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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 옛날이었다. 중국 진시황은 세상을 모두 자기 손아귀에 넣고 권세를 부리면서 술과 여자와 노래 속에 살면서 세상에서 영생을 누리려고 하였으나 차차 자신 육신이 늙어감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막강한 군사를 이루어 놓고 만리장성을 쌓아 왜군의 침노를 막을 수는 있었으나 생명을 연장하는 일은 스스로 힘에 의하여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왕으로는 체면에 없이 괴로와하기 시작하였다.
왕은 모든 신하들을 모아 놓고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방법이 없는가하고 물었다. 누구도 그 해답을 말하는 자가 없었다. 사람이 영원토록 죽지 않을 방법이 없는 것은 물론이지마는, 설마 있다고 하더라도 그 비방을 진시황에게 알려드릴 누구도 없었다. 오히려 왕이 어서 죽기를 모두 기다리는 판국인데 누가 그 비밀을 왕께 아뢸 것인가.
그런데 꾀많은 서불이라는 신하가 있었다. 그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 폭군인 진시왕의 휘하에서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소인이 듣건데, 저 동쪽 나라 작은 섬 영주라는 곳 영산 한라산에 사람이 먹으면 영원토록 살 수 있다는 불로초(不老草)가 있다고 하옵니다. 소인이 성심을 다하여 그 약초를 캐어오고자 하나이다."
왕은 귀가 번쩍 뜨였다.
"오, 과연 네가 가장 나를 섬기는 충성스러운 신하로구나. 만약 네가 그 불로초를 캐어온다면, 내가 이 나라의 땅 절반을 너에게 주겠다."
왕은 정말 서불이 자기를 위해 불로초를 캐오려는 줄 믿고 기뻐하였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것을 캐어오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옵니다. 그러하오니 황송하옵니다만, 동남동녀 오백을 차출하여 주시면 합니다."
"동남동녀 오백이라, 그 많은 사람들은 무엇에 쓰려는고?"
"예, 한라산이라는 그 산은 험하기가 이룰 데 없음은 물론 그 험한 산속 깊이 깊이 숨어 사는 그 불로초라는 아무 눈에라도 띄는게 아닙니다. 마음과 몸이 정결하고 흠이 없는 동남동녀들이 눈에만 띄인다 하오니 그런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가 합니다."
서불의 이야기는 모두 거짓말이었다. 그에게는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이 지경을 당하여 왕이 서불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왕은 서불이 원하는 대로 동남동녀 오백에 그들이 오랜 세월 동안 먹고 쓸 모든 물건을 준비하고 곤륜산에서 좋은 재목을 베어다가 큰 배를 여러 척 만들고 하여 서불 일행을 내보내었다.
이렇게 진시황의 휘하를 떠난 서불 일행은 제주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한라산에 올라 불로초를 캐기는 커녕 산구경만 하였다. 한라산 뿐만 아니라 제주의 여러 절경을 구경하면서 섬을 한바퀴 돌다가 지금 정방폭포에 이르러 구경을 하고 다시 동쪽으로 떠나면서 정방폭포 바위 위에 그들이 이곳을 지나갔다는 글귀를 새겨두었다. 서불과차(徐市過此)란 글귀다.
지금도 폭포 상단 바위에는 그런 글 흔적이 있다고 한다. 그들 일행은 동쪽으로 가서 어느 땅에 정착하여 그들 대로 작은 나라를 이루었을 거라고 여겨진다. 애초부터 불로초를 캐겠다는 것은 공연한 구실이었다.
제주전설 오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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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지금 서귀포시 홍로 오댁(吳宅)에 한 서자가 있었다. 이 청년은 성산면 고성리 남문집에 양자로 들어갔다. 당시는 적서차별이 심한 때여서 그는 생가에 여러 형제 친척들에게 괄시를 많이 받아오던 커라 멀리 양자로 들어가 버린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도 하였으나 이따금 제사 때나 되어 생가에 들렸을 때라도 그는 여러 형제들과 같은 반열에 서서 배례를 하지 못하고 혼자서만 마당에서 배례를 하곤 하였다. 그러면서 한없이 자기 신세를 한탄하엿다. 그러면서도 조상에 대한 그의 효서은 극진하여 그러한 굴욕을 참아가며서 늘 생가의 기일 제사를 잊지 않고 참례하였다.
