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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들이여!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고자 한다면, 코카서스인들의 영웅적인 투쟁을 본받아라!
- 칼 마르크스
유럽을 뒤흔들고 세계 역사를 요동치게한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의 바람은 코카서스 지방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1917년 10월, 레닌이 이끄는 볼세비키 혁명 세력은 마침내 겨울 궁전을 장악하고 소비에트 정권의 수립을 선언한다. 코카서스 산민들에게는 자유와 독립을 위한 결정적인 호기였다.
체첸에서는 볼세비키가 승리를 하기 전에 이미 모반의 조짐이 싹트고 있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이 있었던 1905년, 체첸 그로즈니의 석유 시추시설의 노동자들 사이의 동요를 시작으로 산민들 사이에서 코사크인들과의 마찰이 심화되고 있었다. (체첸에서 석유가 시추되기 시작한 때는 1887년으로, 20세기 초에 들어서는 세계 최대의 산유지 중의 하나였다.) 양쪽의 충돌이 격화되어 학살극이 자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산민들의 대표와 테레크 코사크 군정부 사이에서 회담이 열렸고, 이는 '체르벨른 회담'이라고 불렸다.
양자는 1906년 봄에 지방 의회 (두마)를 구성하고 공동으로 의원과 대표를 선출하는 것을 합의하였지만, '피의 일요일 사건'의 반발을 어느 정도 진정시킨 차르 니콜라이 2세에 의해 그 해 7월에 해산되었다. 러시아군은 산민들의 의회를 해산시킬 뿐 아니라, 베데노 지역을 시작으로 대부분의 체첸 지역의 산민들을 무장해제 시켰다. 저항하는 자는 포격으로 말살시켰다. 수백명의 반군들을 체포하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냈다.
하지만 차르의 러시아 제정은 산민들의 독립 요구를 계속 틀어막기에는 이미 힘이 다해버렸다. 1917년 2월부터 볼세비키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때가 되었음을 알게 된 코카서스 여러 산민들은 그 해 5월, 현 북오세티야의 수도 '블라디카프카즈'에서 회담을 갖는다. 이곳에 모인 다게스탄, 체첸, 잉구세티아, 북 오세티야, 카바르디노 발카리야 대표들은 최초의 '산악민족 연합'의 구성을 선언하고, 여러 산악 민족들의 독립을 위해 함께 싸울 것을 의결하였다. 10월에 코사크 인들도 이 의회에 가담했지만, 체첸인들과 코사크인들의 분쟁이 격화되어 결국 분리되고 만다.
체첸인들과 코사크인들의 다툼은 필연적이었다. 제정 러시아는 코카서스 전쟁을 통해 제국의 영역을 넓혔고, 그 선두에는 코사크인들의 정착이 있었다. 체첸 북부의 비옥한 흑토 지역은 수십년에 걸쳐 점차로 코사크인들에 의해 채워졌고, 체첸인들은 점차로 그들의 밑에서 소작농으로 일하거나 터키나 다른 러시아로 이주해야 했다. 이 양자의 충돌은 불가피하였다.
결국 1917년 12월, 코사크인과 체첸인들은 그로즈니와 구데르메스에서 무력 충돌을 벌였다. 코사크인들은 그로즈니를 제압하여 엄청난 수의 체첸인들이 희생되었고, 회담을 목적으로 그로즈니에 머물러 있던 체첸인 대표들도 피살되었다. 코사크인들은 북 오세티야의 모즈독을 중심으로 여러 산민들의 연결을 차단하고 조각조각 분쇄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코사크인들의 무력에 대항하기 위해 산민들은 뭔가 선택을 해야 했다. 하나는 전통적인 방식의 이슬람 연합체였다. 이미 1917년 8월에 다게스탄의 안디 아울에서 세이크 낙슈무딘 핫소와 세이크 우준 하지가 다게스탄과 체첸의 이맘을 자처하며 지역의 무슬림 세력들을 규합하고 있었다. 또 하나는 혁명으로 제정을 파괴한 볼세비키와의 연대였다. '사회주의는 약소민족의 문화, 종교, 자치를 보장한다'는 레닌의 슬로건은 큰 호응을 얻었고, 산민들 자체적으로도 혁명 이념을 받아들인 지식 계층이 있었던 것이다.
