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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使徒)들의 편지
그리스도에 관한 초기의 신화 만들기는, 2세기로 넘어올 무렵에 그 진로가 변한다. 새로운 개념상의 몇 가지 문제가, 예수의 이름으로, 다종다양한 사상이나 관습에 대하여 생각하는, 여러 그리스도의 그룹 때문에 사회에 떠오르게 된 것이다.
경건을 앞에 내세우는 분파주의자들, 떠돌이 마술사들, 그리고 그럴듯한 말솜씨로 듣는 사람들을 현혹하는 자들, 우주에 관해 이것저것 추구하는 철학자들, 구노시스의 깊은 뜻을 전하는 자들은, 모두 자기들의 프로그램의 근거나 진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의 이름을 빌어 호소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반듯이 이런 종교적인 실험의 혼란을, 사회를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삶에 생기를 주는 자극적인 상쾌한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현대의 젊은이들이 자기의 삶의 방향을 잡기 위해, 신비주의적인 우주나 심령의 세계에 젖어보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 타입의 그리스도 회중會衆에게는, 그 실험이 사회에 확대되어 가자, 점차로 위협이 되기도 했다.
그들은 예수 운동과 그리스도 숭배를 서로 상대를 이해하려던, 온건주의자라고 이를만한 회중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 신화를 받아드리고 있었지만, [이야기 복음서]도 환영하고 있던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그리스도 회중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자기들을 이스라엘의 유산 상속인으로 상상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장래의 어느 때가 되면, 묵시록적인 심판이 있을 것으로 상상하고, 그때가 올 때까지 서로 도우며 규율있는 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커다란 로마세계 속에 마이노리티(少數人)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자기들이 대표하는 왕국에 대하여 만인구제적인 희망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타입의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참다운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는 자기들의 주장이, 그 의미를 잃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복음이 정확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 자기들은 예수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제자弟子로부터, 그것을 직접 [이어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예수의 제자들에 대한 관심의 방향전환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것은 희랍 철학의 학파 중에서 착실히 뿌리를 내린 그 당시의 모델을 따라, 그 학파의 가르침은 [창시자=교사]에 근원하는 것으로, 그것은 [지도자적인 제자=교사]의 계보를 통하여 전해지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제자=교사]들은 [계승자]로 인정하고, 그의 가르침은 그 학파의 정통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디오게네스](희랍철학 犬儒派의 대표적 인물)는 이런 모델을 사용하여, 희랍 철학의 전 역사를, 전설적인 [7현인](기원전 7-6세기 고대 희랍에 실재했던 훌륭한 7인의 통치자)의 시대로부터 발자취를 더듬어, 그의 시대(서기 200년경)에 성盛했던 희랍 사상의 여러 파벌이 얼마나 오래된 전통을 지니고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모델은, 그리스도교도에게는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철학의 한 일파의 논리가 항간에 퍼지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대단히 빠른 속도로 예수 운동과 그리스도 운동이,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예수파에서는 [후계자]의 기록도 남기지 않고, 70년이 경과하고 있었다. 거리와 거리를 돌면서 그리스도의 회중을 형성하던 사람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1세대 그리스도교도의 대부분이, 교사나 설교자 그리고 회중을 맡은 각 지역의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모두 역사의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뿐이었다.