어느 해 일이었다. 어느 때같이 오 서자는 생각집에 제사를 보려고 아침 일찍이 집을 떠나 홍로 생가로 떠났다. 아침부터 흐릿한 날씨는 산길에 접어들었을 때부터 갑자기 험악해 지더니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하였다. 그는 소나기를 피하려고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별로 피할 곳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리저리 찾아다니다가 어떤 골총안 숲이 우거진 곳을 찾아들었다. 그는 거기서 잠시 비를 피하려고 생각하였다. 갖고 있던 칼로 가시덤불을 캐고 몸 둘 자리를 만들어 잠시 쉬고 있었다. 그러면서 비가 멎기를 기다렸다.
비는 꽤 오래도록 계속하여 내렸다. 비 개이기를 기다리는 사이에 깜빡 잠이 들었다. 그때 그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어떤 하연 백발 노인이 나타나서는,
"나는 이 무덤에 묻힌 사람입니다. 당신이 내 집을 깨끗이 정리하여 주시니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습니다. 하찮지마는 오늘 저녁 당신 아버님의 제사를 걸 제가 압니다. 그러니 이것을 제사의 제수로 드리니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한 말을 마치고 그 노인은 사라져 버렸다. 깨고 보니 꿈이었다. '이상한 일이로군'하고 생각을 하면서 그 무덤에서 나왔다. 어느덧 비는 개고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는 급히 다시 홍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서귀에 이르기 전 효돈 마을의 동편에 큰 내가 있었다. 비가 내렸던 후여서 내가 크게 치고 있었다. 그때 냇물에 떠내려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무엇인가 다가가서 자세히 보니 그것은 바로 노루가 냇가 나무 틈에 끼어 죽어 있었다. 그때 그는 아까 그 꿈에 노인이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것이로구나. 그 노인이 제수로 주겠다는 것이..."
그는 기뻐하며 그 노루를 둘러메고 생가집에 이르렀다. 모여 있었던 친족들은 모두 놀랐다. 밤중에 되어서야 제사집에 이른 일도 놀랐고, 더구나 제수로 큰 노루까지 짊어지고 왔으니 더욱 놀라면서 의아해 하였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제관들은 그를 방안으로 불러들여 같이 제관으로 배려하도록 하였다. 오 서자에게는 너무나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뒷날 돌아오는 길에 다시 그 무덤에 들려서는 더 정성을 드려서 소분을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묘에 비석을 발견하였는데, 그 묘는 정말 지체있는 집안의 선묘였다.
그래서 그 집안에 알리자, 오 서자에게는 더 많은 사례를 하면서 고마워하는 것이었다.
(서귀포시 문헌 자료집)
제주전설 고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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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리에 고대각이라는 힘이 장사인 사람이 살았었다. 그 부친은 소를 여러 마리 기를 정도로 여유있게 살았다. 단지 그에게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힘센 아들을 하나 얻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부인이 임신을 하자 그는 힘센 아들을 얻기 위하여 소를 열두 마리나 잡아 먹였다. 그러나 나고보니 아들이 아니고 딸이었다. 실망이 매우 컸으나 다음을 기약하고 참았다. 그 후에 다시 임신을 하자 이번에는 열 마리만 잡아 먹였다. 열두 마리를 잡아 먹이면 다시 딸을 나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은 것은 아들이었다. 고대각 부친은 매우 흡족하게 생각하였다.
오뉘는 잘 자랐다. 외모도 남달리 뛰어났고 힘도 세었다. 고대각 부친은 여간 다행으로 생각하질 않았다. 고대각의 힘은 그 주위에서 알아줄 정도로 소문나 있었다.