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인 지식 계층은 몇가지 과도적인 정치 체제를 거쳐서 1918년 5월 11일, ‘북 코카서스 산악 공화국’의 설립을 선포한다. 이는 카프카즈 지역의 동쪽 지역을 거의 대부분 장악하였으며, 과거 '산악 민족 연합'의 후예였다. 이들은 터키와 우호 조약을 맺고, 러시아로부터 코카서스 지역이 분리되기를 원하는 영국 등의 다른 유럽 열강의 지원을 약속받는다. 또한 독일, 오스트리아 - 헝가리 등의 러시아와 전쟁 중이던 적대국으로부터 국가로 승인받는다.
하지만 북 코카서스 산악 공화국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어진 적백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역 코사크인들은 백군과 손을 잡는다. 러시아 남부지역의 백군을 지휘하던 데니킨 장군은 산민들이 만든 공화국을 인정해줄 의사가 없었다. 볼세비키와 손잡은 산민들을 굴복시키고 후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데니킨은 산악 공화국을 공격하였다. 1919년 2월, 잉구세티아로부터 시작된 데니킨의 공격은 산민들의 거점을 연거푸 격파하고, 5월에는 공화국의 주요 기능이 정지하였고 대표들은 도주하였다. 데니킨은 코카서스 지역의 볼세비키에 동조한 산민 세력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산민들에게는 다른 복안이 마련되어 있었다. 산악 공화국이 파괴된 잿더미 속에서, 낙슈무딘 핫소와 우준 하지는 1919년 9월, '북 코카서스 에미레트'를 선언한다. 이는 산악 공화국과 거의 비슷한 영역인 다게스탄, 체첸, 잉구세티야, 카바르디노 발카리야 지역을 포괄하는 이슬람 연방으로, 율법인 샤리아에 따라 통치하는 이슬람 국가였다. 우준 하지는 80세가 넘는 노인으로, 제정 시대에 시베리아 유형도 다녀온 강골의 산민이었다. 낙슈무딘 핫소는 과거 이맘 샤밀 휘하의 ‘나이브’의 아들로, 다게스탄 출신이었다. 그들은 휘하에 1만의 산민들을 군으로 편성하였고, 백군 데니킨을 격파하기 위해 볼세비키의 적군에게 의사를 타진하였다. 손잡고 백군을 무찌르는 대신에 율법 샤리아로 통치할 북 코카서스 에미레트를 인정하라고.
상황 파악이 빠르고 실용적인 볼세비키 적군은 이에 동의하였다. 우선은 백군을 격파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협상이 이루어졌고, 우준 하지는 이나루크 디시닌스키 장군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산민들의 군대를 적군과 연대하게 하였다. 데니킨의 백군은 광신적인 무리드들이 지휘하는 산민의 군대를 상대하지 못했고, 1920년 2월에 북 코카서스 지역에서 퇴각하였다. 적군은 3월에 그로즈니에 입성하였고, 그들은 해방자로 환영받았다. 과연 약속은 지켜질 것인가?
이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잘 되가는 것으로 보였지만, 볼세비키는 백군이 물러나게 되자 태도를 돌변하였다. 그해 3월에 세이크 우준 하지가 90세의 나이로 죽은 것을 계기로 하여, 적군은 에미레트에 대하여 지배력을 행사하려고 하였다. 신생 소비에트로서도 코카서스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이슬람 율법에 의해 다스리는 에미레트는 볼세비키 이념과는 지극히 거리가 멀었고, 또 위험하였다.
1920년 8월, 이맘 샤밀의 손자, 사이드 벡 샤밀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반란이 다게스탄에서 발생하였다. 핵심은 과거 우준 하지와 손을 잡았던 낙수무딘 핫소였다. 이들은 소비에트의 축출과 샤리아 율법의 통치를 기치로 하여 휘하에 1만의 병력을 규합하였다. 그들의 무기는 전통적인 무기인 단검과 소총에 40정의 기관총이었다. 이 병력으로 주로 순자강 계곡에 있는 코사크 정착지를 습격하였다.
