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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종교>: 동양의 종교
1. 힌두교(Hinduism)
인도교(印度敎)라고도 한다. 힌두교를 범인도교라 함은 힌두(Hind?)는 인더스강의 산스크리트 명칭‘신두(Sindhu:大河)’에서 유으로, 인도와 동일한 어원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BC 2500년경의 인더스 문명에까지 소급될 수 있으며, 아리안족의 침입(BC 2000∼BC 1500?) 이후 형성된 바라문교를 포함한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아리안 계통의 바라문교가 인도 토착의 민간신앙과 융합하고, 불교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300년경부터 종파의 형태를 정비하여 현대 인도인의 신앙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같이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었기 때문에 특정한 교조와 체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다양한 신화 ·성전(聖典)전설 ·의례 ·제도 ·관습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을 통일하여 하나의 종교로서의 구체적인 기능을 가능케 하는 것은 카스트 제도이다. 이의 기원은 바라문에 규정된 사성(四姓: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제도이지만,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변천하여 현대의 카스트 제도에는 종족 ·직업 ·종교적인 제조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인도인의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도인은 힌두교로 태어난다고 하며 카스트 제도에는 엄격하지만 신앙에는 상당히 관용적이다.
고대 바라문교와의 차이점으로는, 바라문교가 베다에 근거하여 희생제를 중심으로 하며 신전이나 신상(神像)이 없이 자연신을 숭배하는 데 비하여, 힌두교에서는 신전 ·신상이 예배의 대상이 되고 인격신이 신앙된다는 점이다. 또한 공희(供犧)를 반대하여 육식이 금지되고 있다.
힌두교의 근본 경전은 베다 ·《우파니샤드》이며 그 외에도 《브라마나》 《수트라》 등의 문헌이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은 인도의 종교적 ·사회적 이념의 원천이 되고 있다. 또한 경전에 준하는 것으로 《마하바라타》 《라마야나》(라마의 기행)의 2대 서사시가 유명한데, 특히 전자의 일부인 《바가바드 기타》는 널리 애창되고 있다. 이 외에 《푸라나》 《탄트라》 《아가마》 《상히타》 등이 힌두교 각 파에서 존중되고 있다.
힌두교는 바라문교에서 많은 신관(神觀) ·신화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다신교 같아 보이지만, 신들의 배후에 유일한 최고자를 설정하고 그 신들을 최고신의 현현(顯現:權化)이라고 하여 교묘히 통일시키고 있는 점에서 일신교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푸라나》 문헌 등에 나타나는 트리무르티(三神一體)가 그 좋은 예이다. 이는 별도의 기원에 속하는 우주창조신 브라마, 유지신(維持神) 비슈누, 파괴신 시바의 세 신을 일체로 하여 최고의 실재원리로 삼는 것이다. 그 중 비슈누와 시바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힌두교의 대종파를 형성하였다. 비슈누파는 학문적 성격이 강하며, 비교적 사회의 상층부에 속한다. 비슈누는 인간과 동물의 모습으로 지상에 출현하는 것으로 신앙되고, 비슈누의 10권화(權化) 중의 라마와 크리슈나는 2대 서사시의 영웅이며, 이에 따라 비슈누파는 라마파와 크리슈나파로 나뉘었다.
비슈누파에 비하여 시바파는 사회 하층부에 세력이 있으며, 수행자의 고행 ·주술, 열광적인 제의(祭儀)가 특색이다. 또한 인도에서는 예부터 신비(神妃) 숭배가 성하여 브라마에게는 시라스바티(辯才天), 비슈누에게는 라크슈미(吉祥天)가 배우 여신으로 간주되며, 시바신의 배우 여신으로는 두르가 ·파르바티 ·우마 ·칼리 등 많은 이명이 있다. 이들 여신을 샤크티(여성적 창조력)라고 하며, 이들을 숭배하는 샤크티파도 있다.
힌두교의 특징적인 사상은 윤회(輪廻)와 업(業), 해탈(解脫)의 길, 도덕적 행위의 중시, 경건한 신앙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윤회와 업 사상은 민간신앙을 채용한 것으로 이미 고(古)우파니샤드에 보이며, 《마하바라타》에 이르러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인도인의 도덕관념을 키웠지만, 한편으로는 숙명론을 심어줌으로써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인간의 사후 운명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이 있었다. 신들도 업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그러한 속박에서 해탈하는 방법으로서, 출가 유행(遊行)의 생활과 고행 또는 요가가 교설되었다. 고행은 주로 육체의 수련이며, 요가는 정신의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힌두교 사회에 있어 도덕관념의 기초는 바라문교의 법전에 규정되어 있는 달마(법 ·의무)이다. 4성(계급)제도와 4생활기(學生 ·家住 ·林住 ·遊行期)가 중심으로서, 자기가 소속하는 카스트에 따를 의무의 수행이 강조되었다. 최고신에 대한 바크티(信愛)와 그 은총은 능력 ·성별 ·직업 ·계급 여하에 관계없이 일반 민중의 구제를 위하여 가르쳐진 것이다. 또한 힌두교는 이슬람교 및 그리스도교와 접촉하여 여러 가지 영향을 받아, 근세에는 브라마 사마즈(1828년 창립), 아리아 사마즈(1875년 창립) 등의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비베카난다(1863∼1902)에 의한 라마크리슈나 교단(1897년 창립)은 모든 종교가 하나로 귀일(歸一)한다고 하여 보편주의적 종교관을 보여주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많은 신자를 가지고 있다.
2. 불교 [佛敎, Buddhism]
석가모니(釋迦牟尼)를 교조로 삼고 그가 설(說)한 교법(敎法)을 종지(宗旨)로 하는 종교.
