들이 의논하여 처리하라는 하교에 따라 낭관을 보내서 여러 대신들의 논의를 취합하였습니다. 의정부 영의정 남공철은 이르기를 “ 김일손이 연산조에 참혹하게 사화를 입은 것은 오로지 뭇 소인배들의 미움이 쌓였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후인들의 논란은 있으나 대체로 사우의 연원이 백세에 입증하고 있습니다. 문장과 의기(義氣)가 지금까지 빛나고 있으니 참으로 세상에 드문 자질을 타고난 특이한 사람입니다. 정경(正卿)으로 증직을 더하고 시호를 내리는 것이 진실로 성조(聖朝)에서 선비를 높이고 절의(節義)를 권장하는 도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어리석은 견해를 감히 자신할 수 없으니,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재가하소서.”라고 하고
議政府左議政李相璜 以爲金馹孫 其死則人至今悲之 其文章氣節道義之盛 則人又至今誦慕不已 况師友之間 淵源有自 與文敬文獻兩先正 麗澤相契 有功斯文 今此士林齊籲 知出公議 加贈許諡之爲 朝家崇獎之政 愚見未無異同於領相 然事係特典 伏惟上裁云
의정부 좌의정 이상황(李相璜)은 말하기를 “김일손의 죽음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슬퍼하며, 그의 문장과 기절(氣節)과 도의(道義)가 훌륭하여 지금도 사람들은 칭송하고 사모하기를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더욱이 사우간(師友間)의 연원이 알려져 있으니, 문경(文敬), 문헌(文獻) 두 선현과 더불어 사귀며 학문과 덕을 서로 도와 닦았고, 사문(斯文)에 공이 있었습니다. 지금 사림(士林)에서 일제히 호소하는 것은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인 줄 압니다. 증직을 더하고 시호를 내리는 것은 모두 조정에서 어진 이를 높이고 절의를 권장하는 바른 처사입니다. 저의 견해도 역시 영상(領相)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일은 특전(特典)에 해당되므로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재가하소서.”라고 하고,
議政府右議政鄭晩錫 以爲金馹孫道義之醇正 文章之灝咢 冠冕當世 膾炙中州 此先賢所稱宇宙間間氣 而卓節竟罹奇禍 其死也絶悲 士林齎恨 至今未已 加贈節惠 儘合慰幽獎義之道 而事係特例 未敢質對 伏惟上裁云矣 大臣之議如此 上裁何如
의정부 우의정 정만석(鄭晩錫)은 말하기를 “김일손은 도학이 순정(醇正)하고 문장은 깊고 넓어 당대에 으뜸이었고, 중국에서도 회자(膾炙)되었습니다. 이에 선현들은 우주의 간기(間氣)를 타고난 사람이라 칭송하였는데, 그 뛰어난 절개는 결국 유별난 화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매우 비통하여 사림(士林)에서는 지금까지 탄식하고 한스러워하기를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증직을 더하고 시호를 내리는 일은 모두 명계(冥界)의 영혼을 위로하고 절의를 권장하는 도리에 합당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특례(特例)에 관계되므로 감히 결정하여 대답할 수 없사오니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재가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대신들의 논의가 이와 같으니 전하께서 재결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傳曰允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하였다.
贈職 敎旨
증직하는 교지
贈通政大夫 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 藝文館直提學 尙瑞院正 行通訓大夫 吏曹正郞金馹孫 贈資憲大夫 吏曺判書兼知經筵 義禁府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成均館事 世孫左賓客 五衛都摠府都摠管者
통정대부 승정원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예문관직제학 상서원정에 증직되고 통훈대부를 이조정랑[1]을 역임한 김일손에게 자헌대부[2] 이조판서 겸 지경연[3] 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4] 예문관대제학[5] 지춘추관성균관사 세손좌빈객[6] 오위도총부도총관[7]에 증직한다.
[1] 이조정랑(吏曹正郞) : 정5품인 이조(吏曹)의 낭관이다. 삼사의 관원 임명을 좌우하는 전랑(銓郞)으로 실권이 대단한 요직이다.
[2] 자헌대부(資憲大夫) : 문무관(文武官)에게 주던 정2품의 관계(官階)이다.
[3] 지경연(知經筵) : 경연의 지사(知事)로 정2품관이다.
[4] 의금부사(義禁府事) : 왕명을 받들어 추국(推鞫)하는 일을 관장하는 의금부의 지사로, 정2품이다.
[5]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 경적(經籍)에 관한 일을 맡은 홍문관의 실질적 수장으로 통상 경연의 지사와 성균관 지사를 겸한다. 정2품관이다.
[6]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 임금의 칙령과 교명을 기록하던 관청의 정2품 관직이다.
[7] 세손좌빈객(世孫左賓客) : 세손을 가르치는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의 정2품관이다.
[8]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 조선 시대 군대 조직인 오위의 군무(軍務)를 총괄하던 관청의 수장으로 정2품관이다.
