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씨(朴氏)는 중국에서는 없는 우리나라 순수 성씨이다. 시조 혁거세왕(赫居世王)이 큰 알에서 태어났는데 그 알이 박(瓠)과 같아서 성을 朴이라 하였다.
● 팔대군은 밀성대군(밀양박씨), 고양대군(고령박씨), 속함대군(함양박씨, 삼척박씨 ), 죽성대군(죽산박씨, 음성박씨, 고성박씨), 사벌대군(상주박씨, 충주박씨), 완산대군(전주박씨, 무안박씨), 강남대군(순천박씨, 춘천박씨) 월성대군(경주박씨) 이외에 국상공파(울산박씨), 경애왕 후손인 계림대군이 있다.
● 함양박씨(咸陽朴氏)는 시조 박혁거세의 30세손으로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셋째 아들인 박언신(朴彦信)을 득관조(得貫祖)로 하고 있다. 그가 속함대군(速咸大君 속함은 함양의 옛 명칭)에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았다. 이후 신라팔공자(新羅八公子)가 분봉(分封)된 뒤 계속된 변혁으로 문헌이 없어져 세계가 실전되었다.
후손들이 고려시대에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내고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진 박선(朴善)을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함양(咸陽)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계승하였다. 1세에서 8세 박충좌까지는 경남 함양을 중심으로 세거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으며, 고종 때 이언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진 박신유(朴臣蕤)의 여섯 아들에서 6파로 갈라졌는데 금당∙맛질 함양박씨는 차남 박지빈(朴之彬)의 후손들로 문원공파(文元公派)에 속한다.
9세 박전(朴琠)에 이르러 성주군 선남면 오도리로 이주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13세 박이경(朴而敬)까지의 묘소가 성주에 자리하고 있다. 14세 박소종(朴紹宗)의 묘소는 상주 함창에 있는 것으로 보아 성주에서 함창으로 이주한 듯하다. 박소종의 장남 15세 杏亭(행정) 박눌(朴訥 1448~1528)은 안동 길안면 묵계리 안동김씨 입향조인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의 따님을 부인으로 맞이하였으며 세거지가 상주이고 향오린(鄕五鱗, 巨鱗, 亨鱗, 鵬鱗, 洪鱗, 從鱗)중의 다섯째 아들인 16世 박종린(朴從鱗 1496~1552)은 감천 문씨 문류경(文柳磬)의 사위로 처가가 있는 금당실로 들어와 살았다.
금당실 입향조인 박종린은 경북 상주 함창에서 출생하여 21세에 진사시에 합격을 하고 중종 27년(1532) 37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으나 김안로가 정권을 잡고 나서 횡포가 심해지자 1538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금당실에 정착하게 된다.
큰 맛질(용문면 대제리)에는 함양박씨 주부공(主簿公) 종가가 자리하고 있으며 이들은 금당실 입향조인 박종린의 차남 17世 박지(朴芝 ?~1593)의 후손들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21세 獨處齋 박세주(朴世柱 1652~1727)가 큰 맛질에 살고 있던 안동권씨의 사위가 됨에 따라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박지의 둘째 딸은 이웃마을 죽림의 예천권씨 초간 권문해에게 출가하였다.
금당실 입향조 박종린의 셋째 아들 病栢堂 박운(朴蕓 1535~1596 박지의 아우)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 알려져 있으며, 아들 3형제 중 셋째 아들 박수근(朴守謹)이 임진왜란 때 임금을 모셨다는 공을 인정받아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박운의 위패는 1800년대에 세워진 금당실 북촌에 자리한 유계소(儒契所)에 모셔져 있었으나 1894년 동학혁명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이후 1923년 유림과 후손들에 의해 중건되었으며 재실 경담재(鏡潭齋)와 사당 경담사(鏡潭祠)로 이루어져 있다.
입향조 16世 정랑공 박종린의 현손 20세 박정시(朴廷蓍 1601~1672)의 혈통을 잇고 있는 남야 종가가 금당실 동촌에 자리하고 있다. 24세 南野남야 박손경(朴孫慶 1713~1782)이 불천위로 지정받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에 남야종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박손경의 고조인 박정시는 태안 군수를 마지막으로 벼슬에서 물러날 때 거문고 한 개와 책 한 권을 가지고 귀향했을 정도로 청렴결백했다고 한다. 이 거문고가 자명금 혹은 태랑금이라는 거문고 전설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박손경은 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 韓山人), 百弗巖 최흥원(崔興遠 1705~1786 慶州人)과 함께 영남삼로(嶺南三老)로 일컬어지고 있다. 남야 종가에는 70년 전에 유림에서 추대받은 박손경의 불천위가 모셔져 있다.
• 대산 이상정(한산이씨 大山 李象靖 1711~1781 밀암 이재의 외손자)은 李栽의 外孫으로 退溪 李滉 → 鶴峯 金誠一 → 敬堂 張興孝 → 石溪 李時明(1590~1674) → 葛庵 李玄逸 → 密庵 李栽(1657~1730 이현일의 子)로 이어지는 퇴계학맥을 계승하였다.
● 제상일월(渚上日月)은 큰 맛질에 있는 미산고택에 세거하던 25世 박한광(朴漢光)에서 시작하여 30세 박영래(朴榮來)에 이르기까지 6대에 걸친 약 140년간의 일기책이다. 당시 일기를 소장하고 있던 미산고택은 박한광의 차남 26세 박득영(朴得寧 1808~1886 味山)의 집으로 주부공 종가의 작은 집에 해당하는 셈이다. 박세주가 1650년 금당실에서 큰 맛질로 이거해 오면서 지은 것으르 5대손인 박득영이 182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었다고 한다.
• 정유삼흉(丁酉三凶) 조선 중종 32년(1537) 정유에 외척 윤원로 등에 의하여 세 흉물이라 하여 피살된 김안로, 허황, 채무택의 세 사람
● 박충좌(朴忠佐 1287~1349 咸陽人) 고려 말의 문신으로 호는 치암(恥庵), 시호는 문제(文齊)이다. 백이정(白頤正 1247~1323 고려말 유학자)의 문인(門人)으로, 고려 말기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라 순성보덕협찬공신(純誠輔德協贊功臣)에 책록되고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졌다. 성품이 온후하고 검소한 대신으로 이름났다.
•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온 사람은 안향이지만,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그 체계를 파악해 크게 일가를 이룬 이는 백이정이라 할 수 있다. 안향과 백이정의 학통은 이제현에게 전승되었고, 이제현은 이색(李穡)에게, 이색은 권근(權近)과 변계량(卞季良)으로 이어졌다.
● 금곡서원은 1568년(선조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文齋 박충좌(朴忠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杏亭 박눌(朴訥)과 南野 박손경(朴孫慶)을 추가로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유림에 의해 1982년에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