어느 가을이었다. 고대각은 밤에 산디밭을 지키려고 갔다. '쿨쿨왓'이란 밭에 산디를 갈아 잘 여물었는데 베어 놓고는 밤에 지키지 않으면 도둑놈들이 다 지어가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녁을 먹고 온 고대각은 밭 한편 구석에 비스듬하게 기대어서는 담배를 피워물고 있었다. 밤이 으슥하니 쌀쌀한 냉기가 옷섶으로 스며드는 게 으스스하게 춥기도 하였다. 그 때였다. 어떤 사람이 밭안으로 퉁하고 뛰어들었다. 그래도 고대각은 가만히 동정만 살폈다. 그 괴한은 밭 한가운데로 들어가더니 주위를 한번 휘둘러 보고는 엎드려 비오논 벼를 묶기 시작하였다. '이놈아'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하는 거동이 너무나 당당하고 대담하여 좀 두고 보기로 하였다. 그 사람은 어느새 인지 밭 가운데 있는 벼를 거지반 묶고는 한가운데로 모아놓아 짐을 꾸리기 시작하였다. 짐꾸리는 것을 보고서야 그 사람도 보통이 아니란걸 알 수 있었다. 고대각은 그냥 두었다. 그리고는 몰래 그의 뒤를 따라 가 보았다. '언제고 내가 값을 톡톡히 받을 때가 있을 테지.'하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 날이 훤하게 밝자 그 산디 지어간 사람을 만났다.
"왜 남의 곡식을 물어보지도 않고 지어갔소."
좀 퉁명스럽기는 하였으나 조용하게 물었다.
"곡식은 떨어지고 물어봤자 지어가라고 할 것 같지는 않고 해서 내가 한 짐 지어 왔소. 나중에 내가 값을 갚을 것이니 그리 아시오."
상대는 미안한 기색이 하나도 없이 아주 의젖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고대각은 더 따지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몇 년 후였다. 그 산디 지어간 사람에게서 산디값을 받아가라는 기별이 왔다. 그는 육지와 쌀장사를 하는 사람이었는데 이번 쌀장사가 잘 되었으니 와서 받아가라는 것이엇다.
고대각은 때를 맞추어 갔다. 그이 무곡 실은 배는 갯가에 쌀을 실은 채로 그냥 있었다.
"오래간만입니다. 전에는 제가 실례가 많았소. 오늘 그 값을 갚을 테니, 가져갈 만하게 가져가시오."
그는 배를 가리키며 마음대로 지어가라고 고대각에게 말했다. 고대각은 아무 말없이 쌀 실은 배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자근자근 쌀가마니들을 포개놓고 세워놓고 하면서 짐을 꾸렸다. 그러다 보니 배안에 있는 쌀가마니들이 겨우 한 짐 밖에 되질 않았다. 고대각은 배 안에 있는 쌀을 몽땅 한 짐에 지어나오면서,
"더 가져가려해도 쌀이 없어 이것밖에 못 가져갑니다."
이렇게 한 마디하자 그를 바라보고 있던 배임자는 가슴이 뜨끔하였다. 그날밤에 자기가 너무 당돌하게 그 집 산디를 지고 온 게 미안하였다. 저 힘에 한번 싸움이라도 붙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니 가슴이 오싹하였다.
"쌀값은 제대로 갚는군."
배임자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렇게 힘이 센 고대각도 그 누이에게 들면 힘을 못썼다. 어느 해 겨울이었다.
모관 동촌에서 온 섬 장사들이 모여 씨름대회가 벌어졌었다. 고대각은 여기에 참석하였다. 아직 그의 힘이 널리 알려지기 전이었다. 한참 씨름이 고조를 이룰 즈음에 고대각이 썩 나섰다. 한 사람 두 사람 세사람‥‥‥. 그렇게 이겨가는데 그를 당할 사람이 아무도 나타나질 않았다. 모여든 사람들은 서로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저 친구 안보던 사람인데‥‥‥"
"남의 지역에 들어와 건방지게 힘을 자랑하여 뻐기는 꼴 보기가 안좋군."