仕板旁註
관리 명부의 성명 옆에 기록한 주석
道義之醇正 文章之灝咢 冠冕當世 膾炙中州 卓節竟罹奇禍 其死也絶悲 士林齎恨 至今未已 加贈正卿事承傳
도의(道義)가 순정(醇正)하고 문장은 깊고 넓어 당대에 으뜸이었고, 중국에까지도 회자(膾炙)되었으나 그의 뛰어난 절의는 결국 유별난 화를 입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매우 비통하여 사림에서도 지금도 탄식하고 한스러워함을 그치지 않고 있다. 정경(正卿)으로 더하는 일은 전지(傳旨)를 받든 것이다.
출전 : 탁영선생문집 중간본,역주본
집 : 2015.01.27. 죽산
諡狀
시장[1]
[1] 시장(諡狀) : 공신에게 시호를 내릴 때 미리 세 가지 시호를 태상시(太常寺)에서 의정하여 이조를 통하여 임금에게 상주하는 시망(諡望)에 생전의 공적을 적어 올리는 글이다. 탁영의 시망은 문민(文愍), 문간(文簡), 문정(文貞)이었는데 임금이 문민(文愍)에 낙점하였다. 학문과 사물에 대해서 많이 들어서 아는 것이 많고 본 것도 많아(博聞多見曰文) 문(文)자를 쓰고, 백성들로 하여금 마음이 슬프고 아프다는 뜻에서(使民悲傷曰愍) 민(愍)자를 씀
金公馹孫 戊午寃死之首也 尤庵宋先生時烈 序其集 略曰 濯纓先生 以文章節行 冠冕一時 不幸遭逢燕山 身棄東市 禍延士林 實崇於吊義帝一篇 未知畢齋之作此文何意 先生之錄是文 又何見歟 皆非後學所敢窺測
김공(金公) 일손(馹孫)은 무오사화 때 원통하게 죽은 첫 번째 사람입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탁영문집》서문에 이르기를 “탁영(濯纓) 선생은 문장과 절행으로써 한 시대의 으뜸이었던 분인데 불행하게도 연산군(燕山君)을 만나 일신이 동시(東市)에서 처형당하는 화(禍)를 입었고 그 화는 온 사림(士林)에 미쳤다. 사실 〈조의제문(弔義祭文)〉한 편이 빌미가 된 것인데 점필재(佔畢齋) 선생은 이 글을 무슨 마음으로 지으셨고 또 탁영 선생은 무슨 생각으로 이 글을 사초(史草)에 수록하셨는지 알 지 못하겠거니와 이 모두가 감히 엿보아 추측할 바가 아니다.
豈定哀徵其辭事者 非聖人達權大用 則終不可師法 而秉史筆者 惟直是職歟 先生 宇宙間間氣也 其生也非偶然 其死也豈人所能哉
일찍이 공자께서 노(魯)나라 정공(定公)과 애공(哀公)의 사실(史實)을 《춘추(春秋)》에 완곡하게 비평한 것은 임기응변에 능통한 성인(聖人)의 대승적 행사가 아니고는 끝내 본받을 수 없는 일이요, 사필(史筆)을 잡은 사람 즉 사관(史官)은 오직 직필(直筆)하는 것만이 그 직분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우주 간의 간기(間氣)를 타고나시어 그 태어남이 우연이 아닌데 그 죽음을 어찌 사람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하였습니다.
噫 斯言其盡之矣 雖然 自公昭洗之後 旣貤贈之 又俎豆之 所以爲崇報者 靡有憾矣 惟諡典未及焉 此聖朝之缺事而學士大夫之恥也
아, 이 말은 공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공의 누명이 분명하게 씻긴 후로 이미 증직을 하고 또 향사를 받들어 높이고 있으니, 보답하는 일에 있어서는 유감이 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오직 시호(諡號)를 내리는 은전이 미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우리 조정의 결례요 학사(學士)와 대부(大夫) 된 사람들의 수치입니다.
上之三十年庚寅秋 三道儒生李浚等上言言之事 下攸司 吏曹判書臣徐能輔 請議大臣 欲重其體也 於是 領議政臣南公轍 以爲金馹孫 慘被史禍 而師友淵源 百世可徵 文章氣義 照耀至今 加贈正卿 施以節惠 允合崇儒獎義之道云
현 임금 30년 경인년(1830, 순조30) 가을에 삼도(三道)의 유생(儒生) 이준(李浚) 등이 올린 상소가 해당 관청에 올라가서 이조 판서 신 서능보(徐能輔)[2]가 대신들과 의논하기를 청하였는데 그것은 그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이에 영의정 신 남공철(南公轍)[3]이 이르기를 “ 김일손은 사화에서 참혹하게 화를 입었으나 사우(師友)의 연원(淵源)은 백세(百世)토록 증거 될 만하고, 문장과 기개와 절의는 지금까지 밝게 빛나니 정경(正卿)에 증직하고 시호를 내리는 것이 유학을 숭상하고 의리(義理)를 권장하는 도리에 합당합니다.” 하였으며,
[2] 서능보(徐能輔, 1769~183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치량(穉良). 판서 유경(有慶)의 아들이다. 1828년 이조판서에 승진하였다.
