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사건은 누구에게서 이루어질 일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질문이 다시 필요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오늘 날 계시록의 환난은 유대인에게 일어날 일이라는 주장이 끈질기게 제기되고 있어서 교회들로 하여금 환난을 대비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검토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계시록의 수신자가 유대인들이 아니고, 당시에 있던 아시아의 일곱교회이기 때문에 계시록사건의 현장도 당연히 교회라고 봅니다
첫째, 계시록의 수신자가 유대인이 아니라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1장 4절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John to the seven churches which are in Asia...."
이렇게 요한이 서두를 꺼내게 된 이유를 얼머전에 있었던 환상에서 예수님한테서 직접 명령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 요한은 ...밧모라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계1:9-11)
그리고 2장과 3장에서는 일곱교회에 써 보내는 편지들의 내용이 나옵니다.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2: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3:1"사데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이로 볼 때, 계시록의 수신자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 땅인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이란 것에는 이의가 없는 줄 압니다. 물론 이들 중에는 유대인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초대교회에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째, 약속과 성취는 동일한 대상에게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일곱교회에 편지를 보내시면서 동일한 구조로 말씀을 하시는데, 그 중에 하나는 일곱 교회 모두에게 <이긴 자에게는 ...을 주리라>는 약속을 하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에베소 교회엔 낙원의 과실을,
2. 서머나 교회엔 두째 사망의 면제를,
3. 버가모 교회엔 감추었던 만나와 흰돌을,
4. 두아디라 교회엔 만국을 다스리는 철장권세를,
5. 사데 교회엔 흰옷과 생명책에서의 이름 보존을,
6. 빌라델비아 교회엔 하나님과 새예루살렘과 예수님의 이름을,
7. 라오디게아 교회엔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심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분명히 이 약속들은 아시아의 일곱교회들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즉, 유대인에게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계시록은 서론과 본론과 결론으로 나눌 수가 있겠는데, 본론 부분을 또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초반부: 일곱교회에게 편지를 보내는 장면(2장-3장)-이긴자에게 상급을 약속하시는 장면.
중반부: 환난과 진노를 당하는 장면 (4장-19장)-시험하시는 장면.
후반부: 이긴자들이 상을 받는 장면(20-22장)- 약속대로 이긴자들에게 상급을 주시는 장면.
초반부와 후반부를 연결해 보면 초반부에서 일곱교회에 약속하신 것들이 후반부에서 성취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후반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성취됩니다.
1.낙원의 과실(22:2)
2.두째 사망의 면제(21:4)
3.만나와 흰돌(?)
4.철장권세(19:15)
5.흰옷과 생명책에서의 이름 보존(19:8, 21:27)
6.하나님과 예루살렘과 예수님의 새이름(21:12-14)
7.보좌에 함께 앉는 권세(20:4)
그러면 이제 우리가 결론적으로 생각해야할 부분이 있는데,
시험하는 이유는 약속하신 상급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약속은 교회에 해 놓고, 유대인들을 시험한다면 말이 됩니까?
시험은 유대인들을 해 놓고, 상급은 교회에 주시는 것이 합당합니까?
이 모두가 부당한 일입니다.
약속을 교회에 하셨다면, 시험도 교회를 해야하고, 상급도 교회에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안그런가요?
그러므로 계시록을 초반부(상급을 약속한 부분)와 중반부(환난을 받는 자들)를 나누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즉, 계시록의 중간 부분(환난)이 유대인들에게 일어날 일이라고 보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상을 이방인 교회에게 약속하셨으면, 환난도 이방인 교회들이 받아야 하는 것이고, 또 이기고 상받는 자들도 이방인교회들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계시록을 이방인, 유대인들로 구분하여 나누는 것은 부당한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에서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약속을 받은 것도 주님의 교회요, 환난을 당하는 것도 주님의 교회요, 상을 받는 것도 주님의 교회이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첫댓글 약속의 내용은 미래형으로 되어있습니다.
또 '이기는 자들'의 의미입니다.
환란을 극복하라시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계 14장 12~13에서의 순교의 권면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오순절적인 추수로서의 알곡추수가 공중 강림에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교회들에게 주신 약속의 실행입니다.
물론 빌라델베아적인 교회 서도들에게는, 피난처로의 공간이동 등을 통한 보호하심을 약속하셨으나, 극히 적은 숫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교회인, 이스라엘의 영적인 회복이 야곱의 큰 화란의 주축이기에, 계 7장에서 하나님의 인을 치시고, 계 12:5의 '단체적인 사내아이'로 환란 초기에
초실절적인 휴거가 일어나며, 영적인 노약자들은 페트라로
공간이동방식 등으로 피신시키실 것이 계 12장에서의 여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남은 자들'이 영적 싸움에서 순교를 당합니다.
이들이 계 2~3장에서의 순교자들인 이기는 자들과 같이 계 15:2에서 '승리한 자들'로 나타납니다.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계 2~3장에서의 약속을 지키심에 영향이 없습니다.
대체신학의 미혹으로 오류를 보인 것 때문에 혼돈이 있었기에 착각을 하게 됩니다.
은혜시대의 초실절적인 휴거는 주님의 초림의 부활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그래서 오순절의 헌물에서 '누룩을 넣어 군(환란 중의 연단 의미) 두(이스라엘의 남은 자들과 은혜시대 성도들 중 이기는 자들) 빠'을 드리는,
예표의 실현입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