가. 개요
불교라는 말은 부처(석가모니)가 설한 교법이라는 뜻과(이런 의미에서 釋敎라고도 한다) 부처가 되기 위한 교법이라는 뜻이 포함된다. 불(佛:불타)이란 각성(覺性)한 사람, 즉 각자(覺者)라는 산스크리트 ·팔리어(語)의 보통명사로, 고대 인도에서 널리 쓰이던 말인데 뒤에는 특히 석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불교는 석가 생전에 이미 교단(敎團)이 조직되어 포교가 시작되었으나 이것이 발전하게 된 것은 그가 죽은 후이며, 기원 전후에 인도 ·스리랑카 등지로 전파되었고, 다시 동남아시아로, 서역(西域)을 거쳐 중국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왔고, 한국에서 일본으로 교권(敎圈)이 확대되어 세계적 종교로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14세기 이후로는 이슬람교에 밀려 점차 교권을 잠식당하고 오늘날에는 발상지인 인도에서는 세력이 약화되었으나, 아직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캄보디아, 티베트에서 몽골에 걸친 지역, 한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에 많은 신자가 있으며,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다른 여러 종교와 비교하여 불교가 지니는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신(神)을 내세우지 않는다. 불타가 후에 이상화(理想化)되고 확대되어 절대(絶對) ·무한(無限) 및 그 밖의 성격이 부여되고, 각성과 구제의 근거가 되고 있으나 창조자 ·정복자와 같은 자세는 취하지 않는다. ②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로 대표된다. ③ 자비는 무한이며 무상(無償)의 애정이라 할 수 있어, 증오(憎惡)나 원한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일반적으로 광신(狂信)을 배척하고 관용(寬容)인 동시에 일체의 평등을 관철하고자 한다. ④ 지혜의 내용은 여러 가지로 발전하는데, 일체를 종(縱)으로 절단하는 시간적 원리인 ‘무상(無常)’과, 일체를 횡(橫)으로 연결하는 공간적 원리인 ‘연기(緣起)’가 중심에 있어, 이것은 후에 ‘공(空)’으로 표현된다. ⑤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경향이 강하다. ⑥ 모든 일에 집착과 구애를 갖지 않는 실천만이 강조되고 있다. ⑦ 조용하고 편안하며 흔들리지 않는 각성(覺性:解脫)을 이상의 경지(境地)로 삼아 이를 ‘열반(涅槃)’이라 한다. 그 교의(敎義)는 석가의 정각(正覺)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8만 4000의 법문(法門)이라 일컫듯이 오랜 역사 동안에 교의의 내용은 여러 형태로 갈라져 매우 복잡한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불(佛)도 본래는 석가 자체를 가리켰으나 그의 입적(入寂) 후 불신(佛身)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 2신(身) ·3신 등의 논, 또는 과거불 ·미래불, 또는 타방세계(他方世界)의 불, 보살(菩薩) 등의 설이 나와 다신교적(多神敎的)으로 되었다.
나. 인도의 원시불교
창시기(創始期)의 불교를 말하며, 경전들은 석가의 생애 중의 가르침을 스승이 죽은 후에 제자들이 수집 ·정리한 것이지만, 그 중에서 석가가 직접 설한 교법을 판별하기는 곤란하다. 교단도 이미 발족되어 석가 입적 후 약 100년 동안은 완전한 통일이 유지되었다. 불(佛) ·법(法) ·승(僧)의 3보(寶)는 불교를 구성하는 기본요소인데, 승(僧:敎團)은 출가신자(出家信者)인 비구 ·비구니와 재가신자(在家信者)인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로 이루어져 계율(戒律)로 규제되며 부처를 중심으로 모여 그 법을 실천한다. 이 재가신자는 단가제도(檀家制度)에서의 신자와는 달리 3보에의 귀의(歸依)를 서약할 뿐 아무런 속박도 없으며 그 대신 출가신자에 대한 의식(衣食)의 재정적 지원을 맡았다. 석가는 태자(太子) 시절의 물질적으로 풍족하던 생활에서도, 출가 후의 고행(苦行)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고뇌하였으나, 그 두 극단의 고뇌를 버림으로써 중도(中道)를 깨닫고 불타가 될 수 있었다.
중도란 일체 편견(偏見)에 구애되지 않는 자세이며, 올바른 견해 ·결심 ·언어 ·행위 ·생활 ·노력 ·사념(思念) ·명상(瞑想)의 팔정도(八正道)를 말한다. 5온(蘊)의 일체는 고(苦:苦諦), 그 고의 기원(起原:集諦), 고의 초극(超克:滅諦), 초극에 이르는 길, 즉 도제(道諦)라는 4개의 진리(四諦)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것이 팔정도이지만, 그 중 도제의 내용이야말로 팔정도 바로 그것이며 그 실천에 의해서만 중도가 얻어진다. ‘일체는 고이다(一切皆苦)’라는 말에서 생각해 보아도 5온의 이합(離合)은 항상 변천(變遷)하는 것이며(諸行無常), 존재하는 것에는 상일(常一) 주재(主宰)하는 입장은 없는 것으로(諸法無我), 전변(轉變) 무상한 세계에서 상(常)을 구하기 때문에 고가 생기는데, 팔정도의 실천에서 각성이 열리고 열반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도 설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원시불교의 사상이다.
다. 인도의 부파불교
불멸(佛滅) 후 100년까지 교단은 착실하게 확대 ·발전을 이루어, BC 3세기에는 마우리아왕조의 아소카왕[阿育王]이 귀의하여 불교는 거의 인도 전체에 퍼져 교세는 비약적으로 커졌다. 그러나 교단의 확대에 따라 내부에 의견의 대립이 나타나 불멸 후 100년이 지난 무렵부터 교단은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와 혁신적인 대중부(大衆部)의 두 집단으로 분열되었다. 또한 불멸 후 200년 무렵에는 대중부 속에서 재분열이 일어나, 먼저 일설부(一說部) ·설출세부(說出世部) ·계윤부(鷄胤部)로 갈리고, 이어서 다문부(多聞部) ·설가부(說假部)가, 또 제다산부(制多山部) ·서산주부(西山住部) ·북산주부(北山住部) 등으로 분파되었다. 한편 상좌부도 불멸 후 300년 무렵부터 분열이 시작되어 먼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설산부(雪山部)로 갈리고, 설일체유부에서 독자부(犢子部)가, 독자부에서 법상부(法上部) ·현주부(賢胄部) ·정량부(正量部) ·밀림산부(密林山部)가 분출(分出)되고, 또 설일체유부에서 화지부(化地部)가, 화지부에서 법장부(法藏部)가, 다시 설일체유부에서 음광부(飮光部)가, 이어서 경량부(經量部)가 분출되었다.
