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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트레킹의 말미에 이렇게 호젓한 산길도 만났다.
특별하지 않은 산행이 있을까만 이번 산행은 그중에서도 좀 특별했다. 딸과의 백패킹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고 싶다는 순수한 뜻을 가진 친구들과 함께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 친구들은 계곡미가 물씬 풍기는 원시의 어떤 곳을 그리고 싶어 했다. 나는 그들에게 예전부터 계곡 트레킹으로 가고 싶었던 ‘법수치계곡’을 추천했다. 순수한 뜻을 가진 친구들이라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 이면에는 남들이 우리 두 사람의 사적 영역에 불쑥 들어온다는 부담감, 그리고 자유를 구속당한다는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사춘기에 접어드는 소진이가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산행은 싫다고 출발 전날 내게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법수치계곡으로 출발하는 이른 아침. 촬영팀은 집에 방문해 출발 모습부터 찍고자 했다. 소진이가 생각보다 더 많이 쑥스러워했다. 우리 딸 소진이가 이렇게 쑥스러워한 적이 있었던가? 여하튼 1시간쯤 출발컷을 찍고 두 대의 차량으로 계곡 트레킹의 종착 지점인 법수치리의 미림연수원으로 향했다. 차량에서도 촬영팀의 일부가 동승해 동영상을 계속 찍고 있었다. 휴가철이라 일찍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법수치리까지 4시간 30분이나 걸렸다.
종착 지점에 내 차를 세우고 촬영차량에 오른 우리는 출발 지점인 부연약수터 인근으로 향했다. 길은 비포장이었고 옆으로는 천길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었다. 비가 많이 온다면 사고가 날 가능성이 높은 도로였다. 과연 이런 곳에 마을이 있을까? 차량은 점점 더 우리를 오지로 이끌고 있었다. 일정상 점심을 먹고 출발해야 했으나 식당은커녕 집을 찾기가 힘들었다. 다행히 부연약수터 인근에 도착하자 민박 겸 식당이 나타났다. 촬영팀 포함해 일곱 식구는 곤드레밥과 산채비빔밥으로 거하게 점심을 먹었다. 각종 산 야채와 효소들을 반찬으로 낸 건강식이었는데 집에 두고 온 아내 생각이 간절했다. 아내는 이런 음식들을 아주 좋아한다.
이래저래 꾸물대다 보니 벌써 시간은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촬영팀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여하튼 우리는 부연약수터에서 법수치리로 향하는 계곡의 상류에 발을 담갔다. 그 순간 나는 뭔가가 내 예상과는 다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촬영팀의 속도가 생각보다 훨씬 더딘 탓이다. 젊은 친구들이라 어느 정도 빨리 따라 붙을 거라 예상했는데 장비의 무게와 미끄러운 바닥에 그들은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예상에도 없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장비에 비가 들어가면 안 되는 관계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쉬었다. 비가 그치고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으나 우리와 그들 사이의 거리 차이가 너무 많이 나기 시작했다. 계곡길로 500m 남짓 왔는데 이미 시간은 오후 4시가 돼 가고 있었다. 더 이상 진행하기에는 무리였다. 결단을 내릴 때. 나는 경험상 이번 촬영은 취소하고 새로운 산행지를 모색해 재촬영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나마 지금 탈출하면 도로를 통해 차량까지 20분쯤이면 도착할 수 있지만 머잖아 이곳을 벗어나면 오도 가도 못 하는 처지가 된다. 그들도 2시간 남짓 취재를 하면서 그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린 듯하다. 일단 소진이와 나는 늦은 시간이지만 산행을 강행키로 하고 그들과 헤어졌다. 미안함이 좀 들었다. 어쨌거나 한 팀으로 뭉쳤는데 소진이와 나만 빠져나오기가 그랬지만 이렇게 간도 안 보고 수저를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그들을 뒤로 하고 우리는 본격 계곡 탐사에 들어갔다.
법수치계곡 상류의 부연동에서 계곡 트레킹은 시작된다.