아무도 고대각과 상대하는 사람이 안 나타나자 분위기는 이상하게 돌아갔다. 그 때였다. 어떤 사람이 씨름판 안으로 달려들어 고대각과 맞붙었다. 순식간에 승부는 나고 말았다. 고대각이 지고 그 모른 사람이 이겼던 것이다. 사람들의 환호가 씨름판을 흔들었다. 고대각은 분을 못이겼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제주전설 여우물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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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에서 법환에 이르는 사이에 여우물이란 곳이 있다. 이 물가에는 늘 여우가 나타난다 하여 여우물이라고 사람들이 불러왔다.
옛날에 어떤 관리가 이 물가를 지나게 되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이었는데 혼자 몸이라서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어정쩡한데 이곳에 이르렀을 때에 반갑게도 혼자가는 어떤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혼자라 쓸쓸하고 무섭기조차 한 때인데 잘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아주버님, 어디까지 가십니까. 같이 벗을 하여 가십시다."
여자가 먼저 말을 걸어오면서 함께 벗을 하여 가자는 데는 더욱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 여자가 꽤나 어여쁜데 더욱 마음이 흡족하였다.
"예, 어쩐 일로 이런 밤중에 혼자 밤길을 가십니까. 저도 마침 혼자길이라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습니다."
남자인 선비는 오히려 잘 되었다는 듯이 여자의 청을 그대로 받아들이었다. 그래서 여자를 타고 가는 말에 태우려 하였다.
"불편하지만 이 앞에 타시지요."
여자를 앞에 타도록 권하였다.
"아이고, 여자몸에 어떻게 남자 앞에 탈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뒤에 타겠습니다."
그래도 앞에 타는 것이 안전하다고 하면서 앞에 탈 것을 권하였으나 여자는 끝끝내 뒤에만 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몇 번이나 실랑이가 오가는 가운데 관리는 그 여자가 보통 여자가 아님을 느꼈다. 이는 필시 여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종종 여우가 나타난다는 옛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 여자 말대로 그녀를 뒤에 태웠다. 그리고는 말을 마구 달렸다.
"아이쿠 떨어지겠습니다. 그렇게 달리지 말아 주십시요."
얼마쯤가니 여자가 천천히 달려달라면서 애원을 하였다.
"나는 길이 바쁜 사람이오. 천천히 달릴 수는 없는데, 아, 좋은 수가 있소."
관원은 도포고름을 풀어 그 여자와 자기 몸을 꽁꽁 하나로 묵고는 다시 말메 채찍을 놓아 달렸다. 여자는 마을이 가까울수록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관리를 혼내주려던 애초의 생각에서 혹시 이 관리에게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일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마을에 들어서자 내려달라고 졸랐다.
"나으리, 고맙습니다. 제 갈길에 다 이르렀으니 이제는 절 놓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관리는 못들은 척 더욱 빨리 말을 달리는 것이 아닌가.
"나리, 여기서 내려주십시요. 내릴 곳을 지나 왔습니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내려줄 생각은 커녕 더 말을 달리는 것이었다. 여우인 여자는 관리의 등에서 몸질을 치기 시작하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어떤 변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라는 겁이 일었다.
관리는 재빨리 말을 달려 그의 집으로 들어섰다. 그의 집에는 큰 개가 두 마리 있었다. 그 개는 주인이 집안으로 들어설 때면 언제든지 나와서 주인을 맞이하곤 하였다. 이날도 주인의 말방울 소리를 듣자 마당으로 나와서 주인을 맞았다. 그때 관리는 등에 단단히 동여매었던 끈을 풀었다. 여자가 마당에 휙 나둥그라졌다. 그 순간이었다. 개가 그 여자 앞으로 쏜살같이 내닫고는 여자를 물어 흔들었다. 그 순간 여자는 별안간 한마리 여우로 변하고는 피를 흘리며 마당 가운데 나동그라졌다.
관리는 그의 지혜로 그 여우를 잡고 말았다. 그 후로는 여우물에 여우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서귀포시 문헌 자료집)
제주전설 이청장물 여우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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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강정리 「도릿동네」에 강씨 형제가 웃집(한라산쪽 집), 알집(바다쪽 집)에 살고 있었다. 형제는 아주 건장하고 부자로 살았다.
