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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왕과 남제왕 개중비직은 개로대왕의 친아들!"
男弟王 = "開中費直"이며, 공주송산리 6호분의 주인.
"공주왕릉원 6호분 유물"
"일본고고국보2호,우전8번경과+에다후나야마 유물들이 6호분의 유물".
공주6호분의 陵의 주인은 斯麻의 男弟(남자아우) 開中費直!
“소진철 교수님의 우전팔번경의 탁본의 사진 직경22cm"
503년 癸未年에 斯麻王이 常方에서 이 쳥동경을 만들어 아우 開中費直에게 하사한 동경을 간직하다가, 529년 이후에 6호분에 묻힌 동경.
1932년에 가루베가 6호분을 혼자서 완전 도굴하여다가, 일본고고국보2호로 만든 우전팔번신사경으로 둔갑시킨 癸未銅竟.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 男弟王 在意紫沙加宮時 斯麻 念長寿遺開中費直 穢人今州利二人等 取白上同二百旱 作比竟
"사마대왕년 503년8월10일 의자사가궁에 있는 남동생왕 개중비직이 장수하기를 바라면서, 예맥인 금주리와(다른 한사람) 2인등이 양질의 백동2백한으로 이경을 만들었다."
*사마계미년=503년, *대왕년=사마, *남제왕=개중비직, *의자사가궁=공주 수촌, 만든사람=예맥인 금주리+1인.
*念長寿遺 = 장수하길 염원함.을 念長奉遣= 무슨 뜻? 왜인들 주장.
일본故古국보 2호 "우전8번신사경"은 1932년에 공주송산리 6호고분군에서 가루베지온(輕部지온)이 능의 천장을 뚫고 유물들을 완전 도굴하고,
1933년애 왜경들의 철통같은 경비속에 한국사람은 근접도 못하게하고서 발굴했을적엔 유물들은 없고 깨끗이 청소된 빈무덤이었다함.
우전8번신사 = "신공황후"를 모신다는 神사.
신사의 제사장의 설명 ; "우전8번신사경과 칠지도를 "신공황후(321~389)가 三韓을 정벌할적에 삼한주민이 왕에게 받친것" 이라는데,
마한,변한,진한이 사마왕의 계미년(503년)이후란 말인가?
6호분의
다른 유물들은 1932년 도굴품을, 1873년에 船山(에다후나야마)고분에서 발굴한 것으로 만들어, 일본유물로 둔갑시키고 있다.
1934년 글자를 판독했다는 보고서가 이를 말해주는 것이다.
1932년에 6호분에서 도굴한것을
1934년에 판독했다는 글자.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 男弟王 在意紫沙加宮時 斯麻 念長寿遺開中費直 穢人今州利二人等 取白上同二百旱 作比竟"
江田船山(에다후나야마)의 환두대도의 75글자 판독
"治)天下獲(復) * * * 鹵大王世奉爲(事) 典曺人名(無)利弓
八月中用大鐵* 四尺*刀 八十練六十* 三寸上好*刀
服此刀者長寿 子孫**得三恩也 不失其所銃 作刀者 伊太*
書者張安也. " ***결자는 百濟蓋. 蓋鹵王때 辛亥年(471년)
공주왕능원 6호분의 개중비직의 유물
우전8번신사경(계미동경)은 = 503년 사마가 아우 개중비직이 의자사가궁(의당수촌)에 남제왕(담로왕)으로 있을적에 사마가 아우 개중비직이 장수하길 바라면서 만들어준 청동경이고, + 선산의 환두대도 손잡이에 이글이.
환두대도는 = 471년 개로대왕이 개중비직의 출생의 선물로 개로왕이 만들어 준것이었기에, 개중비직이 간직하다가 529년이후에 무덤에 매장된 유물들이다.
계미동경=인물화상경(우전신사경)은 48글자중에 "斯麻"라는 글자 때문에 우전8번신사에 숨겨두고, 1934년부터 해독하고서는, 삼국사기의 사마왕이라는 역사때문에, 1932년부터~1971년까지 삼국사기는 허구의 역사서라 폄하하면서, 1951년에 6월9일(한국동란중)에 일본고고국보2호로 내어놓은 청동경(거울)이다.
