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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읍의 건립 建都
지리에 관한 학설은 상고시대上古時代1)의 경전에는 없고, 진대晉代 이후로 술사術士들
이 창시한 것이다.2) 후세의 유가儒家들은 상고시대에 지리설이 있었는지 여부를 두고 논
쟁을 벌였는데, 내 생각에 상세上世 때부터 성인들은 지리를 깊이 살피지 않은 적이 없었
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뿐이다. 이것은 공자孔子가 천天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 까닭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3)
옛날 성왕들이 이룬 일들 중 가장 큰 공적은 도읍을 건립하고 나라를 세운 일이다. 『서경書
經』 「우공禹貢」에 의하면 기주冀州는 이 세상에서 형세가 가장 뛰어난 곳이었다.4) 따라서
요堯임금은 평양平陽을, 순舜임금은 포판蒲阪을, 우禹임금은 안읍安邑을 각각 자신의 도
읍으로 삼았는데,5) 이 세 곳은 서로 200리 정도 떨어져 있으며 모두 기冀 땅에 속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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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고시대上古時代: 태고太古 상세上世 상대上代라고도 하며, 역사적으로 볼 때는 문헌文獻이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옛날로서
선사시대先史時代 다음의 고대를 말한다. 동양사에서는 대개 BC 221년의 선진시대先秦時代까지, 한국사에서는 단군시대로
부터 삼한시대三韓時代까지를 말한다.
2) 진대晉代 … 것이다.: 대개 고전적인 풍수가로는 장경葬經을 지었다고 전하는 진나라 곽박郭璞과 청오경靑烏經을 저술한 한대
漢代 청오 선생을 꼽는다. 장서에서 풍수 이론이 정리된 이후, 풍수는 한 대에 실제적으로 운용되기 시작하였다.(이화, 「『장서葬
書』: 그 맥락과 의미」, 『종교와 문화』10,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2004.)
3) 이것은 … 않다.: 이 말의 뜻은 공자가 하늘을 몰라서가 아니라, 말로 표현하기에 너무 깊은 뜻이 있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공야公冶」)
4) 『서경書經』… 곳이었다: 치수治水의 명을 받은 우禹는 먼저 제도帝都가 있는 기주冀州에서 시작하였다. 호구산壺口山에서부터
양산梁山과 기산岐山을 다스리자 태원太原 지방이 구제되고, 악양岳陽 지방까지 이르게 되었다. 담회覃懷 지방에 이르러 그간
의 공적이 이루어졌고, 다시 형장衡漳 지방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지방의 토질은 희고 부드러웠으며, 그 공부貢賦는 상의 상上
이었으나, 간혹 상의 중中도 섞여 있었고, 토지의 등급은 중의 중이었다. 또한 항수恒水와 위수衛水가 다스려지자 대륙大陸의
못이 경작할 수 있는 토지로 변하였으며, 도이島夷들이 가죽옷을 입고 와서 공물을 바쳤다. 이에 그들은 바른쪽으로 갈석산碣石
山을 끼고 황하로 들어가 입공入貢하게 되었다.(『서경書經』,「하서夏書 우공禹貢」)
5) 요堯는 … 삼았는데: 요堯는 평양平陽(현재의 임분시臨汾市), 순舜은 포판蒲板(현재의 운성시의 영제시), 우禹는 안읍安邑(지
금의 운성시 하현)에 도읍을 정했는데, 산시성은 중국 오천년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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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周나라가 최초로 도읍을 정한 곳은 풍豐과 호鎬였고,6)【풍豊은 후대의 장안長安이다.】 그
뒤에 낙양洛陽으로 천도하였는데, 중원中原의 한가운데였다.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은 초
기에 서쪽 지방에 도읍을 두었다가 그 뒤 동쪽 지방으로 천도하였으니, 이는 모두 주대周
代의 전례를 따른 것이다. 육조六朝 때에도 이와 같아서 초기에는 서쪽에 도읍하였다가 그
뒤 동쪽으로 천도하였으며, 당대唐代에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오대五代와 송宋 나라에는
모두 변경汴京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고종조高宗朝에 남쪽 임안臨安으로 천도하였다.