웃집에 사는 형이 말을 타고 대정고을 현청에 일을 보러 출입을 했다.
대정고을로 출입하는 길 중간에 <이청장물>이 있는데 여기에는 가시나무로 꽉 둘러싸여 있었다.
하루는 형이 말을 타고 대정고을로 들어갈 때 <이청장물>에 이르자 고운 소복차림의 여인이 나타나서 졸라대는 것이었다.
"오라버니, 함께 가겠습니다."
강씨는 여우가 변신한 귀신임을 알았다. 이렇게 자꾸 희롱을 걸자 잡아 죽여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대정고을에서 일을 마치고 노끈을 허리에 감추고서 돌아오는데 또 고운 여인이 나타나 수작을 부리는 것이었다.
"오라버니, 데려다 주십시오."
"그렇게 해라, 말을 타라"
여인이 말에 오르자마자 숨기고 있던 노끈을 풀어 여인의 허리를 묶고는 자신의 몸에 꼼짝하지 못하게 얽어매었다.
여인은 깜짝 놀라면서도 태연한 척 사정을 했다.
"오라버님, 이 줄을 풀어주십시오."
"그래, 그래, 조금만 기다려"
풀어주질 않고 말을 달려 집으로 달려 왔다.
강씨 형 집에는 사나운 사냥개 두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개들이 주인을 맞이하여 달려나오자 묶었던 줄을 풀었다. 이때 개 두 마리가 달려 들어 여인을 물어 죽였다. 죽고 난 다음에 살펴보니 머리에는 백년 묵은 해골을 썼고, 옷을 벗겨 보니 몸은 늙은 <황식(고양이)>이었다.
강씨 어른이 여우 귀신을 잡아 버리자 <이청장물>에는 고운 여인이 나타나지 않았다 한다.
(서귀포시 문헌 자료집)
제주전설 세당할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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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리 본향당 하르방은 부인을 데리고 살았다. 그런데 본향당 하르방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
부인이 임신을 하고 입덧을 하게 되자 돼지고기를 무척이나 먹고 싶어 했다. 하루는 부인이 남편에게 사정얘기를 했다.
"입덧으로 돼지고기를 무척이나 먹고 싶습니다."
남편은 부정한 년이라고 욕을 하며 돼지고기를 사다 주지도 않고 먹지도 못하게 했다. 부인은 무척이나 돼지고기를 먹고 싶어하던 중 통시(변소)에 갔다가 보니 돼지가 있었다. 부인은 즉시 돼지털을 뽑고는 콧구멍에 끼워 불을 붙였다. 돼지고기 냄새라도 맡아 보려고 그렇게 했던 것이다. 남편이 드디어 이 냄새를 맡고는 버럭 화를 내었다.
"부정한 년, 당장 집을 나가라"
부인은 어쩔 수 없이 본향당을 떠나 집을 나와 <새당>이라는 곳에 와서 혼자 살았다 한다.
이러한 전설로 본향당에 갈 때에는 돼지고기를 먹지도 않고 가져 가지도 않으나 새당할망에게 갈 때에는 돼지고기를 먹기도 하고 가져 가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서귀포시 문헌 자료집)
제주전설 대포리 설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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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에는 먼저 원(元)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 처음에는 '큰재물'이라고 하는 바닷가 동네에 한 서른나믄 호로 마을을 이루었다가 지금의 대포리 지역으로 옮겨와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을 이루었던 원(元)댁은 매우 호사롭게 살았는데 마을 맨 안쪽에 고대광실 큰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 그 집 이름을 '안집'이라 하였다.
그 집이 얼마나 웅장하였던지 집 처마마다 네 귀에 풍경을 달았다. 바람이 불때마다 그 풍경소리가 온 마을에 들릴 뿐 아니라 지나가던 사람들의 발걸음까지 멈추게 하였다 한다.
하루는 지나가던 목사가 이 집에 들렸다. 풍경소리에 따라 들어왔는데 집을 보니 사가로서는 너무나 웅장하니 목사가 마음이 뒤틀릴 정도였다. 당장 집을 헐라고 호령을 하고 싶었으나 이 지역 토호로서 그 세도가 막강한 것을 생각할 때 섣불리 그럴 수도 없었다.