각 지역의 회중은, 그 고장의 [장로]나 파트론 들의 지원과 지도 하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예수 최초의 제자들에 대한 집단적인 기억도, 실은 이미 애매한 것이 되어 있었고, 그들에 대한 것을 누가 질문해도 뚜렷하게 대답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초기의 예수 운동은, 예수 자신의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해 훈련하고 있던 제자들의 기록으로서, 아무것도 남겨 놓은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이미 보아 온 것처럼 그런 프로그램 자체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고, 따라서 제자들을 지도자로서 훈련을 시킨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 곤란했던 것은, 예수 운동 최초기의, 새로운 가르침은, 어느 것이던 예수를 계승한 제자들이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르침을, 직접 예수 자신에게 돌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바울의 개종자들도, 자기들의 전도와 설교를 보증하여 줄 [예수의 직제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예수 그룹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예를 들면, 그 저자가 [요한]이라고 이르고 있는 [복음서]를 태어나게 한 사람들은? 그리고 자기들의 우주적인 그리스도 체험이 확실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굳이 제자의 이름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는 듯이, 신화나 의식의 복잡한 체계를 만들고 있던 그룹, 그들에게는 신화적인 예수의 소리만이 그들의 귀속에 맴돌고 있었으며, 어떤 저자로 특정하지 않는 집합적인 문서文書 만들기에, 능란하게 잘 어울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Q의 문서를 포함해, [제자들]이 소재로 나오지 않는 문서가 갖가지 예수 운동 중에 나돌게 되었던 것일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예수의 가르침이 예수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弟子를 거쳐 전해졌다고 하는 해석을 뒷받침하여 줄 증거는 어디에도 거의 없다는 것이다.
[마가]가 70년대에 예수의 생애를 묘사함에 있어, [제자들을 거느린 교사]를 모델로 사용하려고 생각했을 때, 그가 알고 있던 제자들은, 그의 복음을 전달할만한 또렷한 사람들이 되질 못했다.
그는 예수의 제자로서 이름이 알려져 있던 서로 다른 두 가지를 모두 알고 있었다. 하나는 바울이 [예루살렘의 기둥들]이라고 한 베드로와 야곱과 요한의 삼인조의 세트로(갈라디아 2, 9), 이 사람들은 유대전쟁 전에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마가]는 그들을 예수의 대역으로 묘사하려는 것 같았지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마가는 그들을 대단히 아둔하게 보이도록 묘사하고 있었다. 만약 진짜 베드로나 그의 동료들이 [마가복음서]를 읽어 보았다면, [마가]가 그리는 [신의 왕국]의 해석이나, 그가 그리는 새로운 예수의 생애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지도 모르겠다.
마가는 [12 제자]라고 불리고 있던 또 하나의 세트를 알고 있었고, 실제로 그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었다(마가 3, 13-19). 그는 이제 2개의 제자이름 리스트, 하나는 [기둥들]의 이름 리스트, 또 하나는 12제자 이름의 리스트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곳에 이름이 중복되고 있는 것은 같은 인물이 아니었다. 12제자의 리스트의 야곱과 예루살렘 3인의 기둥의 한사람인 야곱도 같은 인물은 아니었다.
예루살렘의 야곱은 예수의 형제였으며(갈라디아 1, 19), 마가가 언급하는 제자弟子도 [세베대]의 자식이 아니고, 요한의 형제도 아니었다(마가 3, 17). 그렇다면 마가는 어디서 12제자의 관념을 얻었던 것일까?
[열두 제자]의 관념은, 바울이 활동하고 있던 50년대에 이미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왜냐 하면 그는, 예수가 죽은 후에 나타났다고 그가 말한 사람들의 리스트에 [12제자]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고린도 전서 15, 5).
Q저작 후의 단계에도, 신의 왕국에서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12부족을 심판하고 있는] 제자들에 대한 어록이 들어가 있었다(Q=누가 22, 28-30). 이러한 언급은 [12제자]의 관념이 이스라엘의 개념槪念을 주장하는 목적을 가지고 신화적인 마무리를 하는 과정에서 전개되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었다.
개개인의 이름은 들고 있지 않은 것은, 그 개념자체가 픽션이었으며, 하나하나 이름을 들지 않더라도 문제없이 기능하였기 때문이다.
[마가]가 70년대에 그 복음서를 저술했을 때, 우리는 처음으로 12제자들의 이름을 밝힌 리스트를 보게 되는 것은, 다분히 그에게 알려져 있던 예수 그룹의 초기의 상황과 결부된 그 자신이 만든[짧은 이름의 리스트]인 것이다.