계곡 탐사를 하면서 다시 한 번 그들을 보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계곡은 점점 더 깊어졌고 물에 몸을 온전히 담가야 하는 곳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법수치계곡에서 부연동으로 올라오는 한 무리의 등산객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우리의 안부를 물었다. 원래 계획했던 합수골 인근의 비박지는 언감생심. 가다가 어두워지면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으리라 마음을 먹었다. 계곡은 같은 듯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한 굽이 돌아서면 다른 굽이가 나오며 길은 그렇게 이어졌다. 시간이 늦은 터라 마음이 조금 급했다.
“소진아! 시간이 없어서 아빠가 좀 빨리 걸을 테니, 힘껏 따라 붙어라.” “네! 아빠!” 뒤돌아보니 바로 뒤로 소진이가 바짝 붙어있다. 녀석, 체력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가다가 길이 없으면 계곡에 몸을 던지며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이미 하늘은 뿌옇고 계곡에는 물안개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우리 앞에 오리 가족들이 정겹게 헤엄을 치며 길 안내를 한다. 그 모습이 정겨워 잠깐 카메라에 담아본다. 하지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마냥 즐기지는 못하고 이내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 갑자기 천둥번개와 함께 비가 세차게 쏟아진다. 주변을 둘러봐도 탈출구마저 없다. 일기예보상 아주 맑다고 해서 온 것인데 도대체 이 무슨 경우던가? 무엇보다 계곡폭우의 위험성을 알기에 탈출구가 나올 때까지 최대한 부지런히 걸었다. 소진이도 아빠가 당황하는 경우는 처음 봤는지 긴장한 표정이 역력하다. “소진아! 이렇게 탈출구가 없는 계곡에서 폭우를 만나면 정말 위험해. 빨리 탈출구부터 찾자!” 소진이는 반쯤 얼어붙은 표정으로 연신 고개만 끄덕인다. 그렇게 10여 분을 걸었으나 사방은 천혜 절벽이라 탈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경치도 아무 관심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앞에는 도저히 지나갈 수 없는 거대하고 시커먼 소(沼)까지 보인다. 마치 그 소는 우리를 집어 삼킬 것처럼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물이 얼마나 깊으면 아예 캄캄한 암흑일까? 하지만 나는 사실 거대한 깊은 소가 나와 오히려 안심했다. 이런 곳에는 필시 능선길이 있기 때문이다.주변을 다시 잘 살펴보니 희미하지만 산으로 가는 길이 어렴풋이 보였다. 나뭇가지에는 ‘강릉바우길’이라는 반가운 표시기가 떡 하니 달려 있었다. “휴! 살았다. 소진아!” “그래요?” “응! 이제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이 능선에만 있으면 괜찮으니 이 근처에 자리를 잡자.” “네! 좋아요!”
다행히 능선길을 내려갈 즈음의 계곡 입구에 약간 높은 둔덕이 있어 그곳에 잠자리를 만들기로 했다. 100여m 앞쪽에 한 무리의 등산객들도 있어 오히려 이런 날씨에는 안심이 됐다. 하지만 그때도 폭우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벼락과 동시에 천둥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는 바로 우리 위쪽에 강한 비구름끼리 부딪히며 한바탕 으르렁 싸움을 벌이고 있는 듯했다. 나는 저체온증에 대비해서 잽싸게 매트리스를 꺼내어 소진이와 덮고 소진이를 최대한 내 몸으로 감싸 안았다. 소진이가 사력을 다해 나를 꼭 껴안는다. 이런 느낌, 참 오랜만이다. 아니 처음인 것 같기도 하다. 이건 그냥 껴안는 것이 아니다. 한 존재의 생명을 한 존재에게 맡기는 그런 몸부림이다. 소진이가 갓 태어난 아기처럼 애처롭고 또 사랑스럽게 다가왔다. 나도 말없이 그녀를 꼭 껴안았다.
