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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文(서문)
夫族以宗別宗以祖顯祖以孫傳孫
무릇 종족은 종친으로서 다른 종친과 구별되고, 할아버지로서 또 그 조상이 나타나고, 손자로서 그 후손에 전해진다.
故保族者必敬宗 敬宗者必自尊祖
따라서 씨족을 보존하려면 반드시 종친을 존경해야 하며 종친을 존경하려는 자는 반드시 조상을 숭배한데서부터 시작된다.
始金海之金以首露王爲祖越十世至仇衡王以德讓國於新羅 遂避地入智異山 宅于王山之下其終也
김해 김씨의 시작은 수로왕이 시조가 되어, 10세(世)를 지나 구형왕에 이르러, 덕으로서 신라에 나라를 양도하고 마침내 그 곳을 피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왕산 밑에 터를 잡고 임종하였다.
葬于王山 其孫大角干諱庾信 追慕厥祖之盛德 築室崇岡之側 晨昏灑掃至于七年之勤
왕산에 장례를 지내니 그 후손<증손자> 대각간(大角干) 휘 유신(庾信)이 그 조상<증조>의 성덕을 추모하고, 숭강(崇岡;숭고한 언덕=묘를 지칭)의 곁에 집을 짓고,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 까지 청소하기를 7년간이나 열심히 계속하였다.
伊後羅麗之亂失其陵所 子孫又中替不顯于世 逮入我朝圭組蟬聯 貞忠姱節歷世炳朗 亦有文章德業踵武而作世之以金爲氏者殆遍於國中
이(伊->以) 후 신라와 고려의 난리에 그 능소를 잃어버렸고, 자손들이 중간에 바뀌어 세상에 나타나지 못하다가, 조선조에 와서 <변두리의 미미한>관직이 연속되었고, 충신과 절의가 대대로 빛을 냈으며, 또한 문장과 덕업을 닦은 분들이 뒤를 이어 배출되었고 세상에서 김씨 가진 사람들이 나라안에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今有顯道者濯纓之孫也 早業家學性又嗜古篤於向先
이제 현도(顯道, 성시-이장-정택-현도,1755~1815)란 사람이 있으니 탁영(濯纓, 김일손, 1464~1498)의 후손이다. 일찍이 가정의 학문을 하였고 성품 또한 옛것을 좋아하여 선조를 위하는데 독실하였다.
歲戊午入山陰登縣之換鵝亭 搜覽扁楣得其失傳之陵於千有餘載之後 鳴呼 苟非至誠能若是乎金氏 其可謂有孫矣
무오년(1798년)에는 산음현에 들어가 그 고을에 있는 환아정에 올라가 현판과 글(편미)을 찾아 살펴보고 그 실전된 능(구형왕 능)을 천여년에 찾아냈다. 아! 참으로 그 지극한 정성 아니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김씨 집안은 참으로 훌륭한 후손을 두었다 할 것이다.
顯晦理也 固自有時者存而旣顯矣 不可以復晦 又不可不收其族以顯 其祖顯其祖以延其世遂乃謨之同人鳩如干財創譜牒之役顧其意 豈淺淺乎哉
나타나고 감추어짐은 세상의 이치이다. 진실로 다 그때가 있는 것인데 이미 나타난 것을 다시 감춰지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니, 또 종족을 수합하여 그 조상을 나타내고 조상을 나타내게 함으로써 그 세(世)를 연장하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마침내 이에 뜻을 같이 한 사람들과 상의하여 약간의 재정을 모아 가지고 보첩(족보)의 일을 시작하였으니, 그 뜻을 생각하건데 어찌 얕다고 하랴(깊고 크다)
夫王山金氏之門戶也 王山高則金與之俱尊 王山不毁則金與之相終 始而金海之納陵慶州之西岳于 光有耀矣要余一言而叙之遂次其意如此云
무릇 왕산은 김씨의 문호(門戶)이다. 왕산이 높으면 김씨가 더불어 높아질 것이고 왕산이 허물어지지 않으면 김씨도 더불어 서로 종시(終始)를 같이 하리라. 그러니 김해의 납릉(納陵)과 경주의 서악(西岳)은 선대가 남긴 빛나는 영광(榮光)이라 하겠다. 나에게 한 말씀 서(序)해 주기를 요청함으로 곧 그 뜻을 펴기를 이와 같이 한다.