그리하여 [마태]가 80년대 후반에, 그의 복음서를 저술할 때, 처음으로 베드로를 예수가 자기의 일을 이어받아 수행하기 위한 제자로 지명하여, 12제자 중 제일 걸출한 지도자로 등장시킨다. 그러한 이유로 1세기가 끝나갈 무렵 자기들의 복음의 확실성에 대하여, 특히 어떻게 하여야 복음의 가르침이 예수로부터 자기들에게 이어지게 되었는가에 대한 뚜렷한 근거를 설명하기 어려웠던 사람들에게 있어선, 역사적인 기록을 자기들의 상황에 알맞게 적당히 짜 맞추어야 할 절대적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의 어떤 문서에도, 자신들과 복음서 중에 묘사된 예수까지 소급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면, 2세기의 그리스교도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자기들에게 이어준 제자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에 관한 자기들의 기억을 되살려, 자기들에게 준 그(예수)의 가르침을 기록하였음이 틀림없는 것이었다고 상상하는 일은, 특별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희랍의 [교사-학파]라는 모델에서 이미 알고 있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기술한 것처럼, 이야기를 과거의 저명한 인물에게 돌리는 것은, 이야기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이었다.
1세기의 예수의 추종자들은 이러한 모델에 따라서 예수에 관한 자기들의 [기억]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심화시켰다.
2세기의 신화神話 만들기는 그 선례를 따랐다. 그것은 예수와 그 권위로부터 사도로서, 또는 전도사로서 그의 제자들에게 관심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
이미 복음서는 제자들이 예수에 의하여 그 임무를 위탁받았다고 상상함으로서, 그에 대한 첫발을 내딛고 있었다. [제자들]이라던가 [12제자]라는 용어를, 바꾸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사도들]이란 용어였다.
[사도들]은 그들을 파견한 사람을 대표하기 위한 임무를 위탁받은 사람들이었다. 바울은 이미 자기 자신을 지칭하여 이런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바울의 경우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를 보낸 것은 예수가 아니라 직접 신(神)이었다.
이것은 자기가 [제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도傳道하기 위해 바울 나름의 권위를 주장하기위한 논거였다.
그는 [사도]라는 용어를 베드로와 야곱, 요한을 언급할 때도 사용하여, 자기와 그들이 같은 레벨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려고 했다. 이러한 주장은 바울에게 있어 현명한 전술이었다(Mack 1988, 113).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하여 둘 것은, 그가 [예루살렘의 기둥들]을, 바울이 제자弟子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인 것이다. 바울의 표현을 빌린다면, 그들은 [자기보다 앞서 사도였던 사람들](갈라디아 1, 17)이었다.
50년대의 이러한 작은 증거단편은, 우리에게 사도의 관념이 선교의 개념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는 것과, 제자 관념과 사도 관념의 융합이, 그 후에 또 다른 이유로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사도의 관념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지도자를 칭하는 용어는 다름 아닌 바울자신에게 공헌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사도]라는 용어에 담긴 뜻은, 부활한 주를 [보았던]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어, 대단히 특수한 권위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들]과 [사도들], 즉 [예수와 같이 있던 사람들]과 [부활한 주를 본 사람들]의 역할을 혼동시키는 것으로-이것은 1세기 후반에 일어난 이미지의 혼동이었다. 그리하여 바울도, 복음의 확실한 보증하기 위한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들 속에 끼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전승에 뿌리를 둔 제자들, 즉 부활한 주를 보았다고 하지 않고, 단지 [그와 같이]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그들이 사도로 상상되기 위해선, [이야기 복음서]에 그들이 사도로서 임무를 위탁받았다는 이야기와 그들도 부활한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하는 기사를 포함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가]는 갈릴리에서 활동하는 예수에게 12제자를 덧붙이는 것으로, 예수에 의하여 임무를 위탁받은 제자들의 관념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그의 복음서엔 제자들의 이야기를 생각보다 많은 것을 포함시키지 않았고, 또 마가가 제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뚜렷하게 표현한 것처럼(마가 6, 30-44. *8, 14-21), 복음의 보증인으로서 제자의 지위를 높인 것도 아니었다.