황명皇明은 천하를 통일한 뒤에 처음으로 금릉金陵에 도읍을 정하였다.7) 금릉金陵도 형
세가 뛰어난 곳이고 삼국 시대 오吳나라의 손씨孫氏 때부터 도읍으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렇지만 이곳은 동남쪽에 치우쳐 있어서 서쪽과 북쪽을 장악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
기 때문에 만세토록 제왕의 도읍이 될 만한 자리는 못 되었다. 그 뒤 문황文皇의 정난靖難
때에8) 순천부順天府9)로 천도遷都하였는데 옛날의 기주冀州이니, 이곳이 구주九州에서
도읍이 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다.
주자朱子는 도읍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기주冀州는 산맥이 운중雲中에서 시작하고, 대하大河가 그 남쪽을 둘러싸고 있다. 화산
華山이 그 오른쪽에 있고, 앞으로는 세 개의 안산案山10)이 거듭 둘러싸고 있으니, 난봉鸞
鳳이 우뚝 솟고 교룡蛟龍이 내달리는 듯하다. 뒤로는 구하九河가 휘돌아가서 해와 달을
씻어내고 하늘과 땅을 가득 적시는 형세이다. 비록 흥망성세에 운수가 있다고 하지만 기
주는 요임금으로부터 몇 천 년 동안 제왕들이 뿌리내리셨던 곳이다” .
그 다음으로 도읍이 될 만한 자리가 있다면 장안長安이다. 이곳은 병목에 해당하는 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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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주周나라는 … 호鎬였고: 풍경豐京과 호경鎬京을 통칭한 것으로 주나라의 도성都城들이다. 이것들은 오늘날 섬서성 서안시에
있다. 일찍이 주 문왕文王 때에 풍수灃水와 위수渭水의 사이에 풍경豐京을 건설했고, 주나라 무왕武王이 자리를 이어 다시 호경
鎬京을 건립하였다. 풍경은 종묘宗廟와 원유園囿가 있는 곳이고, 호경鎬京은 주왕들이 거주하여 정사를 펼쳤던 중심지이다.
7) 금릉金陵: 오늘날 중국 강서성江蘇省의 남경南京에 있다. 진晋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수도였다.
8) 문황文皇의 정난靖難 때에: 중국 명나라 태조 홍무제는 몽골 세력에 대한 방위를 국책으로 하여, 각 요지에 자신의 아들을 봉
건封建하여 방벽으로 삼았는데, 그 아들들은 특히 북쪽 변방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지방 정권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뒤를 이은
손자 건문제建文帝가 주왕 등 5왕을 폐하자, 제왕 중 가장 큰 연왕燕王 체棣는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1398년 승려 도연道衍을
모사로 하여, 황제 옆의 간신을 제거하고 명나라 왕조를 안전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3년 동안의 싸움 끝에 연
왕군이 명나라 환관과 내통하여 남경南京을 점령했고, 건문제는 불에 타죽었다고 한다. 1401년 연왕은 즉위하여 태종인 영
락제가 되었다.
9) 순천부順天府: 명明나라 초기에 북경北京 일대를 통치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관부. 태종 영락제永樂帝는 이때 순천부를 북경으
로 삼아 서울을 금릉金陵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유명한 자금성紫錦城을 축조하였다.
10) 안산案山: 풍수 상 남쪽에 위치한 산이고, 등지고 있는 산은 조산祖山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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要地로서 오래 전에 도읍으로 정하였다. 낙양洛陽이 그 다음인데, 이곳은 사면에서 적의
침략을 받기 쉬우며 무武를 사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곳은 천하의 한 가
운데에 있으면서 남면하여 제후들을 호령하기에 용이한 형세였으므로, 옛날부터 황제의
도읍지로 낙양을 빼놓은 적이 없었다.
중원中原에는 4곳의 요충지가 있으니, 바로 강회江淮11)·형양荊襄12)·천협川陜·청제靑
齊13)이다. 이 4곳이 잘 지켜져야 천하가 안정되니, 이것이 천하의 형세다. 국도國都를 다
스리려면 반드시 이 네 곳을 먼저 살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오랫동안
평화롭게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1.4)
나는 구석지고 치우친 작은 나라에서 나고 자랐으므로, 위의 것들은 당연히 직접 보고 들
은 것이 아니라, 이전 사람들의 기록에서 찾은 것이다. 이것은 모두 우리나라의 산천에 관
한 것이고, 역대 국도國都에 대한 자료가 모두 내 책상 위에 있으니, 중국의 훌륭한 선비
들조차 이것에 대해 무슨 말을 더 덧붙일 수 있겠는가?
