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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永川)의 향교(鄕校)
1. 개요
근세조선(近世朝鮮)의 전통적(傳統的)인 유학(儒學)을 중심으로 하는 관립(官立)으로는 중앙에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이 있었고 지방(地方)에는 향교(鄕校)가 있었으며, 사립교육기관(私立敎育機關)으로는 서원(書院)과 서당(書堂)이 있었다.
중앙에 있는 성균관의 규모를 축소(縮小) 한 것이 지방의 향교(鄕校)이다. 향교는 대성전(大成殿)이 있어, 공자(孔子)의 위패(位牌)를 안치(安置)하고 대성전 앞 좌우(左右)에 동무(東廡) 서무(西廡)를 세우고 이곳에는 유교에 공헌(貢獻)한 많은 현인(賢人)을 배향(配享)하였으니, 이것이 향교의 문묘(文廟)이다.
중앙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 설치되어 있는 문묘(文廟)에는 공자(孔子)를 주벽(主壁)으로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를 배향하고 공문 10철(孔門十哲) 및 송조 6현(宋朝六賢)과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명현(名賢) 18현을 종사(從祀)했다.
우리나라 문묘의 시작은 신라시대인 성덕왕 13년(714)에 김수충(金守忠)이 당(唐)에서 공자와 10철, 72제자의 화상(畵像)을 가지고 돌아와 왕명에 의해 국학(國學)에 두면서 비롯되었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공자 이하 133위를 모시게 되었다.
문묘의 배향에는 인물(人物)과 그 수(數)는 고을의 격(格)이나 향교의 규모(規模)에 따라 대설위(大設位), 중설위(中設位), 소설위(小設位)로 구분하여 정해지는데 대개 관찰사(觀察使)가 상주(常駐)하는 부(府)는 대설위이고, 부(府)와 군(郡)이 중설위이며 현(縣)이 소설위라고 한다.
대설위(大設位) 향교에는 공자(孔子 : 大成至聖文宣王) 아래 사성(四聖 : 顔子, 曾子, 子思, 孟子)과 십철(十哲)과 송조육현(宋朝六賢)의 위패(位牌)를 대성전(大成殿)에 모시면서 공자 72현(孔子 七十二賢), 한, 당(漢, 唐) 이십이현(二十二賢)을 배향(配享)하며 우리나라 십팔현(十八賢) 가운데 동무(東廡)에 아홉 분(薛聰(弘儒候), 安裕(文成公), 金宏弼(文敬公), 趙光祖(文正公), 李滉(文純公), 李珥(文成公), 金長生(文元公), 金集(文敬公), 宋俊吉(文正公))을 모시고, 서무(庶廡)에 아홉 분(崔致遠(文昌候), 鄭夢周(文忠公), 鄭汝昌(文戱公), 李彦迪(文元公), 金麟厚(文正公), 成揮(文簡公), 趙憲(文烈公), 宋時烈(文正公), 朴世采(文純公)을 모셨다.
중설위(中設位) 향교에는 오성(五聖 : 孔子와 四聖)과 십철(十哲), 송조육현(宋朝六賢)을 대성전(大成殿)에 모시고 그 동 ․ 서무(東 ․ 西廡)에 우리나라의 십팔현(十八賢)을 모셨다.
소설위(小設位) 향교는 오성(五聖)과 송조사현(宋朝四賢 : 주돈이, 정호, 정이, 주희)을 대성전에 모시고 그 동 ․ 서무(東 ․ 西廡)에 우리나라 십팔현(十八賢)을 모셨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우리나라 명현 18위를 동무(東廡)· 서무(西廡)에 두었으나,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 1949년에 동무와 서무에 종사한 중국 명현의 위판을 매안(埋安 : 神主를 땅에 묻는 일)하고 우리나라 명현 18위를 대성전으로 승당(陞堂)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묘(文廟)의 앞뜰에 교육을 시키는 도장(道場)인 학교가 있으니, 이것이 명륜당(明倫堂) 이다.
그 좌우에 학생들이 기숙(寄宿)하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으니 요즈음의 기숙사(寄宿舍)와 같은 것이다.
직원(直員)은 종육품(從六品)의 교수(敎授)와 종구품(從九品)의 훈도와 품위(品位)가 없는 학장(學長) 등 세 가지 종류의 직원을 두었는데 이는 고을이 크고 적음에 따라 다르게 배치(配置)하였으니 주, 목, 부(州, 牧, 府)에는 교수(敎授) 군, 현(郡, 縣)에는 교수(敎授) 혹은 훈도(訓導)를 두었고 500호(戶) 미만의 작은 곳에는 학장(學長)만 두었다.