[3] 남공철(南公轍, 1760~1840). 조선 후기 문장가·정치가. 본관은 의령. 자는 원평(元平), 호는 사영(思穎)·금릉(金陵). 서울출신. 아버지는 대제학 유용(有容)이다. 1833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저서로는 《고려명신전 高麗名臣傳》, 자편의 시문집으로 《귀은당집 歸恩堂集》·《금릉집》·《영옹속고 穎翁續藁》·《영옹재속고 穎翁再續藁》·《영은문집 瀛隱文集》 등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而左議政臣李相璜 右議政臣鄭晩錫 議略同 上允之 蓋公歿之三百三十有餘年矣 公於中廟改玉之初 首蒙復爵 顯廟朝 以筵臣言 特贈都承旨 至是加贈吏曹判書兼銜如例
좌의정 신 이상황(李相璜)[4]과 우의정 신 정만석(鄭晩錫)[5]의 의론도 대략 같았기에 주상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대체로 공이 돌아가신 지 330여 년 만의 일입니다. 공이 중종반정(中宗反正) 초에 제일 먼저 관작이 회복되었고, 현종(顯宗) 때에 연신(筵臣)[6]들의 주청에 따라 특별히 도승지에 증직하고, 지금에 이르러 이조 판서에 증직하고, 겸직도 전례와 같이 하였습니다.
[4] 이상황(李相璜, 1763~184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주옥(周玉), 호는 동어(桐漁) 또는 현포(玄圃). 태종의 둘째아들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으로, 승지 득일(得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현감 유성모(柳聖模)의 딸이다. 1824년 좌의정이 되었다. 저서로는 《동어집》·《해영일기 海營日記》가 있다. 헌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5] 정만석(鄭晩錫, 1758~183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성보(成甫), 호는 과재(過齋). 지중추부사 기안(基安)의 아들이다. 1829년 우의정이 되었다. 저서로는 《관서신미록》이 있다. 시호는 숙헌(肅獻)이다.
[6] 연신(筵臣) : 경연(經筵)에서 일하던 신하를 말한다. 경연(經筵)은 고려‧조선 시대에, 임금이 학문을 닦기 위하여 학식과 덕망이 높은 신하를 불러 경서(經書) 및 왕도(王道)에 관하여 강론하게 하던 일
公字季雲 系出駕洛國王 在新羅 大角干庾信 以功業大顯 而高麗之季 有諱管 仕至版圖判書 於公爲六世祖也 曾祖諱湑 縣監 是生節孝先生諱克一 薦拜持平 有至孝 事載邑誌
공의 자는 계운(季雲)인데 가락국왕(駕洛國王)의 후손으로, 선조에 신라 때 세운 공적으로 널리 알려진 대각간(大角干) 유신(庾信)이 있고, 고려 말에 벼슬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른 휘 관(菅)은 공의 6세조입니다. 증조의 휘는 서(湑)인데, 현감을 지냈으며, 절효선생 휘 극일(克一)을 낳았는데, 절효선생은 지평(持平)에 천거되었고, 효성이 지극하여 그 사실이 모두 읍지(邑誌)에 실려 있습니다.
考諱孟 文科執義 贈吏曹參判 公以天順甲申生 未弱冠 聞佔畢齋金先生宗直 居憂密陽 與仲氏翰林公驥孫 往從之 得聞學之方 而所磨礱而浸灌者 卽惟寒暄金先生宏弼 一蠹鄭先生汝昌也
선고의 휘는 맹(孟)인데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습니다. 공은 천순(天順) 갑신년(1464)에 태어나서 약관(弱冠)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선생이 밀양에서 거상(居喪) 중에 있다는 말을 듣고 중형(仲兄) 한림공 기손(驥孫)과 함께 찾아가서 학문하는 방법을 들었으며, 학문을 갈고닦아 서로 영향을 끼친 사람은 바로 한훤(寒喧) 김굉필(金宏弼) 선생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선생이었습니다.
方是時 我成宗大王 尊尙儒術 作興人材 上自朝廷 至于鄕黨 韋布彬彬 多宏博雅飭之士 號稱國朝盛際 而裒然爲衆論所推
당시 우리 성종대왕께서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인재를 많이 양성하여, 위로는 조정에서부터 시골의 가난한 선비에 이르기까지 학문이 넓고 깊은 고상한 선비가 많이 나와 나라와 조정이 가장 번성한 시기라 일컬었으며, 이러한 가운데서 중론의 추앙을 받는 바가 되었습니다.