壬戌十月下澣嘉義大夫行吏曹參判兼同知經筵實錄事安東金羲淳序
임술(1802)년 10월 하순 가선대부 행이조참판 겸 동지 경연 실록사 안동 김희순 서
임술보(壬戌序1802) 발문(跋文) 1
吁其幸矣 吾之譜成矣今而後庶可免僉宗之譜乎 吾宗之譜有甲戌焉而辛卯焉而是譜也
아!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우리의 족보가 지금 이루어 진 것이 이후 비천함을 면하고 여러 종친의 족보가 될 것이다. 우리의 족보는 갑술(1754)에 있었고, 신묘(1771)에 있었으며 <그 다음이> 이 족보이다.
派不過數十卷不過八九 凡我駕洛 聖祖不億耳孫安得咸囿於一圈之內哉
<보첩은> 수십 권에 파는 89개에 지나지 않으나 모든 우리 가락의 거룩한 조상과 헤아릴 수 없는 후손을 모두 한 군데에 모았다.
是以敦睦之誼有未盡路人之嘆亦不無今因王山 陵寢之修繕八路同聲遂乃就事玆 豈非 先靈陰騭之所使耶
이것으로도 돈독하고 화목한 정의(情誼)가 미진하고, 길가는 사람의 한탄이 없질 아니하니 지금 왕산의 능침(구형왕릉)을 수선하여, <조선> 8도에서 같은 목소리로 수행하여 이 일을 이루니 어찌 선영의 음덕으로 도우는 바의 일이 아니라 하리오.
盖修陵之議三從叔雲谷公發之宗丈圭亮氏助之宗兄象鉉.履鉉甫.贊之而石陵之事久遠譜之役浩大其於經紀之道<不>擇人無以竣事不知余顓蒙而不克負荷擧而委之再三辭終不獲遂與 僉宗始事卽壬戌春三月也
대개 능을 씌우고 보수하자는 의논은 3종숙 운곡공이 발의하고, 종씨의 어른 규량씨가 협조하고, 종씨의 형인 상현(문충공파, 한희-익조-상현, 1751~1832), 이현이 도와주어, 능을 돌로 보수하는 일이 영원 무구하고, 족보<간행>의 일이 넓고 큰 일이나, 경기지도(일정한 포부를 가지고 어떤 일을 조직적으로 계획하여 처리함) 로서 사람을 뽑<지 않>으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거늘 일이 끝남이 없고, 어디에서 끊어서 덮어야 할지도 모르는 감당할 수 없는 일로서, 위원들이 재삼 사양하여 <인원을>다 뽑지 못하고 끝냈다. 여러 종친들과 같이 더불어서 일을 시작한 것은 즉 임술년(1802년)봄 3월이었다.
議或有矛盾而調停之財亦有難嗇而拮据之今年仲夏始克訖役千五百其板三十一其卷各從世代之近遠且錄行誼之彰明而各派先烈不知忠臣幾孝子幾烈女幾德行幾文章幾淸宦幾炳郎 於一世則吾 鼻祖降世積善滾滾發育於後孫子猗歟盛矣
혹시 모순이 있으면 조정하였고, 재정적인 것도 어려움이 있었고 아껴야 했다. <실제적인>일은 금년 한 여름이 시작하여 능히 이 일을 마쳤다. 판수는 1천5백여 개이고, 권수는 31권이다. 각 세대의 가깝고 먼 것에 따라 기록하고, 또 각파의 선열과 알 수 없는 충신, 효자, 열녀, 덕행, 문장, 청환(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에게 시키던 규장각, 홍문관 따위의 벼슬. 지위와 봉록은 높지 않으나 뒷날에 높이 될 자리였다), 병낭의 품행과 도의를 드러내어 밝혀 재차 기록하였다. 1세 즉 우리 조상의 세덕이 쌓여 흐르고 흘러 후손을 아름답고 무성하게 발육시킨 것이 아름답도다.
