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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태을도 7월 월례치성 도훈
“모심(侍)의 실천”
2016년 7월 31일 (음력 6월 28일)
7월 31일 월례치성을 맞이해 오늘 이렇게 태을도인들을 뵙고 보니, 상제님 고수부님의 명실상부한 대행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시는 여러분들의 모습이 너무나 고맙고 반갑고, 애쓰시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나락이 초복 중복 말복을 지나면서 익어가듯이, 우리 도인들도 힘든 사회생활 가정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공부도 하고 수행도 하면서, 힘든 만큼 스스로가 뿌듯함도 느끼고 ‘아, 내가 이렇게 깨쳐가는구나.’ 하는 것을 충분히 느끼실 거라 생각이 됩니다.
오늘 제가 도인들께 한 말씀씩 준비하라고 했는데,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말씀 중에서 나한테 큰 깨침을 주셨던 말씀 하나를 골라주시고, 왜 그 말씀을 자기가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도 간단히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충덕(忠德)도인:
저한테는 상제님의 말씀 중에 ‘광구천하(匡救天下)’란 말씀이 크게 와 닿습니다. 상제님의 꿈은 광구천하(匡救天下)였던 것 같아요.‘광’자를 일반적으로는 ‘넓을 광(廣)’자로 많이 생각하는데, 광구천하의 ‘광’자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바로잡을 광(匡)’자로 나오거든요.
하여튼 상제님께서도 그 때 이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아셨던 같아요, 도를 이루기 전에. 상제님께서는 광구천하의 꿈을 이루기 위해 태을도인 무극대도를 완성하신 거죠. 하여튼 상제님께서는 꿈이 있었고 그 꿈을 이루신 분이라고요. 저도 상제님 신앙을 접하기 전에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 대해서 여러 가지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왜 그럴까 부터 시작해서, 주위의 상황들, 80년대 정치적인 상황들 종교적인 현상들, 이런 것들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는데 결국은 제 스스로 해결을 못하고, 상제님께서 이루신 도를 통해서 제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은 거죠.
그러니까 저도 잘 되고 싶지만, 사람이란 것이 나만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저도 부모님의 자식이기도 하고 형제자매가 있고 자식이 있고 이웃이 있거든요. 그 사람들이 잘되고 잘 살아야 제 자신도 행복하거든요. 나만 잘 살고 나만 잘 되고 다른 사람이 잘못 되면 그것도 굉장히 불편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다 함께 잘사는 사회가 되어야 비로소 나도 최종적으로 잘 살게 된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상제님이 말씀하신 광구천하란 말씀이 큰 울림으로 제게 다가온 것 같습니다. 상제님께서는 그런 꿈을 꾸셨고 무극대도를 깨달으셔서 그것을 이루셨고. 저도 상제님이 이루신 도를 따라서 제가 그것을 완성해서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사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 지금의 제 꿈인데, 상제님을 만나기 전의 저의 그런 고민과 생각이 이제는 확신을 가지고 상제님께서 이루신 도를 따라서 제가 그것을 깨달아서 그 길을 가고 싶은 제 꿈이 된 거죠.
충희(忠熙)도인:
제 마음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상제님 말씀은 ‘진심견수복선래(眞心堅守福先來)’입니다. 특히, 요즘은 진심견수복선래라는 말씀을 한창 더욱 간절하게 붙들어서 되새겨 보고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살다보면 선택을 해야 하고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일에 부딪히게 되는데, 이 때 무엇을 좌표로 해서 선택하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고민을 하게 되는데, 제가 찾은 정답은 ‘진심견수복선래’입니다.
결정을 내리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정보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논리적인 인과관계를 모두 따져본 뒤에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결정을 내릴 때 궁극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나의 진짜 마음은 무엇이라고 하는지?’ ‘나의 양심은 무엇이라고 하는지?’ ‘나의 본래 마음은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 일 수 밖에 없더라고요. 결정을 하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결국 나의 진심을 알아 내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상제님 말씀이 진심을 굳게 지키면 복이 온다는 말씀이십니다. 진심을 굳게 지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간혹 진심이라고 생각한 것이 돌이켜보면 진심이 아닌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진심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의 본래 마음, 나의 양심, 즉 ‘진심’을 찾아내는 것이 본질적으로 중요하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태을도를 잘 닦아야 하겠지요.
진심견수복선래(眞心堅守福先來), 이 말씀이 궁극적으로 저의 말과 행동을 좌우하는 나침반, 지침, 기준의 역할을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저를 항상 되돌아보게 하고 반성하게 하는 말씀이어서, 저에게 가장 큰 깨달음을 열어주시는 말씀으로 소개하여 드립니다.
충정(忠正)도인:
상제님 말씀 중에 이 말씀이 와 닿습니다.
