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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 원초 리지
수 년째 월간 마운틴에 익사이트 마운틴을 연재하고 있는 유학재는 늘 다음 취재 대상지를 찾느라 골몰을 한다. 2009년부터 다섯 해나 끌고 왔으니 더 갈 곳도 마땅치 않고 원고지 칸을 채워넣을 단어도 고갈 되었건만 끈질기게 이어가고 있으니 신통하다. 글을 써 생활 하는 전업 기자도 아닌데 말이다. 오래 전에 손재식 사진가와 함께 한국의 암벽이란 연재를 했던 경험이 있어 그 고충을 익히 아는 나는 그의 긴 호흡이 부럽기만 하다.
수년 전부터 일 때문에 칭다오를 드나들며 본 노산은 나의 가슴을 설게 하기에 충분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푸른 숲 자락을 덮고 우뚝 솟은 셀 수 없이 많은 화강암 봉우리들을 보고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더 이상 산쟁이가 아닐 터이다. 연전에 크리스 샤마와 함께 칭다오에 출장을 왔다가 노산에 같이 오른 적이 있다. 세상의 좋다는 바위는 모조리 다녀 보았을 당대의 클라이머인 그도 눈 앞에 널린 수 많은 바위를 보고는 마치 장난감 가게에 들어간 어린 아이처럼 눈을 휘둥그레 뜨고 볼더를 찾아 온종일 이리저리 쏘다녔었다.
달포 전에는 존 바카, 린 힐 등과 함께 80년대 미국의 전위적 클라이머 그룹인 스톤 마스터의 일각을 이루며 캘리포니아 일대의 암벽에 자신의 족적을 남긴 마이크 “그라미찌” 그래함과 노산에 갈 기회가 있었다. 그 또한 노산의 무수한 암봉을 보고는 단 숨에 서른 해 세월을 뒤로 돌리고 바윗길 찾기에 여념이 없다.
한창 때의 날렵한 몸매가 세월에 묻혀 두리뭉실해지고 반 남은 머리카락조차 성성한 백발이지만 등반 선을 살피는 그의 눈매는 형형하기만 했다. 바위만 보면 이성을 잃는 바위쟁이들은 이렇듯 저마다의 “킹라인”을 마음에 그리며 사는 운명인가보다. 나는 유학재가 노산에서 자신이 꿈꾸는 환상의 등반선을 찾지는 못할 지언정 연재할 기사 서너 꼭지 쯤은 무난히 찾으리라 믿고 내가 중국에 머무는 동안 노산에 한번 다녀가라고 불러들였다.
인천 공항에서 한 시간만 날아가면 닿는 청도의 노산은 서울의 북한산과 너무도 닮아 낯 설지 않다. 황해를 가운데 두고 나뉘어진 중국 대륙의 동쪽 해안선과 한반도의 서쪽 해안선의 형태가 마치 퍼즐의 마춤짝처럼 나란해서 한 때는 양 쪽의 땅이 한 몸이었고 노산과 북한산은 한 산줄기에 나란히 솟은 사촌지간이 아닐까 싶다. 아침 첫 비행기를 타고 청도로 들어온 유학재와 유영직을 마중해서 곧바로 노산으로 향했다.
청도에서 10여년간 살면서 사업을 하고 있는 부산 출신 클라이머 남희도씨가 안내를 맡았다. 그는 오래 전부터 보아 둔 리지가 하나 있다며 이룡산으로 갔다. 석축을 쌓아올려 물을 가둔 산상호수 옆의 도교 사원으로 향하는 잘 정돈된 돌계단 길을 따라 오르다 왼쪽으로 보이는 암벽을 향해 얽히고 섥힌 덩굴 숲을 헤치고 나갔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히기 시작하고 팔뚝에 풀에 베인 자국이 두어 줄 그어졌을 때 산 아래서 눈짐작으로 가늠해 둔 암벽이 나타났다.
바위는 북한산의 그것과 흡사한 화강암이었으나 표면이 무르고 거친 것이 아마 바닷 바람을 쐬인 탓인 듯했다. 바닷가에서부터 연결된 능선은 바위가 주를 이룬 암릉이긴 했지만 바위로만 쭉 연결된 것이 아니라 군데 군데 풀 숲들이 있어 과연 우리가 바라는 리지 등반이 될 지 의문이었다. 아무튼 우리가 당도한 암릉의 측면은 가파른 벽을 이루고 있어 암벽 등반 채비를 했다. 오른쪽으로 열린 오픈북 크랙을 십 여미터 오르자 크랙은 막히고 인수봉 대슬랩같은 페이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띄엄띄엄 확보물을 설치할 수 있는 틈새나 구멍이 나타나 안도할 수 있었지만 결코 미덥지 않은 확보물을 담보로 하고 십여미터 이상을 전진해야 했다. 그런 페이스를 두어 마디 더 오른 다음 널찍한 암봉의 정수리에 올라섰다. 그러나 기대했던 대로 암릉이 산 위쪽으로 연결되지 않고 걸어가는 숲길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능선 마저 커다란 골짜기를 향해 끄 꼬리를 사려버리는 바람에 더 이상 올라갈 곳도 없었다.