이들 20개의 부파는 소승 20부(小乘二十部)라고도 부르며 이들을 총칭하여 부파불교(部派佛敎)라고 한다. 상좌부 ·대중부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는 별로 없으나 혁신적인 대중부에는 후일 대승불교(大乘佛敎)로 발전할 기미가 엿보인다. 또한 상좌부 불교는 남방불교로서 오늘에 전한다. 〈대승불교〉 출가신자(승려) 중심인 종래의 불교에 대항하여 기원 전후부터 재가신자를 포함하는 신앙으로의 탈피를 원하는 대승(大乘)의 운동이 인도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 밖에 불탑을 중심으로 모여 불탑에 예배함으로써 불타에 대한 신앙을 높이는 재가신자의 집단인 보살단(菩薩團)이 있어, 이것도 대중운동에 합체하여 초기 대승불교가 성립되었다.
BC 1세기부터 AD 2세기에 걸쳐 《반야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 《유마경(維摩經)》 《화엄경(華嚴經)》 《무량수경(無量壽經)》 등의 대승경전이 차례로 성립되어, 이것들은 3세기 전후에 나가르주나(N?g?rjuna:龍樹)에 의해 이론적 근거가 부여되면서 대승불교의 확립을 보았다. 용수는 《중론(中論)》에서 모든 존재는 연기에 의하여 생기는 것으로 단독으로 존재하는 일은 없으니, 이것을 깨달으면 진공중도(眞空中道)의 정관(正觀)을 얻을 수 있다는 반야공관(般若空觀)을 설하였는데, 이 설에 기초를 둔 학파를 중관파(中觀派)라고 한다. 또 미륵(彌勒)이 시작하고 무착(無着) ·세친(世親) 등이 전개시킨 학파를 유가파(瑜伽派) 또는 유식파(唯識派)라고 한다.
이 학파는 용수의 반야공관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관상(觀想) 등에 의한 수행(修行)인 유가행(瑜伽行), 외계(外界)의 실재한다고 생각되는 것은 다만 심식(心識)의 투영이며, 심식만이 실재한다는 유식설(唯識說), 불성(佛性)은 중생도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것으로 중생 모두가 여래(如來)가 될 수 있다는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등을 설하고 있다. 이 두 학파가 중기 대승불교를 형성하였으며 그 후 세친의 학통을 이은 진나(陳那) 등에 의하여 인명(因明:불교논리학)이 확립되었다. 후기 대승불교에 이르면 인도교 등의 영향을 받아 다라니(陀羅尼)나 진언(眞言)을 중심으로 하는 밀교(密敎)가 주류를 이루어 점차 타락의 길을 걷다가 이슬람교의 인도 침입으로 13세기에 쇠멸하기 시작했다.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은 모든 존재에 실체(實體) ·아(我)와 같은 것은 없다고 하는 ‘공(空)’의 사상이다. 또 보살(각성을 구하는 사람)의 실천윤리덕목으로서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내세우는데, 그 첫째가 보시로 되어 있어 이타행위(利他行爲)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대승불교는 주로 북쪽으로 퍼져 중국과 한국 ·일본 등에 전해졌다.
다. 남방의 불교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등 동남아시아에 전파된 불교를 남방불교라 한다. 이 지역으로 불교를 전파하는 기지가 된 곳은 스리랑카이며 BC 3세기 중엽, 아소카왕의 왕자 마힌다(Mahinda)가 파견되어 상좌부 불교를 전한 것이 효시가 된다. 이 불교는 팔리어(語) 경전을 믿기 때문에 팔리불교라고도 한다. 5세기에는 불음(佛音)이 인도로부터 건너와 팔리어 경전의 주석(注釋)을 집대성함으로써 상좌부 불교의 기초가 굳어지고 활기를 띠게 되었다. 미얀마와 타이에는 이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가 전해졌다. 5세기에 미얀마로 건너간 상좌부 불교는 그 후 밀교[大乘]로 바뀌었다가 11세기 파간조(朝)의 전(全)국토통일과 함께 재흥되었고, 후에 본가인 스리랑카불교가 쇠퇴하자 상좌부 불교가 스리랑카로 역수입되었다.
한편 타이에는 8세기 무렵에 밀교가 전해져 번창하다가 후에 미얀마로부터 상좌부 불교가 진출하였고, 13세기 말에는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가 전해져, 그 후 왕조의 보호 밑에 발전하여 지금은 이 지역 제1의 불교국이 되었다. 자바에는 8세기경 인도로부터 밀교가 전해져 번창하였으나 후에 이슬람권으로 바뀌었다. 캄보디아 ·라오스는 13세기 말부터 타이족의 침입으로 상좌부 불교가 전해져 오늘에 이른다. 인도차이나반도의 또 하나의 지역인 베트남은 옛날부터 중국과의 교섭으로 6∼7세기경 대승불교가 전해져 선종(禪宗)을 중심으로 번영하였다.
라. 티베트와 몽골의 불교
티베트 ·몽골의 불교는 라마교라고도 한다. 티베트에는 일찍이 네팔 등의 불교가 들어온 것으로 생각되는데 토속적 샤머니즘인 분교(?敎)가 성행하여 교세를 넓히지 못하였다. 6∼7세기 인도에서 공식적으로 불교가 들어왔고, 8세기경에는 다시 인도로부터 밀교와 중관계(中觀系) 대승불교가 전해졌고, 경전의 티베트어 번역도 진척되면서 불교는 널리 전파되었다. 10세기에 한때 쇠퇴하였으나 11세기에 다시 일어나 밀교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15세기 초 종객파(宗喀巴)가 나와 종풍(宗風)을 쇄신, 교세를 크게 높였으며, 이후 그 법계(法系)는 대대로 다라이라마(‘큰 라마’라는 뜻)가 되어 종교와 정치의 실권을 잡았다. 한편 몽골에는 13세기 파스파(’Pags-pa:八思巴)가 티베트불교를 원(元)나라 조정으로 전해왔고, 그 후 각지로 퍼져 청(淸)나라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마. 중국의 불교
처음 불교가 전해진 연대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1세기 중엽 한(漢)나라 때 서역(西域:티베트)지방을 경유하여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서역지방은 옛날부터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요로에 있어 양쪽 문화의 접촉장소가 되어왔으므로 인도의 불교가 재빨리 서역에 전해지고 다시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서역지방에도 독특한 불교문화가 개화하였는데, 그 서역불교의 발자취는 둔황[敦煌]을 비롯한 여러 곳의 유적에서 엿볼 수 있다. 초전기(初傳期)에서 4세기까지를 중국불교의 제1기라 할 수 있으며, 이 시대에는 서역방면으로부터의 내입승(來入僧)의 활약이 눈에 띈다. 즉 안세고(安世高) ·지루가참(支婁迦懺) ·축법호(竺法護) ·불도징(佛圖澄) 등이며 그들은 대승 ·소승의 경전을 번역하여 불교에 대한 중국인의 이해를 넓히는 데 노력하였다. 중국인 불도(佛徒)로 주사행(朱士行) ·도안(道安) ·혜원(慧遠) 등이 나왔고, 특히 도안 ·혜원 등은 학문적이고 이론적이었던 불교를 실천으로써 이해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불교가 무조건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며 고래의 사상과의 유사점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일도 있었다. 불타가 황제(黃帝) ·노자(老子)와 나란히 제향되는 예가 그것이며, 4세기 무렵부터는 불교의 ‘공(空)’을 노자의 ‘무(無)’로 해석하려는 격의불교(格義佛敎)도 생겨났다. 401년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장안(長安)에 들어와 대승경전의 번역을 시작한 때부터 중국불교는 제2기에 들어선다. 구마라습은 여러 경전의 뛰어난 한역(漢譯)을 행하여, 그 한문경전에 의한 불교 본래의 교리연구가 진행되었고, 중국인의 불교에 대한 이해도 넓어져, 이후 중국불교의 사상적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 그 문하생은 3,000여 명이라 하며 그 계통은 일대 교세를 이루고 제2기 불교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구마라습 외에도 각현(覺賢) 담무참(曇無讖) ·보리류지[菩提流支] ·진제(眞諦) 등이 도래하여 경전의 한역을 행하고, 그 경전 연구에 따라 삼론(三論) ·사론(四論) ·성실(成實) ·법화(法華) 등 많은 학파가 발생하였다.