"참 집이 훌륭합니다. 혹 이 집에 대한 당호(堂號)나마 있는지요."
목사는 집이 훌륭함을 감탄하고 나서 은근히 어떤 무엇을 얻어보려고 집의 당호를 물었다.
"예, 뭐 보잘 것 없이 초라하여 부끄럽습니다. 선친께서 저희 여덟형제를 두시어서 팔룡당(八龍堂)이라 불러온 줄 압니다."
집주인은 아주 공손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하였으나, 마음 속으로는 어떤 오만함이 서려있는 어투였다. 당신이 아무리 목사라고 하지마는 내 재력(財力)을 따르겠느냐는 마음이었다. 그것을 간파하지 못할 못사도 아니다. 더구나 여덟 아들을 두었다 하여 감히 '용(龍)'자를 써서 '팔룡당(八龍堂)'운운한 것이 괘씸하기 그지 없었다.
"팔룡당이라 당호치고는 매우 훌륭합니다만‥‥."
목사는 말끝을 맺지 아니하고 설레설레 저었다. 집주인이 바싹 긴장을 하였다.
아까는 아무리 오만한 마음으로 의젓하게 말을 하였지마는 목사의 표정을 보니 마음이 어수선하였다.
"무슨 말씀이온지, 혹시 잘못이라도 되었으면 ‥‥."
주인의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하였음을 눈치챈 목사는 옳다구나 하였다. 그만 하면 내가 능히 저 무엄하게 큰 집에 대하여 목사의 위엄을 볼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예, 당호는 훌륭합니다만 일반 백성의 당호로서는 너무 센 것 같습니다. 앞으로 혹 그 당호를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가문에 ‥‥."
말끝을 맺지 아니하고 안타깝다는 얼굴로 집주인을 바라보고는 자리를 뜨려 하였다.
"나으리, 이왕 말씀을 꺼내신 김에 적당한 당호를 하나 마련하여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주인은 목사의 말을 듣는 중에 불현듯 불안이 엄습하였다. 어떤 액운이 서서히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용(龍)은 우리같은 백성들에게는 너무 과분합니다. 그러지 않습니까."
목사는 집주인의 얼굴을 이번에는 아주 정면으로 쏘아보듯 하였다. 목사 자신의 신분으로도 그러한 글자를 써서 당호를 지을 수 없다는 말은, 왕이 아니면 그런 당호를 쓸 수 없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주인은 갑자기 송구한 마음이 일어 몸둘 바를 모른다.
"예, 이렇게 하십시오. 용(龍)자를 뱀 사(蛇)자로 바꾸십시오."
목사의 말은 아주 단정적이었다. 이미 주인은 심리적으로 목사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알겠습니다."
주인은 곧 당호를 팔사당(八蛇堂)이라 바꾸었다.
그런데 목사가 다녀가서 그렇게 집의 당호를 바꾼 지 불과 한 달만에 집안에 궂은 일이 일어나면서 망해가기 시작하였다. 얼마 오래 못가서 그 많은 재력이 축이 나면서 가세가 기울어지더니 결국은 다시 그 옛날의 부를 도모할 수 없게 망하였다고 한다.
(서귀포시 문헌 자료집)
제주전설 힘과 기예가 뛰어난 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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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마을은 토지가 다른 마을에 비하여 협소하고, 척박하여 농사가 잘 되지 않아서 가난하게 살아온 마을이었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주로 무명을 짜서 그것을 쌀로 바꿔다 먹고 살기 위하여 제주 섬안을 누벼 다녀야만 했었다. 바로 그 시절에 이 마을에 어떤 강씨도 무명을 잔뜩 지고 동네 청년들이 거세다고 소문난 냇기(지금의 성산면 신풍리, 신천리와 표선면 하천리) 마을로 들어갔다.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며 다니다 보니, 다리도 피곤했다.