볼세비키는 아직 국내외의 크고작은 반란에 산적해 있었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산민들과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는 제안을 신속하게 제시하였다. 바로 코사크인들의 정착지를 대거 산민들에게 넘겨주는 것이었다. 코사크인들은 백군과 손잡고 볼세비키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었기 때문에, 그들로서도 크게 무리한 제안은 아니었다.
산민들은 흥미를 갖게 되었고, 1921년 1월에 소비에트 대표와 회담을 갖는다. 이 때 소비에트 대표는 볼세비키 정부를 승인하기만 한다면, 그들은 자치를 보장받고 샤리아와 관습법에 입각한 헌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제안을 하였다. 또한 지난 반란의 주모자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으며, 다만 소비에트 정부의 제안에 따른 여러 공화국을 통해 국가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을 의미한다.
산민들의 대표들은 이 조건에 따라 반란을 종식시키는 것에 동의하고 1921년 5월에 반란은 끝났다. 이어서 ‘산악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러시아어의 약자에 따라 ‘ASSR’이 탄생하였다. 이때만 해도 산민들은 자치권의 보장과 이슬람 율법에 따른 헌법에 큰 기대를 갖고 오랬동안 소망했던 독립된 정부가 탄생하리라 생각하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일단 반란이 진압되자, 소련측은 합의 사항을 준수할 생각이 없었다. 1922년부터 병력을 증강시켰고, 점차로 산민들의 무장 해제와 이슬람 율법과 관습의 제거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 산민들과 합의한 소련측 대표가 다름 아닌 요제프 스탈린이다.
산민들의 반란에 대한 보복은 1925년, 스탈린이 소비에트의 권력 기틀을 확고히 다진 이후부터 본격화되었다. 그 해 8월 23일, 소비에트 정부는 체첸 '도적떼'들의 무기를 압수할 것을 명령하였다. 비밀 경찰 '체카'와 북 코카서스의 소비에트 군은 마을을 하나하나 뒤지면서 무기들을 압수, 파괴하고 주모자들을 색출하였다. 바로 1920년의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들이었다.
소련은 1925년, 낙슈무딘 핫소를 비롯한 대부분의 주모자를 검거하였고, 그들을 대거 처형하거나 시베리아로 유형보냈다. 이어서 허울뿐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간판을 걷어내 버리고, 1922년부터 24년 사이에 6개 지역으로 공화국을 쪼개버리고 산민들의 영역을 하나하나 갈라버렸다. 오늘날의 ‘체첸’, ‘잉구쉬’, ‘카바르디아-발카리아’, ‘카라치-체르케시’, ‘북오세티아’, ‘다게스탄’ 공화국의 영역은 이 때 결정되었다.
거기에 각각의 인종들을 조금씩 뒤섞어 놓아서 단결력을 희석시키기 까지 하였다.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를 통치하는 방식이자, 로마 제국 시대부터 전해져 오던 유명한 규칙, '나눠서 지배하기 (Divide and Conquer)'를 충실히 이행하였다.
이어서 소비에트는 이슬람의 색깔을 옅게 만듬과 동시에 집단 농장도 운영하려고 하였다. 이는 특히 산민들에게 저항을 불러일으켰는 데, 그들의 토지 소유 개념은 개개인이 각 씨족의 규칙에 따라 토지를 소유하는 개념으로, 사회주의의 토지 국유화와 공동 소유라는 개념은 충돌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종교적인 제약과 토지 문제는 산민들에게 소비에트 정부에 고분고분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929년, 스탈린이 러시아 전역에 ‘집단 농장’을 코카서스 지역에서 시범적으로 실시하려고 하자 산민들은 또다시 봉기하였다. 특히 사유재산을 인정치 않고 국유화하려는 소비에트의 정책을 산민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반란은 체첸 각지에서 시작됬는 데, 핵심 지역은 물라 아흐마트와 쿠리예프가 주동한 고이티, 시타 이스타믈로프가 주동한 샬리, 라로스와 호드자가 지휘한 베노이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서 산민들은 지역 행정부를 장악하고 관리들을 억류하고 ‘반혁명분자’를 색출하기 위해 왔던 국가정치보안부 (GPU로 체카의 후신)의 간부를 체포하였다. 베노이 지역에서는 석유 채굴 시설을 장악하고 농성하였다.