甫二十三 中生員第一 進士第二 其冬 擢文科第二 公之夙就 由此可知 明年 出補晋州學官 時仲氏乞養監昌寧縣 公爲便省母計也
겨우 23세 때에 생원에 1등, 진사에 2등으로 합격하고, 그해 겨울에 문과에 2등으로 발탁되었으니, 공의 이른 성취를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그 이듬해에 진주 학관(晉州學官)에 보직되었는데, 이때 중형(仲兄)이 모친의 봉양을 위하여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왔기에 공도 모친을 뵙는 데 편리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戊申 病辭 己酉 以非罪幽金寧 旋赦 召爲遼東質正官 赴京師 辛亥 又朝元正 由龍驤司正 選隷綱目校讎 癸丑春 奉旨頒論嶺南 又賜暇湖堂 而前後踐履 今雖未得其月日之詳 大槩在翰林 最久 歷遍三司 而末職天官郎也
무신년(1488)에 병으로 사직하였고, 기유년(1489)에 죄 없이 금녕(金寧)에 유폐되었다가 곧 사면되자 요동 질정관(邀東質正官)으로 부름을 받아 북경에 다녀왔습니다. 신해년(1491)에 또 명나라에 진하사(陳賀使)로 갔다가 돌아와서 용양위 사정(龍驤衛司正)을 거쳐 《강목(綱目)》교정관으로 뽑혔고, 계축년(1493) 봄에는 교지를 받들어 영남에 민심을 알아보는 반유 어사(頒諭御使)로 다녀온 후 또 호당(湖當)에서 사가독서를 하였습니다. 전후에 두루 거친 이력에 대해 지금 비록 그 날짜를 상세하게 알 수는 없으나 대개 한림(翰林)에 가장 오래 있었고 삼사(三司)를 두루 거쳤으나 마지막 직책이 천관랑(天官郞([7]이었습니다.
[7] 천관랑(天官郞) : 이조의 낭관 즉 이조 정랑을 말한다.
歲戊午 公新除內艱 養疾於咸陽之鄕廬 而史獄起 始公爲獻納 疏論李克墩 成俊 互相傾軋 將成牛李之黨 曁修成宗實錄 克墩 管史事 見公史草 書其穢行甚悉 且載世祖朝秘事 欲因此爲修隙地 議于摠裁官魚公世謙 魚公愕然不應之
무오년(1498)에 공이 모친의 상(喪)을 벗고 함양에 있는 집에서 병을 요양하고 있을 때 사옥(史獄)이 일어났습니다. 일찍이 공이 헌납(獻納)이었을 때 이극돈(李克墩)[8]과 성준(成俊)[9]이 서루 다투며 장차 우이(牛李)의 당[10]을 만들려 한다고 소론(疏論)한 바 있었습니다. 《성종실록》을 편수할 때 극돈이 사사(史事)를 주관하게 되자, 공의 사초(史草)에 자기의 더럽고 부도덕한 행실이 모두 적혀 있고, 또 세조(世祖) 때의 숨겨진 일이 적혀 있음을 보고 이것으로써 보복하고자 총재관 어세겸(魚世謙)[11]에게 의논하니 어공(魚公)이 놀라서 응하지 않았습니다.
[8] 이극돈(李克墩, 1435~1503) :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고(士高).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이다.
[9] 성준(成俊, 1436~1504)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시좌(時佐). 참판 순조(順祖)의 아들이다.
[10] 우이(牛李)의 당 : 당나라 때 대신 우승유(牛僧孺)와 이덕유(李德裕)가 서로 당파를 결성하여 당쟁을 벌인 고사를 인용한 말이다.
[11] 어세겸(魚世謙, 1430~150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자익(子益), 호는 서천(西川). 판중추부사 효첨(孝瞻)의 아들이며, 우참찬 세공(世恭)의 형, 좌의정 박은(朴訔)의 외손이다.
乃與柳子光謀 子光陰險樂禍者也 視以奇貨 相與慫慂於尹弼商等 告公以誣先王 激主怒 時燕山政荒 性猜暴 尤惡文士 恩因事一逞 遂令金吾郞馳傳 往拿公鞫之 而別遣掖隷 察道中遲速云
이에 유자광(柳子光)에게 꾀하니, 자광은 본래 음험하여 화를 즐기는 사람이라 절호의 기회라고 여겨 서로 윤필상(尹弼商)[12] 등에게 종용하여 탁영이 선왕(先王)에 대하여 허위 사실을 기록했다고 고하고 주상을 노하게 격동시켰습니다. 이때 연산(燕山)은 정치에는 거칠고 성질은 의심이 많고 포악하였으며, 더욱이 문사(文士)를 미워하여 이 일을 기화로 한바탕 울적한 마음을 풀고자 생각하여, 드디어 금오랑(金吾郞)에게 명하여 달려가 잡아와서 공을 국문하게 하고 별도로 환관들을 보내어 도중에 빨리 오는지 어정거리는지 살피게 하였습니다.
[12] 윤필상(尹弼商, 1427~1504).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탕좌(湯佐). 삼한공신 신달(莘達)의 후예로 아버지는 경(坰)이며, 어머니는 이목(李霂)의 딸이다.