“천용우로지박즉(天用雨露之薄則) 필유만방지원(必有萬方之怨),
지용수토지박즉(地用水土之薄則) 필유만물지원(必有萬物之怨),
인용덕화지박즉(人用德化之薄則) 필유만사지원(必有萬事之怨),
천용지용인용(天用地用人用) 통재어심(統在於心),
심야자(心也者) 귀신지추기야(鬼神之樞機也) 문호야(門戶也) 도로야(道路也), 개폐추기(開閉樞機) 출입문호(出入門戶) 왕래도로신(往來道路神),
혹유선(或有善) 혹유악(或有惡),
선자사지(善者師之) 악자개지(惡者改之),
오심지추기문호도로(吾心之樞機門戶道路) 대어천지(大於天地).”
우리는 살아가면서, 인간이라는 제한된 수명과 제한된 능력을 가지고 한계적인 인간으로 스스로 생각을 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어떤 절대자에 기대려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데, 상제님께서는 그런 모자라고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채워가고 고쳐가면 완전함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고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말씀을 남기신 것 같습니다.
어제 가족들과 외식을 했는데, 꼬막정식집이라고 해서 갔는데 꼬막이 요만큼 나오더라고요. 저도 마음은 그랬지만 또 애들 앞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긴 뭐해서 꼬막이 비싼가 보다 정도로 이야기하고 말았는데, 애들 입에서 불평불만이 터져나오더라고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늘도 땅도 마음을 잘못 쓰면 만물이 원망을 하듯이, 사람도 마음을 잘 써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흔히 내가 손해 보지 않을까 내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오그라들게 되는데, 과감하게 내가 좀 손해보더라도 좀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남들에게 도움이 되게끔 음식도 퍼주듯이 많이 주면, 당장은 덜 남더라도 장기적으로 손님이 늘지 않습니까? 그렇게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말과 행동을 적극적으로 실천해 나가다 보면, 세상에 감동도 줄 수 있고 그런 사회로 바뀌어나가지 않겠나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충원(忠元)도인:
충원(忠元)입니다. (상제님의 말씀에는) 선천은 상극의 운이다, 서양과학문명은 하늘문명이다, 이와 같은 대경대법한 말씀도 있지만, 소소하고 운치있는 말씀도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구는 “바람도 불다가 그치나니, 남의 시비를 잘 이기라.” 살다보면 남에게 억울한 오해를 받을 수 있고 때로는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남의 시비를 잘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최근 중동 IS사태를 보면서 저의 가치관이 바뀌었습니다. 독재자 후세인이 죽으면 좋은 세상이 올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증산 상제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선한즉 선한 세계요, 너희가 악한즉 악한 세계니라.” 독재자를 비난하고 빨리 죽기를 바라지만, 정작 그 사람이 없어진다고 좋은 세상이 찾아오게 아니라 내가 먼저 바뀌는 게 관건이라 생각합니다.
충필(忠必)도인:
‘남 잘 되게 하라’는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예전에 보면 저에게 안 좋게 대했던 사람에게 그때는 기분이 나빴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지금은 이해도 되고, 안 좋게 대하던 사람들을 어떻게 잘 대할 수 있을까, 그게 가장 힘들지만 해내야 할 것 같습니다. 같이 공무원 시험 준비하던 친구들도 어떤 친구는 합격하고 어떤 친구는 합격 못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합격한 친구한테서 전화가 와서 ‘축하한다’라고 말은 했는데, 전화 끊고 생각해보니 ‘아, 내가 진심으로 축하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정말로 남을 잘되게 하는 걸 꼭 해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종부(宗婦)님 :
저는 평소에는 ‘동심인성’이란 단어를,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저도 살아온 길(과정)이 평탄치를 못해서 그럴 때마다 그 고비를 넘기는 데 힘이 되어주는 말씀으로 붙들고서 신앙해왔습니다. 고비를 지나놓고 나서 보면, 고비의 그 순간은 항상 고통스럽지만 넘기고 나면 결국은 그 고통이 저에게 경험이 되고 경륜이 되어서 제가 더 넓어지고 커지는 기회로 작용했었기 때문에, 우리가 ‘위기는 곧 기회다.’ 얘기하는 것처럼 그런 고비들을 통해서 커지고, 커짐으로 해서 하늘이 원하는 합당한 사람에 더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고 있고요, 또 주로 마음에 관계되는 말씀들이 많이 마음에 와닿는 데, ‘마음을 정직히 하면 하늘도 오히려 무서워 떤다.’라고 하신 말씀에서 ‘아, 하늘을 두려워하기보다 사실은 내 양심을 잘 살펴보아 양심대로 살아가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충양(忠陽)도인:
예. 저는 ‘성경신(誠敬信)’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성경신은 수도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우리가 지방법소에서 치성을 모시고 도훈도 하고 각자 수행을 해오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 한결같은 마음 한결같은 정성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공경하고 믿는다는 것도 얼핏 보면 쉬운 일인 것 같지만, 정성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몇십 년 전 처음 상제님 신앙할 때의 그 마음, 그리고 3년전 태을도에 입문했을 때의 각오나 다짐, 또 속육임을 정한 이후 얼마만큼 나 자신에 충실하였나 되돌아보면, 한결같은 정성을 내기가 정말 어렵구나, 보통 일이 아니구나 생각됩니다. 기독교인들이 새벽기도를 나가는 것도 정성이거든요. 한결같은 정성이 어렵긴 하지만, 도를 이루려면 어차피 그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 태을도인들도 변치 않는 그런 정성으로 실천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봅니다.