마침 눈 앞에 '들음돌'이 있었다. 들음돌이란 둥그렇고 큰 바위돌로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길가에 놓아두어서 그 마을 젊은이들이 힘 내기로 항상 들어 힘을 기르는 돌이다. 이 것은 큰 것을 동네에 놓아두면 반드시 그것을 들 수 있는 힘센 사람이 난다고 하고, 그것은 동네 힘의 상징물이어서 큰 돌음돌이 놓여 있으면 딴 동네 사람들이 감히 넘보지도 못하는 것이다.
강씨는 바로 그 돌 위에 무명을 진 채로 앉고 말았다. 그때 마침 냇기마을 한 청년이 바로 그 앞을 지나고 있었는데, 조용히 지나갈 리가 없었다.
"자네, 어찌 거기에 앉았는가?"
청년은 강씨의 거만한 거동을 보자 훌닦기 시작했지만, 강씨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왜 그렇소. 아, 내가 먼길을 오다보니, 다리가 아프고 해서 좀 쉬자고 여기에 앉았소만‥‥"
"이 돌이 어떤 돌인 줄을 몰라요?"
"난 모르겠오만, 도대체 어떤 돌이요? 난 이 돌이 뭔지 몰라서 앉았오이다만‥‥"
강씨가 그 돌이 어떤 돌인 지를 모를 리가 없었다.
"당신, 그 돌을 한번만 들으시오."
"난 이 돌 못들겠소."
"못 들 테면 당신이 앉았던 자리를 혀로 핥으오."
"돌을 어떻게 혀로 ‥‥?"
바로 그때였다. 부리부리하게 생긴 동네 청년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강씨의 입장도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 혀로 핥을 수는 없고, 이 돌을 좀 들어 보지요."
강씨는 무명 진 채로 그 돌을 선뜻하게 들고서는,
"이것을 어디로 가져다 놓을까요?"
강씨의 이 말에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 말이 없자, 옆에 있는 대밭으로 뻥 내던져 버렸다. 이 동네에서 아무리 힘이 센 사람도 겨우 들까 말까 하는 돌인데, 그것을 지켜 보던 청년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들 슬금슬금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강씨는 온 종일 행상다니다가 다른 마을로 넘어갈까 했지만, 해도 저물고 해서 냇기 마을에 있는 방 한칸을 빌어 투숙하기로 마음먹었다. 예전처럼 저녁 식사를 끝내고 곧 잠자리에 들까 하는 찰나였다. 동네 청년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방 가득 들어앉아 자기네들 끼리만 말을 주고 받기 시작했다. 이 모두가 강씨를 골려 줄 계책임에는 틀림없는 처사였다.
"우리 이 저녁에 그대로 심심하게 있을 게 아니라 무슨 내기를 해서 술먹기로 하는 게 어떤가?"
우락부락하게 생긴 한 청년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강씨를 제외한 모든 청년들이 이 말에 응수했다.
"거 좋지!"
"무엇으로 내기를 할까?"
"퉁소 불기 내기 하자, 못 부는 사람 술 내기로."
"참 좋다."
계책대로 착착 진행되어가는 판이었다. 동네 청년들이 퉁소를 불기로 내기한 까닭은 강씨가 언청이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것을 노린 것이었다.
강씨는 우두커니 방구석에 앉아 있으면서 쳐다볼 뿐이었다. 한 사람씩 앉은 순서대로 퉁소를 불어 나갔다. 순서대로 한다면 강씨는 맨 나중에 불 판이었다. 제각기 제법들 불어 나갔다. 소리의 고비를 겪어가며 조용히 불어나갔다. 어느덧 강씨 앞에 퉁소가 턱 놓였다.
"당신도 불어 보시오."
우락부락하게 생긴 바로 그 청년의 말이었다.
"난 퉁소를 못 붑니다."
"불어보라면 불어보오. 뭐 그리 잔말이 많소."
"그래도 난 불지 못해요."
"못 불겠거든 술 내시오."
"강씨는 입장이 난감했다. 이러나 저러나 퉁소를 불지 않을 경우에는 무슨 소란이 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하는 수 없이 불기로 작심했다.