계미동경과, 선산의 유물이라는 것들이(금동신발,금동관모 등)은
斯麻(武寧)王의 常方(왕의 물건을 제작 관리하든 관청)에서 만든것으로,
무령왕능의 유물들과 똑같은 유물들이다.
江田船山(에다후나야마)의 유물들과 =공주 수촌 4호고분군(삼근왕)의
금동모와 환두대도는 거의 똑같은 것들이다.
위의 문장내용에 어느글의 퍼즐이 옳을가?
왜인들은 1.念長寿遺 = 念長奉遣자로, 遺=遣자로 만들어 =
1. 斯麻念長寿遺開中費直 =사마가 개중비직이 장수하길 바라며. 를
2. 斯麻念長奉遣開中費直 =사마가 男弟王에게 길이 봉사하기 위하여
開中費直을 보내어, 예인금주리와 경을만든 장인.으로 만들고 있다.
피장자를 알수있는 능이 2개가 있다.
1. 斯麻王 = 武寧王 능(1971년 발굴).
2. 6호분 = 斯麻 男弟王(담로)(1932년도굴) = 開中費直의 능이다.
무령왕능의 제작자는 6호분의 주인인 사마의 男弟王 開中費直 이시며,
竟에 나타나 있는 대로 건강이 약하였다는 것이 나타나 있다.
그러기에 개중비직이 後生을 준비하여, 자기 陵(6호분)을 정성들여 만들었는데(513년), 무령왕이 갑자기 서거하자, 자기 능의 상좌에다 서둘러 무령왕 능을 만들었다는 증거가 "6호분은 벽돌도 고급이고 정교하게 빈틈없이 만들어지고 정성들여졌는데, 무령왕능은 부실공사의 흔적"이 여러 곳에서 나타고 있다.
개중비직의 지휘하에 사마왕과 왕비를, 정지산에서 3년상을내고
"무령왕(525년)을 안장하고, 왕비(529년) 합장하여 안장"하였다.
입구를 막은 마지막 벽돌이 6호분의 벽돌이 임진년=512년에 만든벽돌 이었다. 남제왕은 빈틈없는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무령왕의 지석을 기록들을 남기신 분)이라, 6호분에는 더 자세한 역사서가 매장되엇었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도굴하여다가, 일본의 역사서인 서기를 만것이다.
일본서기="공주의 마한의 역사로 일본고서기 만들고, 공주의 비류백제의 역사로 일본서기를 만든것.
江田船山(에다후나야마)의 환두대도의 "蓋鹵大王世"(471년경)의 글과 우전신사경이라는 경에 "斯麻 大王年" 癸未年(503년)이라는 글자는 두 유물이 한곳, 6호분의 유물임을 입증할수있는 것이다.
사마왕이 개로왕의 아들로 기록된 1914년(대정3년)에 강효석이 만든책
典故大方왕력편에 기록되어 있음.
癸未銅竟에 開中費直은 斯麻의 男弟이니 두분이 개로왕의 아들들이다.
이것은"사마대왕의 지석의 탁본"
지석에 “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 年六十二歲 癸卯年 五月 丙戌朔 七日壬辰 崩” 세겨져있음.
이지석이 발견되지 못하였다면, "癸未銅竟"이 우전8번신사경이되고, 일본고고국보2호가 된 억지주장이, 왜의 역사가 될뻔한 끔직한 역사 반란! .
일본인들이 삼국사기에 백제대왕들의 죽음을 崩을 薨으로 조작가필된것.
*계미동경속에 斯麻라는 글자때문에 일본의 역사로 만드는데, 걸림돌이되고 도굴품이라는게 탄로나니까? 사마를 뒷전으로 숨기고 있는것.
1932년~1971년까지 삼국사기는 허구의 역사서라고, 폄하하다가,
1971년 사마왕능의 지석의 내용이 삼국사기와 일치하자, 설화를 만들어
일본서기 16권 무열기 4년의 기사를 1972년에 적어넣었다고.
