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 외도 항복 받고 설법
일체중생 위한 전법행 표현
현재 대부분의 불당(법당)안에 모셔진 과거나 현재의 부처님은 앉아계신다. 그런데 미래에 오실 부처님으로 알려진 미륵부처님은 야외에서 서 계신 모습으로 모셔지고 있다. 앉아계신 부처님이든 서 계신 부처님이든 예경하고 공양하기 위해 모시는 목적은 같지만,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2500년이라는 긴 불교사 속에 발생한 적지 않은 일(불사)들이 때로는 역사적인 모습과 달리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불상 조성 유례이다. <조상공덕경>에는 부처님 당시에 불상을 조성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미술사학과 같은 실증주의 학문의 설명에 의하면, 불상 조성은 기원전 4세기 중후반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 이후라는 것이다. 이 설명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무조건 어느 한 쪽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우리들의 이해와 인식에 별 도움이 못되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 부처님 열반 이후 초기에는 부처님을 상으로 만든다는 것은 쉽게 용인되지 않았다. 그래서 부처님 모습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룰 때의 앉으신 보리수나무나 부처님의 발자국인 족적으로 부처님을 표현했다. 까닭은 여럿으로 추측할 수 있지만 <금강경>의 설명처럼 무유정법의 이해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의 위없는 깨달음은 어떤 언어로도 제대로 설명할 길이 없듯이 부처님의 모습도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으므로 상징으로만 부처님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관점은 인도불교에 그리스 문화가 스며들게 되자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에 대해 “난만한 조형미술의 발달을 토대로 풍부한 인격 신상의 제작을 경험하였던 그리스인들에게 불상을 직접 표현하지 않는 인도 불교의 전통은 이해하기 어렵고 무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였을지 모른다”고 하는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의 설명은 이해를 도와준다. 어찌됐던 부처님의 상징을 통해 예배를 하던 시대에서, 직접 32상호를 바탕으로 한 불상을 모시고 예배하고 공양하는 시대로 나아갔다.
우다연 왕이 처음에는 앉아계신 좌상으로 모셨다고 전하지만, 불상이 처음 출현했다고 알려진, ‘서북 인도의 간다라나 서북 인도 대륙 및 아라비아 해에 연결되는 마투라 지역’에 나타나는 불상은 대체로 서 계신 불상이 많이 남아 있다. 앉아 계신 부처님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루고 법륜을 굴리시고 신통을 나타내어 외도를 항복 받으시고 불사를 이룩하실 적의 모습으로 말하자면 선정, 무외, 설법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서 계신 부처님은 어떤가. 부처님은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열반했다고 불교인들은 늘 설명하고 이해한다. 길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은 어머니 마야 부인이 출산을 위해 친정으로 가는 길에 태어났다는 것을 말하고, 길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수많은 곳을 다니면서 설법하여 중생을 제도하다가(遊行) 말라 나라의 두 그루 사라 나무 밑에서 열반에 드셨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서 계신 부처님은 일체 중생을 찾아다니며 바른 진리를 설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유행상이라고 할 수 있다.
좌상의 선정에서 입상의 유행까지는 부처님의 전 생애를 표현한다. ‘대웅전’이라는 액자를 단 불(법)당에 들어가면 대개 중앙에는 앉아계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모셔져 있고, 좌우에는 문수ㆍ보현보살이나 혹은 좌우에 지장ㆍ관세음보살이 부처님과 함께 옆에 앉아계신다. 부처님 좌우에서 협시하는 것은 부처님을 모시기 위해서인데, 앉아계시므로 협시상이라기보다 삼존상의 모습에 가깝다. 초기의 협시 존자는 가섭과 아난존자, 과거의 디팡카라(연등보살)보살과 미륵보살이 서 있는 모습으로 조성됐다. 또 협시하는 존자들의 손에 들고 있는 물건도 적지 않은 변화를 겪는다. 처음에는 부처님 옆에서 한 분은 일산을 들고 햇빛을 가려주었고, 한 분은 부채를 들고 모기 등을 쫓았다. 모시는 모습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후대로 오면서 그것이 상징화되어 감로병. 연화, 칼 등으로 바뀌어 갔다. 또 수인으로 표현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