충일(忠日)도인:
저는 “나의 진리는 상생의 진리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군대 제대하고 23살쯤, 상제님 서적으로는 처음으로 대순진리회에서 발간한 ‘전경(典經)’이라는 책을 읽어 봤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말씀 중에 하나가 있는데, 기존 종교의 여러 가지 책을 다 읽어 보았지만 기독교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불교에서는 자비를 이야기하고 유교에서는 인의예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삶에 대한 과정적인 것만 있지, 왜 그리 이야기하는지 왜 그렇게 희생하고 봉사하고 살아야만 되느냐?
그런데 전경을 통해 ‘상생’이라는 글을 보면서, 삶에 대한 과정과 결과가 같이 있는,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상생세상 그것이 후천세상이다, 라는 말씀을 보면서 ‘아! 증산상제님께서 진짜 상제님이시고 하느님이시구나.’ 하는 걸 많이 깨달았고, 그 분의 진리대로 살아야 되겠고 내가 신앙을 하게 되면 상제님을 믿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말씀 중에 하나가 “나의 진리는 상생의 진리이다.”여서, 이 말씀이 제일 기억에 남았던 것 같습니다. 이상입니다.
종장(宗長)님 (도훈):
종부님부터 충덕도인, 충정도인, 충일도인, 충원도인, 충양도인, 충희도인, 충필도인, 각자 진리의 길을 가면서 특히 태을도인으로서 상생의 길을 가면서 깨침의 길을 열어주셨던 상제님의 말씀을 한 마디씩 해주셨는데, 천지부모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사업을 하셨다는 것은 결국은 말과 글과 행실로써 하신 거거든요.
일반적으로 우리가 우울하거나 기쁘거나 또 좋거나 나쁘거나 이럴 때, 자기의 감정을 풀기 위해서 더러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듣기도 하잖아요. 근데 부르거나 듣는 노래를 우리가 선곡할 때 내 감정이입이 되는 걸 고른다고요. 누구한테 배신을 당했다 그러면 ‘배신자’를 많이 부른다는 거예요. 방송에서 나훈아 쇼 하는 걸 보니까, 나훈아 그 양반도 배신을 많이 당했는가 봐요. 그래서 ‘배신자’ 부른다니까, 사람들이 우뢰와 같은 박수 속에서 광화문 세종문화 회관인가 쇼를 했는데 건물이 떠나가도록 배신자를 같이 부르더라고요.
‘야, 사람들이 배신을 많이 하고 배신을 많이 당하는 구나. 그러니까 저렇게 배신자 노래가 인기가 있지.’ 그런 생각을 했는데, 우리가 상제님 고수부님의 마음과 마음씀을 닮아간다고 하는 거는 두 분의 말과 글 속에서 나하고 감정이입이 되는 것, 나하고 마음이 공유되고 흥이 공유되고 신바람이 공유되는 그런 말씀을 통해서 내가 감동하고 울림이 생기고 하는 것이거든요. 상제님 고수부님의 말씀으로 내가 감동하고 나한테 울림이 있기 때문에, 내가 그분의 가르침을 등불로 삼고 이정표로 삼고 표지판을 삼는다는 거예요. 상제님 고수부님이 나한테 전혀 감동도 안주고 흥미도 안주고 울림도 없다면, 나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거지요.
천지부모님이 이 땅에 오셔서 상제님이 천지공사 보시고 고수부님이 신정공사 보셨는데, 상제님께서 말씀하시잖아요. ‘내 말은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구천을 울린다.’ 그래서 상제님 고수부님 말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다 울리는 얘기라는 거예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신바람을 불러일으키고,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얘기인 거예요.
상제님 고수부님 말씀을 보면, 우리를 절망시키고 슬프게 하는 말씀은 한 마디도 없어요. 항상 상생의 말씀, 항상 위로의 말씀, 항상 격려의 말씀이에요. 따뜻하게 껴안아주고 보듬어 안아주고, 힘내라 그러고, 죄와 허물이 있어도 반성하면 된다 그러고, 새 출발하면 된다, 그렇게 얘기하시지, 너는 죄인이기 때문에 너는 허물이 많기 때문에 너는 글렀다, 너는 영원히 안된다, 사람을 포기하게 하고 절망시키고 좌절시키고 체념시키는 그런 말과 글과 행실은 한 마디도 안하셨다고요.