"이병도의 삼국사기 무령왕 해설편 註에"
1972년에, 일본서기 16권 무열기 4년에 백제신찬을 인용하여 "撰者가 說로 그밑에 註로이끌 어 "사마의 출생의 비밀을 만든 설화라고 적혀있다.
즉 (사마의 출생의 비밀)
"개로왕의 동생 곤지가 461년 만삭이 된 개로왕의 왕비(형수)를 아내로삼아 向倭사신으로 가든 중에 오비야(가가라사끼)의 동굴에서, 사마를 낳아서 섬이 왜어로 시마라서 시마왕 시마왕하다가 사마왕이라고 하였다".는 허구의 전설을 만들어 냄. 461년엔 아무런 역사의 기록이 없다.
"곤지"는 475년에 고구려군에게 한성이 박살나고, 문주가 10월에 웅진으로 천도하고 난 이후에, 476년 2월에 한성유민들을 대리고 웅진으로 내려와, 의자사가궁(수촌)에 머물다가, 477년 4월에 내신좌평에 임명되었다가, 7월에 웅진에서 解구에의해 살해된 분인데, 일본은 일본 왕으로 만듬은 사마의 출생비밀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6호분은 무령왕능 보다 먼저만들어 졌으며, 6호분의 주인인 남제왕 개중비직이 무령왕능을 만들었다. 그는 의자사가궁(의당수촌)의 담로 男弟王으로 계실적에 개중비직의 작품이다.
사마왕과 開中費直도 蓋鹵대왕의 아들이며, 斯麻의 남동생(10년 년하) 담로왕 이었든 開中費直이시다.
아래글들은 왜인들이 허구를 말하는것.
斯麻는 倭에 간일도 없는데, 癸未銅竟의 斯麻란 글자때문에 왜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거짖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성왕이 살해되자, 사마가 40세에 일본에서 부인과 같이 건너와 왕에 등극하였다"고 만들고 있으며, 사마가 일본에서 자라고, 결혼하여 낳은 자손들이 일본천황이라는 허구의 역사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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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는 일본에간 일이 없다. 일본이 아닌, 웅진(공주)인, 의자사가궁(의당면 수촌리(축자국?))에서 담로왕으로 군림하시다가, 동성왕이 살헤되자,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입성, 왕에 등극한것임.
우전8번경은 신공황후(321~389년)가 삼한을 정벌할적에 삼한주민이 받친 유물이라면서, 아무런기록도없이 오랜세월이 흘러 1934년에 해독을 시작했다는 것과 선산의 유물도 글자해독했다는 발표 논문이 1932년 6호분의 유물임을 입증되는 것. *斯麻계미년=503년이 三韓이될수없다.
환두대도는=개로대왕이 471년에 아들 개중비직의 출생의 선물로 만들어 준 것이고,
계미동경은=사마왕이 503년에 남동생 개중비직이 의당수촌 意紫沙加宮의 담로왕으로 계실적에 "사마가 아우 개중비직이 장수하길 바라면서" 만들어서 하사한 청동경이다.
왜인들이 蓋鹵王과 開中費直의 관계의 역사를 몰랐기에
환두대도의 글자가 발표된것.
1934년부터 계미동경의 해석을 시작하고 斯麻라는 글자가 들어나면,
6호분의 유물이라는 것이 탄로 나니까? 1932년부터~1971년까지, 삼국사기를 허구의 역사서라고 부정하였든 것이며, 우전8번신사에, 두었다가 1951년에 우전8번신사에서 찾아낸 국보유물로 만든 계미동경이다.
-제멋대로 조작하고 간교하게 가필하여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도굴유물을 왜곡하고 감추려하나, 역사앞에서 들어나는 거짖들.
"지금도 한국의 사학자라는 분들(이병도후학)은 일본인들의 주장을 답습하여 등극 이후에 얻은 젊은 여인이 왕비라는 것--. 그리고 첫째부인은 홀로 6호분에 묻혔다는 억측의 조작들의 역사를 지어내고 있다."