[마태]의 [제자들의 파견]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가]보다는 제자들을 좋게 평하는 편으로, 이야기의 끝 무렵에, 그들은 부활한 예수를 [보고] [꿇어 업들이었다](마태 28, 17)고 하였고, 그리고 [모든 백성에게 세례를 베풀고 예수의 제자로 하라]는 명령을 넣었다.
이것은 사도로서 제자의 권위를 확립시키는 것으로, [복음]을 가지고, 악령을 몰아내라고 하는 [마가]가 이야기하는 갈릴리에서의 그의 파견 이야기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었다.
하지만 [누가]의 해석은 [마태]보다도 한층 뛰어난 것이었다. 누가는 예수를 열한사람(유다를 제외한)의 제자들에게 현현顯現시키고, 그들에게 강한 힘을 주기 위해 예수가 성령을 보낼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도록 그들에게 지시하고, 배반하고 떠나간 [유다]를 대신할 12번째의 사도를 선출하도록 하며, 오순절의 축제를, 전 세계(지중해)가 지켜보는 가운데 치르게 하여, 성령으로 넘쳐나는 제자들을 세계로 파견하여, 예수의 이야기가, 다름 아닌 복음의 진실임을 선교하라는 것이었다.
다른 예수 추종자들이라면, 가령 [토마스의 복음서]에서 토마스 한사람에게 내려주었다는 [비밀의 가르침]이나, [요한복음서]의 개인적인 가르침, 그리고 구노시스 문서에 흔히 보이는, 특정의 제자에게만 나타나는 부활 후, 예수의 현현 등, 만약 전승이 비밀리에 전해지는 것이라면, 전도사 타입의 사도가 필요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전승을 어느 특정의 제자와 접속시키는 이러한 방법은 12제자가 권위 있는 전승의 보증인이라고 하는 관념이 기능하고 있었다는 표시이며, 이러한 흐름이 결국 [사도의 시대]라는 일반적인 관념으로 전개하게 된 것이다.
2세기로 들어설 때쯤, 사도들의 이름으로 쓰인 문서가 많아진 배후에는, 예수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제자들이 예수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정리하여, 다음 세대의 지도자들에게 전해야 할 텍스트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제자弟子나 사도의 이름으로 텍스트를 쓰는 것이 표준적인 관습이 되어 갔다.
이런 이유로 그때까지 쓰이고 있던 작자불명의 문서들, 예를 들면, 신약성서의 복음서도 이제는, [마태]나 [요한]의 경우처럼 제자가 쓴 것으로 하던가, [마가]처럼 제자의 동료가 저작한 것으로 되던가, [누가]처럼 바울의 협력자의 한 사람이 저술한 것으로 된 것이다.
신약의 외전문서로서 전통적으로 알려져 있는, 초기 그리스도교 문서의 많은 집성(Elliot 1993)이나, 구노시스 문서文書로 현재 알려져 있는 여러 문서(Layton 1987; Robinson 1988)를 얼핏 보면, 많은 텍스트가 제자에 의해 쓰인 것으로 되어있고, 제자들의 업적이나 선교, 그리고 설교에 관한 많은 이야기도 그렇게 알려져 있다.
그러한 문서의 작자로서 선호된 사람들 중엔 베드로와 야곱, 요한, 바울 등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각각 그들이 썼다고 하는 편지나, 행전, 그리고 복음서라든가 계시록(묵시록)이 있었다.
그 외의 다른 문서도, 그들의 저작으로 된 것이 많았다. 예를 들면 [베드로의 설교]나 [바울과 세네카가 서로 주고받은 편지] 등이었다.
[마태]도 그의 저작으로 되어 있는 복음서와 보다 빠른 시기의 [히브리인에 의한 복음서]에 관한 전승이 있었다.