그래서 상제님 말씀과 상제님 글, 고수부님 말씀과 고수부님 글, 또 그 분들의 행적을 보면, 우리들로 하여금 무극의 이상, 무극의 목표인 모든 사람들이 근본을 깨쳐서 한데 어울려 춤추고 노래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대동화합 하는 그런 말씀들이고 글이고 행실들이에요. 그래서 그 분들의 말씀을 내 말씀으로 하면, 내가 절망할 이유도 없고 좌절할 이유도 없고 체념할 일도 없어요.
아까 충일도인께서 상제님 말씀 중에 ‘상생’ 말씀이 와 닿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상생이라는 건 희망이거든요. 기쁨을 나누고 즐거움을 나누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거예요. 상제님 고수부님의 제자들은 상제님 고수부님의 마음씀을 배워서, 당신들이 기쁨과 즐거움과 신바람의 말과 글과 행실을 했듯이 우리도 우리의 말과 글과 행실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라는 거예요. 즐겁고 기쁘고 유쾌하고 흥있고 신바람나게 만들라는 거예요. 그러려면 내 스스로가 즐겁고 신바람나고 기뻐야 될 거 아니에요?
상제님 고수부님 말씀과 글을 많이 읽다보면 기쁨이 전이가 되고 즐거움이 전이가 돼요.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전이가 돼요. 그것이 울림으로 차곡 차곡 쌓인다고요. 용서와 사랑이라는 단어에 감동하고, 껴안아주고 보듬어주고 격려해주고 위로해주는 말씀에 우리 스스로 마음속에 희열이 가득 차는 거지요. 누구를 원망하고 복수하고 저주하고 깎아내릴 때에는 그런 말하는 나부터가 주저앉는 거예요. 내 마음이 즐거워야지 그 즐거운 마음이 넘쳐서 내 말과 글과 행실을 다른 사람한테 즐거움 그대로 전할 수가 있다고요.
상제님 고수부님 천지부모님을 우리가 잘 모신다고 하는 것은 상제님 고수부님을 잘 이해해야 가능한 거예요. 그 분들의 마음을 잘 이해해야 된다고요. 아까 제가 상제님 고수부님은 세상사람들한테 즐거움과 기쁨과 유쾌함과 흥과 멋을 주시러 오셨다고 했고 그 시범을 보이셨다고 했는데, 그렇게 되려면 독기와 살기가 없어야 가능한 거지요. 독기와 살기가 완전히 풀어 없어져서 근본과 합일이 됐기 때문에, 무극 태을에서 나오는 힘과 능력을 가지시고 온 천지를 즐거움이 넘쳐나고 웃음이 넘쳐나는 후천세상을 준비하신 거지요. 성음소모에 화기가 무르녹는다 그러잖아요, 후천세상이.
천지부모님이신 강증산 상제님과 고판례 수부님을 잘 모시려면, 그 분들의 마음을 이해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 분의 뜻을 이해해야 돼요. 어젠가 그저껜가, 불교계에서 나름대로 크게 기여했던 현각스님이 한국불교와 이별한다고 전격적으로 통보한 기사가 나왔어요. 왜 이별하냐? 한국불교는 돈만 밝힌다는 거예요. 기복신앙이라는 거예요. 자기의 은사인 승산스님이 석가모니의 본래의 가르침, 깨침의 말씀으로 합리와 이성을 추구하는 서양사람들에게 한국불교를 포교해서, 그 가르침에 감화 받은 외국인 스님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승산스님 가르침대로 열심히 수행하고 교육받고 했는데, 승산스님이 돌아가시고 세월이 흐르다보니 승산스님 가르침의 진면목이 없어져버렸다는 거예요. 한국불교가 승산스님을 제대로 이해 못하고 돈만 밝혀서, 자기가 설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석가모니가 제자들한테 한 유언이 “너희들은 법등명(法燈明) 자등명(自燈明) 해라.” 그거예요. “나를 따르지 말고 법을 따르라. 내가 깨친 깨침을 전한 법을 너희들이 따르고, 네 스스로 너를 믿고 너를 찾아 들어가라.” 이걸 석가모니가 얘기했거든요. 근데 제자들이 그걸 제대로 못해서 불교가 타락했다는 거예요. 석가모니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했으면, 뜻을 제대로 이해했으면, 그렇게 할 리가 없죠. 석가모니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제자들이 석가모니의 마음과 뜻하고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는 거예요. 석가모니의 마음을 모르니까, 자기들 임의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이런 거라고 선전하는 거예요. 이해를 못하니까, 왜곡시키고 곡해시키고 진리를 타락시키는 거예요. 오염시키는 거예요.