땅에는 어떤 이치가 있는가? 땅의 이치는 굳어졌다가 부드러워지고, 부드러워졌다가 다
시 굳어지며, 풀어졌다가는 맺혀지고, 맺혀졌다가 다시 풀어진다. 풀어지면 물이 되고, 맺
혀지면 산山이 된다. 수풀 속의 못은 고요하면서도 깊으니, 이것은 풀어진 것 중에서 맺혀
진 것이고, 산속의 못은 기가 서로 통하니 이것은 맺힌 것 중에서 풀어진 것이다. 이와 같
이 산의 맥도 마치 구슬이 꿰어져 있듯이, 끊어졌다가 이어져 있어 결코 끊이지 않는다.
기산歧山의 한 줄기는 삭방朔方에서 뻗쳐 나와 황하를 가로질러 동쪽에서 호구산壺口山
이 되고 태악산太岳山이 되며,15) 북으로는 태항산太行山이 되고 항동산恒東山이 되며, 다
시 옮겨와 자형산紫荊山이 되었다가 갈석산碣石山으로 끝맺는다. 또 항동산에서 따로 나
온 그 맥락이 새塞를 넘어 요동을 건너 압록강과 토문강 두 강의 사이를 거쳐 남쪽으로 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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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강회江淮: 장강長江과 회수淮水 일대를 말하며, 지금의 강소성江蘇省과 안휘성安徽省 일대에 해당된다.
12) 형양荊襄: 형주荊州와 양주襄州이다.
13) 청제靑齊: 청주靑州와 제주齊州 지역이다.
14) 【두주: 우리나라의 네 요충지는 전라도·경상도·함경도·평안도 등 4개의 도道이다. 4개의 도가 잘 지켜지면 온 나라가 평
안해진다. 또 기전畿甸의 양주楊州·파주坡州·광주廣州·수원水原이 사보四輔다. 성을 쌓고 진을 설치하여 이 4개의 도가
잘 지켜질 수 있다면, 도성都城이 평안해진다. 이것이 ‘바깥과 안에 이중으로 관문關門을 설치한다.’는 뜻이다.】
15) 『서경書經』, 「하서夏書·우공禹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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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이곳에 백두산白頭山이 있다. 이 산은 『산해경山海經』16)에서 불함산不咸山17)이라
고도 하고, 『당서唐書』에서는 태백산太白山18)이라고도 하였다. 우리 동방의 팔도에 있는
산천들은 모두 백두산으로부터 갈라져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나라는 단군과 기자 이래로 대대로 이어 내려오면서, 각기 다른 곳에 도읍을 정하였
다.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여 서경西京이라 하였고, 계림鷄林에도 도읍을 정하여 동경
東京이라 하였다. 이런 일은 모두 상세上世 때에 벌어졌으니 천 년 전의 일이다. 지금 되
돌아보면 이 도읍들은 서쪽이나 동쪽에 각각 치우쳐 있어서 대일통大一統의 기상氣像이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그런데 경기 지역만은 우리나라의 중앙에 있어서 전국을 아우를 수 있다. 백제가 이곳에
도읍을 정한 이래로 양한兩漢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고려 왕건이 남쪽으로는 낙동강까지
무찌르고, 북쪽으로는 압록강까지 쳐 올라가 통일한 뒤에, 송악崧岳에 도읍을 정하였는
데, 그 때까지 도읍은 모두 이곳 경기에 있었으니, 중국에서 평양·포반·안읍의 세 도읍
이 모두 기주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송악松嶽은 입지 조건이 오늘날 우리 조선의 도읍인 한양만은 못하다. 한양에 대해
말한다면, 일찍이 고려의 충숙왕忠肅王(1294~1339)19)이 최사추崔思諏(1034~1115)20), 윤
관尹瓘(?~1115)21) 등을 파견하여, 노원蘆原·해등촌海等村22)·용산龍山 등을 살펴보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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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산해경山海經』: 중국 하나라의 우왕, 또는 백익이 지었다고 전해지며, 산천 초목 조수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17) 『산해경山海經』, 「대황북경大荒北經」.
18) 『신당서新唐書』, 「흑수말갈열전黑水靺鞨列傳」.