또 우발적으로 전래된 여러 경전을 본래의 역사적 발전의 순서로 정리하고 체계를 세우기 위한 교판(敎判:敎相判釋)도 성행하게 되어 교학연구는 더욱 진전하였다. 수(隋) ·당(唐)시대에는 전대의 교학연구를 기초로 소의(所依)의 경론(經論)에 의한 종파가 확립되어 국민의 올바른 이해와 실천에 입각한 불교의 성립을 보았으며, 이 시대는 중국불교의 황금시대가 되었다. 수나라 때는 우선 지의(智?)가 《법화경》에 의하여 천태종(天台宗)을 개종(開宗)하고, 이어서 길장(吉藏)은 용수의 삼론(三論)에 의한 삼론종(三論宗)을 확립시켰다. 당대(唐代)에는 화엄종 ·선종(禪宗) ·정토종(淨土宗) ·법상종(法相宗) ·율종(律宗) ·밀교의 각 파가 성립하였다.
화엄종은 《화엄경》 소의(所依)의 종파로 법장(法藏)이 그 교학의 대성자이며, 선종은 이전부터 달마(達磨)에 의하여 전해져 오다가 5조(祖) 홍인(弘忍)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였고, 다시 그 제자인 혜능(慧能)과 신수(神秀)에 의하여 남종 ·북종의 2대 분파가 생겼다. 특히 남종파는 임제(臨濟) ·위앙(?仰) ·조동(曹洞) ·운문(雲門) ·법안(法眼)과 임제에서 분파된 양기(楊岐) ·황룡(黃龍) 등 이른바 5가(家) 7종(宗)이 나와 크게 번영하였다. 정토종은 담란(曇鸞) ·도작(道綽) ·선도(善導) 등에 의하여 확립되었는데, 부처의 명호(名號)를 외우며 오로지 아미타불에 귀의하라는 간단한 교의(敎義)로써 민중 사이에 널리 퍼졌다.
법상종은 현장(玄?)이 인도에서 가져온 유식론(唯識論) 관계의 경전을 기초로 그의 제자 규기(窺基)가 개종하였고, 율종에서는 도선(道宣)의 계통, 즉 남산종(南山宗)이 번창하였다. 밀교도 선무외(善無畏) ·금강지(金剛智) ·불공(不空) 등에 의하여 인도에서 전래되었다. 수 ·당의 황금기를 지난 중국불교는 그 후 쇠퇴하기 시작하여 몇 차례의 파불(破佛)을 겪고 또 명(明)나라 때는 중앙에서 통제가 가해지는 등, 활발한 불교활동은 차차 자취를 감추고 다만 선종과 정토종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의 중국 본토에서는 불교활동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바. 일본의 불교
일본의 불교는 538년 백제 성왕(聖王) 때 도장(道藏)이 불상과 경전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성실종(成實宗)의 개조가 된 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백제는 일본과의 접촉이 빈번하여 관륵(觀勒)은 역법(曆法) ·천문 ·지리 ·술수(術數) 등을 일본에 전하였고, 혜총(惠聰) ·도림(道琳) ·담혜(曇慧) ·혜미(慧彌) 등 많은 고승이 일본에 건너가 불교와 문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일본에 전해진 불교는 여러 호족(豪族)들의 지지를 얻어 마침내는 쇼토쿠 태자[聖德太子]가 불교장려책을 쓰게 됨으로써 공식적인 지위를 굳혔다. 나라[奈良] 시대에는 불교가 국가와의 연관을 더욱 굳혀 고쿠분사[國分寺]의 제도도 이 무렵의 산물이다.
이 시대는 중국불교가 황금시대를 이룬 때였으므로 그들의 여러 종지(宗旨)가 차례로 건너와 삼론(三論) ·법상 ·성실 ·구사(俱舍) ·율 ·화엄 등 이른바 남부6종(宗)이 성립하였다. 헤이안[平安] 시대에 이르러 불교는 천태(天台) ·진언(眞言)의 2종이 중심이 되어 전개된다. 천태종의 사이초[最澄], 진언종의 구카이[空海] 등은 모두 입당(入唐)하여 새로운 불법을 구한 개조들이다. 남부6종은 이들 2개 종파의 발전에 따라 점차로 그 세력을 잃게 되었고, 특히 사이초가 대승계단(大乘戒壇)을 개설하고 그가 죽자 이것이 국가의 공인을 얻음으로써 남부6종의 몰락은 결정적으로 되었다. 또 헤이안불교는 귀족들의 열성적인 귀의와 보호를 받아 귀족불교라 일컬어졌는데, 귀족들은 조정의 본을 떠 조사(造寺) ·조탑(造塔)에 힘쓰는 한편 기도(祈禱)와 법회를 자주 열어 그 권세를 자랑하였다.