학생 정원은 대설위에는 90명, 중설위에는 50명, 소설위에는 30명이었다.
우리 영천에는 중설위 향교인 영천향교와 소설위 향교인 신녕향교가 있다.
2. 영천향교(永川鄕校)
영천향교는 영천시 교촌동 46~1번지에 위치하며 조선 세종(世宗) 17년(1435)에 중국 목수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중종(中宗) 8년(1513)에 군수 이중량(李仲樑)이 명륜당(明倫堂)과 사마소(司馬所) 및 서별실 및 행곽 10칸, 외대문 및 행곽 7칸을 새롭게 창건하였다.
선조(宣祖) 3년(1570) 9월에 실화로 소실되고, 동왕(同王) 36년(1603)에 군수 이유홍(李惟弘)이 동 · 서재를 중수하였다.
광해(光海) 10년(1618)에 군수 조명욱(曺明勗)이 명륜당 12칸을 영건(營建)하고, 동왕(同王) 14년(1622)에 군수 황효의(黃孝儀)가 대성전을 중창하였다.
현종(顯宗)과 숙종(肅宗) 때 군수 한명원(韓明遠)이 전사청(典祀廳)을 창건하고, 1913년 군수 남필우(南泌祐)가 대성전에 단청을 하였으며, 1926년에는 군수 이돈영(李敦英)이 대성전을 중수하였다.
1978년 3월에 대성전이 보물 제616호로 지정되었다.
1983년에는 명륜당과 동 ․ 서재를 개방하여 국학학원(國學學院)을 개원하여 사회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전국 최초로 청소년을 위한 충효교실(忠孝敎室)을 열었다.
1987년 10월 20일에 대성전을 중건하고 삼일재(三一齋)를 중수하였다.
대성전(大成殿)에는 공자(孔子)를 주벽으로 사성(四聖)과 동 · 서종향에 송조 2현 및 동 ․ 서벽하(東 ․ 西壁下) 에 우리나라의 18현을 봉안하고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석전대제(釋奠大祭)를 봉행하고 있다.
동 · 서무(東 · 西廡)는 우리나라 18현을 봉안하였는데 1984년 8월 4일 대성전으로 이봉안(移奉安)하고 지금은 제기고로 사용하고 있으며, 전사청은 석전대제 때에 제수고로 사용하고 있다.
명륜당은 향내 노석유(老碩儒)를 모시고 지방 영재를 모아 학문과 도의를 강학하던 전당인데 석전대제 때 개좌(開座) 집사(執事) 분정(分定)을 하여 대제 봉안을 준비하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동 · 서재는 유생(儒生)이 기숙하며 수학을 하던 곳인데 현재는 국학학원(國學學院) 강의실로 사용하고 있다.
유래루(牖來樓)는 2층 건물로 성묘(聖廟)의 문루로써 누각에 올라 예의를 강론하고 봄에는 시를 읊고, 여름에는 글을 외우는 강소이며, 삼일재는 향내 영재를 육영하던 곳으로 맹자 삼락(三樂) 중에 그 하나를 취한 것인데 일명 사마소라 한다.
3. 신녕향교(新寧鄕校)
영천시 신녕면 화성리에 소재하는 신녕향교(新寧鄕校)의 초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명종 6년(1515년) 금계 황준량 현감이 재임 시에 중수하였다고 하며 화산 및 명천 위에 있었다고 하니 그 이전에 창건되었음이 분명하다.
그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 7년(1615) 현 향교 뒤편에 다시 세웠다가 숙종 12년(168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신녕향교의 명륜당(明倫堂)은 비교적 규모가 크고 구조도 건실하며 지붕의 형태는 이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이 건물은 철종 3년(1852년) 5월에 중건하였고 이때 다른 건물들도 중수되었다 한다.
신녕향교 대성전은 공자(孔子),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자(子思子), 맹자(孟子) 등 5성과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주희(周熹) 등 송조 4현 및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안향(安珦), 정몽주(鄭夢周),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이이(李珥),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 조헌(趙憲),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박세채(朴世采) 등 우리나라 명현 18분 등 27분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드리는 곳이다.