陵之始終譜之顚末已悉於金尙書原序 不必疊床而顧玆不肖旣幹譜役竊有感焉
능의 시작과 종말, 보첩의 전말을 이미 남김없이 김상서(김희순)이 원 서문에 썼으므로, 불필요하게 또 말하는 것이고 <이는> 불초가 이미 보의 일을 맡아 처리함에 있어, 남모르는 감회가 남아 있다.
粵在辛卯修譜之時吾先君晩悔公構出序文而路遠便遠不得登榟草本留篋矣
신묘년(1771년) 수보를 할 때, 나의 부친이신 만회공(挺澤,1719~1789)이 서문을 썼으나, 너무 오래되어 그 남아 있는 판목을 얻을 수가 없었다.
不肖方在幹事之列諸宗且有跋文之屬故遂撮其要語先君之言曰駕洛以後派系無徵則宗丈楫熙氏首叙之名賢達士前後炳炳則上舍晟氏歷擧之觀吾譜者孝悌油然則再從叔油然公敦勉之今何贅焉
불초가 간사를 맡아보고, 여러 종씨들이 또 가지고 있던 발문이 있어, 그 중요한 요점을 취하게 되었다. 부친께서 말씀하시길 가락이후의 파의 계통이 증거가 없어, 우리 종씨의 어른이신 집희(참판공파, 홍명-우채-집희(生父는 우기))씨가 책머리의 서문에 쓴 이름난 어진 사람과 사물에 정통한 사람들이 앞뒤로 밝게 빛났다. 진사 성씨가 내력을 들어 보이는데, 우리 보첩의 효성과 공경심이 피어오름이라. 재종숙 유연공의 힘써 노력하는 것이 지금 어찌 쓸모없겠는가.
苐有可書而闕漏者有二焉 吾先祖執義公經學文章上承節孝下居濯纓三足一道相傳四世竝美則三賢建祠之日獨闕蓐儀者良有感焉
글로 써서 남길 만 한, 빠트린 것이 2개가 있는데, 우리의 선조이신 집의공(孟,1410~1483, 호는 남계)의 경학 문장은 위로는 절효공(극일)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탁영(일손)과 삼족(대유)이 하나의 도로서 서로 전하니 4세가 나란히 아름답다. 삼현(극일, 일손, 대유)의 사당을 세우는 날에 혼자(孟을)만 빠트리고 치르는 의례와 <같은> 느낌이 있다.
佔畢齎金先生之學受之江湖江湖之學受之冶隱接天載淵源爲一世師宗則斯文上大眼目豈無所見於卓爾之地而有此山仰之盛稱乎
점필재(金宗直:1431~1392)선생의 학문은 강호(金叔滋:1389~1456, 김종직의 父)를 이어 받고, 강호의 학문은 야은(길재)를 이어 받아, 오랜 세월(天->千載)동안 교제하였으니 1세의 스승으로 받들어 모시는 분이 되었다. 이 글이 큰 안목으로 우뚝 선 땅(卓爾之地)에서 어찌 바라 볼 곳이 없겠는가. 이 우러러 볼 산이 있다는 것을 대단히 칭송할 만하다.
仲尼日月也鄒夫子猶引宰我子貢有若之言以證之?吾先祖行誼愈遠而愈晦則可無存一言以記之以待後世之子雲乎 此其可書者一也
공자(仲尼,BC552~479)는 해와 달과 같이 우러러 보나, <그의 말은 오래되어 잊혀져> 추부자(추나라에서 태어난 맹자,BC372~289)는 오히려 <공자의 제자인> 재아, 자공, 유약의 말들을 증거로서 인용하였는데, 하물며 우리 선조들이 행한 정의(情誼)가 점점 더 멀어지고 점점 어두워져 기록에 한마디도 없을 만 하다. 이는 후손에 기대하여 기록하는 것이니 이것이 글로 써서 남길 첫 번째 것이다.