그들은 각지역에서 거점을 형성한 뒤에 볼세비키 정부에게 요구사항을 전달하였다.
첫째, 허울좋은 ‘집단화’라는 명목하의 재산의 불법적인 강탈을 중단하라
둘째, 집단농장에 저항한 농민에 대한 체포를 중단하라
셋째, GPU의 요원들은 즉각 체첸을 떠나고 체첸인 중에서 선출된 관리가 권한을 넘겨받는다.
넷째, 소련의 ‘인민법정’은 즉각 폐지하고 샤리아 법정으로 대체하며, 1921년의 산악공화국의 헌법에 따라 통치한다.
다섯째, 체첸 공화국에 대한 중앙 정부의 간섭을 중단하고 모든 행정과 경제에 대한 사항은 공화국 자체 의회를 통해 결정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과거 스탈린이 보장해줬던 두가지 요소, 샤리아에 따른 통치와 산민들에 대한 간섭을 중단하고 자치권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지금까지 몇번이고 약속하고 또 배신당했던 간절한 바람을 다시한번 요구하였다.
소비에트 정부의 입장은 간단하였다. 무기를 내려놓고 소비에트 연방의 권위를 인정할 경우에만 조건을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우선은 협상을 위해 산민들의 대표와 만날 의사를 타전한 뒤, 비밀리에 GPU의 정예부대를 샬리로 급파하여 산민들의 대표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소련의 보안부 요원들은 샬리에 있던 시타 이스타믈로프의 집을 기습하였는 데, 새벽 1시에 기습당했음에도 시타와 동생 하산은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어느새 날이 밝아오자, 인근 산민들이 무장하고 몰려왔고 GPU의 150명의 정예부대는 그곳에서 전멸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때 소비에트의 평화 제안으로 풀어졌던 항쟁의 불길이 다시 번졌고, 반란은 체첸 전역을 넘어 다게스탄과 오세티아, 카바르다, 카라치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더 이상 얕은 수가 먹히지 않자 소련은 1929년 12월, 붉은 군대 정규군을 체첸 국경지대로 급파한다. 4개 보병 사단과 3개 포병사단, 이란과 터키 국경지대에서 차출된 2개 연대의 국경수비대, 크산도르 기병학교 생도들과 블라디 카프카즈에 주둔중인 28사단과 보병학교 생도들이 이 작전에 투입되었다. 거기에 반혁명 분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3개의 GPU 부대가 투입되어 숙청 작업을 하였다.
막대한 병력이 투입되자 산민들로서는 방어의 이점을 살릴 수가 없었다. 1930년 1월 중순에 고이티 지역의 산민 거점이 함락되었고, 아흐마트와 쿠리예프도 전사하였다. 샬리 지역의 사령관인 시타 이스타믈로프는 병력을 철수시켜 산악지대로 옮겼다.
하지만 붉은 군대의 피해도 막대하였다. 고이티 전투에서 소련 82 보병연대는 거의 전멸하였다. 샬리 전투에서는 거의 사단 하나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러나 3월에 붉은 군대 사령관 벨로프는 남부 카프카즈에서 추가 증원 병력을 받았고, 산민들 최후 거점인 베노이를 공격하였다.
두달 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벨로프는 1930년 4월에 베노이를 점령했지만, 산민들은 산악지대로 빠져나간 뒤였다. 낙담한 벨로프는 산민들에게 협상을 제안하지만, 산민들은 소련군이 모두 철수하기 전까지는 협상할 용의가 없다고 답변했다.
전투가 생각보다 길어지고 러시아 전역에서 ‘집단화’에 대한 반발이 심각해지자, 스탈린은 이 정책이 지나치게 급진적이라고 평하며 보류하기로 하였다. 특히 코카서스 지역의 반발을 누그러트리기 위해, 반란군에 대한 사면을 발표하고 집단화로 인한 약탈한 사유물에 대해서도 반환하였다. 산악지대의 반군들은 마을로 돌아왔고, 시타 이스타믈로프도 샬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소련 정부는, 스탈린은 자신들에게 총을 겨눈 자들을 결코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1931년 가을, 샬리 지역 GPU의 책임자인 바클라코프는 시타 이스타믈로프를 집으로 초대하였다. 바클로프는 시타에게 중요한 서류가 있다고 말한 뒤, 그 서류를 읽어보라고 전달했다. 시타가 그 서류를 펼쳐든 순간, 바클로프는 마우저 권총을 발사하였다. 체첸 지역의 반란 분자들에 대한 숙청의 신호탄이었다.