4. 배향인물(配享人物)
1)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공자(孔子)
공부자(孔夫子)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의 대사상가ㆍ교육자이며, 유교의 개조(開祖)이자 성인(聖人)다. B.C. 551년에 나셨으며, B.C. 479년에 돌아가셨다.
공(孔)은 성이고 자(夫子)는 남자의 미칭으로 '선생'의 뜻이며,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노(魯)나라 창평향 추읍(昌平鄕 추읍 ; 지금의 山東省 曲阜縣 남쪽 추현)에서 태어났다.
문선왕은 성이 공(孔)이요. 휘(諱)는 구(丘)이며, 자(字)는 중니(仲尼)인데, 노(魯)나라 사람이다. 아버지는 숙량흘이요. 어머니는 안(顔) 징재이다. 노나라 양공 22년인 경술년 11월 경자에 탄생하여 애공 16년 4월 기축에 졸하시니 애공이 뢰하여 니보라고 하였다.
한(漢)나라 평제가 원시 원년에 포성선니공이라는 시호를 내고 동한의 화제가 영원) 4년에 포존후를 봉하였으며 북위의 효문제가 태화 16년에 추국공으로 봉하고 수나라 문제가 선사니보로 증시하였으며 당나라 태종이 정관 2년에 높여서 선성이라고 하였다가 11년에 높여 선보라고 하였으나 고종 현경 2년에 다시 높여 선성이라고 하였다. 건봉 원년에는 태사를 추증하고 천수 원년에 융도공으로 봉하였다. 현종 개원 27년에 문선왕으로 추시하고 송나라 진종 대중 상부 원년에 현성문선왕으로 시호를 가자하고 5년에 지성문선왕)으로 가봉하였으며 원나라 무종 대덕 11년에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으로 가봉하였다. 명나라 세종 가정 9년에 작시를 버리고 지성선사(至聖先師)라고 불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계속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고 일컬었다.
2) 복성공(復聖公) 안자(顔子)
안회(顔回, B.C.521 ~ B.C.490)는 춘추시대의 유학자이며 공자의 수제자이고 자는 연(淵)이어서 안연(顔淵)이라고도 하며 노(魯)나라 출신이다. 아버지와 공자의 문하에 입문하여 공자의 3천 제자 중에서 으뜸가는 제자가 되었다. 공자의 뛰어난 제자 가운데 덕행(德行)으로 손꼽히는 제자이며, 생활이 곤궁하였는데도 인(仁)을 성실하게 실천하였다. 공자도 안회에 대해 “다른 사람은 ‘인’을 하루도 실천하기도 어려운데 안회는 ‘인’ 을 삼 개월 동안이나 어기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한 바 있다.
안회는 가난함에 굴하지 않고 ‘도(道)’를 즐기는 안빈락도(安貧樂道)의 전형으로 평가되며, 공자의 제자 중에서도 제일로 평가되어 ‘복성(復聖)’ 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공자보다 30세 아래였으나 불행히도 3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3) 종성공(宗聖公) 증자(曾子)
증삼(曾參, B.C.505 ~ B.C.436)은 공자의 제자였던 증점(曾點)의 아들이며 자는 자여(子輿)로서 공자보다 46세 연하이며 노나라 무성(武城) 지금 산동성 가상현(嘉祥縣)출신이다. 『논어』전편을 통해 여러 번 “증자(曾子)”라고 경칭(敬稱)되는 것으로 미루어 『논어』가 증자의 문인들에 의하여 정리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증자는 제자 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리고 노둔하였으나 학문의 뜻이 가장 성실하고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공자의 도통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증자는‘효’의 실천자로 유명하다. 증자는 공자의 도를 전수받아 자사(子思)에게 전했으며 자사는 다시 맹자에게 전했다. 증자는 고향인 수사(洙泗)에서 평생을 제자 양성에 힘썼으며, 그의 저서로는 사서 가운데 하나인 『대학』과 『효경』이 있다. 후세의 유림들은 그를 종성(宗聖)으로 받들고 안자, 자사, 맹자와 함께 4성(四聖)으로 추존하였다.
4) 술성공(述聖公) 자사(子思)
본래 이름은 공급(孔伋. B.C.483 ~ B.C.402)이며 자는 자사(子思)이다. 공자의 손자로서 일찍이 증자에게서 공부를 배웠고, 그의 문인이 맹자에게 학문을 전수함으로써 사맹학파(思孟學派)를 형성하였다.