19) 충숙왕忠肅王: 고려 제 27대 왕. 1313년 왕위에 올랐으나, 심양왕 고暠가 왕위를 노리고 그를 헐뜯어, 5년간 연경에 체류해야
했다. 1325년 귀국하였으나, 눈과 귀가 멀어 정사를 못 돌본다는 조적 일당의 거짓 고발 때문에, 정사에 더 염증을 느껴 1330 년 태자 정에게 왕위를 넘기고 원나라에 갔다. 충혜왕이 폐위되자 1332년 복위하였으나 정사는 잘 돌보지 않았다.
20) 최사추崔思諏: 고려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가언嘉言, 초명은 사순思順이다.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선종
때 전중소감殿中少監과 지상서호부사知尙書戶部事를 역임하였고, 1088년(선종 5)에는 예빈소경禮賓少卿으로 동지공거同
知貢擧를 겸하였다. 1103년에는 수태위 판이부사守太尉判吏部事에 임명되었다. 그 해 반역을 도모한 대장군 고문개高文蓋
장홍점張洪占 이궁제李弓濟, 장군 김자진金子珍 등을 잡아 귀양 보내고, 그 공으로 문하시중에 임명되어 보정공신輔正功臣
의 호를 받았다. 1104년에 수태보守太保가 되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벼슬에서 물러났다. 예종 때 수태사 중서령
守太師中書令이 더해져서 치사하였다. 이자겸李資謙이 그의 사위였는데, 이자겸의 딸이 예종의 비가 되어 태자를 낳자 추성
봉국공신 대령군 개국후推誠奉國功臣大寧郡開國侯에 봉해졌다.
21) 윤관尹瓘: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동현同玄. 고려 태조太祖를 도운 삼한공신三韓功臣 신달莘達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검교소
부소감檢校小府少監을 지낸 집형執衡이다. 문종文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습유拾遺 보궐補闕을 지냈다. 1087년(선종 4) 합
문지후閤門祗候로서 출추사出推使가 되어 광주廣州 충주 청주를 시찰하였다. 1095년(숙종1)에 좌사낭중左司郞中으로 형
부시랑임의任懿와 함께 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肅宗의 즉위를 알렸다. 1098년(숙종 3)에 동궁시학사東宮侍學士로서 조규
趙珪와 함께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숙종의 즉위를 통고하였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1104년(숙종 9) 2월 동북
면행영도통東北面行營都統이 되어 여진 정벌의 임무를 맡을 때부터 1111년(예종 6) 죽을 때까지의 약 7년간이다.
22) 해등촌海等村: 지금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인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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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그들은 삼각산 면악面嶽의 남쪽을 살펴보았으니, 건심乾心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
다. 면악은 오늘날 백악白岳에 해당된다. 그리고 우리 조선조에 이르러 이곳을 도읍으로 하
여 터를 잡을 수 있었다. 이 지역은 중국의 낙양이 중앙에 있으면서 각지에서 그곳에 이르는
거리가 균일하고, 장안長安이 효산崤山와 위수渭水 때문에 굳건해지고, 기주가 세 개의 안
산案山로 중첩되어 있어 견고할 수 있었듯이, 도읍으로서의 여러 장점들을 고루 갖추었다.
성인께서 지리를 살폈던 공적이 여기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백제. 고구려. 신라
1.1. 삼국 三國
백제百濟 시조 온조왕溫祚王(재위 BC18~AD27)은 남한南漢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위례
성慰禮城로 천도하였고, 문주왕文周王(?~477, 재위 475~477)23)은 북한北漢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공주公州로 천도하였으며, 성왕聖王(?~554, 재위 기간 523~554)24)은 웅진
熊津에서 부여扶餘로 도읍을 이전하였다. 그 영토는 동쪽으로 지리산智異山까지, 서남쪽
으로는 해북海北까지였으며, 한수漢水를 경계로 삼았다. 백제는 의자왕義慈王(?~660,
재위641~660)25) 때에 당唐의 소정방蘇定方(592~667)26)과 함께 쳐들어 온 신라新羅 김
유신金庾信(595 673)27)에게 멸망되었고, 당의 군사가 이곳을 떠난 뒤에 신라 땅이 되었
다. 그 뒤 견훤甄萱은 전주全州에 도읍하고 국명을 후백제後百濟라고 하였다.