한편 이렇게 귀족들과 깊은 관련을 갖게 된 승려들은 세속적 권위와 결탁하게 되었고, 절은 귀족으로부터 기부받은 토지를 지키기 위하여 승병(僧兵)을 두게 됨으로써 많은 폐단을 낳게 되는 근원이 되었다. 일본불교가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가마쿠라[鎌倉] 시대이다. 말법사상(末法思想)을 배경으로 일어난 정토종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외우는 일만이 정토왕생(淨土往生)의 정정업(正定業)이라고 설하면서 급속히 교세를 넓히다가 기성종파의 반감을 사고 박해를 받게 되었다. 정토종을 확립한 겐쿠[源空:法然]의 문하에는 많은 인재가 모여 여러 종파로 분립되었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되는 것은 정토진종(淨土眞宗)을 개설한 신란[親鸞]이다. 그도 스승과 마찬가지로 유형에 처해졌으나 그는 유형지에서 저술과 포교에 주력하였다. 한편 에이사이[榮西] ·도겐[道元] 등에 의하여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선종(禪宗)은 계율에 엄격한 수양의 교법으로서 무사계급과 결부되어 발전하였다. 가마쿠라불교의 최후를 장식한 것은 니치렌종[日蓮宗]이다. 니치렌은 처음 진언밀교(眞言密敎)를 배우고 이어 천태(天台)를 배워 《법화경》의 진리를 깨닫고 니치렌종을 개종하였다.
이 종파는 천태 이외의 종파를 부정하는 도전적인 언동 때문에 자주 법난(法難)을 받았다. 그러나 후에 민중들 사이에 교세가 확장되어 지금은 진종(眞宗)과 나란히 대종파를 이루고 있다. 무로마치[室町] 시대 이후 불교는 점차 쇠퇴하다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천하를 통일하자 완전히 교세가 꺾였으며, 에도[江戶] 시대에는 정권의 도구로 타락하였다. 이렇게 침체 ·부패한 불교에 대하여 비난 ·배척의 운동도 자주 일어났으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뜻있는 불제자들에 의하여 혁신의 기운도 높아지고 여러 종파의 부흥운동도 추진되어 근대적 종교로서의 불교발전이 이룩되었다.
사. 한국의 불교
1) 삼국시대의 불교
한국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 6월 진(秦)나라의 순도(順道)와 아도(阿道)가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들어와 초문사(肖門寺)·이불란사(伊弗蘭寺) 등을 창건하고 설법을 시작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들의 설법과 전도를 공허(公許)한 고구려에서는 그후 평양(平壤) 9사(寺)와 반룡사영탑(盤龍寺靈塔) 등을 짓는 한편 불교 전파에도 힘써 많은 고승이 배출되었고, 열반종(涅槃宗)·삼론종(三論宗)·천태종(天台宗)·살바다종(薩婆多宗) 등의 종파가 이루어졌다.
의연(義淵)은 불교역사 연구를 통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고, 혜자(惠慈)·운총(雲聰)·혜편법사(惠便法師)·담징(曇徵)·법정(法定) 등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였고, 도림(道琳)·덕창(德昌)·혜량(惠亮)·신성(信誠) 등은 호국불교를 위한 실력배양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백제는 384년(침류왕 1)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晉)을 경유하여 입국, 왕의 우대를 받고 궁중에 머물다가 이듬해 남한산(南漢山)에 절을 짓고 포교를 시작하였다.
그후 왕흥사(王興寺)·미륵사(彌勒寺)·한산불사(漢山佛寺)·경복사(景福寺)·수덕사(修德寺) 등 많은 사찰이 건조되고 교파도 삼론종·계율종·성실종(成實宗)의 세 종파가 성립되었다. 백제불교는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많은 고승들이 일본에 건너가 불교 전파에 큰 공헌을 하였는데, 일본 성실종의 개조가 된 도장(道藏)을 비롯하여 혜총(惠聰)·도림(道琳)·혜미(惠彌)·도흔(道欣)·담혜(曇慧)·도령(道寧)·상휘(常輝)·의각(義覺)·방제(放濟)·다상(多常) 등이 있다. 이 밖에도 백제 멸망 후 그 재건을 위해 궐기하였던 승장(僧將) 도침(道琛), 인도에 유학하고 귀국 후 《율부(律部)》 72권을 번역한 겸익(謙益) 등도 유명하다.
신라는 삼국 중에서 불교가 가장 늦게 전파된 나라로 527년(법흥왕 14) 이차돈(異次頓)의 순교가 있은 후 비로소 공인되었는데 그후 급속히 발전하여 국가적 종교로 존숭되고 승려와 사원이 국가의 두터운 보호를 받게 되었다. 많은 구법승(求法僧)이 인도와 당나라에 유학하였고 그들에 의하여 당나라의 13종(十三宗:成實宗·三論宗·俱舍宗·地論宗·攝論宗·天台宗·法相宗·涅槃宗·念佛宗·密宗·禪宗·華嚴宗·律宗)이 도입되어 발전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선종은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이른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분파를 이루었다. 국가 안태(安泰)와 왕실의 번영을 비는 호국불교로서의 신라불교는 사상·정치·문화·외교·국민생활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건축·공예 방면에도 찬란한 예술의 꽃을 피웠다.
황룡사(皇龍寺)·사천왕사(四天王寺)·봉성사(奉聖寺)·감은사(感恩寺)·봉덕사(奉德寺)·망덕사(望德寺)·법주사(法住寺)·통도사(通度寺)·화엄사(華嚴寺)·월정사(月精寺)·부석사(浮石寺)·불국사(佛國寺)·장안사(長安寺)·해인사(海印寺)·보현사(普賢寺)·범어사(梵魚寺)·쌍계사(雙磎寺) 등 명찰을 창건하였고, 탑·종·불상 등의 공예가 발달하여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 정혜사(淨惠寺)의 13층탑, 화엄사 쌍탑, 감은사 쌍탑, 무량사탑(無量寺塔), 동화사(桐華寺) 쌍탑, 금산사(金山寺)의 석탑 및 6각다보탑, 화엄사 사리탑 등을 비롯하여 석굴암 석불, 황룡사 장륙금상(丈六金像), 봉덕사 종, 금산사 부도(浮屠), 감산사(甘山寺)의 2불상, 백률사(栢栗寺)의 약사상(藥師像), 사천왕사의 사천왕상, 화엄사 석등 등은 귀중한 문화재로서 전승된다. 한편 수많은 고승이 배출되어, 원광(圓光)과 같은 대학승(大學僧)은 세속5계(世俗五戒)로 국민도의를 확립하였고, 자장(慈藏)은 문물제도를 수립하였으며, 의상(義湘)은 실천적인 수행(修行)과 사찰의 건립을 통하여 화엄의 교리를 널리 펴는 한편 많은 학승을 양성하였고, 원효(元曉)는 80여 부의 논소(論疏)를 지어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는 한편 통일불교 창조에 정력을 쏟았다.