소련 정부의 숙청은 가차없었고, GPU는 체첸 전역에서 3만 5천명의 ‘반혁명 분자’들을 체포하였다. 그들 중 상당수는 GPU의 요원에 의해 처형당했다. 또한 체포를 피한 반란의 주모자들도 30년대 중반까지는 다수가 암살되거나 처형당했다.
결국 차르의 러시아 제정이 무너지고 약소민족의 해방을 부르짖던 소비에트 정부가 들어섰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산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약속을 몇번이나 해줬지만, 결코 그 약속대로 해줄 생각이 없었다. 어느새 산민들은 자신들을 장악하던 사람들의 정치 체제만 달라졌을 뿐, 변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정책에 계속해서 저항하였다.
이제는 소련의 유일무이한 대원수가 된 스탈린은 이들에 대하여 진절머리를 내기 시작하였고, 뭔가 다른 수단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독일과의 '대조국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되는 상황에서, 그는 그 결심을 쉽게 굳히게 된다.
출처 : http://www.amina.com/article/twent_fort.html
http://en.wikipedia.org/wiki/Soviet_Mountain_Republic
http://www.amina.com/article/
http://en.wikipedia.org/wiki/Mountainous_Republic_of_the_Northern_Caucasus
첫댓글 워,,,공산당을 믿다니요....ㅠㅜ 스탈린 출신지가 그쪽아닌가요?
그루지아 고리시 출신입니다. 이번 남오세티아 전쟁으로 러시아군이 진격한 곳이지요.
스탈린과 공산당을 믿다니... 그럼 결국 지켜진건 코사크 정착지 상당수가 자기들것이 된것 뿐인가요?
코사크도 소비에트의 주요 탄압대상이었으니, 어찌보면 크게 선심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 다음에 이어지는 사건으로 결국 무의미해지죠
'악한 사마리아인'이 생각나는군요. 지옥에나 떨어져라 스탈린 ㅆㅂ!!
스탈린을 가둘만한 지옥이 있을까요?
우리 악마들은 지옥에서 온 정치적 망명자들입니다. 스탈린이 있는 지옥에서는 못살겠어요 ㅜㅜ
스탈린이라...참 제대로 만났군요. 비극 중의 비극이네요.
사실 누굴 만나도 답이 없었지만, 그 강도가 좀 달라졌겠죠
역시...공산주의라도 이상과 현실은 처음부터 따로 놀았군요...소수민족의 자치와 독립이란 말에 속았던 우리 독립운동가 분들께 묵념...-_-
자본주의니 공산주의니 해도 강대국들의 최종 목표는 강력한 중앙집권이니까요..자국의 이상에 방해가 되는 요인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없애버리는 사례는 미국, 프랑스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강제 이주는 말 안듣는 소수 민족을 길들이기 위해 고대부터 강대국들이 자주 써먹었던 방식이죠;; 미국 역시 인디언들을 여러 차례 집단 이주시켰고 그 와중에 상당수가 질병이나 굶주림으로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조직적인 대량 학살은 프랑스 혁명의 전매특허이기도 합니다. 저항하는 세력 거점의 모든 남녀노소를 문자그대로 박멸한 경우도 있었으니;;;
소련 사회주의 정권은 강대국이 벌인 행각 중 규모나 질적인 면에서 최악을 달렸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거룩한 이상을 내세우면서 소수민족들에게 독립의 단꿈에 젖게 만들고 그 와중에 뒤통수 친 경우는 정말 비일비재합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또 다른 개념이라지만, 적어도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저런 말들은 사탕발림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교활하고 잔인한 스탈린에게 이용만 당했군요... 그 인간은 정말 살인자이자 사기꾼입니다... 어떻게 민중을 위한다는 공산주의자들의 머리에서 그런 약삭빠른 짓들이 행해졌는지... 참~ 마르크스가 땅을 치고 통곡하겠네요...
잔혹한 스탈린을 상대로 과연 제대로 싸울수 있을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