·기자箕子의 41대손 준準은 위만衛滿을 피해 남쪽으로 도망하여 익산益山에 도읍하였
다. 신라는 시조 혁거세赫居世가 개국하여 경주慶州에 도읍을 정하였다. 그 영토는 동남
쪽으로 바다를, 서쪽으로는 지리산을,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경계로 삼았다. 고구려高句
麗는 평양平壤에 도읍하였고, 동으로는 바다까지, 남으로는 한강[한수漢水]까지, 북으로
는 요하遼河 너머까지를 국경으로 삼았다.
대가야국大伽倻國의 시조는 이아치왕伊阿致王이고 고령高靈에 도읍하였고, 가락국駕洛
國의 시조는 수로왕首露王이며 김해金海에 도읍하였다. 장산국萇山國은 동래東萊에, 문
소국文韶國은 의성義城에, 이서국伊西國은 청도淸道에, 압량국押梁國은 경산慶山에, 사
벌국沙伐國은 상주尙州에, 감문국甘文國은 개녕開寧에, 고가야국古伽倻國은 함창咸昌
에, 하시량국河侍良國은 함안咸安에, 본가야국本伽倻國은 고성固城에, 본예맥국本穢貊
國은 강릉江陵에, 실직국悉直國은 삼척三陟에, 고예맥국古穢貊國은 춘천春川에, 태봉국
泰封國은 철원鐵原에, 황룡국黃龍國은 용강龍崗에, 비류국沸流國은 성천成川에 각각 도
읍하였다. 도읍한 연대와 영토의 경계에 관해서는 모두 고찰할 수 없다.【그 밖에 주邾와
설薛과 같은 작은 나라들도 있었으나 이루 다 기록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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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문주왕文周王: 백제 제22대 국왕. ‘문주文洲’ 또는 ‘문주文州’라고도 한다. 제21대 개로왕蓋鹵王의 아들이고, 제23대 삼근왕
三斤王의 아버지이다.『삼국사기』 연표에는 문주왕文周王의 재위 기간을 3년으로, 본기本紀에는 4년간으로 되어 있다. 한강
유역 일대를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에게 빼앗긴 직후에 즉위하여 웅진熊津으로 천도하였다.
24) 성왕聖王: 백제의 제26대 왕. 이름은 명농. 538년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다. 신라 진흥왕에게 한
강 유역을 빼앗기자, 554년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25) 의자왕義慈王: 태자 때부터 어버이를 효성스럽게 섬기고 형제들과 우애가 깊어, 당시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렸다. 재위 기간
초기에 개혁 정치를 펼쳐 국정을 쇄신하고,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해서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나당연합
군羅唐聯合軍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해 백제의 마지막 왕이 된 비운의 군주이다.
26) 소정방蘇定方: 이름은 열烈. 자字 정방定方이다. 당나라 태종太宗 때 이정李靖과 함께 동돌궐東突厥을 정벌하였고, 657년에
는 서돌궐을 쳐 항복시킴으로써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를 모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예속시켰다. 660년(백제 의자왕 20)
3월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으로 13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산동山東 반도에서 황해를 건너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협공하여 사비
성泗沘城을 함락시켰고, 의자왕과 태자 융隆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송치하였다. 그 이듬해인 661년(고구려 보장왕 20)에는
나당연합군을 거느리고 고구려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철군하였다.