그는 공자의 중용사상(中庸思想)과 시중사상(時中思想)을 계승. 발전시켰고, 사서 중의 하나인 『중용』을 저술하였다. 자사는 하늘(天)과 인간(人),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본성(性)과 그 본성을 되살리는 방법(道)에 대하여 연구하여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이론을 세웠다. 후세 학자들은 자사가 공자의 도를 이었다고 하여 술성(述聖)으로 받들었다.
5) 아성공(亞聖公) 맹자(孟子)
맹자(孟子, B.C.372 ~ B.C.289)의 이름은 가(軻)이고 자는 자여(子與)이며 추(鄒) (지금의 산동성 추현) 출신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자라서는 문인에게서 수업을 받았으며, 공자의 도를 독실하게 믿고 따랐다. 학문을 성취한 후에는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여러 나라를 유세(遊說)하여 유교의 도덕정치를 역설하였다. 맹자가 살았던 시대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전국시대로서 열국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맹자의 정치이론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고향으로 돌아온 맹자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공자의 도를 전하고 『맹자』7편을 지었다.
맹자의 대표적인 사상으로는 인간의 본성은 날 때부터 선하다는 성선설(性善設)이 유명하며, 대장부(大丈夫)의 호연지기(浩然之氣)와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부동심(不動心)을 기를 것을 주장하였던 것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또한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왕도정치를 주장하여 패도정치(覇道政治)를 하는 왕은 하늘의 이름으로 바꿔도 된다는 혁명론(革命論)을 역설하였다. 당시에는 그의 사상이 시행되지 않았지만 이 주장은 후세 정치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이라 하여 아성(亞聖)이라고 높이게 되었다.
6) 도국공(道國公) 주돈이(周敦頤)
주돈이(周敦頤, 1017 ~ 1073)의 자는 무숙(茂叔)이며 세칭 '염계'선생이라고 불렀다. 30여 년간의 관료생활 중 청빈하고 강직하여 높은 관직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유교뿐 아니라 불교와 도교에도 조예를 지니고 있었던 그는 『주역(周易)』과 『중용』에 대한 뛰어난 관심으로 우주의 본체를 규명한 『태극도설(太極圖設)』을 완성하였다.
또한 ‘성(誠)’ 을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근거로 보아 강조하였다. 정치학설에 있어서도 유교의 전통적인 덕치주의(德治主義)에 입각하여 어진 사람을 등용해야 한다는 상현주의(尙賢主義)를 역설하였다. 정명도, 정이천을 제자로 길러냈으며 훗날 송대 성리학의 새로운 장을 연 모태가 되었다.
7) 예국공(豫國公) 정호(程顥)
정호(程顥, 1032 ~ 1085)는 동생 정이와 함께 이정자(二程子)라고 불리며, 시호를 따라 정명도(程明道)라고도 불린다. 한때 관직에 있으면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에 반대하다가 좌천되기도 하였으며 노자와 불교의 사상에도 능통하였다.
육경(六經)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주렴계 선생의 태극(太極)개념 대신 건원(乾元)개념을 사용하여 유교의 본체론을 심화 시켰다.
그는 사람의 죽음과 삶은 기(氣)의 변화에 불과하다는 기일원론(氣一元論)적 유교이론을 세웠으며, 인(仁)을 강조하여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구분점으로 삼았다. 왕수인(王守仁) 등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동생 정이와 함께 송대 성리학의 대표자로 손꼽힌다.
저서로는『명도문집(明道文集)』과 『어록(語錄)』이 있다.
8) 낙국공(洛國公) 정이(程頤)
정이(程頤, 1033 ~ 1107)는 정명도의 아우로서 이천(伊川)지방을 한때 다스렸기 때문에 정이천(程伊川)으로 잘 알려져 있다. 형과 함께 주렴계 선생에게서 유교를 배웠으며 왕도정치를 강조하였다.
형의 기일원론(氣一元論)과 달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여 ‘기’ 중심의 사상에서 ‘이’ 중심의 사상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性(성)에는 기품지성(氣稟之性과 천연지성(天然之性)이 있다고 하여 훗날 주자가 본연지성(本然之性)이론을 세우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정이천은 형인 정명도와 개성이나 학풍이 다른 점이 많았다. 형이 덕(德)을 중시한 반면 이천은 주지적(主知的)성격이 강했으며, 형의 학문 방법이 직관적, 연역적이었던 반면 경험적, 귀납적, 분석적 성격이 강했다. 이정자의 학문과 주희의 학문을 통칭하여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한다.