토마스(도마)에게는 [토마스의 복음서]나, [토마스의 행전], [토마스의 묵시록], [토마스의 유아복음서], [논쟁자 토마스의 서] 등이 있다.
[빌립보에 의한 복음서]나, [안드레 행전], [파르디레미의 질의] 등과 많은 [사도바울의 기도]와 같은 문서가 존재하였고, 그 외에도 하나의 단위문서로 12사도의 이름을 빌어 문서가 저술되기도 했다.
예를 들면, [12사도의 가르침] [사도들의 편지], [사도헌장](그리스도의 신앙과 예배용 지침편람) 등이 있었다.
이런 문서군의 대부분은 2세기나 3세기, 그리고 4세기에 쓰인 것이지만, 그것은 2세기로 넘어올 무렵에, 일기 시작한 그리스도에 대한 초기의 신화 만들기의 전환轉이 성공했다는 것을 뒷받침하여 주는 것이었다.
그 전환은 [사도시대]의 관념, 즉 그리스도교회가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의 첫 장을, 그 제도와 직무를 위한 확실한 기반으로 상상하는 관념을 태어나게 한 것이었다.
그것은 제자들을 영웅으로 변화시켜, 이후의 그리스도교 역사를, [신앙의 모범 시리즈]의 모델을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권위를 텍스트에서 구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이러한 문서군이나, 이런 문서들이 사도의 이름을 빌어 전개되는 과정을 자세하게 보게 될 것이다. 이번 장에선 신약성서 속에 들어간 위명의 편지만 논의할 것이다.
그러한 편지 중엔 [디모데]나 [디도]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와, 베드로나 유다의 [합동서간]이라고 불리는 것, 야곱의 편지, 그리고 요한의 3개의 편지인 것이다.
연구학자들은 이러한 서간의 저작연대를 90년부터 140년 사이에 쓰인 것으로 추정하고, 그것을 저작할 때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선, 2세기 초의 분위기와 활동상태를 조사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다. 이런 편지에서 당시의 몇 가지 상황의 관찰이 가능한 내용이 있어 이것을 이제부터 검토하여 보려고 한다.
이 편지는 이미 논했던 바울의 편지와 함께, 신약성서의 많은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성서의 텍스트 집성 중엔 4개의 복음서, 하나의 사도행전, 하나의 묵시록(계시록) 외에, 21개나 되는 많은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어찌하여 그렇게 많은 편지가 들어가게 되었으며, 왜 제자나 사도들의 편지만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에 대하여 대답하려면, 각각의 텍스트가 저작된 전승의 복잡한 역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2세기부터 4세기까지 교회의 지도자들의 관심의 변화가 설명되어야 하고, 3세기의 어느 시기에, 이들의 편지는 뒤에서(본 저서의 10장) 논하게 될 갖가지 이유로, 그리스도교도가 대중 앞에서 큰소리로 읽어줄 수 있는 텍스트의 리스트에 그 편지들이 포함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최종적으로 오늘날 신약성서로 알려진 집성 중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많은 수의 편지가 신약성서에 수록하게된 것이 새삼 놀라운 것이다.
2세기 초에 발달하기 시작한 회중의 네트워크로부터 교회가 태어났을 때, 그러한 편지를 저술하고 보존하던 사람들에게는 그 편지는 대단히 중요한 문서였다.
이미 앞에서 서술했던 온건주의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전통적인 회중의 지도자들을 매료시키고 끌어드린 무엇인가가 편지에, 그리고 그 인물들에게도 있었던 것 같다.
그 당시, 어떤 한 지역의 그리스도 회중의 지도자들은, [장로] 혹은 [감독]이라고 불리기 시작했고, 이들은 [가족]이라던가 [같은 무리(同僚)]로서 개념화된 회중들의 안정과 질서, 그리고 일반적인 안녕의 책임을 도맡아 돌보아 주는 담당자 역할이기도 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도가 로마제국의 사회제도 속에서 스스로 설자리를 마련하기 시작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그들의 관심은, [가족(會衆)]들의 상호 질서를 지키며, 사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보호자가 없는 과부를 돌보며, 복음의 전승을 전하고, 다른 그리스도 회중과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의 활약이 괄목할 전개를 하였던 것이다.
