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조계사 내 총무원 청사 건립 상량식 장면. 조계사 주지 고산스님이 마이크를
잡고 축원하고 있다. 스님은 기공식후 중단된 청사 건립을 위해 위원회를 조직하고
권선에 나서는 등 결정적 기여를 했다. <지리산 무쇠소>에서 사진 인용.
총무원장 4명, 조계사 주지 4명 거쳐 어렵게 완공
1971년 9월4일 마침내 총무원 청사 기능을 하는 불교회관 기공식을 거행한다. 조계사 대웅전 뒤편 153평의 건물에 연건평 1600평, 11층 규모의 대형 건물이었다. 총공사비는 1억8천여만원, 1973년 말 완공을 목표로 삼았다. 당시 계획은 예산 관계로 인해 한꺼번에 짓지 않고 1971년 말까지 1차 지하 1층 지상 3층을 건립하고 최종 완공은 1973년으로 잡았다. 당시 주지는 후일 총무원장을 역임한 서의현 스님이었다. 불교회관 건립 지시를 내린 사람은 총무원장 청담 스님이었다.
기공식에서 주지 의현 스님은 청사 건립을 위해 1천만원을 확보한 상태라며 1차 사업 예산 6000만원을 사부대중과 각계 성금으로 충당하겠다고 보고했다. 공사는 중화건설(대표 이상수)이 맡았다. 건물 조감도에 따르면 회관은 지하 1층에 식당 주방 다실이 들어서며 1층은 대강당으로 회의실 용도였다. 예식장으로 일반인에 대여할 계획도 세웠다. 2층은 종정, 총무원장 스님 등의 거실이며 3층은 중앙선실(禪室)과 연구실 각 단체 신도회와 사무실 용도였다. 층수가 대폭 낮아졌지만 당시 세운 골격이 총무원 청사의 뼈대를 이루었다. 하지만 많은 곡절을 겪으며 공사가 늦어졌다.
불교 위상 보여 줄 대규모 불사, 사부대중 십시일반 참여
봉은사 매각 대금으로 동국대 혜화관 구입…청사 이전
청사 건립이 늦어지는 가운데 1972년 초 총무원은 장충동 동국대 혜화관으로 옮겨간다. 오늘날의 혜화관은 원래 공무원교육원으로 사용하던 정부 소유 건물이었다. 대전에 새 교육원을 짓게 됨에 따라 매각 건물로 나와 동국대 법인인 종단이 매입한다. 봉은사 부지 10만평을 팔아 마련한 7억원으로 샀다. 봉은사 소유 토지 매각 후 종단 내부에는 한바탕 회오리가 불었지만 당시는 강남개발이 본격화 하기 전이어서 봉은사 소유 토지에 대한 중요성이 떨어졌고 총무원도 청사의 필요성이 제기되던 때여서 종단 지도자들이 모두 혜화관 매입에 동의했다.
1971년 겨울부터 동국대 교육관 건물로 청사를 이전할 계획을 세웠다. 종단 지도부이기도 한 학교 법인이 사용료 전액을 지불할 능력이 없어 일부를 청사로 사용하고 일부는 학교 강의실로 임대해 사용료를 받을 계획이었다. 조계사내 청사 건립이 지지부진한 것도 이유였다. 하지만 일부 스님들은 조계사 정화회관을 두고 청사를 옮기는 문제를 찬성하지 않았다.
1971년 12월 제28회 중앙종회에서 청사 이전을 두고 논의가 오갔다. 도우 스님이 동국대로 청사 이전 계획에 의거해 1972년 예산을 편성한 집행부를 향해 꼭 이전해야하는지, 정화회관은 어떤 용도로 쓸 것인지 묻는다. 당시 총무부장 광덕 스님은 이렇게 답한다.