今以野乘之雜出者考之 公爰辭有曰 貴人權氏 事聞於貴人之姪許磐云 有曰 請復昭陵事 欲聖朝行仁政云 公嘗爲忠淸都事 上疏請復昭陵故也 有曰 後殿曲事 昔在西湖也 茂豊副正摠 攜琴相訪 彈後殿曲 其曲哀 非治世之音 故並及之云
지금 야사(野史) 여기저기에 나온 것들을 살펴보면 공이 한 말 중에 귀인[13] 권씨(權氏)의 일은 귀인의 조카 허반(許磐)[14]에게 들었고, 소릉(昭陵)의 복위를 청한 것은 성조(聖朝)로 하여금 인정(仁政)을 베풀게 하고자 함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공이 일찍이 충청 도사가 되어 소릉의 복위를 청하는 소(疏)를 올렸던 것입니다. 또 이르기를 〈후전곡(後殿曲)〉의 일은 옛날 서호(西湖)에 있을 때 무풍부정(茂豊副正) 이총(李摠)이 거문고를 가지고 찾아와서 〈후전곡〉을 탔는데 그 곡이 슬퍼서 태평한 세상의 음악이 아니므로 함께 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3] 왕의 후궁을 귀인이라 하니 아마 권치명의 따님 중에 한분이 왕의 후궁이었던 것 같다. 따님중에 또다른 한 분은 허반의 모친이다.
[14] 허반(許磐, ?∼1498) :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병(文炳). 아버지는 사지(司紙) 인이며, 어머니는 권치명(權致明)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일손·이목(李穆)·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 등과 함께 참형되었다. 평소에 글재주가 뛰어나고 인품이 단정하여 세칭 무오사화의 오현(五賢)이라 일컬어졌다. 뒤에 신원되었다.
又問同議史草之人 公曰 旣輸情矣 請獨死 凡此事實 皆得之斷爛之餘 無以究其顚末 而畢齋所著吊義帝文 亦在史草 子光摘其語 自爲註釋 遂句解之曰 某之惡 皆宗直誨而成之也
또 사초(史草)를 같이 의론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으니 공이 말하기를 이미 실정을 다 털어놓았으니 홀로 죽기를 청한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이런 사실들은 훼손된 나머지 기록에서 얻는 것이어서 그 전말을 모두 규명할 수 없으나 점필재가 지은 〈조의제문〉이 또한 사초에 실려 있어서 유자광은 그 글을 지적하여 스스로 주석을 달고 글귀마다 해석을 가하여 말하기를 “탁영(濯纓)이 악한 짓을 한 것은 모두 종직(宗直)이 가르쳐서 이루어진 것” 이라고 하였습니다.
其禍遂至滔天 公先以大逆論處極律 畢齋戮及泉壤 而一代搢紳以名流爲號者 誅竄殆盡 卽是年七月十七日也
그 화는 드디어 하늘에 사무치고, 공이 먼저 대역(大逆)으로 논의되어 극형에 처해지고, 필재는 형벌이 무덤에까지 미쳤으며, 한 시대의 진신(縉紳)들 가운데 이름난 사람은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어 거의 다 없앴으니 곧 그해 7월 27일[15]이었습니다.
[15] 27일 : 원문에는 17일로 되어 있으나, 《연산군일기》와 《탁영선생연보》에 의거하여 고쳐 번역하였다.
是日晝晦 雨下如注 大風起 拔木飛瓦 都市人無不顚仆股慄 儒林喪氣 重足屛息 學舍蕭然 數月無誦讀聲 而公所居前川血流三日云
이날 대낮이 어둡더니 비가 퍼붓듯이 쏟아지고 큰 바람이 불어서 나무가 뽑히고 기왓장이 날리니 도시의 사람들은 자빠지고 다리를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유림은 기운을 잃고 매우 두려워 나다니지 않고 숨을 죽였으며, 학사(學舍)는 쓸쓸하여 여러 달 동안 글 읽는 소리가 없었습니다. 공이 살던 마을 앞 냇물은 핏빛으로 변하여 3일 동안 흘렀다고 합니다.
公嘗與鄭文翼公光弼 受兩南御史之命 同日辭朝 同宿於龍仁之館 公慷慨論時事 語多激 文翼屢止之曰 言不可若是 公奮曰 士勛亦爲卑下之論耶 達一宵 竟不相契 士勛 鄭公字也
공이 일찍이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16]과 함께 경상도와 전라도 양남 지방의 어사로 명령을 받아 같은 날 조정을 하직하고 출발하여 용인의 여관에서 함께 자게 되었는데 공이 강개(慷慨)하여 시사(時事)를 논하는데 과격한 말이 많아 문익공이 여러 번 저지하며 말하기를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해서는 안 된다.” 하자, 공이 분연히 말하기를 “사훈(士勛)마저 비굴한 논의를 펴는가.” 하고 하룻밤을 자면서도 끝내 서로 뜻이 맞지 않았습니다. 사훈은 정공(鄭公)의 자입니다.
