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개장터에서 12km정도 지방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50여 가구가 사는 산골짜기 의신 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마을 앞쪽으로 흐르는 이 계곡은 암반과 숲이 많아 매년 여름철 피서인파가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오늘 우연하게도 차를 몰고 집을 나서다 보니 하동방면으로 가게 되었다. 가다가 완사 시골장터에서 피순대
안주에 소주 1잔 걸치고 돼지국밥으로 배를 채운 후 도착한 곳이 의신마을이다. 몇 년 전 이른 봄 고로쇠 물
마시려 왔다가 민박집에서 하룻밤 자고 간 인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곳 의신계곡은 지리산의 중심부, 벽소령 아래에 있다. 행정구역은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화개장터를 에둘러
온 1023번 지방도로가 끝나는 곳에 자리하고 있으니 지리산의 여러 계곡 중에서도 가장 오지에 속하는 편이다.
이곳에서 시작되는 등산코스만 줄잡아 20여개쯤 된다. 삼정마을을 거쳐 벽소령으로 향하거나 대성계곡을 끼고
세석평전까지 오르는 등산로가 대표적인 코스. 이렇듯 산행 들머리로만 여겨진 탓에 사람들의 시선에서 살짝
비켜서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의신계곡을 즐기는 방법이야 저마다 다를 터다. 의신계곡 특유의 풍경과 제대로 마주하려면 계곡 트레킹에
나서는 것이 좋겠다. 웅장한 바위들과 계곡수가 어우러지며 만들어 낸 빼어난 아름다움은 내 나라 안 어디서고
쉽게 접할 수 있는 풍경이 아니다. 다만 출발 전 의신마을이나 국립공원관리공단에 꼭 출입신청을 해야 한다.
출입제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트레킹은 의신마을을 들머리 삼아 용소와 쿵쿵소 등을 거쳐 빗점골까지 다녀오는 게 일반적이다. 거리는 7㎞
남짓. 왕복 6~7시간 정도 소요된다. 중간중간 주변의 임도를 이용할 경우 3~4시간이면 다녀올 수 있다.
용소에서 계곡길을 따라 20분 남짓 오르면 쿵쿵소에 닿는다. 오랜 세월 쏟아져 내린 폭포수가 바위를 깎아
움푹 파인 공간을 만들었고, 폭포 소리가 그 공간에 부딪치면서 '쿵쿵' 하는 소리를 내게 된 것. 단풍나무가
바위와 계곡수를 덮고 있는 전형적인 늦가을에 가면 더욱 즐거운 풍경과 마주할 수 있는 곳이다.
쿵쿵소에서 빗점골까지는 임도를 따라가는 게 좋다. 빗점골로 향하는 길과 벽소령 등산로가 갈라지는 삼정
마을에 들러 숨 한 자락 내려놓으면 넉넉한 지리산이 가슴 가득 차오름을 느낄 수 있다.
빗점골은 '마지막 빨치산' 이현상이 국군 토벌대에 의해 최후를 맞았던 곳이다. 안내판에 따르면 이현상은
무려 6년 동안 빗점골 내 배나무평전에서 수력발전기를 돌려가며 생활했다고 한다. 배나무평전 400m 위쪽에
이현상의 아지트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모든 전란의 마지막 전적지가 바로 이곳이었다. 지리산 자락까지 몰린 동학농민군과 갖은
전쟁에 참여했던 의병, 한국전쟁 당시 군인, 빨치산 등이 모두 이곳 산자락에서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이기는 하나 어딘가 처연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은 아마 그런 까닭이었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