상제님 고수부님도 독기와 살기를 풀어서 천주의 성품을 되찾고 태을신성과 생명력을 회복하도록 해서, 즐거움이 넘치고 화락이 넘치고 흥이 넘치고 멋이 넘치는 세상을 만드셨는데, 우리 증산신앙인들이 그걸 이해 못하고 제대로 알아듣질 못해가지고 상제님 고수부님의 가르침을 왜곡시킨다는 거예요. 자기들 임의로 자기들 욕심을 가지고 탐음진치에 입각해 자기 돈 버는 수단,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 명예를 드높이는 수단으로 삼는다는 거예요.
상제님 고수부님이 손가락 끝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봐야 하는데, 진리의 달을 봐야 되는데, 손가락만 보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개벽신앙과 도통신앙만 하고 있다는 거예요. 표피적인 신앙만 하고 있는 거지요, 심층신앙을 하는 게 아니고. 원숙한 신앙을 해야 되는데 유아적인 신앙을 하고 있는 거지요. 상제님 고수부님의 마음과 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거예요.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상제님 고수부님을 제대로 못 모시는 거예요.
아까 충양도인이, 상제님 말씀 중에 ‘성경신’ 말씀이 와 닿더라, 그 중에서 공경하고 믿음은 웬만큼 할 것 같은데 정성을 들이는 게 힘들더라, 말씀하셨는데, 모시는 건 정성을 들이는 거예요. 물론 공경하고 믿는 것도 정성을 들이는 거지만, 한결같은 정성을 들이는 것 그것이 모시는 거예요. 모시려면 상제님 고수부님 마음과 뜻에 맞게 모셔야 제대로 모시는 거지, 당신들 마음과 뜻에 어긋나게 우리가 모신다면 상제님 고수부님이 좋아하시겠냐 이거예요. 불편할 거 아니에요. 우리가 부모님을 모실 때에도 부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모셔야 부모님이 편하지, 우리가 편한 대로 모시면 부모님이 편하겠냐 이거예요. 그건 자기일방적인 효인 거지요.
아까 서두에 상제님과 고수부님이 상극의 세상을 접고 상생의 세상을 열었다고 말씀드렸듯이, 천지부모님께서 복수하고 투쟁하고 저주하고 미워하는 이런 세상에서 사랑하고 용서하고 기뻐하고 껴안고 보듬어주고 위로하는 이런 세상을 만드셨는데, 우리도 그렇게 하려면 증산신앙인들이 천지부모님의 마음과 뜻을 온전히 이해해서 상제님 고수부님을 제대로 모셔야 된다는 거예요. 또 상제님과 고수부님을 제대로 모시려면 상제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릴 줄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상제님 고수부님의 말과 글과 행실을 잘 살펴보면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마음과 뜻을 우리가 헤아릴 수가 있어요. 그렇잖아요?
상제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한고조는 소하의 덕으로 천하를 얻었으나 너희들은 베풀 것이 없으니 언덕(言德)을 잘 가지라.” 한고조가 소하의 덕으로 천하를 얻었다고 상제님께서 말씀을 하셨는데, 소하라는 사람이 뒷받침을 잘해준 거예요, 한고조가 원하는 뒷받침. 한고조를 잘 모셨다는 거지요. 소하 임의로 판단해가지고 한고조를 뒷받침한 게 아니고, 한고조의 마음과 뜻을 잘 헤아려가지고 소하가 후방에서 잘 모셨다, 잘 보필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한고조가 천하를 얻었다는 거예요. 상제님께서는 ‘너희들은 베풀 것이 없으니 언덕을 잘 가지라.’ 하셨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언덕을 잘 갖느냐?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마음과 뜻을 그대로 닮은 말과 글과 행실을 우리가 해야 언덕을 베푸는 거잖아요. 상제님 고수부님의 마음과 뜻을 잘 헤아려서 그런 말과 글로 상제님 고수부님을 모시면서 세상사람들한테 전해야, 언덕으로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거예요. 상제님 고수부님 마음과 뜻을 헤아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상제님 고수부님을 잘 모시고 천하를 얻을 수가 있냐 이거예요. 그건 아니라는 거예요. 상제님 고수부님의 마음과 뜻을 이해하고 헤아리고 또 깨쳐야 된다는 거예요. 상제님 고수부님이 닦으신 그 진리, 그 도를 우리가 깨쳐야 된다는 거예요. 깨쳐야 그 분들의 마음과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거지, 깨치지 못하고서 어떻게 그분들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냐는 거예요.
상제님 고수부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고, 내 마음이 상제님 고수부님 마음이 되어야 돼요. 그래야지 상제님 고수부님이 깨친 그 도를 우리가 용사할 수 있어요. 그 도를 깨치지 못하면 상제님 고수부님이 말씀하신 말과 글과 행실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고 헤아릴 수도 없고 용사할 수도 없어요. 상제님이 고수부님께 그러시잖아요. “내가 니가 되고 니가 나 되는 일이다.” 그건 우리한테도 똑같이 하신 말씀이라고요. 수운한테 천명을 줄 때 상제님이 그러시잖아요. “니 마음이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니 마음이다.”