[16] 정광필(鄭光弼, 1462~1538)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 이조판서 난종(蘭宗)의 아들이다.
南秋江孝溫之言曰 公眞希世之才 廟堂之器 論議國事 是非人物 如靑天白日 曺南冥植之言曰 公生有凌霜之節 死有通天之寃 野乘又云 公倜儻有大節 魁偉有器局 文章汪汪若河海 在書堂著秋懷賦 氣像於此可見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7]이 이르기를 “공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재주요, 조정의 그릇이다. 국가를 논의하고 인물의 옳고 그름을 가림에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이 밝다.”라고 하였으며, 남명(南冥) 조식(曺植)[18]은 말하기를 “공이 살아서는 서릿발을 능가하는 절개가 있었고, 죽어서는 하늘에 사무치는 원통함이 있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야사(野史)에 또 이르기를 “공은 다른 사물에 구애받지 않고 큰 절개를 가졌으며 우람한 풍모에 큰 도량이 있었고, 문장이 넓고 깊어 하해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독서당에 있을 때 지는 〈추회부(秋懷賦)〉에서 그 기상을 볼 수 있습니다.
[17] 남효온(南孝溫, 1454~1492) : 조선 단종 때의 문신으로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본관은 의령.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 영의정 재(在)의 5대손이고, 생원 전의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수학했다.
[18] 조식(曺植, 1501~1572) :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健中), 호는 남명(南冥). 생원 안습(安習)의 증손으로, 승문원판교 언형(彦亨)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다.
其立朝 好盡言 不避權貴云 公所以爲公者正在此 而亦所以取禍也歟 公於著述 立草千言 沛乎無礙滯 見者望洋 中華人 至以東國之昌黎稱之
조정에 들어가서는 할 말은 다 하기를 좋아하여 권세 있고 지위 높은 사람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공이 공답게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으며, 또한 화를 입은 원인도 이에 있지 않겠습니까. 공이 저술할 때 초안하는 천만 어휘(語彙)들이 마치 물이 흐르듯 막힘이 없어 보는 사람들은 넓은 바다를 보는 듯 하였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동국의 창려(昌黎)[19]라 일컬었습니다.
[19] 창려(昌黎) : 한유(韓愈 768~824)의 호, 중국 당(唐)나라의 문학자·사상가이며 자는 퇴지(退之),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每腹藁成 磨墨滿硯 一筆揮之 不復視 投之篋中 經累月始出而點化之 或問之 曰 始起草 猶有私意 不自見其當改 久然後私意除 公心生 乃明知其醇疵也 其用工之精如此
매양 마음속에 문장을 구상한 다음 벼루에 가득히 먹을 갈아 놓고 일필휘지(一筆揮之)하여 다시 보지도 않고 상자 속에 던져두었다가 여러 달이 지나서 비로소 끄집어내어 검토를 하는데, 혹자가 물으니 처음 초안을 했을 때는 아직 사사로운 마음에 가리어 스스로 마땅히 고칠 곳을 보지 못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주관적인 생각이 가시고 나면 공정한 마음이 생겨서 이에 그 잘잘못을 알게 된다고 하였으니 일에 대한 정밀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嘗與兩兄赴別擧 欲以壯頭讓之 公則不製焉 伯氏遂魁 仲氏聯之 而後圍初場 公醉眠曳白而歸 中場亦如之 至終場 盡粘三場試券 連數十幅而入 考官問策以中興爲目 而宋高宗齒焉
일찍이 두 형과 더불어 과거에 응시하였을 때 장원을 형에게 양보하려고 공은 글을 짓지 아니하여 드디어 백형(伯兄)이 장원을 하고 중형(仲兄)이 이어서 장원을 하였습니다. 그 후 과거에서 공은 초장(初場)에 술에 취하여 졸다가 백지(白紙)를 내고 돌아왔으며 중장(中場)에서도 또 그와 같이 하고, 종장(終場)에 이르러서는 삼장(三場)의 시험지를 모두 이어 수십 폭을 가지고 들어가니 시관(試官)이 중흥(中興)을 제목으로 그 대책(對策)을 물었는데, 송(宋)나라 고종(高宗)이 중흥주(中興主) 속에 끼어 있었습니다.
公卷其題 詣前曰 宋高宗 偸安一隅 忘親釋怨 乞和於犬羊 豈與殷宗周宣 並列於中興之主哉 考官大慙改之 公乘半酣揮灑 日未斜矣 榜將揭 使人覘之曰 第一名非我 勿復觀 果然
공이 그 제목을 말아 들고 시관 앞에 나아가서 말하기를 “ 송나라의 고종은 한 구석으로 쫓겨나서도 안일만 탐하고 어버이의 원한을 풀 생각은 잊고 오랑캐에게 화친을 구걸하였으니, 어찌 은(殷)나라의 고종과 주(周)나라의 선왕(宣王)과 더불어 중흥한 군주(君主)의 대열에 끼일 수 있습니까?” 하자 시관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고쳤습니다. 공이 반쯤 취기를 타고 단번에 써내니 아직 해가 기울지도 않았다 하였습니다. 방이 걸리자 사람을 시켜 가 보게 하면서 제일 첫 번째 이름이 자기가 아니면 다시 볼 것 없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습니다.