저서로는『역전(易傳)』『춘추전(春秋傳)』『이천문집(伊川文集)』등이 있다.
9) 휘국공(徽國公) 주희(朱憙)
주희(朱憙, 1130 ~ 1200)북송 유교학자들의 학설을 종합 계승하고 동시대의 불교와 도교를 섭렵함으로써 송대의 유교를 집대성 하였다.
자는 원회(元晦)이며 호는 회암(庵晦)이고 본관은 휘주(徽州)이다. 19세기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다가 28세에 고향으로 돌아가 약 20년 동안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학문의 기본을 공맹(孔孟)에 두고 성리학을 완성시킴으로써 유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이로 인해 맹자 이후 1400여 년간 끊겨왔던 유교의 도통을 성리학에 접목시킴으로써 유교를 부흥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의 철학체계인 ‘주자학(朱子學)’은 성리학의 진수를 종합한 것으로서 그 이론이 정밀하고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 이후의 유교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그의 유교이론이 조선시대전반을 통하여 정설로 인정되고 과거시험의 학과로 채택됨에 따라 장기간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저서로 유명한 것은『주자대전(朱子大全)』,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등이 있다.
10)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
설총(薛聰, 650경 ~ 740경)은 신라경덕왕 때 활동하던 유학자로서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의 아들이기도 하다. 강수(强首),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로 꼽힌다.
처음에는 불교에 입문하였으나 후에는 유학에 전염하여 통일신라 이후에는 귀족의 자제를 중심으로 가르치는 국학을 세워 유교의 발전을 꾀하였다.
유학정신에 입각한 도덕정치의 실현을 추구한 정치가로서, 그리고 유교의 대중화에 기여한 학자로서 신라시대 유교발전에 큰 공헌을 한 설총은 고려 顯宗(현종) 13년(1022)에 홍유후의 시호를 받고 문묘에 모셔졌다.
11) 문창후(文昌候) 최치원(崔致遠)
최치원(崔致遠, 1243 ~ 1306)의 자는 고운(孤雲)이며 경주 최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12세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이름을 떨치기도 한 그는 시대를 대표하는 유교인 가운데 한 삶으로서 인간의 주체적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문장에도 뛰어났는데 당나라에서 황소(黃巢)의 난(亂)이 일어났을 때 이들 반란군에 대한 토벌을 격려하기 위하여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유명하다.
고려조에 들어와 문창후에 봉해졌으며, 현종 11년(1020)에 문묘에 모셔졌다. 『고운집(孤雲集)』, 『계원필경(桂苑筆耕)』 등의 저서가 전해진다.
12)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
안향(安珦, 1243 ~ 1306)은 고려 말에 활동했던 유학자로서 우리나라 최초로 송대의 주자학을 소개 하였다. 그는 주자학 가운데서도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실천도덕과 관련된 내용을 강조하였으며, 공자의 학문은 주자의 학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평가하였다.
선생이 죽은 뒤 고려 충숙왕의 命(명)에 의하여 그의 초상화가 그려졌는데 이 초상화는 현재 紹修書院(소수서원)에 보관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초상화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32년 (1306년)에 문성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공로로 고려 충숙왕(忠肅王) 6년(1319)에 문묘에 모셔졌다.
13)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
정몽주(鄭夢周, 1337 ~ 1392) 고려 공양왕 때의 유학자로 호는 포은(圃隱)이며, 목은 이색(李穡), 야은 길재(吉再) 등과 더불어 고려 유교를 대표하는 삼은(三隱)으로 불렸다.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여 고려의 국운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국가의 장래에 대한 입장차이로 인하여 서로 대립하게 되었으며, 마침내는 개성의 선죽교에서 살해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되었다. 그는 이미 국립대학의 성격을 갖고 있던 성균관 이외에 또 다시 개성에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설치하여 교육의 기회를 확대 하였으며 지방에도 향교를 세워 유교진흥에 힘썼다.
그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서, 대유학자로서 선비의 절개를 지키며 고려와 운명을 함께 함으로써 후세의 귀감이 되어 조선 太宗(태종) 원년에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받고, 중종 12년(1517)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14)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
김굉필(金宏弼, 1454 ~ 1504)은 조선 성종, 연산군 때에 활동했던 유학자로서 호는 한훤당(寒喧堂)이다. 김종직의 제자로서 유교의 생활화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귀양살이를 하였으며, 1504년 甲子士禍(갑자사화)때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유교의 입문서라 볼 수 있는 『소학(小學)』을 중요하게 여긴 그는 평생토록 이 책을 곁에 지니며, 『소학(小學)』에 제시된 생활규범을 하나하나 실천하기를 힘썼다.