粤在戊午之禍米谷之前溪便紫水峴之松栢咸凄當時禍色慘不忍言
무오사화 때, 미곡(청도화양栢谷) 앞의 개울이 자줏빛으로 붉게 물들고, 언덕의 소나무와 잣나무는 처량하여 사화의 참혹성은 말로서 다할 수 없다.
吾先祖提學公坐徒湖南而命監察公奠居南原監察公卒于南而葬于南故司果公臨終命參奉公曰我家血縷不絶如線而湖嶺一身奔走無暇我死葬我於父母墓下汝則還故土備省掃而 以待子孫之有兄弟者一湖一嶺以守先墓 參奉公乃惟命焉 我家之復居道州者司果公遺命也
나의 선조 제학공(駿孫,1454~1507)이 호남에 유배되고 감찰공(大壯,1493~1549)에게 명하여 남원에 살게 하고(奠居), 감찰공이 졸하여 남원으로 가서 남원에 장사지내므로, 사과공(鏘,1519~1587)이 임종시 참봉공(致三,1560~1625)에게 명하기를 “우리 집안은 혈루(피흘림)가 마치 실과 같이 끊이질 않아 호남과 영남에 일신이 분주하여 한가한 때가 없구나. 내가 죽으면 나를 부모님 묘 아래에 장사 지내어 옛 흙으로 돌아가도록 하여 깨끗이 손질하도록 하고 자손을 기다려 형제가 있는 사람은 1명은 호남, 1명은 영남으로 선조의 묘를 지키도록 하라” 참봉공이 이 명령을 생각하니(따르니) 우리 집안이 다시 도주(지금의 청도) 에 살게 된 것은 사과공의 유언이다.
1. 濯纓 김일손이 무오사화 때 아들 대장과 같이 호남에 유배된 후 능지처참의 형을 당함
이후 중종 때 홍문관 직제학으로 추증됨. 묘:남원
2. 栗里 김대장이 무오사화 때 아버지와 같이 유배를 당하였으나 중종 때 조광조의 추천으로 감찰을 역임함. 묘:남원
3. 驚北 김장이 음직으로 충의교위 충좌위사과(忠毅校衛 忠佐衛司果)를 지냄. 형인 김갱은 선조 김일손의 고향인 청도로 돌아가고, 김장은 조부와 부의 묘를 지키기 위해 남원에 남아 남원에서 졸함. 묘:남원
4. 一之 김치삼이 사첨시참봉(司瞻寺參奉)을 지냄
至於通禮公始多螽斯慶命吾曾祖府君委禽於南原李先生活溪之門而仍居焉 我家之復居南原者亦以司果公遺命也
통례공(善慶,1586~1638, 청도의 白洞祠에 제향)에 이르러 많은 후손(螽)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 경사스러운 운수로, 나의 증조(聲始,1654~1697)께서 남원의 활계(남원의 이대위(李大위, 또는 李大甹, 李大聘, 경주이씨:1540~1609, 號는 활계)의 문하인 이 선생에게 자식(禽을 자식들이라 해석해도 무방한가?)들을 맡겨 다시 살게 하니, 우리 집안이 다시 남원에 살게 된 것 역시 사과공의 유언이다.