“소진아! 춥니?” “아니요. 아직은 괜찮아요.” “소진아, 저체온증이 제일 무서운 거니 조금이라도 추우면 바로 아빠한테 이야기해야 한다. 알았지?” 10여 분을 그렇게 껴안고 있었으나 비는 그치지 않고 세차게 폭우는 계속된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걱정은 없다. 바로 뒤쪽에 탈출구가 있으니 막말로 안전은 보장된 것이고, 또 오랜만에 딸하고 이렇게 꼭 껴안고 있는 이 느낌이 너무 좋다. 그런 생각이 사위어 갈 때 즈음 빗방울이 차츰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때다 싶어 소진이 주변으로 매트리스를 꽁꽁 싸주고 재빨리 쉘터를 설치했다. 자리를 정리하자마자 젖은 옷을 벗게 하고 일단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혔다. 아직 비는 간간이 내리고 있고 한바탕 생난리와 긴장을 한 터라 이내 둘 다 잠이 든다.
소진이가 깊은 소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또 엄마 생각하는 중?
한 30여 분 그렇게 잤을까? 쉘터를 열고 앞의 개울을 확인했다. 그 맑던 물이 순식간에 흙탕물로 변했고 수위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다. 계속 관찰하면서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저녁은 간단하게 나름의 건강식 라면으로 해결했다. 저녁은 잠을 자기 위한 최소한의 열량만 필요하기에 늘 한 개로 두 사람이 나눠 먹곤 한다. 뒷정리를 하고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 하늘은 그 사이 구름이 점점 더 걷히고 있었고 이내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물끄러미 뭔가 생각에 잠긴 소진이한테 말을 걸었다. “소진아! 무슨 생각하니?” “(잠깐 머뭇거리다) 엄마 생각이요.” “어제 엄마가 그렇게 너한테 화를 냈는데도 엄마가 좋으니?” “네. 제가 잘못한 거니까.” “소진아! 있을 때 잘 해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이제 엄마 볼 날도 6개월 밖에 없다.”
소진이가 아무 말도 없기에 쳐다보니 굵은 눈물 몇 방울이 볼에 떨어지고 있다. “소진아! 서로 떨어져 있을 때 인디언들이 만나는 방법 가르쳐 줄까?” “그런 게 있어요?” “그럼. 너가 대안학교 가기 전에 엄마, 아빠, 종형이와 약속을 미리 하는 거야. 예를 들면 밤 10시 즈음에는 하늘의 달을 바라보면서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말이야. 그러면 그 순간만큼은 달을 매개로 서로 대화도 할 수 있지. 그런 마음만 있으면 우리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건 떨어진 것이 아니야.” “아빠! 고마워요. 저 꼭 그렇게 해 볼래요.”
아침에 일어나니 계곡의 물이 다시 맑아져 있었다.
아침이면 늘 그렇듯이 새 소리에 잠을 깬다. 그리고 살짝 문을 열어 하늘을 확인하고 그 하늘을 보며 몇 십 분 그렇게 누워 있다. 이 여유가 좋다.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 앞의 계곡물이 다시 깨끗하게 우리를 반겼다. 우리는 잠깐 산책을 하고 아침을 준비한다. 오늘 아침은 색다르게 서양식으로 ‘오트밀 죽’을 준비했다. 일단 약간의 조미들만 가미하면 앞으로 아침의 주식으로 애용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다슬기가 너무 많아 다음에는 꼭 바늘을 가져와야겠다는 소진이.
이제 할 일은 딱 하나! 젖은 짐들을 말릴 동안 신나게 물놀이를 하는 거다. 아직 아침이라 물이 차갑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쯤이야’ 하며 함께 몸을 담근다. 수영도 하고 다슬기도 줍고, 물싸움도 인정사정없이 해 본다. 소진이는 이렇게 다슬기가 많은 계곡은 처음이라며 다음번에 여기 올 때는 꼭 바늘을 챙기겠다고 다짐한다.
더울 때는 이렇게 물속으로 걷는 게 계곡 트레킹의 맛!
계곡 트레킹 중에는 따로 길이 있는 것이 아니다. 걷다가 길이 없으면 물속으로 첨벙 들어가고 길이 있더라도 더우면 다시 계곡으로 입수하면 그만이다. 가끔씩은 아주 깊은 소와 사람이 도저히 다닐 수 없을법한 절벽을 만나게 되는데 잘 살펴보면 꼭 산으로 우회하는 길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곳에서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게 있다. 바로 ‘뱀’이다. 유독 이런 계곡 트레킹 코스에는 뱀들이 많다. 산에서 뱀이 내려와 몸을 말리기에 좋은 조건이기 때문일까?