의상과 원효는 그 학통이 중국과 일본에도 널리 알려졌으며, 원측(圓測)은 유식설(唯識說)에 통달하여 독특한 견해를 가졌고, 그 때문에 중국의 법상종 정통파에게는 비난을 받았으나 그의 저술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는 티베트어로 번역되어 전한다. 혜초(慧超)는 인도에 건너가 불적(佛蹟)을 순례하고 육로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귀국한 다음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하여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그 밖에 신라시대의 고승들로는 도증(道證)·경흥(憬興)·지통(智通)·표훈(表訓)·명랑(明朗)·승전(勝詮)·대현(大賢)·도의(道義)·신행(信行)·체징(體澄)·지증(智證)·혜소(慧昭)·현욱(玄昱)·개청(開淸)·낭공(朗空)·범일(梵日)·무염(無染)·원랑(圓郞)·진경(眞鏡)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모두 당나라와 일본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2) 고려시대의 불교
고려의 불교는 신라불교를 그대로 계승하는 한편 송(宋)나라의 영향 아래 독자적인 발달을 이루었다. 태조 왕건(王建)은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새로 승과(僧科)를 제정하여 승려를 우대하였다.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 등을 연중행사로 개최하는 등 태조의 숭불정책은 고려 전반에 걸쳐 계승되면서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당시에 건립된 사찰로는 개성의 왕륜사(王輪寺)·법왕사(法王寺)를 비롯한 16사(寺)와 봉은사(奉恩寺)·진관사(津寬寺)·부석사(浮石寺)·관음사(觀音寺)·숭교사(崇敎寺)·석왕사(釋王寺)·영명사(永明寺) 등이 있으며, 공예품으로는 관촉사(灌燭寺) 석등, 부석사 조사전벽화(祖師殿壁畵), 대흥사(大興寺)의 종 등 우수한 예술품을 낳았다.
특히 문종(文宗) 연대에는 고려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간행하여 한국불교문화의 대표작을 남겼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음에도 이름난 고승은 많이 배출되지 못하였다. 그 중에서 체관(諦觀)은 천태종을 재흥시켰고,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문종의 아들로 일찍이 11세 때 승려가 되어 송나라에 유학한 후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 교장(敎藏) 4,740여 권을 간행한 것은 특기할 만하며, 또 문하생이 1,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 밖에 중기에 이르러 지눌(知訥)·수기(守其)·균여(均如), 말기의 나옹(懶翁)·보우(普愚)·보조(普照)·백운(白雲) 등은 이름을 떨친 고승들이었다. 고려의 불교종파는 신라의 종파가 계승되었다가 말기에 다소 분화되어 조계종(曹溪宗)·천태법사종(天台法師宗)·천태소자종(天台疏子宗)·화엄종·총남종(摠南宗)·자은종(慈恩宗)·신인종(神印宗)·남산종(南山宗)·도문종(道門宗)·중신종(中神宗)·시흥종(始興宗)의 11종이 성립되었으며 그 중 화엄·자은·총남·중신·시흥의 5종을 5교(敎), 조계·천태의 2종을 양종(兩宗)이라 하여 5교 양종의 종파를 이루었다.
3) 조선시대의 불교
조선시대에 이르러 조정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인하여 불교는 미증유의 수난기(受難期)를 맞이하였으니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는 한편, 함부로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하고 사전(寺田)에도 과세를 하였으며 승려의 궁중출입과 도성(都城) 내 출입을 금하였다. 또한 연산군 때는 승과(僧科)를 폐지하고, 삼각산의 여러 절의 승려를 몰아내어 그곳을 놀이터로 삼았으며 원각사(圓覺寺)의 불상을 옮기고 그곳을 기관(妓館)으로 삼는가 하면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덕(興德) ·흥천(興天) 두 절을 없애고 여승은 궁중의 노비(奴婢)로 삼고 승려들도 모두 환속(還俗)시켰다. 중종(中宗)은 경주(慶州)의 동불상(銅佛像)을 녹여 병기(兵器)를 만들고 원각사를 헐어 그 재목은 민가를 짓는 데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에도 불구하고 불교신앙 자체를 말살하지는 못하였으며, 특히 상류층 부인의 신앙을 저지하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역대왕 중에는 호법왕(護法王)도 있었으니, 태조는 석왕사 ·태고사 ·해인사 등에 비판(婢板)을 하사하였고, 세종 ·세조 때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 불경을 간행하였다. 특히 세종은 불교종파의 정비를 단행하여 조계 ·천태 ·총남의 3종을 선종(禪宗)으로, 화엄 ·자은 ·시흥 ·중신의 4종을 교종(敎宗)으로 통합하여 선 ·교 양종을 성립시켰다. 이름 높은 명승도 많이 배출되어 무학(無學) ·함허(涵虛) ·보우(普雨) 등과 임진왜란 때의 승장 서산(西山) ·사명(四溟) ·처영(處英) ·영규(靈圭) 등은 특히 유명하다. 그 후 한국불교는 일제강점기에 사찰령(寺刹令)에 따라 31개 본사와 1,200개의 말사(末寺)로 구분되었고, 3 ·1운동 때는 많은 승려가 가담하였으며, 한용운(韓龍雲) ·백용성(白龍成) 등은 33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8 ·15광복 후 전국불교대회를 열어 교구제(敎區制)를 정하고 중앙에는 총무원, 각 도에는 교무원을 설치, 종헌(宗憲)에 따라 조직을 강화하였다.