“꼭 이전해야한다는 원칙은 없으나 현 우리 종단은 무엇인가 달라져야 합니다. 말하자면 전진의 일보 일보를 내딛고 걸어야 합니다. 좋은 건물에 사는 것이 발전하는 것이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만, 사무의 능률과 대내외적인 위신으로 보아 이전해야 하며 재단 역시 우리가 안가고 건물을 모두 사용한다고 해서 지금의 사용료 이상 더 많은 사용료를 지불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현재의 이 정화회관은 조계사 법당 사용 시간이 많기 때문에 포교 법회처로 사용하면 유효하게 쓰일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발전을 위해 더 큰 공간으로 이전할 필요가 있다는 요지였다. 이어 영암 스님이 이전의 당위성을 설명한다.
“이전 여부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총무원도 옮기고 총무원 뿐만 아니라 조계종 산하 모든 단체가 다 쓸 수 있도록 회관으로 하자 해서 사들인 것이니 언급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현 정화회관 건물은 총무원의 위신을 지킬 수 없게 되어 있다. 외국 귀빈이 와도 영접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들어와서 앉을 데가 없으니 손님이 와도 들어오시라고 인사말도 못하게 되어 있으니 총무원에 살아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천년을 살 것을 단 하루를 살고 그만 두더라도 당장 옮기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협소한 기존 건물로는 종단 위신이 서지 않는다는 뜻이다.
1972년 2월10일 종정 총무원장 감찰원장 등이 모인 가운데 열린 종정지도회의에서 청사 이전이 논의돼 종회의장 벽안 스님, 봉은사 주지 운허 스님, 총무원장 석주 스님, 종정지도위원장 서운 스님, 동국학원이사장 벽암 스님으로 ‘청사이전 소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3월 청사를 옮겨 간다. 1, 2층에 조계종 총무원과 신도회가 들어서고 3, 4층은 동국대 경상대학 강의실로 사용했다. 덕산 이한상 거사가 지은 풍전회관에 입주해 있던 불교신문은 1972년 3월27일 총무원이 다시 이한상 거사로부터 인수하면서 이곳 총무원 청사로 들어갔다.
청사가 조계사에서 동국대로 떠나면서 조계사 주지가 의현 스님에서 고산 스님으로 바뀐다. 조계사 주지를 맡아 청담 스님 아래서 기공식을 했던 의현 스님은 은해사 주지로 내려가고 1972년 3월1일 고산 스님이 주지 대행을 맡는다. 스님은 기초공사만 시작한 채 중단했던 불교회관 건립을 다시 시작한다. 청사 건립의 실질적 주역은 바로 고산 스님이었다. 스님은 청담 스님 시절 만든 설계도를 찾아 불교회관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권선에 나선다. 재정이 부족해 공사비가 밀려 시공업자로부터 폭언을 듣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은 끝에 완성한 대작불사였다. 이에 관해 고산 스님의 회고록 <지리산의 무쇠소>에 자세히 기술돼 있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당시에는 조계종 총무원에 청사가 없어서 장충동 동국대학교 교사(校舍)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조계사 대웅전 뒤 옛날 청담 스님이 12층 건물을 짓겠다고 설계해 놓은 설계도가 보관되어 있기에 그 설계대로 나중에 12층을 지을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기초를 지하 1층, 지상 12층으로 짓기 시작해서 일요법회 때마다 보시 공덕에 대해서 말하고 권선문을 돌렸다. 이에 불교회관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명을 기울여 추진. 노력하는데 당시 전국신도회 회장인 김모 씨는 천만 원을 내겠다고 화주책에 적어놓고 지하 1층, 지상 3층의 골조 공사가 끝날 때까지 3년 동안 법당에서 법회만 보고 한 푼의 돈도 내지 않다가 골조 공사가 끝났다는 말을 듣고 동대 이사로서 이사회에 갔다가 거마비 받은 돈 5만 원을 비서를 시켜서 보내왔다. 당시 그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재벌인데도 3년 동안 자기가 교주처럼 법당만 사용하고 10만 원도 아니고 100만 원도 아닌 거마비 5만 원을 보내다니 그렇게 인색한 사람인 줄 비로소 알았다.
