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확신과 우리의 자랑과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닻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과,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천국의 상속자들이고, 우리 자신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원한 복락의 소망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신7:12-13). 또한 마찬가지로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리니”(렘7:5-7). 이와 비슷한 말씀들을 천 가지도 넘게 인용할 수 있다.
모세는 율법은 우리 앞에 축복과 저주, 그리고 죽음과 생명을 제시하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축복이 무익하고 무효가 되든지, 아니면 칭의가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주장을 한다. 만일 율법을 붙잡게 되면, 모든 축복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모든 범죄자들을 위하여 마련된 저주가 우리 위에 드리워지게 된다(신27:16). 왜냐하면 주께서는 오직 그의 율법을 완전무결하게 지키는 자들에게만 약속을 하시는데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율법을 통해서는 온 인류 전체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요, 거기서 해방을 받기 위해서는 율법의 권세에서 벗어나고, 말하자면 율법의 속박에서 풀려나서 자유를 얻어야만 한다는 것이 사실로 남아 있게 된다.
그런데 만일 이 자유가 육체적인 자유라면 우리가 율법을 준행하는 데서 벗어나서 모든 일에 방종해지며, 마치 자물쇠가 망가져버렸고 고삐가 풀려버린 것처럼 우리의 욕심이 마음껏 활개치게 되겠지만, 이 자유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영적인 자유이다. 그러므로 이 자유는 실망에 빠져 있는 상한 양심을 위로하고 일으켜 세워서, 율법이 억누르고 얽매어 놓고 족쇄를 채워놓고 있던 그 저주와 정죄에서 자유함을 받았음을 분명히 확신케 해 주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붙잡을 때에 이러한 자유와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을 얻게 된다. 율법이 양심으로 죄를 의식하도록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찌르고 괴롭혀 왔으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죄를 사함 받았음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심으로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도우지 않으셨더라면 율법에 우리에게 제시되어 있는 약속들이 모두가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율법을 준행하여야 한다는 조건이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께서는 우리를 도우시되, 우리의 행위들의 의의 일부로 인정하시고 또 나머지 일부는 그의 사랑과 긍휼하심으로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그 의를 이루시는 분으로 지정하심으로써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고 말한 다음 이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부패함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 주는 상급의 혜택을 절대로 누릴 수가 없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다른 의를 얻고서야 비로소 그 혜택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다윗은 주께서 자기 종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상급을 기억하고서 곧바로 그 상급을 무효화시키는 죄를 떠올리는 것이다. 시편 19:12에서 율법의 유익함을 높이 찬양하면서도 곧바로 이렇게 외치고 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다윗은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시25:10)라고 말한 다음, 곧바로 이어서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시25:11)라고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율법에 우리를 위하여 제시되어 있어서 행위로써 자격을 갖추기만 한다면 그 자비하심을 얻을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로서는 그런 행위를 도저히 이룰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율법의 약속들이 복음을 통하여 효력을 발휘한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약속이 열매를 내지도 못하고 그냥 사라지기 위해서 주어졌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 율법의 약속들은 행위의 공로와 관련지을 때에는 전혀 그 혜택을 누리는 일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그 자체로만 생각하면 그것들이 어떤 의미에서 폐기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는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레18:5)라는 유명한 약속이 있으나 그냥 거기서 그쳐버리면 그 약속이 아무런 소용이 없고 또한 없는 것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이다(롬10:5,갈312). 아무리 거룩한 하나님의 종들이라 할지라도 율법을 지키기는커녕, 온갖 과실과 허물로 얼룩져 있기 때문에, 그들조차도 그 약속을 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의 약속들로 그것들을 대체시키면, 그 약속들은 값없는 죄 사함을 선언하는 것으로서 우리를 하나님께 합당하도록 만들어줄 뿐 아니라 우리의 행위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만들어 주게 된다. 주께서 우리의 행위들을 기뻐하시기로 정하실 뿐 아니라, 그의 율법을 준행하는 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축복들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주께서 그의 율법에서 의와 거룩함을 지키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그 상급들이 신자들의 행위에 대해서 베풀어진다는 것을 인정한다. 단, 이러한 상급이 베풀어지는 데 대해서 우리는 주께서 무엇 때문에 우리의 행위들을 인정하셨는지 그 이유를 항상 생각해야 마땅한 것이다.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의 행위를 돌아보시면 언제나 칭찬보다는 책망이 앞서게 되는데, 그가 그 종들의 행위를 돌아보시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종들을 품어 안으시고, 행위의 도움이 없이 오직 믿음만을 보시고 그들을 자기 자신과 친히 화목하게 하신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지니신 그의 자비하심과 너그러우신 사랑으로 그들의 행위를 그토록 존귀한 자리로 높이 인정하셔서 그것들에게 가치를 부여하시는 사실이다. 셋째는, 그 종들의 행위들을 그 불완전하며 부패한 상태 그대로 보신다면 덕이 아니라 죄일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불완전함을 인정하시지 않고, 그 행위들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신다는 사실이다.
궤변가들은 자기들이 공로를 세워준다고 보는 그 행위들이 과연 율법의 약속을 실현시키는 조건들에서 얼마나 거리가 먼가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직 믿음에 근거하는 의롭다 하심과 죄 사함을 통해서 선한 행위들이 흠도 티도 없이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만 그런 조건들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353-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