남제왕 開中費直은 사마왕의 친아우로써 意紫沙加宮(의당 수촌리) 담로왕으로 계시다가 사마왕능을 만드시고, 529년 以後에 6호분에 묻힌신 陵의 주인이다. 6호분은 사마왕의 侯王으로 의자사가궁에 권력을 가지고 있든 남제왕으로 개중비직 이었다.
사마왕은 삼근왕이나 동성왕보다 나이가 더많은 분이시다.
삼근왕이 479년에 죽자, 동성(곤지의 子)이 축자국이(의자사가궁)에서 500군사들의 호위속에 왕에 오르고, 사마왕도 의당면 수촌의 의자사가궁의 담로왕으로 26년간 군림하시다가, 동성왕의 살해된후, 40세에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입성하시어 쉽게 왕에 등극하시고,
개중비직이 의자사가궁의 담로왕으로 계실적에 兄 斯麻왕이 상방에서 만들어 하사한 계미동경이 일본고고국보2호이다.
왜에서 귀국한것이 아니라, 의당 수촌 의자사가궁(축자국)에서 오신것.
사마왕이 왕으로 등극하시고 의자사가궁은 남제 개중비직이 다스림.
축자국 의자사가궁이 의당 수촌?
수촌고분군의 1호는 문주왕능(477년에)이고, 2호분은 문주왕비,
4호분은 삼근왕능(479년에). 5호분은 삼근왕비. 3호분=곤지묘.
송산리 무령왕능(523~529년에),
6호분은 529년이후에 묻히신 개중비직.
꼼꼼한성격의 소유자이어서 무령왕의 지석등을 부장품으로 넣으시고,
6호분에는 더많은 역사서도 묻혔있었을것이다.
그역사들이 왜의 역사로 둔갑됨.
공주 송산리 5,6호를 1932년애 輕部지온(가루베)가 완전도굴,
*5호석실고분이 응신왕릉? 이며, 유물이 칠지도 아닐까?
5호분의 유물? 칠지도=일본고고 국보1호로 만듬?,
6호분의 계미동경을 우전8번신사경이라고하며= 일본고고국보2호로 만든것.
무령왕능의 청동경 17.5cm.
무령왕의 동경의 글자
"常方作竟 眞大好 上有仙人 不知老 渴飮玉泉飮食棗 寿如金石兮".
(상방작경 진대호 상유선인 불지노 갈음옥천 음식조 수여금석혜)
"상방에서 거울을 만드니 참으로 좋구나. 하늘의 선인들은 늙지도않고, 목마르면 옥천에서 물을마시고, 배고프면 대추를 먹듯이, 이거울을 보는사람은 생명이 쇠와 돌같이 영원하리라."
癸未銅竟과 무령왕능의 竟과 묵대경들이 後韓鏡이아니라,
선산의 유물들과 모든경이 무령왕의 常方(왕의 물건을 관리 감독하든관청)에서 만들어진 유물들이다.
백제의 유물들의 섬세하며 무척 정밀하였다.
백제시대는 도자기가 발전하지 못하고, 철제류와 석제에 글들이 발전한듯.
환두대도의 글씨, 칠지도, 지석, 금판지의 글씨 등.
上其의 유물들에 글자가 없었다면 숭두리째 倭의 역사가 될뻔한 무서운 역사의 반란이며 음모였다.
그리고 "사마왕의 목관 나무가 일본산 금송이 아닌 백제의 관목"이다.
철저한 검증이되면 모든것을 가려질것.
무녕왕능의 유물들=선산의 유물들이란것, 묵대경등, 우전신사경등은
무령왕의 상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재질과 만든 수법등을 정밀감정 분석하면 나타날것?)
"무령왕릉은 남제왕 개중비직이 만드셨다."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意流村 = 意紫沙加宮(일본고고국보2호 글중).
意紫沙加宮= 의당 수촌 고군분의 주인들!
ㅏ
수촌 고분군의 금동신발의 뼈의 주인들과 유물들!