27) 김유신金庾信: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장군 대신大臣. 증조부는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
의 구해왕이며, 할아버지는 무력武力, 아버지는 서현舒玄이다. 어머니는 만명 부인萬明夫人이다. 어머니의 증조부는 지증왕,
할아버지는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 아버지는 숙흘종肅訖宗이다. 숙흘종은 만명을 감금하면서까지 서현
과의 혼인을 반대했다. 이는 신라에 투항한 가야 왕족이 당시에 비록 진골 귀족眞骨貴族으로 편입되어 있기는 했지만, 왕족 출
신과 통혼할 만한 대귀족은 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 금관가야 왕족의 후예들은 신라 왕족의 김씨金氏와
구별하여 신김씨新金氏라 칭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는 서현과 만 명이 야합野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숙흘종이 만
명을 감금한 곳에 갑자기 벼락이 쳐서 1만 명이 탈출하여 서현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설화도 전한다. 이러한 설화는 둘의 혼
인이 파격적이고 극히 어려운 상황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김유신은 진골 귀족이기는 했지
만, 당시 신라를 주도한 대귀족들과는 차이가 있었음도 암시해 준다. 이러한 상황은 그가 누이를 김춘추金春秋(태종무열왕)와
혼인시킬 때의 극적인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춘추와 사통하여 임신한 누이를 화형火刑시키려고 하자, 그 사실을 안 선
덕여왕이 나서서 극적으로 혼인을 성사시킨 것이다. 이는 이 무렵까지도 그의 가계가 왕실과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혼인하기
어려운 처지였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김춘추와 혼인한 누이는 바로 문무왕과 김인문金仁問 등을 낳은 문명왕후文明王后이
다. 이 혼인의 결과, 그의 일족의 세력이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아내 지소 부인智炤夫人은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이었는데, 그와 태종의 이처럼 서로 얽힌 혼인 관계는 당시 신라 사회의 관습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었다. 지소 부인과의 사
이에는 삼광三光 원술元述 원정元貞 장이長耳 원망元望 등 다섯 아들과 네 딸을 두었다. 그리고 서자로서 군승軍勝이 있었
다고 한다. 손자로는 윤중允中 윤문允文이 있었고, 현손으로는 그의 행록行錄 10권을 지었다는 장청長淸의 이름이 전한다.
아우로는 삼국통일을 위한 전쟁에서 장군으로 활약한 흠순欽純이 있다. 윤중의 서손庶孫 암巖은 둔갑술과 병법에 능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진천 길상산吉祥山은 고려 때 태령산胎靈山으로 불렸고, 김유신의 태를 안치했다고 하여 신라 이래로 김유신사
金庾信祠를 세워, 봄 가을로 국가에서 향香을 내려 제사를 지내도록 했음이 전해지고 있다. 감금에서 탈출한 만명은 만노군萬
弩郡(지금의 충청북도 진천)의 태수로 부임하는 서현을 따라갔는데, 그 곳에서 595년 김유신이 출생한 듯하다.
1.2. 고려 高麗
태조太祖가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서북쪽으로는 압록강을 국경으로 정하고, 동북쪽으로는
선춘령先春嶺28)을 국경으로 삼았으며, 동쪽과 서쪽, 남쪽은 모두 바다이다. 그는 송악崧嶽
을 도읍으로 정하였다. 이곳은 임진강臨津江과 예성강禮成江 두 강이 금대襟帶가 되고, 오
관산五冠山과 성거산聖居山 두 산은 뒷막이가 되어, 육로와 수로가 한 데 모인 곳이다.
삼국 시대에 신라에서 가장 많은 위인들이 태어났다. 신라는 인자하고 문을 숭상하였고,
백성들이 부유하고 인구가 많았다. 한편 고구려는 명장이 많이 배출되어서 나라가 강성
하였고, 무武를 숭상하였으며 땅이 넓고 재물이 풍부하였다. 백제는 문文에서는 신라만
못하고, 무武에서는 고구려만 못하였으며, 가장 비옥한 땅에 있었지만 사치스러워서 삼
국 중에서 존속 기간이 가장 짧았다. 고구려가 그 다음이고, 신라가 그 중 가장 오래 지속
되었다. 이것을 보면 인후함이 무력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3. 조선 朝鮮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께서는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셨는데, 왼쪽으로는 관령關嶺을
끼고, 오른쪽으로는 발해渤海에 둘러싸여 있었다. 임진강臨津江과 한강漢江을 각각 북과
남의 금대襟帶로 삼고, 도봉산道峯山과 감악산紺岳山이 전각殿閣과 누각이 되어 둘러싸
고 있었다. 이것은 마치 용이 서려 있고 호랑이가 뛰어오르는 듯하며, 봉황이 날아오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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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선춘령先春嶺: 윤관이 동북 여진을 내쫓고 새로 개척한 지역의 동북쪽 경계에 있던 고개인데, 위치가 확실치 않다.
29) 금탕金湯: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준말로 방비가 아주 견고한 성을 가리킨다.
30) 염락濂洛: 북송 때 성리학자인 주돈이周敦頥와 정호程顥·정이程頥가 살던 지역 명칭이 염계濂溪와 낙양洛陽인 데서 유래한
것으로, 성리학性理學에 밝은 학자들이 많은 지역을 가리킨다.
우하영의 천일록 --도읍의 건립 建都 중에서....
장안 長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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