선조 7년에 문경공이라는 시호가 내려 졌으며, 광해 2년(1610)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15)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
정여창(鄭汝昌, 1459 ~ 1504)은 조선 연산군 때에 활동했던 유학자로서 호는 '일두' 이다. 젊은 시절 관직에 마음을 두지 않고 유교에 몰두하였으며 41세가 되어서야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무오사화로 인하여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되었으며 갑자사화로 인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어 처형하는 극형)의 형벌을 당했다. 이같은 불행한 삶을 살았으나 학문적으로는 정몽주,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유교의 정통을 전수받아 성리학의 대가로서 학문의 목적을 성인이 되는 것에 둔 정통파 유학자였다.
선조 8년에 이르러 문헌공의 시호가 내려졌고 광해 2년(1610)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16)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조광조(趙光祖, 1482 ~ 1519)는 조선 중종 때의 유학자이자 진보적인 정치가이기도 했던 선생의 호는 정암(靜庵)이다. 과거에 급제한 후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국가 발전을 위하여 인재의 등용이 필수적이라 보고 현량과를 설치하여 새로운 인재를 발굴 등용하였다.
유교의 지치주의(至治主義)에 기반을 둔 개혁정치를 주장하였으며 당시 부당한 특권을 누리고 있던 훈구대신(勳舊大臣)의 특혜를 깎아내리고 부패한 관리를 제거하는 등의 과감한 개혁조치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보수 세력에 부딪혀 끝내 그 뜻을 펴지 못하고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아 죽음을 당하였다. 유교이념에 바탕을 둔 선생의 개혁정치는 반대파의 모함으로 완성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선조 1년에 문정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광해 2년(1610)에 스승 김굉필과 더불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17)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
이언적(李彦迪, 1491 ~ 1553)의 호는 회재(晦齋)로서 조선 중종시기에 활동하던 성리학자였다.
24세에 관직에 나간 이후 국사(國事)를 돌보다가 당시 부당한 권세를 누리고 있던 김안로(金安老)에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이유로 1531년에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뒤 유교의 학문 발전에만 전념하였다.
유교의 민본사상(民本思想)에 근거하여 도덕정치 구현을 주장하였는데 김안로가 죽은 뒤 이조판서와 지금의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부 판윤(判尹)등을 지냈다.
그 후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귀향생활 속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쳤지만 훗날 그 당시 여러 갈래로 나뉘어 발전해 온 성리학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 준 공로로 선조 38년(1605)에 문헌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광해군 2년(1610)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18)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이황(李滉, 1501 ~ 1570)의 호는 퇴계(退溪)이며 조선 중종 때에 활동하던 유학자이다.
관직보다는 유교발전에 뜻을 두고 있던 선생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유교 경전 저술활동과 제자교육에 힘썼다. 한국 유교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고매한 인격자로 알려진 그는 60세 되던 해에 도산서당(陶山書當)을 짓고 후진 양성에 주력하여 유성룡(柳成龍)을 비롯한 수많은 유학자를 배출하였다.
그는 유교의 실생활과 관련된 윤리도덕을 우리나라의 토양에 정착 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공로로 선조 9년(1576)에 문순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광해군 2년(1610)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19) 문정공(文正公) 김인후(金麟厚)
김인후(金麟厚, 1510 ~ 1560)의 호는 하서(河西)이며 성균관에 입학하여 이황 등과 함께 공부하며 당시의 유교학자들과 깊은 교류를 가졌다.
그는 『중용(中庸)』사상을 기본으로 하여 유교의 근본원리를 알리는데 공헌을 하였으며, 인간의 순수한 본연의 모습인 ‘본연지성(本然之性)’을 보존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황 등과 함께 조선에서 주자학의 이념을 확립해 나가는데 많은 공헌을 인정받아 현종 10년(1669)에 문정공의 시호를 받게 되었으며, 정조 20년(1796)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20)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이이(李珥, 1536 ~ 1584)는 조선 명종(明宗)과 선조(宣祖)시기에 걸쳐 활동하였으며 호는 율곡(栗谷)이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났으며 과거에 9번 장원급제한, 조선왕조 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어머니 신사임당 申(신)씨가 돌아가시자 더욱 학문에 몰두하여 조선 유교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이상과 현실을 잘 조화하여 시행해야 한다는 주장 아래 왜란에 대비한 10만 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황과 더불어 조선시대 쌍벽을 이루는 유학자인 그에게는 인조 2년(1624)에 문성공 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이어 숙종 8년(1694)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21)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
성혼(成渾, 1535 ~ 1598)은 조선 선조 때의 성리학자로 호가 우계(牛溪)이다.