1호분의 금동신발= 문주왕, 4호분의 금동신발은= 삼근왕.
1호 T자 문양은 문주대왕. 4호는 삼근 더정교, 크기 291.5cm.
수촌 1호고분군 금동모의 주인=문주왕?
수촌4호분 삼근왕 금동모. = (일본 에다후나야마의 금동모(6호분 유물)와 흡사(똑같은것)하다.
1호분의 유개사이호 = 문주왕.
4호분 자기, 석각묘 = 삼근왕 .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신대기, 신공기, 응신기,웅략기, 계체기, 침명기등 모두가 비류백제 구마나리중심의 역사이다. 응신기 이후는 남으로 이주되어 남쪽의 비류백제의 소멸의 역사를 왜의 역사로 조작한 것이다.
익산의 대왕능(641년), 소왕능(643년).
일본에 나타나는 백제유물들은 일본 강점기에 충청남도에서 도굴해간것.
부여 능산리, 1913년에 야쓰이가 도굴하여갔고, 1917년에 익산의 대왕릉(641년), 소왕릉(643년), 릉급6기도, 谷井濟一(야스이)가 6일만에 도굴하여 유물들만 모두 쓸어담아다가, 일본에 묻어두고 발굴한것으로 만듬.
익산의 관목과 무령왕능의 관목이 일본산 금송이라는 것은 순거짖말이다.
나라는 이완용이 팔아먹고, 그의 손자 이병도가 역사를 팔아먹었다.
久麻那利(웅성봉)의 馬韓과, 비류백제의 역사로 倭의 古書期를 만들었고,
일본서기는 공주의 문주왕이후 역사로 만든 왜의 역사이다.
지금도 倭라이트 친일매국노 정권들은 역사를 왜곡 조작하고있다.
2016년 1월. 왕눈벌. 010-3403-3936 Kang,HC.
첫댓글 신공황후(호미꼬)가 삼한을 정벌할때 그곳주민이 가져다 받친 유물이라는 동경= 삼한이 백제 사마(무녕)왕 503년이 삼한때인가?
공주 마한은 ad9년에 왕궁평성으로 밀려나고 18년에 아산인주 밀두리에서 웅성봉으로 온 비류백제, 웅성봉의 마한과 비류백제의 역사서로 만든 일본 고서기와, 일본서기이다.
계미동경은 공주송산리 6호분에서 1932년에 도굴하여다가 일본고고국보2호로 만든 우전8번신사경은 사마왕 계미년 503년에 사마왕의 상방(웅진)에서 만든 동경이다. 상방이 웅진에서 만든 것인데 어데로 보낸다는 것인가?
이동경과 무녕왕능의 동경의 재질과 만든 수법들을 첨단과학으로 비교 검증하면 나타난
역사를 잊어버린 민족에겐 희망이 없다!
환두대도의 글자와 우전8번경에 글자 때문에 두유물들이 6호분의 유물이란걸 찿을수가 있는 것.
글자가 없었다면 6호분에서 도굴하여간 유물들을 찿을길이 없었는데,굴자때문에 개중비직의 세상을 찿을수 있고
왜인들의 악날함을 만천하에 고할수가 있다. 왜인들이 일본의 왜왕이라고 자랑하기 위해 발표해준
두 유물들의 글자로 인하여 무령왕의 시대와 사마의 후왕 남제왕 개중비직의 세상이 밝혀질수있는것.
온조백제가 웅진으로 문주가 475년에 한성의 왕족들을 수습하여 내려오다가 수촌에 (의자사가궁)에 집단촌을 형성하고, 문주는 웅진성은 토착세력과 합세하여 정권을 잡고, 토착세력인 해구한톄 477년에 살해당하여 수촌 1호분에 묻힌것. 아들 삼근이 왕에올라 2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 묻힌곳이 수촌4호분. 삼근의 종제 동성왕이 22년을 통치하다 백가에 살해되다. 의자사가궁에서 사마가 왕에 오른후 503년 계미년에 만들어 의자사가궁에 담로왕으로 계시는 아우개중비직에 만들어준 동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