반면 한 사람이 이 불사에 10만 원, 20만 원씩 열일곱 번을 낸 분도 있었다. 나는 이 사람을 찾아서 사실을 물었다. 어떻게 같은 불사에 열일곱 번이나 시주를 했느냐고 했더니 이 사람은 ‘스님께서 일요법회 때마다 법문이 끝나고 총무원에서 돈이 나와서 짓는 것도 아니고 재벌들이 돈을 내지도 않고 많은 신도들이 십시일반으로 내서 계속 골조가 올라간다는 말을 듣고 또 스님의 보시공덕 복덕종자 행복종자의 법문을 듣고 그냥 있을 수가 없어 내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회관 불사는 이렇게 많은 신도가 일심 단합해서 이뤄진 것이다.”
고산스님 조계사 주지 부임후 추진위 구성해 공사재개
“대웅전 보다 높으면 시비 끊이지 않는다 충고” 일화도…
회고록에서 밝힌 것처럼 고산 스님은 1차 공사로 잡았던 3층 까지만 올렸다. 그리고
1975년 2월말 은해사 주지를 임명받아 조계사를 떠난다. 후임으로 월탄 스님이 임명받아 회관 건립불사를 매조지한다. 이런 가운데 총무원 청사가 입주해 있던 동국대 혜화관 소유권을 놓고 종단과 학교가 불편한 관계에 놓인다. 종단 내 갈등이 학교 운영에 까지 영향을 미쳐 급기야 관선이사가 파견되는 수모를 겪는다. 결국 혜화관 건립 비용으로 들어간 7억원을 불교회관 건립비로 지원하기로 1975년 3월10일 총무원과 학교법인이 약정 하면서 문제가 풀린다. 즉 3층 골조 까지 끝난 조계사 불교회관 건립비를 학교법인이 부담해 공사를 마무리하면 총무원 청사를 다시 조계사로 옮겨오고 혜화관은 학교에 양도키로 한 것이다.
약정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총무원 청사 및 부지를 동국학원으로 소유권을 넘겨주는 대신, 동국학원 측에서는 종단으로 봉은사 부지 복구비조 2억원, 총무원 청사 이전건립비조 5억원, 도합 7억원을 제공한다. 7억원 중 대물변제비로서 성동구 명일동의 임야 및 전답2만1천461평의 소유권을 종단에 양도하고 그 공제 잔액을 현금으로 상환 한다”
총무원은 현금상환액으로 2억원을 요구한다. 이 돈으로 청사 건립을 연내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학교법인이 이를 수용해 3층에다 나머지 2층을 올려 이 해 11월 불사가 마무리된다.
애초 10층 규모에서 5층으로 줄어들었지만 당시로서는 처음으로 일으킨 종단 차원의 대형불사였다. 4명의 총무원장과 4명의 조계사 주지를 거쳐 기공식 5년여만에 드디어 불교회관 즉 총무원 청사 불사가 끝을 맺게 됐다. 공사 건립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청사는 이후 20여년간 조계종의 얼굴이며 심장부로서 역할을 하는 한편, 종단분규의 상징으로 자리잡을 정도로 큰 상처를 입기도 했다.
고산 스님은 그 이유를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 보다 청사 건물이 높아서라고 분석했다.
회고록에서 스님은
“지상 3층만 한 것은 경봉 스님께서 한번 오셔서 보시고 내게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아, 절대로 3층 이상 법당보다 높게 짓지 말아라. 만약에 높게 짓는다면 온 세계가 떠들썩하게 시비가 끊임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절대로 3층 이상 짓지 말아라’라고 해서 나는 3층만 짓고 말았는데 내 후임 주지가 2층을 더 올려 5층으로 지었다. 그 후 94년 종단 개혁과 98년 99년 종단 사태로 인해 시끄러웠다. 이것을 보면 큰스님들의 말씀을 무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현재 청사를 겸하는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은 고산 스님이 총무원장 시절 설계했는데 높이가 대웅전보다 높지 않다.
[불교신문 2716호/ 4월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