계곡 트레킹 중간 바위를 조심해서 내려오고 있는 소진이.
우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바위 중간 중간을 잘 살피면서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황색과 진한 갈색의 독사 두 마리가 짝짓기를 하고 있었다. 보통은 사람이 오면 피하는데 짝짓기 중이라 그런지 스틱을 세게 부딪쳐 큰 소리를 내도 꿈쩍하지 않는다. 자기를 닮은 새끼를 만들기 위해 이들도 목숨까지 내놓는다. 소진이와 나는 우회하면서도 혹시나 몰라 그들을 예의 주시한다.
계곡 슬라이딩 코스에서 계류를 타며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소진이.
계곡 트레킹의 백미는 가끔씩 만나게 되는 ‘천연 슬라이딩 코스’다. 우리의 기대대로 법수치계곡에도 이런 코스가 몇 군데 있었다. 일단 이런 곳을 만나면 무조건 배낭을 내려놓고 적어도 3~4번은 이 코스를 짜릿하게 즐긴다. 소진이가 계곡 트레킹을 제일 좋아하는 이유가 이런 슬라이딩 코스 때문인데 고백하자면 나도 마찬가지다. 반질한 계류에서 물살의 도움으로 확 내려갈 때의 짜릿함을 싫어할 이가 있을까?
날씨가 덥다 보니 중간 중간 수시로 배낭을 내려놓고 수영을 한다. 하류로 내려올수록 깊은 용소가 자주 나타나고 계곡으로 가는 길은 점점 더 험해졌다. 어떻게든 물가에 붙어 있으려고 절벽들을 몇 번 타보지만 도저히 길이 없거나, 있더라도 무척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우리는 다시 산쪽의 능선길을 찾아서 걷기 시작한다. 확실히 산길이 편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아마도 계곡으로 걸었으면 족히 1시간은 넘게 걸릴 길인데 산으로 가니 20분이 걸리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어제 차를 세워 놓았던 법수치계곡의 하류 종점에 도착했다.
이번 산행을 갈무리하면서 가장 강렬하게 떠오른 것이 있다면 폭우 속에서 나를 꼭 껴안던 딸아이의 모습과 그 몸짓일 것이다. 아마 소진이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그 느낌을 함께 상기할 것 같다. 무서움에 떨던 한 존재, 그래서 살기 위해 온전히 자기를 내게 맡기던 한 존재의 몸부림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결국 인생이라는 것도 시련과 고난이라는 것이 있기에 추억거리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위험한 순간에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어 나 또한 고맙고 감격스러웠다. 딸과의 백패킹은 이렇게 계속 깊어진다.
남대천 본류의 시초
트레킹 중간에 지저귀는 산새소리에 귀 기울이는 소진이.
계곡물이 마치 불가의 법수처럼 이곳에서 뿜어져 나와 남대천 본류의 시초가 됐다고 해 ‘법수치’라는 이름이 붙었다. 주로 화전민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었으나 근래 들어 펜션들이 들어서고 있다. 양양의 하조대에서 남대천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물고기가 많아 밭을 이룬다는 ‘어성전’을 지나 법수치리로 들어가게 된다. 법수치리 계곡 트레킹을 위해서는 부연동의 부연약수터에서 시작해 법수치리쪽으로 내려오는 것이 물길의 순방향이라 편하다.
대중교통은 아주 불편하다. 동서울종합버스터미널이나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하루 20여 차례 있는 고속버스를 타고 강릉고속버스터미널까지 2시간 30분쯤 걸려 도착한다. 하지만 강릉시에서 부연마을까지 가는 대중교통편이 없기에 자가용이 없을 경우 이 구간은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승용차의 경우 영동고속도로 진부 나들목에서 6번 국도를 타고 월정사 방향으로 직진하다가 병안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진고개로 올라간다. 진고개에서 부연동 휴양지 이정표를 따라 비포장도로를 6km 달리면 부연마을이다.
월간사람과산/ 글•사진 안광호(자유산행가)
첫댓글 딸은 커녕..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