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영천객사(永川客舍) - 영양관(永陽館)’의 유래
조선시대 영천에 있던 객사는 영천의 옛 이름인 영양(永陽)을 따라 영양관(永陽館)이라 하였으니 현 창구동 90번지 일원에 있었으며, 신녕현의 객사는 화산관(花山館)으로 현 신녕초등학교 자리에 있었습니다.
공무를 수행하는 관리나, 사신들의 숙소로 활용되던 객사(客舍)는 객관(客館)이라고도 합니다.
『고려사』에 충렬왕 5년(1279) 8월에 객관을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객사는 고려 후기에 와서야 있었던 것으로 알기 쉬우나, 고려 초기부터 있었음이 확실하다. 외국사신이 내왕할 때 이곳에서 묵으면서 연회도 가졌습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객사에 전패[殿牌 :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로, ‘전(殿)’자를 새김]와 궐패[闕牌 : 황제를 상징하는 나무패로 ‘궐(闕)’자를 새김]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향망궐배[向望闕拜 :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림]하는 한편, 국왕이 붕어(崩御 : 임금이 죽음)하셨을 때도 전패에 절을 하였습니다.
또한 객사는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나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하였으며, 지방관이 부임지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전패를 모셔둔 객사의 정청에 들어가 절을 하는 것이었으며, 그 다음에 향리와 백성들의 인사를 받았습니다.
특히, 명나라와 통하는 연변에는 우리 사신뿐만 아니라 명나라에서 오는 사신도 묵었기 때문에 건물 보수 등 어려움이 많아서 인근 고을의 사람들을 동원하는 일이 때때로 있어 폐단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건물의 구조는 정당(正堂)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실(翼室)을 두고, 앞면에 중문(中門) · 외문(外門), 옆면에 무랑(廡廊) 등이 부속되었으며, 정당은 기와와 돌을 깔고 좌우의 익실은 온돌로 하였습니다.
현존하는 객사 건물로 조선 전기의 것으로는 강릉의 임영관(臨瀛館)의 3문인 객사문(客舍門, 국보 제51호) · 전주 객사(보물 제583호), 안변 객사의 가학루(駕鶴樓, 1493), 고령 객사의 가야관(伽倻館, 1493), 경주 객사의 동경관(東京館) 좌우 익실(16세기말) 등이 있습니다.
후기의 것으로는 성천 객사 동명관(東明館)의 강선루(降仙樓), 통영 객사, 여수 객사 등이 남아 있는데, 조선시대의 목조 건축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객사는 각기 명칭이 있는데 평안도의 예를 들면 중화(中和) 객사는 생양관(生陽館), 순안(順安) 객사는 안정관(安定館), 숙천(肅川) 객사는 숙녕관(肅寧館), 안주(安州) 객사는 안흥관(安興館), 가산(嘉山) 객사는 가평관(嘉平館)입니다.
이들 객사는 아전들이 맡아 관리했는데, 고려 때의 예를 보면 지방에 두었던 잡직(雜職)의 하나로, 향직 6품인 객사사(客舍史)라 불리는 아전이 담당하였습니다.
1018년(현종 9)에 각 고을의 아전수를 정할 때 1천정(丁 : 군적에 있는 지방의 장정) 이상의 군에는 객사사 4인, 500정 이상의 군에는 3인, 300정 이상의 군에는 2인씩을 두었습니다.
신유(申濡)는 1643년 통신사의 종사관으로서 일본으로 갈 때 영양관(永陽館)에 머물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습니다.
영양관(永陽館)에서 신독우(申督郵)를 작별하며
永陽城畔客東西 영양성 가에 동서로 헤어지는 길손
楊柳垂絲拂古堤 수양버들 늘어진 가지만 옛 둑을 스치네.
老馬似知離別意 늙은 말은 아마도 이별의 뜻을 아는 듯
背人嘶去跼霜蹄 사람을 등지고 울고 가며 흰 발굽을 머뭇대네.
안기(安奇) 역마(驛馬)가 갈려 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