후천은 마음세상이에요. 마음으로 태을을 용사하는 지심대도술 세상이라고요. 그러면 내 마음이 니 마음이 되고, 니 마음이 내 마음이 되어야 될 거 아니에요. 상제님 마음 고수부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고, 내 마음이 천지부모님 마음이 되어야 마음세상을 열어간다는 거예요. 깨쳐야 돼요. 상제님 고수부님도 태을도를 깨쳤기 때문에, 마음세상을 열어가는 옥황상제 옥황후비로서의 위격을 갖추고서 삼계도정을 주재하신 거예요.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마음과 그 뜻을 이해하고 헤아리고 깨쳐서 상제님 고수부님이 내 마음 속에 온전히 자리잡아야 돼요. 상제님 고수부님의 분신이 되어서, 상제님 일이 내 일이 되고, 고수부님 일이 내 일이 되어야 한다고요. 상제님 고수부님의 마음과 뜻을 이해하고 헤아리고 깨쳐야 상제님 고수부님의 일이 내 일이 되고 상제님 고수부님이 가신 길이 내 길이 되는 거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헤아리지도 못하고 깨치지도 못하면 그렇게 하고 싶어도 상제님 고수부님 일이 내 일이 되질 않잖아요.
이게 어떤 일인지 모르잖아요.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가셨는지, 지소선후는 어떻게 되는 건지, 어떤 방식으로 후천을 만들어가시는 건지, 어떤 식으로 인간개조를 해나가실 건지 모른단 말이에요. 눈뜬 봉사가 어떻게 안내를 하냐 이거예요. 상제님 고수부님의 마음과 뜻을 이해하고 헤아리고 깨쳐서 상제님 일이 내 일이 되고 고수부님 일이 내 일이 되어야, 온전히 상제님 고수부님을 모시고 상생세상을 만들어간다는 거예요.
수운선생이 상제님한테 천명을 받았잖아요. ‘니 마음이 내 마음이다.’ 천명을 받은 거예요. 천명을 받고서 시천주를 전하면서 그 마음을 편 거예요. 펴면서 수운선생이 제자들한테 수없이 얘기해요.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하느님만 믿었어라.” 나한테 일방적으로 니들 믿고 따르고 복종하지 말고 하느님 법을 따르라고 누차 얘기한다고요. 그렇게 얘기해도 동학도들이 수운선생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질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고 수운이 전한 그 도를 깨치지 못해서, 자기 임의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서 동학을 망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수운선생이 너무도 안타깝고 걱정이 되어서 ‘흥비가(興比歌)’를 지었어요, 흥비가. 동학 제자들한테 ‘너희들 정신 차려라.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하느님만 믿어라. 하느님이 깨친 그 도를 깨쳐라.’ 하느님을 제대로 이해하고 헤아리고 하느님이 주신 그 도를 깨치라고 흥비가에서 얘기해요. 동학 경전에 나오는 원문을 보면 이렇게 얘기한다고요.
시운(詩云) 벌가(伐柯) 벌가하니 기측(其則) 불원(不遠)이라.
내 앞에 보는 것을 어길 바 없지만은
이는 도시 사람이요 부재어근(不在於斤) 이로다.
목전지사 쉬이 알고 심량(深量) 없이 하다가서
말래지사 같잖으면 그 아니 내 한(恨)인가.
이러므로 세상 일이 난지이(難知而) 유이(猶易)하고
이지이(易知而) 난(難)인 줄을 깨닫고 깨달을까.
명명(明明)한 이 운수는 다 같이 밝지마는
어떤 사람 저러하고 어떤 사림(士林) 이러한지
이리 촌탁(忖度) 저리 촌탁 각각 명운(明運) 분명하다.
(후략)
이게 원문이에요. 이걸 천도교에서 이렇게 해석을 해놓았어요.
‘시경에 말하기를, 도끼 자루를 깎아서 만드는데 그 본보기가 될 도끼 자루가 먼데 있지 않다고 하였으니, 내 앞에 보는 것을 어길 수 없지만은 이것은 도무지 사람이 하는 일이요, 도끼에 있는 것이 아니라네. 눈 앞에 보이는 일은 쉽게 알고 헤아림이 없이 하다가서 끝말에 돌아오는 일이 그와 같이 아니되면 나에게는 한이 되지 않겠는가. 이러므로 세상일은 어렵다고 생각한 일이 오히려 쉽고, 쉽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려운 줄을 그 누가 깨달을까. 밝고 밝은 이 운수는 다같이 밝지만은 어떤 사람은 저러하고 어떤 선비들은 이러한가. 이렇게 남의 마음을 미루어서 헤아리고, 저렇게 남의 마음을 미루어 헤아려보니, 저마다의 밝은 운수가 분명하다.’ (후략)
수운선생이 상제님으로부터 천명을 받아서 상제님 마음을 전하고 동학을 폈는데, 그 하느님 마음자리를 헤아리고 이해하고 하느님이 주신 동학을 깨달아서 하느님이 원하는 세상을 만드려는 게 아니고, 자기 생각을 가지고 이리 머리 굴리고 저리 머리 굴려서 임의로 행동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수운선생이 보기에, 이 제자들이 잘못하면 동학을 만나 망치게 생긴 거예요. 그래서 흥비가를 지어서 이렇게 경계한 거지요.