보다 큰 도시의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관할지역내 적은 도시의 회중을 감독하는 조직이 자연스럽게 태어나게 된 것이다.
편지는 이러한 경우에 어떤 목적을 수행하는데 있어, 최량의 커뮤니케이션의 형식이었다.
필요하다면, 그것은 회중을 설득할 수도 있는 것이었고,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 그리고 교육적인 자료를 만들 수도 있었으며, 편지를 받은 사람이, 보낸 사람을 대신해 회중에게 낭독하며, 또 필사하여 회중의 네트워크를 매체로 널리 전파시킬 수도 있는 편리한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 곁에 [에베소]나, [마그네시아], [드라레스] [로마] [빌라델비아] 그리고 [스미르나]의 그리스도 회중에게 보내는 기원100년경에 쓰인, [안티오키아]의 감독 [이그나디오스]의 편지가 여섯 개, [스미르나]의 감독 [포류가르포스]에게 보낸 편지 한 개가 남겨져있다.
[안티오키아]의 감독 [이그나디오스]의 편지는, 자기 자신의 회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신앙과 실천에 관한 가르침을 주는 권위의식을 멋지게 표시하고 있었다.
그의 커다란 관심은 다른 교회의 회중들이 자기의 감독이라는 지위와, 복음에 확신을 갖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책임을 지고 있는 감독자에 걸맞은 경의敬意를, 회중들이 표하고 순종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그나디오스의 이러한 편지와 신약성서 중의 다른 편지와의 주된 차이는, 저자가 감독이 아니라, 사도들에 의하여 쓰인 것으로 되 있다는 것이다.
사도들의 편지라는 픽션을 뒷받침하기 위해, 예수로부터 감독까지 연면히 계속되어 있다고 상상되는 전승의 사슬로 줄줄이 엮어, 그 편지에 사도의 권위를 불어 넣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저자성의 픽션을 위한 신약성서의 편지, 즉 이그나디오스의 편지가, 사도의 개인적인 글 솜씨 스타일을 빼어 닮은 점에서, 진짜처럼 보이게 한 것이었다.
[베드로]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고 있는 감독을 상상하여보기 바란다.
아무튼 [베드로]가 이르기를, 그리스도교도는 윗사람들의 가르침과 권위에 순종하고, 감독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회람을 목적으로 한, 그 설득 내용으로 보아, 감독이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 편지가 뚜렷한 픽션이라는 추정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도는 이러한 편지를 사도가 실제로 쓴 진짜 편지로 간주하는데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지만,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사도 픽션]이 그 당시 그리스도교도에게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끼쳤는가를 시사하는 것이었다.
왜 편지가 바울이나 베드로, 야곱, 요한, 유다들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었는가와 편지 내용은 별도의 문제인 것이다.
특히 바울이 편지의 픽션 저자著者로 선호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 하면 그의 유산(바울의 복음)은 이미 회중의 편지나, 디모데, 디도와 같은 협력자들에 대한 언급, 각 지역 회중의 지도자에 대한 가르침, 그리고 보다 커다란 그리스도교회의 네트워크 속에 통합된 전통 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울 편지의 선례는, 중요한 감독수단으로서, 서간을 사용하는 모범적인 모델이 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모델의 전개는 소 아세아와, 희랍, 그리고 로마의 교회에 있어서는 더욱 뚜렷하였다.
