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임금은 자기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을까? 군왕의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정조는 심환지(沈煥之)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호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이라고 했다. '수많은 냇물을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존재'로 스스로를 규정한 것이다. 정조는 군왕인 자기 자신을 밝은 달로 생각하였음이 드러난다.
명월(明月)은 군왕의 상징이었다. '만천명월'과 비슷한 맥락의 표현이 월인천강(月印千江)이다. '달의 빛이 일천 강에 비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달은 부처를 상징하기도 하고, 임금을 상징하기도 한다. 달은 하나이지만 만천(萬川)과 천강(千江)에 두루 비친다. 달은 밤에 보면 물에 비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한자문화권에서는 해보다 달을 주목하였다. 태양은 달보다 훨씬 밝지만 대낮에 뜨기 때문에 물에 비치지는 않는다. 태양과 달은 이 점에서 그 특징이 다르다. 아무리 강물과 냇물이 많더라도 보름달이 뜨면 그 그림자는 그 강물과 냇물 모두에 각각 비친다.
달이 지닌 이 동시성의 특성이 고대의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것 같다. 먼저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사상이다. 화엄(華嚴) 사상의 핵심이 이것이다. 하나는 곧 여럿일 수 있고, 여럿은 곧 하나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와 여럿이 본질적으로는 같다는 주장이다. 일(一)과 다(多)가 이렇게 서로 연결되고 있다는 이치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달과 천만강천(千萬江川)의 관계만큼 좋은 비유는 없다. 화엄에서 이야기하는 '일즉다 다즉일'의 사상은 고대의 중앙집권적인 왕권을 뒷받침하는 원리적 근거로 동원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군왕과 백성의 관계가 바로 이러하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한발 더 들어가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다즉일(多卽一)'에 있다. 만천과 천강에 비치는 달도 그 근원은 하늘에 떠 있는 달이다. 이 달은 결국 임금인 것이다. 임금이 먼저 있어야만 일천 강에 달도 뜰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하늘의 달은 본체(本體)이고, 강물에 비친 달은 현상(現象)인 것이다. 정조가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이라고 규정한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런 사상적 배경이 있다.
* 조용헌 교수
용주사는
융건릉을 왼쪽에 두고 빠져나오면 불과 1.7㎞ 거리에 숲으로 둘러싸인 용주사가 있다. 행정구역상으론 태안읍 송산리(현: 송산동)지만 융건릉을 모신 화산 뒤쪽인 북쪽 기슭이다. 이곳엔 본디 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염거화상이 창건한 갈양사(葛陽寺)가 있었다. 고려 광종 21년(970)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수륙재를 개설하는 등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호란(胡亂)으로 소실된 채 숲속에 묻혀 있었다. 조선의 정조가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크게 다시 짓고(1790) 원찰로 삼으니 용주사의 구석구석에 효심이 어려 있다.
대웅보전팔작지붕 다포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왕명으로 지은 건물답게 튼튼하고 장중한 느낌을 준다.
용주사가 사도세자의 원찰이 되기까지는 당대의 고승 보경당(寶鏡堂)의 숨은 의지가 있었다. 보경스님은 융릉의 이장지를 찾아다니는 정조를 만나기 위해 가까운 대황리에 머물며 『부모은중경』을 설하고, 이 너머에 능지(陵地)가 있다고 진언했던 것이다. 정조는 『부모은중경』 설법에 깊이 감동을 받았고, 보경스님은 용주사 중창의 도총섭(都總攝)을 맡아 4년 만에 불사를 완성했다. 전국에서 들어온 시주가 8만 냥이 넘었으며, 145칸을 갖춘 대찰의 면모였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니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龍珠寺)라 했다고 전한다.
* Naver 지식백과
첫댓글 역사저널에서 한 페널이 정조대왕을 "일모도원日暮途遠, 날은 저무는데 갈길은 멀다"라는 사자성어로 잘 표현하였습니다. 서얼도 관료가 될 수가 있고, 공노비를 폐지하고, 요즈음 말로 재벌의 독과점을 금지하고 자영업을 육성하고, 규장각 등 학문연구기관을 육성하고...이루말할 수없는 업적을 이룬 불교를 사랑했던 호불군주정조대왕이 그리운 시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