오늘의 상제님 성구를 한 번 봅시다. 244 페이지 읽어볼게요.
이 공사를 마치시고 형렬에게 일러 가라사대 "허미수가 중수한 성천 강선루의 일만이천 고물은 녹줄이 붙어있고, 금강산 일만이천 봉은 겁살이 끼어있나니 이제 그 겁살을 벗겨야 하리니, 너는 광찬과 도삼을 데리고 돌아가서 조석으로 청수 한 동이씩을 길어서 스물네 그릇에 나누어 놓고, 밤에는 칠성경 스물한 번씩 읽으며 백지를 한 방촌씩 오려 한 사람이 하루에 모실 시(侍)자 사백 자씩 열흘 동안을 써서 네 벽에 돌려 붙이고, 나를 기다리라." 하시니, 형렬이 광찬과 도삼을 데리고 구릿골로 돌아와서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대순전경 p206)
그 아랫구절입니다.
신암을 떠나 구릿골에 이르사, 양 한 마리를 잡아 그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서 벽에 돌려붙인 일만이천 모실 시(侍)자 위에 바르시니, 글자 수가 다함에 피도 또한 다한 지라. (중략) 마침 김제 수각 임상옥이 이르거늘, 그 사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인부를 많이 부릴 때에 쓰라." 하시니라. (대순전경p 210)
일만이천 명 시천자를 내는 공사라고요. 금강산 일만이천 봉에 응기한 그 기운을 취해서 상제님하고 이심전심되는 일만이천 명을 내는 공사란 말이에요. 일만이천 명을 내는 공사인데, 이 일만이천 명이 상제님하고 이심전심되어야 되고, 여기에 칠성경을 읽히셔서 기운을 붙였으니까 칠성여래하고도 이심전심되어야 할 거 아니에요. 단주를 칠성여래로 삼았으니까, 고수부님이 ‘증산소유 단주수명’ 얘기도 하시고. 그러니 상제님하고 칠성여래인 단주하고 이심전심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일만이천 명이. 그런 마음으로 모셔야 된다는 거예요.
이 ‘모실 시(侍)’자라는 것 자체가 일만이천 명이 단주하고 한마음이 돼서, 상제님께서 천명을 주셔서 ‘니 마음이 내 마음이니까 그 마음을 전해라.’ 하는 거예요. 마치 수운선생한테 ‘내 마음이 니 마음이고 니 마음이 내 마음이다’했듯이. 그 마음을 전하라는 거지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수운선생이 그 마음이 왜곡될까봐, 그 뜻이 왜곡될까봐, 얼마나 노심초사해요. 그래서 흥비가를 지어 제자들에게 주잖아요. 니 멋대로 이리 촌탁 저리 촌탁,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하느님 뜻을 왜곡하지 말라, 하느님 뜻을 타락시키지 말라 이거지. 역천하지 말라는 거예요.
상제님 공사내용은, 일만이천 명이 상제님하고 이심전심되고 칠성여래 단주하고 한마음이 되어 마음세상을 열어가라 이거예요. 태을궁 지심대도술의 마음세상을 열어가라 이거예요. 그 세상을 열어가려면 상제님 고수부님이 갖고 계신 마음과 뜻을 잘 이해하고 헤아리고, 또 상제님 고수부님이 깨친 그 도를 깨쳐서, 상제님 고수부님 일이 내 일이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지 일만이천 명의 이심전심 상수심법자가 되어 태을궁 태을세상을 열어갈 수가 있다고요.
아까 서두에, 쭉 돌아가면서 우리가 각자 깨달음을 한 단계 높여가는 데 역할한 천지부모님 말씀이 있느냐 제가 물어봤잖아요. 그래서 한 말씀씩 다 하셨잖아요. 그 말씀들이 다 상제님 고수부님 마음과 마음씀, 그 마음과 뜻을 내가 헤아리고 이해하고 또 상제님 고수부님이 깨친 그 도를 내가 나름대로 깨쳐서, 내 마음의 끈하고 연결된 거예요, 그 말씀을 통해서. 그 말씀들이 우리의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 속에서 숱하게 계기가 주어진다고요.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말씀, 저런 상황에서는 저런 말씀,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글과 이런 행실, 또 저런 상황에서는 저런 글과 저런 행실.