당시의 저명한 유교학자들과 교류하며 유교적 지식을 쌓았고 불혹의 나이인 40세에 이르러서야 관직에 나아가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을 모시고 피난을 갔었는데 난이 평정된 뒤 일본과 화의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였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특히 유학자로서 도덕적 행위와 그 근거인 “인심도심(人心道心)”을 놓고 벌인 이이와의 토론은 조선조 유학사상 손꼽을만한 중요한 업적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인조 11년(1633)에 문간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숙종 7년(1681)에는 문묘에 배향되었다.
22)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
김장생(金長生, 1584 ~ 1631)의 호는 사계(沙溪)로서 율곡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바 있으며 유교발전을 위하여 큰 공헌을 하였다.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국가적 의전이나 주요행사가 있으면 그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그는 당시 어지러운 난세를 극복하고 유교적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가례(家禮)』를 부분적으로 고치고 널리 보급하는 일에도 공헌을 하였다.
이 같은 노력으로 그의 예론(禮論)은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는 모든 의례의 규범이 되었고, 이 같은 공로로 효종으로부터 문원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숙종 43년(1717)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23)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
조헌(趙憲, 1544 ~ 1592)은 조선 선조 때의 유학자이자 의병장인 조헌의 호는 중봉(重峰)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그를 따르는 1,6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왜적에 맞서 싸웠다. 그는 의병활동을 통하여 국가를 위해서는 초개같은 몸을 버린다는 유교의 의리정신을 실천하였고,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7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
이러한 애국애민(愛國愛民) 정신을 기려 인조 27년(1649)에 문열공의 시호를 받았으며, 고종 20년(1883)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24)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
김집(金集, 1574 ~ 1656)의 호는 신독재(愼獨齋)이고 유교 예학(禮學)의 선구자로 알려진 김장생의 아들이기도 하다. 호 신독재(愼獨齋)는 『대학』의 “군자는 반드시 홀로 있을 때를 삼가 하여 조심한다(君子必愼其獨世)” 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개인의 내면적 도덕 정신을 한 순간이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유교적 예를 실천할 것을 주장하였다. 부친과 함께 한국 유교의 독창성을 빛내준 예학의 기본적 틀을 갖추어 놓았기 때문에 효종 10년(1659)에 문경공의 시호를 받았으며 고종 20년(1883)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25)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
송시열(宋時烈, 1607 ~ 1689)의 호는 우암(尤庵)이고 조선 인조(仁祖), 효종(孝宗)년간에 활동하던 유학자이다.
병자호란 후 효종을 도와 청나라와의 화의를 거절하고 북벌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화의파들에 의해 고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파란만장한 정치가로서 뿐만 아니라 율곡 이이의 학설을 이어받은 유학자로서의 삶을 살았으며 전란 속에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숙종 21년(1695)에 문정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정조 32년(1756)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26)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
송준길(宋浚吉, 1606 ~ 1672)의 호는 동춘당(同春當)이며 조선조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과 김집에게 성리학과 예학을 전수받았다. 송시열과 함께 효종을 도와 북벌을 시도하다가 좌절되자 물러나 낙향하는 절개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예학에 정통하였던 그는 유교의 생활예절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문장에도 뛰어나 『충렬사비문』을 비롯하여 명륜당의 현판의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숙종 7년(1681)에 이르러 문정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영조 32년(1756)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27)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
박세채(朴世采, 1631 ~ 1695)는 조선 숙종(肅宗) 때의 유학자로 호는 남계(南溪)이며 송시열 등과 교류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그릇됨을 지적하고 당쟁의 중재에 진력하였으며, 당쟁의 근절을 위하여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신라에서 시작하여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교학자들의 사제(師弟)관계와 교류 상황 등을 기록한『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을 저술하여 학술적으로 공헌을 하기도 하였다.
숙종24년(1698) 문순공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이어 영조 40년(1764)에 문묘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