입술에 찢긴 부분을 무엇으로라도 막아야 할 판이었다. 강씨는 소피를 보고 와서 퉁소를 불겠다고 말해 두고 밖으로 얼른 나왔다. 마침 그 집 변소로 가는 길에 호박잎이 보였다. 그것을 얼른 뜯어내어 방으로 들어갔다. 찢긴 입술에 호박잎 조각을 턱 붙이고는 퉁소를 입에 물고는 불어나가기 시작했다.
"부우- 우, 응‥‥."
한숨에 열두 고비를 겪었던 것이다. 퉁소를 방바닥으로 퉁 내려 놓는 순간, 모든 청년들의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아이고, 선생님 어디 사십니까?"
"나 대포 마을에 살아요."
"당신 그런 힘에 그런 재주를 갖고 여기에 뭐하러 오셨습니까?"
"아, 이 무명을 지고 와서 양식이나 바꿔다 먹고 살려고 왔소."
"아, 그렇습니까. 선생님 내일 아침에 우리가 모두 나서서 이 무명을 쌀로 바꿔 드리겠으니, 여기 가만히 계십시오. 그리고 다음에 이곳으로 올 때는 꼭 우리들을 찾아 주십시오, 선생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이튿날, 강씨는 냇기마을 청년들이 모두 나서서 바꿔 준 쌀을 잔뜩 지고 털레털레 집으로 왔다.
(서귀포시 문헌 자료집)
오름에 얽힌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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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실(靈室)의 ‘실‘은 골짜기의 옛말로서 室(실)이라는 한자를 빌어 표
기하고 있으며, 영실이란 산신령이 사는 골짜기 즉 신령스런 곳이란 뜻이
라고 한다.
아득한 옛날 한 어머니가 아들 5백을 낳아 이 한라산에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식구는 많은데다 집이 가난하고 마침 흉년까지 겹치니 끼니를 이어가기
가 힘들게 되었다.
어느날 어머니는 아들들에게 ≪어디 가서 양식을 구해 와야 죽이라도 끓
여 먹고 살게 아니냐≫고 타일렀다. 오백형제가 모두 양식을 구하러 나갔
다.
어머니는 아들들이 돌아와 먹을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큰 가마솥에다 불을 때고 솥전위을 걸어 돌아다니며 죽을 저었다. 그러다
가 그만 발을 잘못 디디어 어머니는 죽솥에 빠져 죽어 버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오백형제는 돌아와서 죽을 먹기 시작했다. 여늬 때보
다 죽이 맛이 좋았다. 맨 마지막에 돌아온 막내동생이 죽을 뜨려고 솥을
젓다가 이상하게도 뼈다귀를 발견했다.
다시 잘 저으며 살펴보니 사람의 뼈다귀임이 틀림없었다. 동생은 어머니
가 빠져 죽었음이 틀림없음을 알았다.
≪어머니의 고기를 먹은 불효의 형들과 같이 있을 수가 없다.≫ 동생은
이렇게 통탄하며 멀리 한경면 고산리 차귀섬 (遮歸島)으로 달려가 한없
이 울다가 그만 바위가 되어 버렸다.
이것을 본 형들도 그제야 사실을 알고 여기저기 늘어서서 한없이 통곡하
다가 모두 바위로 굳어져 버렸다.
그러니 영실에는 499봉이 있는 셈이고 차귀섬에 막내동생 하나가 떨어져
나와 있는 셈이다.
차귀섬의 오백장군은 대정읍의 바굼지오름(簞山) 에서 훤히 보인다.
어느 해였든가, 어떤 지관 (地官)이 바굼지오름 에서 묏자리를 보게 되었
다.
지관은 정자리를 하나 고르고는 ≪이 묏자리는 좋긴 좋은데 차귀섬의 오
백장군이 보이는 게 하나 흠이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상제는 ≪묏자
리만 좋으면 그것쯤 없애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고 차귀섬으로 건
너갔다.
그래서 곧 도끼로 그 바위를 찍기 시작했으나 워낙 큰 바위라 없애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차귀섬의 오백장군에는 도끼로 찍어 턱이 진 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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