베드로나, 야곱, 요한의 경우, 그 상황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들이 선정된 것은, 주로 그 이름이 바울의 [갈라디아 신도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기 때문이고, 또 공관복음서에 있는 그들의 특별한 역할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을 둘러싸고 전해지는 각각의 이야기가, 여러 지역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복음서의 전승 이외에서 그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기록은, 그로부터 훨씬 후대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그들에 대하여 본질적인 정보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음서의 전승 자체에 근거를 둔, 전설로 보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요한의 이름이 정확히 언제, 요한의 복음서나 편지와 결부하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가 않았다. 요한의 저작著作으로 된 복음서나 편지 중, 어디에도 [제자 요한]이라고 언급된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요한]에 의해 쓰인 것으로 간주된 최초의 증거는, 180년경에 쓰인 이레나에오스(기원 150년경의 그리스도교 초기 신학자)의 구노시스에 대한 [이단논박]이었다.
뒤에 또 설명하겠지만, 요한이 썼다는 편지는 실제론, 그 복음서의 전승 상의 필자가, [온건주의의 복음전승]에 대하여 큰 관심을 표명하고 있던,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장로에 의하여 쓰인 것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것을 요한의 저술로 한 이유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 복음서가 사도使徒에 의해 쓰였다는 권위를 주장하기 위한 것으로, 특히 요한은, 예수의 전설적인 세 사람의 가까운 동료의 한사람으로서, 이러한 문서文書에 커다란 권위權威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야곱의 편지]에 대한 것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의한 것이지만, 단지 이 경우는, 편지의 내용과 예수의 형제 야곱에 대한 정보와의 불일치가, 저자성의 픽션을 시사했다는 점이, 요한과는 다른 것이었다.
한편, 유다기 쓴 것으로 된 어떤 편지는, 근거를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후대의 어느 저작자가 자기의 묵시록적인 문서에, 사도의 권위를 덧붙이고 싶어도, 이미 다 사용해버렸기 때문에, 그때는 그럴싸한 이름을 선택할 수 없어, 그가 예수의 형제라는 유다의 자격을 포함시켰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 베드로에 대한 것으로, [누가]가 [사도행전]을 저술할 즈음엔, 베드로는 이미 신화 만들기를 위한 중요한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 있었고, 더구나 바울의 [갈라디아 신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드로의 이미지를 재창출하여, 공관복음서의 베드로가 그리스도 신화를 상징하는 존재로 상상하게 함으로서, 온건주의적인 관심에, 그 이상 없을 만큼 견고한 기반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예루살렘의 예수 회중의 지도자가 그 복음서(베드로가 그리스도 신화의 상징이 된)를 로마로 가져갔다면-이것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게 된 것이며,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일까?
그 당시 그곳 로마에는 예수 운동도 없었고, 그의 권위만을 한결같이 주장하는 그리스도 회중會衆의 그룹도 없을 때였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를 곁들인 신화 만들기가 용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너무 늦은 단계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이미 널리 알려진 그리스도 신화의 범주를 넘어서는, 새로운 베드로 신화에 독자의 윤곽을 만들 수가 없었고, 단지 베드로가 예수의 제자라는 특권만 가지고, 로마의 초대 사교가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인물의 성격이 다소 약하고 불안정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러한 사정으로 새로 태어나게 되는 문서, 즉 [베드로 복음서]나 [베드로의 설교] [베드로 행전] 그리고 [베드로의 묵시록] 등은, 서로 연관되어 혼합되지 않는 것으로, 그로부터 후대에 만든, 지역적(로마)인 전승의 특이한 해석으로 넘쳐나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 신약성서 중에, 베드로가 쓴 것으로 된 편지는, 온건주의의 전통에 착실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 바울이 알고 있던 베드로의 성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로마교회를 위해, 초대 사교로서 그의 권위를 확립시키기 위한 편지였다.
그 후, 로마교회는 그리스도교도가 로마인과 그들의 제국에 자리를 굳히게 되어 가자, 베드로는 스타플레이어가 된다.
마침내 로마제국의 막강한 세력을 등에 업은, 로마교회는 모든 복음이 계류하는 곳임을 세상에 확인시키기 위해, [바울과 베드로] 두 사람은 필요 불가결한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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