상제님 고수부님이 육신을 갖지 않은 채 저 세상에 있던 분이 아니고, 이 세상에 오셔서 상제님은 9년 동안, 고수부님은 1911년부터 1935년까지 만 24년 동안 공생애를 살아내면서, 그 동안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다 모범을 보였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던 간에 상제님 고수부님 마음과 뜻을 이해하고 헤아리고 깨쳐서, 상제님 고수부님의 대행자가 되어서 그 분들처럼 할 수 있는 모범답안이 다 있다고요. 우리가 노력을 안했을 뿐이지 노력을 하면 똑같이 된다고요.
천지부모님이 진리사업 인간사업 하라 하셨어요. 그 시작이 가족사랑 이웃사랑이에요. 진리사랑 인간사랑의 출발은 가족사랑 이웃사랑이라는 거예요. 사랑이라는 것은 기쁨이 넘치게 하는 거예요. 즐거움이, 유쾌함이 넘치게 하는 거예요. 원수를 은인으로 돌리는 거예요. 돌로 치는 자에게 떡으로써 하는 거예요. 그걸 하라 이거예요. 가족 간에도 일가 속에서도 사랑을 실천 못하는 사람이 니들이 천하사를 하겠냐 이거예요. 일가를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사회에서 조직에서 천하사를 하겠냐 이거예요.
상제님 고수부님은 굉장히 세밀하게 공사를 보셨고, 아주 구체적으로 모범을 보이셨어요. 부모한테 하는 거, 형제한테 하는 거, 친구한테 하는 거, 술집 종업원한테 하는 거, 부인한테 하는 거, 케이스 별로 다 모범을 보이셨다고요. 상제님같이만 하면 세상사람들이 감동해요. 우리의 마음을 타고 상제님 고수부님의 마음이 전해지고, 우리의 뜻을 타고 상제님 고수부님의 뜻이 전해지는 거예요. 우리의 말이 상제님 말이고, 우리의 글이 고수부님 글이에요. 우리의 행실이 상제님 고수부님의 행실이 되는 거예요.
상제님 고수부님을 제대로 이해하고 헤아리고 깨쳤다면, 상제님 고수부님이 세상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세상사람들을 울림 있게 했듯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무슨 단점이 있든지 무슨 허물이 있든지, 우리 태을도인들이 거기에 관심을 두지 말고 그걸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 스스로를 깊이 파 나가면 된다는 거예요. 깊이 파서 모범만 보여 나가면 돼요. 그러면 그 사람들도 양심이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언젠가는 깨어나요. 양심을 먼저 알아채는 사람이 먼저 깨어날 거 아니에요?
오늘 7월 월례치성인데, 우리가 상제님 고수부님을 모신다 모신다 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로 모시는 것인지 그걸 우리가 알아야 된다고요. 모신다고 하는 것은 실천이 있어야 돼요. 실천하려면 공부를 해야 된다고요. 공부를 해서 마음을 배우고 마음씀을 배워가지고 말로 글로 행실로 나타나는 실천을 해야 된다고요. 방안 퉁수 마냥 방안에 가만 있으면 세상사람들과 연결이 안 되잖아요 이게. 실수를 하더라도, 다소 허물이 있더라도, 부딪히라 이거예요. 내 가족들을 안 볼 수가 없잖아요. 가까이 있는 우리 이웃들도 안 볼 수가 없다고. 그런 속에서 자기 마음과 자기행실, 글, 이런 걸 관찰해보라 이거예요. 나는 가족들한테 감동을 주고 있는지, 울림 있는 행실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이만치 왔잖아요. 속육임이라고 하는 건 천지부모님을 올바로 모시는 사람이에요. 시 천주예요, 시 천주. 천주를 모신다, 하늘을 모신다, 이거예요. 하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헤아리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사람이 아무리 시천주를 백날 외워봐야 시천을 찾아봐야, 그게 제대로 모시는 거냐 이거예요. 예수가 그러잖아요?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당에 가는 게 아니고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하는 사람이 천당에 간다’고.
상제님 고수부님을 내가 믿네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급살병에서 사느냐? 아니라는 거예요. 과도적으로 상제님 고수부님이 깨치신 그 도로 인도하는 지로사(指路師)일 뿐이지. 그것이 계기가 돼서 더 심층적으로 상제님 고수부님을 이해하고 헤아리고 깨쳐서, 태을자리에 들어가 내가 천주체가 되고 태을체가 되고, 그래서 시천주 봉태을 하는 명실상부한 태을도인이 되어야, 급살병을 넘어간다는 거예요. 너희들 할 탓이라는 거예요, 상제님이 우리한테. 상제님은 돌아가셨잖아요. 돌아가셨으니까, 니들이 내 마음과 뜻을 제대로 헤아려가지고 내가 한 대로 그대로 모범을 보이라는 거예요. 자, 그런 모범을 보이는 태을도인의 생활을 해나갑시다. 이상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