其後靜庵趙先生光祖掌試 得宋公純對策曰 季雲後 無此作 公之爲世企慕 又如此 及殿試 考官忌而置第二 公恥之 常以坡公之居第二自擬焉 足見公平日氣槩也
그 후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선생이 시관이 되었을 때 송순(宋純)[20] 공의 대책(對策)[21]을 받아보고 계운(季雲) 이후에는 이 같은 작문이 없었다고 하였으니, 세상 사람들이 공을 바라고 사모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전시(殿試)[22]에 이르러 시관이 공을 시기하여 2등에 두니 공은 그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나 옛날 소동파(蘇東坡)가 과거에서 2등한 것과 스스로를 비교하여 태연하였으니, 공의 평소의 기개(氣槪)를 족히 알 수 있습니다.
[20] 송순(宋純, 1493~1582) : 조선 중기의 문신. 면앙정가단(俛仰亭歌壇)의 창설자,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수초(遂初) 또는 성지(誠之), 호는 기촌(企村) 또는 면앙정(俛仰亭). 담양출신. 증이조판서 태(泰)의 아들이다.
[21] 대책(對策) : 시험의 답안 즉 中興對策
[22] 전시(殿試) : 임금이 참석하여 보이던 과거 시험으로, 복시(覆試)에서 선발된 사람을 임금 앞에서 재시험하여 등급을 매겼다.
配禮安金氏 參奉尾孫女 無育 伯氏直提學公駿孫次子縣監大壯 主其祀 其兄三足堂大有 命之也 公葬始在木川 與夫人墓同岡 而公墓後返淸道之上北 以從先兆 尹公鳳朝銘其碑 而學者卽其舊居 又建祠享之
부인은 예안 김씨(禮安金氏) 참봉 (尾孫)의 여식인데 혈육이 없어서 백씨 직제학공 준손(駿孫)의 둘째 아들 현감 대장(大壯)이 공의 제사를 받드는데, 이는 그의 형 삼족당(三足堂) 대유(大有)가 그렇게 처리한 것입니다. 공의 장지(葬地)가 처음에는 목천(木川)에 부인의 묘와 같은 언덕에 있었으나 뒤에 청도의 상북면(上北面 지금의 이서(伊西))에 있는 선영에 옮겨 모셨습니다. 윤봉조(尹鳳朝)[23] 공이 그 비석에 명(銘)을 새기고 학자들이 공의 옛 집터에 사당을 지어 제사를 받들고 있습니다.
[23] 윤봉조(尹鳳朝, 1680~1761)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명숙(鳴叔), 호는 포암(圃巖). 직장 명원(明遠)의 아들이다. 저서로는 《포암집》이 있다.
禮堂之請宣額者 尹公絳宋先生浚吉趙公復陽 而郎官金公壽興也 李公殷相撰侑文 至以趨義之勇 有過黝賁 正氣不泯 撑柱乾坤贊之 世以爲確論 公稟絶異之姿 抱有爲之志 蚤得賢師 學有指授 所與交皆當世之選
예조에 사액(賜額)을 청한 것은 윤강(尹絳)[24] 공, 송준길(宋浚吉) [25]선생, 조복양(趙復陽)[26] 공, 그리고 낭관(郎官) 김수흥(金壽興)[27] 공이고, 이은상(李殷相)[28] 공은 유문(侑文)을 지었습니다. 그 가운데 이르기를 “ 의(義)를 좇는 용맹은 유분(黝賁)[29] 보다 낫고 정기(正氣)가 민몰하지 않고 천지를 떠받칠 만한 기둥이다.” 라고 하여, 세상의 확고한 여론을 밝혔습니다. 공은 특이한 자질을 타고났으며 유용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뜻을 품고 일찍이 훌륭한 스승을 만나 학문의 지도를 받았고, 더불어 사귄 사람들은 모두 당세에 뛰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24] 윤강(尹絳, 1597~166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준(子駿), 호는 무곡(無谷). 공조참의 민헌(民獻)의 아들이다.
[25] 송준길(宋浚吉, 1606~1672) :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영천군수(榮川郡守) 이창(爾昌)의 아들이다.
[26] 조복양(趙復陽, 1609~1671)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중초(仲初), 호는 송곡(松谷). 좌의정 익(翼)의 아들이다.
[27] 김수흥(金壽興, 1626~1690) :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 자는 기지(起之), 호는 퇴우당(退憂堂) 또는 동곽산인(東郭散人). 생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광찬(光燦), 양부는 동부승지(同副承旨) 광혁(光爀)이고, 양모는 광산김씨로 동지중추부사 존경(存敬)의 딸이며, 영의정 수항(壽恒)의 형이다.