1. 통례공 김선경의 자; 10남 : 즙(濈,1607~1654,청도), 흡(翕,1609~1666,청도), 락<洛,出系 瑗后>, 약(瀹,1614~1667,남원), 양(漾,1618~1668), 일(溢,1620~1677), 원(源,1622~1677), 남(湳), 영(水+穎), 호(湖)
2. 활계에 대한 건
2-1. 경주인 이대유 ; 1540(중종 35)∼1609(광해군 1).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인(景引), 호는 활계(活溪). 아버지는 생원 종윤(倧胤)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창원정씨(昌原丁氏)로 담지 의 딸이다. 1570년(선조 3)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혼(成渾)에 의하여 사옹원참봉에 천거되었으나, 얼마 뒤 어머니의 질병으로 사직하였다. 1595년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취임하지 못하였고 이듬해 사포서별좌(司圃署別坐), 1600년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605년 사도시주부에 제수되고 이어 형조좌랑에 승진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대학》을 즐겨 읽고 연구하였으며, 인(仁)에 뜻을 두고 경(敬)을 먼저 실행하기에 힘썼다. 남원의 영천서원(寧川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활계유고》 2권이 있다.
2-2 성혼 (成渾 ; 1535~1598).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로서 해동십팔현(海東十八賢)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자는 호원(浩源)이다. 그리고 호는 우계(牛溪) ·묵암(黙庵)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噫噫嶺之淸湖之南骨肉相離近而父子不相養遠而至於同堂之親落落於半千里之外誰謂墩光之稔惡流毒於累百年之後分吾一家於兩南之間哉 此其可書者二也
아아! 영남의 청도, 호남의 남원은 골육(혈육, 부자형제)을 서로 떨어지게 하고, 가까운 부자가 서로 봉양을 못하게 되며, 멀리 떨어진 동당지친에 이르기까지 반 천리(500리)의 바깥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누군가가 말한 돈광(이극돈과 유자광)의 쌓인 해악으로 수백년간 해로운 독이 퍼져 우리 일가는 양남(영남과 호남)으로 나뉘어 졌다. 이것이 글로 써 남기고자 하는 두 번째이다.
惟此數語吾家之所抱寃而先君立言之意庶可布矣
이렇게 여러 번 말하는 것은 우리 가문의 원통함이고, 이는 부친이 말한 뜻이 모두 옳은 것 아니겠는가!
嗟夫甲辛兩譜美則美矣 惟有踈略故今於 此譜則各派先代碑銘行狀無不纖悉而弁之於卷首官啣行蹟亦皆推類而附於卷中一開卷可知某派之有某賢某家之居某邑而長湖之北大嶺之南若接唔語無復踈遠之嘆周官譜牒之設程子所謂譜者管攝天下之人心在良有以也
아아! 갑술보와 신묘보의 양 보첩은 아름답고 아름다우나 생각해 보면 자세하지 못하므로(踈略故) 이 보첩에서는 각 파 선대의 비명, 행장이 세세하지 않는 것이 없도록 수권에 쓰고, 관직을 받은 것, 행적, 또한 전부 책 중에 덧붙여 놓아, 한권을 펼쳐보면 어느 파의 모 선현과 모 가족이 살고 있는 모 읍을 알 수 있고, 길게는 호남의 북쪽과 크게는 영남의 남쪽까지, 만일 글 읽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멀고 가까움의 한탄을 다시 하지 않도록 하였다. 주나라 관리의 보첩을 만든 정자(중국 송(宋)나라 때의 유학자)는 소위 보첩이라는 것은 천하를 지배하는 인심이 들어 있다고 한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다.
凡我同譜之人念祖宗之積累勉子孫之敦睦不以遠而忽之不以卑而慢之則常員之花樹不必專美而公藝之同居亦將復覩矣 遂爲之跋
모든 우리 보첩에 실린 사람들은 조상의 쌓아 올린 공덕을 생각하고, 자손의 돈독과 화목에 누차 힘쓰고, 멀어서 소홀해지지 말고, 거만하여 천히 여기지 말고, 항상 종원들은 화수의 아름다운 것만 후손에 전할 필요는 없으며 공공의 법도로서 같이 살며, 또한 장차 할 일을 다시 되돌아보며 이에 발문을 마친다.
崇禎紀元後四丙寅五月三十日 不肖孫 顯道謹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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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히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