6 ·25전쟁 후에는 파괴된 100여 개의 사찰을 수축하는 한편 불교의 대중화운동을 전개하였고, 고아원의 설립, 동국대학 ·해인대학 ·경기대학과 해동(海東) ·용인(龍仁) 등 10여 고등학교 및 20여 개의 중학교를 운영, 문화사업에도 기여하고 있다. 1954년 이래 비구(比丘) ·대처(帶妻) 두 파의 분쟁으로 분열된 후 여러 개의 종단으로 갈라졌다. 현재 교육부에 등록된 종파는 조계종을 비롯하여 태고종(太古宗) ·법화종(法華宗) ·미륵종(彌勒宗) ·법상종 ·보문종(普門宗) ·일승종(一乘宗) ·용화종(龍華宗) ·불입종(佛入宗) ·원효종(元曉宗) ·천태종 ·화엄종 ·정토종(淨土宗) ·진각종(眞覺宗) ·총화종(總和宗) ·진언종(眞言宗) ·천화불교(天華佛敎) ·한국불교법화종 등 18개 종파가 있다. 사찰수는 5,700여 개소이며, 승려가 2만여 명, 신도수 1,300만여 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불교신문》을 비롯하여 각 종파 ·단체들에서 정기간행물도 30여 종이 나오고 있다.
3. 유교 [儒敎]
공자를 시조(始祖)로 하는 중국의 대표적 사상.
가. 개요: 공교(孔敎) ·공자교(孔子敎)라고도 한다. 인(仁)을 모든 도덕을 일관하는 최고이념으로 삼고,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윤리학 ·정치학이며, 수천 년 동안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양사상을 지배하여 왔다.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난 공자는 대성(大聖)이었으나 고국인 노(魯)나라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년간 여러 나라로 돌아다니며 ‘선왕(先王)의 도(道)’를 역설하였으나 끝내 그 이상을 펴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사학(私學)을 열어 많은 제자를 가르치는 한편 《시(詩)》 《서(書)》의 2경을 정리하고 예(禮) ·악(樂)을 선정하였으며 《춘추(春秋)》를 저술하고 또한 《역(易)》을 좋아하여 그 해석서라 할 수 있는 《십익(十翼)》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진수(眞髓)는 그가 죽은 후, 제자들이 수집 편찬한 그의 언행록인 《논어(論語)》에서 잘 나타난다. 공자는 인을 가장 중시하였으며, 인은 곧 효(孝)이며 제(悌)라 하여 인의 근본을 가족적 결합의 윤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육친(肉親) 사이에 진심에서 우러나는 애정을 강조하는 한편, 그것을 인간 사회의 질서 있는 조화적 결합의 원리로 삼고, 정치에도 전개시켰다. 그것은 춘추시대 말기의 인간주의적 풍조의 영향을 받아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도덕성에 주목하고, 거기서부터 현실사회의 혼란을 구제하려 하였다. 공자는 훌륭한 정치를 행했던 주(周)의 예악(禮樂)을 끌어들여 그 실행을 강조하면서, 예는 전통적 ·관습적인 사회규범이며 그것은 곧 인의 사회성 ·객관성을 보증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후 맹자가 나타나 인의 실천을 위한 의(義)의 덕을 내세워 인의(仁義)를 병창(倂唱)하였으며 또한 인간의 본성은 선(善)이라 하여 내면적인 도덕론을 펴고, 선한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덕치(德治)로서의 왕도론(王道論)을 주장하였다. 맹자에 의하여 유교는 뚜렷하게 내면적으로 심화되고 또 정치론으로도 정비되었으며 한편 오륜(五倫)도 이 무렵에 시작되었다. 얼마 후 순자(荀子)가 나타나 맹자의 내면화에 반대이론을 내세웠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악(惡)이므로, 외면적 ·객관적인 예에 의해서만 수양이 완성된다고 생각하여 예를 강조하였다. 또 공자와 맹자가 존중하던 불가지(不可知)인 하늘의 존재를 추방하고 인간의 독자적 입장을 주장하였다.
나. 한대의 유교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유교는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대박해(大迫害)를 받아 한때 소멸하는 것도 같았으나 한(漢)나라 무제(武帝)에 이르러,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유교는 국가적 교학이 되어 그 지위를 굳혔다. 공자를 존숭하고, 정치계급은 오경(五經:역경 ·서경 ·시경 ·예기 ·춘추)을 읽도록 요청하여 유교는 왕조의 체제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전한(前漢) 때는 어떤 1경(經)에만 치중하는 학풍이 일더니 후한시대에는 여러 경서를 종합 검토하고 그것을 주석(註釋)하는 훈고학(訓?學)이 성행하여 이것이 당대(唐代)로 계승되었다.
다. 신유교
신유교(新儒敎)란 도학(道學) ·주자학(朱子學) ·양명학(陽明學) 등을 이르는 말이다. 후한 말기에 전래한 불교와, 노장사상(老莊思想)에 바탕을 둔 도학은 육조시대에 융성하여 서로 항쟁하는 가운데, 유교는 침체상태를 보였으나 당나라 때 도학의 선구자인 한유(韓愈)가 유교의 도통을 밝히고 숭유척불(崇儒斥佛)의 기치를 들었다. 이어 북송(北宋)에 이르러 주돈이(周敦?) ·정호(程顥) ·정이(程?) 등이 나와 과거 훈고에만 치중하던 유교를 형이상학적인 면에서 다루어 크게 부흥시켰고 이어 남송의 주자(朱子)는 이들 학설을 집대성하여 주자학을 확립시켰다. 그는 5경(經)에 대신하여 4서(四書:대학 ·논어 ·맹자 ·중용)를 존중하고 이에 대한 《사서집주(四書集註)》를 저술하여 명성을 남겼으며 그 밖에도 《역본의(易本義)》 《시집전(詩集傳)》 등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다.
주자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입각하여 이(理)와 기(氣)를 구분하고, 이를 만물의 근본이 되는 형이상의 도(道)라 하였으며, 기를 만물의 도구(道具)가 되는 형이하의 기(器)라 하였다. 그러나 주자와 거의 같은 시대의 육상산(陸象山)은 견해를 달리하여 ‘심즉리(心卽理)’의 일원론(一元論)을 주장하였다. 그의 육학(陸學)은 심학(心學)이라고도 하였으며 이것은 명나라의 왕양명(王陽明)에게로 계승되어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양명학이 정립되었다.
라. 유교의 몰락
청대(淸代)에 이르자 유교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표방하는 고증학(考證學)이 대두하여 공허한 이론에만 치중하는 송학(宋學:주자학 ·양명학)을 물리치고 고정(考訂) ·교감(校勘) ·훈고를 통하여 고전(古典)의 참뜻을 이해하려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아편전쟁을 계기로 중국의 유교는 종말기를 맞이하였다. 열강의 침략, 청조(淸朝)의 부패에 궐기한 중국인은 많은 개혁안을 제출하였으며 그 중에서 공양학파(公羊學派)인 캉유웨이[康有爲] 등은 유교의 변법자강책(變法自强策)을 주장하여 근대국가로의 탈피를 꾀하였으나 수구파(守舊派)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그 후 유교는 밀려드는 근대과학에 자리를 양보하였다.