[28] 이은상(李殷相, 1617~1678) :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열경(說卿), 호는 동리(東里). 조선 중기 한학 4대가의 한 사람인 정구(廷龜)의 손자로, 소한(昭漢)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여주이씨(驪州李氏)로 좌찬성 상의(尙毅)의 딸이다. 할아버지 정구와 큰아버지 명한(明漢)은 모두 제학 또는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아버지와 사촌형제들이 모두 문장에 뛰어나 일가가 사림을 이루었다.
[29] 유분(黝賁) :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용사인 북궁유(北宮黝)와 진(秦)나라 용사인 맹분(孟賁)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而竗歲蜚英 翶翔乎珥筆 橫經之列 淸裁峻議 傾動朝野 不啻若珪璉之登廟 鸞鳳之儀庭 淸粹之蘊於中 足以格君 彪炳之著於外 足以華國 進足以謀謨巖廊 退足以領袖士林 斯可謂河嶽英靈之所鍾聚
젊은 나이에 명성을 높이 널리 떨치고, 사관(史官)과 문한직(文翰職)의 반열에 올랐으며, 공명한 판단과 준엄한 논의는 조야(朝野)를 기울게 하였으니 묘당(廟堂)에 오를 예기(禮器 국가적인 인재)와 같고 난봉(鸞鳳 현인)이 뜰에 거동함과 같을 뿐만 아니라 맑고 순수함을 마음속에 간직하여 족히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아 밖으로 빛나게 하여 족히 나라를 빛나게 할 만하고, 벼슬에 나아가면 족히 조정에서 계책을 꾀하고 물러나면 사림(士林)의 영수(領袖)가 될 만하니, 이는 가히 산천의 신령한 정기를 받아 태어난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而反以厄運乘之 淫刑酷罰 中途摧折 千載之下 聞公事者 莫不掩抑鳴咽而不忍言 不能不致疑於天道人事之際 嗚呼 殆非公一人所關也
그러나 도리어 액운을 만나 부당한 형벌과 가혹한 처벌을 받아 중도에 꺾이고 말았으니, 오랜 세월이 지나도 공의 이 일을 듣고 얼울해하지 않을 수 없으며 목이 메어 차마 말을 하지 못하니, 천도(天道)와 인사(人事)에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 피해를 입은 것은 공 한 사람에게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然而當時群奸如墩 光之類 構誣煽禍 詡詡然自爲得計者 或於其身 或於其子孫 皆不免刀鉅之典 情狀畢露 昭在史牒 雖婦孺下賤 皆爲唾罵 而公之一節 秉直不回 彌久而彌彰 磨滅不得 則天人之理 信不舛矣
그리고 당시 이극돈, 유자광과 같은 간신 무리들은 거짓을 꾸며 화를 일으키며 스스로 계교를 얻었다고 큰소리쳤지만, 결국 그 당사자나 혹은 그 자손들이 형벌을 면할 수 없었고, 이 모든 정상이 드러나 소상하게 역사에 기록되니, 비록 부녀자나 아이들이나 천한 사람들도 모두 침을 뱉고 매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의 한결같은 절개와 병직(秉直 바른 도리를 지킴)은 굽지 않고 오랠수록 더욱 드러나서 소멸되지 않으니, 하늘과 사람의 도리가 진실로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寅永先祖恭肅公 亦以畢齋門人 罹史案 今於公請諡之狀 義不容辭 略掇前輩記述之可據者 以備太常氏採擇焉
인영(寅永)의 선조 공숙공(恭肅公)[30] 역시 필재(畢齋)의 문인으로서 사화에 걸렸으니 지금 공의 시호를 청하는 소장을 의리상 사양할 수가 없습니다. 선배들이 기술한 것 가운데 근거가 될 만한 것을 대략 추려서 갖추었으니 태상씨(太常氏)[31]께서 채택하시기 바랍니다.
[30] 공숙(恭肅) : 조익정(趙益貞, 1436~1498)의 시호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이원(而元). 공조좌랑 안평(安平)의 손자로, 한산군(漢山君) 온지(溫之)의 아들이다.
[31] 태상씨(太常氏) : 태상시(太常寺)의 장이다. 태상시는 나라의 제사를 주관하고 왕의 묘호와 시호를 제정하는 일을 맡은 관청이다.
嘉善大夫 吏曹參判兼弘文館提學 原任奎章閣直提學 趙寅永 撰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제학 원임 규장각 직제학 조인영[32]찬
[32] 조인영(趙寅永, 1782∼185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희경(羲卿), 호는 운석(雲石). 이조판서 진관(鎭寬)의 아들이며, 국구(國舅) 만영(萬永)의 동생이다.
출전 : 탁영선생문집 중간본, 역주본
편집 : 2015.01.29. 죽산
첫댓글 자료
좋은자료 잘보고갑니다너무나수고많았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