특히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 전개된 근대화운동은 봉건체제의 모든 것을 부정하여, 유교도 그 정신적 지주였다는 뜻에서 적대시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운동의 열기가 식고 평정을 되찾으면서 전통문화가 재검토되었고, 그 결과 유교도 앞으로의 문화창조에 기여할 수 있는 요소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화된 이후 유교는 탄압되고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마. 한국의 유교
유교가 한국에 전래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 때, 당(唐)나라의 학제인 국학(國學)을 받아들인 때를 그 기원으로 삼는다. 즉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太學)을 세웠으며, 백제는 국학을 세운 기록은 없으나 285년(고이왕 52)에 이미 왕인(王仁) 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한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유학이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도 오래 전부터 전래된 것 같으나 국학의 건립은 훨씬 늦어 682년(신문왕 2)에야 실시되었다. 그 후 신라에서는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 학문을 장려하고 최치원(崔致遠)은 당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떨쳤으며 설총(薛聰)은 이두(吏讀)를 창시하여 구경(九經)을 해석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유교는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고, 부차적으로는 지도계급으로 하여금 경사(經史)에 통하게 하고 사부(詞賦)와 문장을 능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태조의 숭불정책(崇佛政策)으로 유교가 한때 부진하였다가 992년(성종 11)에 비로소 국자감(國子監)을 세웠고 문종 때는 최충(崔沖)이 9재(齋)를 설치하고 학도를 가르쳤다. 그러나 무관의 발호와 계속된 전란으로 유교는 240년간이나 다시 침체상태에 빠졌다가 제25대 충렬왕 때 안향(安珦)이 왕을 따라 연경(燕京)에 다녀오면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입수해 온 후 정부에 건의하여 국학을 세우고 대성전(大成殿)을 건립하여 공자를 존숭하는 등 유교 부흥에 힘썼다. 그는 또한 한국에 주자학(朱子學:性理學)을 처음 수입하였으므로 주자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의 문하에는 백이정(白?正) ·우탁(禹倬) ·권부(權溥)등이 있어 모두 주자학 부흥에 힘썼으며, 그 학통은 고려 말의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정몽주(鄭夢周) 등에게로 전승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 정몽주는 성리학에 정통하고 도덕과 경륜(經綸)에도 일가를 이루어 동방 이학(理學)의 조(祖)라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태조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유교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유교의 기초를 처음으로 확립한 학자는 정도전(鄭道傳)이다. 그는 《불씨잡변(佛氏雜辨)》 등의 논설을 통하여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같은 시대의 유학자 권근(權近)도 많은 저술로 이에 동조하였다. 한편 고려의 유신(儒臣)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종직(金宗直)은 당대의 유종(儒宗)이 되었고, 그의 문인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은 가장 유명하였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희생되었다. 다시 조광조(趙光祖)가 유도(儒道)의 정치를 펴려 하였으나 기묘사화로 실패하고 많은 사류(士類)도 함께 화를 입었다. 이어 을사사화에는 이언적(李彦迪) ·노수신(盧守愼) 등의 거유(巨儒)가 유적(流謫)되었으며 거듭되는 사화로 유학자들은 차차 벼슬을 단념하고 산림(山林)에 숨어 오로지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하게 되었다.
서경덕(徐敬德) ·조식(曺植) ·김인후(金麟厚) 등은 그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서경덕은 종래 답습하여 오던 주자의 이기이원론에 대하여 중국 장횡거(張橫渠)의 태허설(太虛說)을 이어받아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장함으로써 한국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 후 명종 ·선조 때에는 많은 유학자가 배출되어 한국 성리학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이황(李滉:퇴계) ·이이(李珥:율곡)가 가장 뛰어나 이황을 ‘동방의 주부자(朱夫子)’, 이이를 ‘동방의 성인(聖人)’이라 할 만큼 그 학풍은 후대의 학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황은 4단 7정(四端七情)의 이기이원론을 주장하여 많은 저술로써 이를 확립하였고, 그 학설은 일본에 전해져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를 비롯한 여러 주자학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동양사상에서 한국의 성리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그의 문하에서는 조목(趙穆)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정구(鄭逑) 등 저명한 학자가 배출되었다. 한편 이이는 주기설(主氣說)을 확립시켰으며 그 학설은 김장생(金長生) ·이귀(李貴) ·조헌(趙憲) 등을 거쳐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등에게 이어졌다. 이황의 학통은 이상정(李象靖) ·이진상(李震相) 등이 적극 발전시켰으며, 송시열의 문인 권상하(權尙夏)의 제자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은 인(人) ·물(物) ·성(性)에 대한 이론을 달리하여 낙론(洛論)과 호론(湖論)으로 갈리어, 이 무렵부터 유교는 별다른 발전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당쟁(黨爭)과 예송(禮訟)의 소인(素因)이 되었다. 그리하여 공리공론만 거듭되는 순리학파(純理學派)를 대신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을 주장하는 실학파(實學派)가 대두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유형원(柳馨遠) ·이익(李瀷) ·박지원(朴趾源) 등이 있다.
그러나 이 학파는 때마침 동점(東漸)한 서학(西學)에 물들었다는 혐의로 조정의 탄압을 받아 끝내 탁월한 경륜을 펴지 못하고 쇠퇴하였다. 그 후 성리학이 부흥하는 기세를 보였으나 이들은 여전히 여러 학설로 갈리어 자기 학파의 학설만 주장하였다. 조선 후기의 이같은 유학자들의 지나친 형식과 체면에 집착하는 완고와 고집은 한국 개화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으며 다만 일제의 침략으로 국세가 위급하자 송병선(宋秉璿) ·최익현(崔益鉉) ·조병세(趙秉世) ·민영환(閔泳煥) ·이준(李儁) ·안중근(安重根) 등의 유학자가 앞장서서 애국의 대의를 펼쳤다. 8 ·15광복 후 전국 유림의 조직체인 유도회(儒道會)를 결성하고 성균관대학을 창립, 유교정신에 의한 새로운 민주교육이 실시되었다.
4. 도교 [道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