반 나절 동안 서너 피치의 암벽 등반을 신나게 즐겼지만 익사이트 마운틴의 기사 거리가 될만큼 익사이팅한 등반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곳은 나중에 청소를 좀 하고 앵커를 설치하면 훌륭한 암장이 될 가능성은 충분했다. 낭패였다. 학재는 글발이 쏟아져 나오는 영감을 줄만한 산행 거리를 다시 찾아야 했다.
이튿 날 노산에서 가장 사람이 붐비는 곳으로 갔다. 골짜기 양쪽으로 솟은 암벽의 크기가 웅장하고 스키장에나 보는 좌석 리프트까지 운행되고 있으니 노산의 여러 곳 중에서 가장 경관이 빼어난 지역임이 분명했다. 만만치 않은 금액의 입장권을 구매하고 전자 지문 날인까지 한 다음 입산이 가능한 이곳은 무슨 놀이 공원처럼 관리되고 있었다.
잘 정돈된 정원을 지나 골짜기 오른쪽으로 난 산길로 접어들었다. 리프트를 오르내리는 케이블 아래로 난 길은 마치 중국 황제가 거닐던 자금성의 앞마당처럼 반듯한 화강암으로 말끔히 덮여 있었고 경사가 급한 곳은 솜씨 좋은 석공들이 정성들여 쌓아올린 돌 계단이 놓여있었다. 이 돌포장 길이 산 꼭대기까지 이어져 있다 하니 중국 사람들의 스케일은 역시 광활한 대륙을 닮았나 보다. 평소 자연 그대로의 것을 선호하는 나는 이처럼 인위적으로 다듬어진 친절한 산길을 달가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산을 찾는 이들이 불어난 탓에 닳고 허물어져가는 등산로들을 보면 아예 이렇게 돌로 덮어 놓는 것이 산의 훼손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있겠단 생각도 든다. 십 분쯤 오른 다음 포장된 돌 계단길을 벗어나 골짜기 건너편의 암릉을 향해 우거진 숲을 헤치고 들어갔다. 안일한 일상의 길이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등반이 시작된다는 클라이머의 계명을 섬기는 우리는 반듯하게 포장된 길을 헌 신짝처럼 버리고 길 없는 곳으로 길을 찾아 나섰다.
황제에게 왕도가 있고, 크리스 샤마에겐 킹 라인이 있는데,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가시덤불이 발목을 휘감는 그런 얹짢은 길이었다. 가파른 암벽과 빙벽만 고집하던 정통파 알피니스트 유학재가 골라 잡은 길 치고는 모양이 상당히 빠지지만 다섯 해 동안 익사이트 마운틴을 연재하느라 각양각색의 산을 오르며 쌓은 내공 탓인지 정작 그는 그깟 불편함에는 개의치 않는 듯하다.
얼마 전 술자리에서 더 이상 벽등반의 패라다임 안에 자신을 묶어두지 않고 어디 다양한 산행을 하기로 했노라 선언한 그에게서 해탈한 수도승의 모습을 보았다. 어떤 산행이든 누구에겐가 아주 의미심장한 것이며 모든 산행은 아릅답다는 진리를 깨우친. 그의 화두는 말하자면 톨레랑스다. 청탁을 불문하고 두주도 불사하는 그의 술버릇처럼 말이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는 얼키고 설킨 가시덤불을 헤치고 골짜기를 건너 암릉이 시작되는 펑퍼짐한 바위로 올라섰다. 산과 들판이 만나고 다시 들판이 바다로 잠기는 풍경이 내려다 보였다. 울산암에서 속초 앞바다를 바라보듯 익숙한 정경이다. 잠시 땀을 식히고 채비를 한 다음 영직이 로프를 끌고 앞장서 나갔다. 출발점으로 삼은 벽에 잘 생긴 크랙 한 줄기가 있었으나 외면하고 왼쪽으로 적당히 기어 올라가는 쉽고 빠른 길을 선택했다.
도무지 이 능선이 어떻게 이어지는 지, 시간은 얼마나 걸릴 지 가늠할 수 없어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을 골라 잡는 것이 상책이었다. 하지만 일단 능선에 올라선 후에는 될 수 있으면 등줄기의 가장 높은 중심선을 따라 올라가며 돌출된 바위를 빠짐 없이 오르내리는 암릉 등반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고도를 높여 갈수록 능선 양쪽으로 떨어지는 절벽의 높이도 아찔하게 높아져서 감히 가장자리로 길을 잡아갈 수도 없었다.
능선의 중심에는 마땅한 확보물을 설치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 위험한 오프 위드 크랙과 머뭇거림 없이 전진하는 영직이 엉성하게 설치된 캠에 매달려 숨을 두 어번 고른 다음에야 넘어간 까다로운 페이스도 있었다. 때론 연보라색 도라지 꽃이 쑥스러이 몸을 숨기고 있는 나무 그늘 아래를 구부정 허리로 지나가고 샛노란 나래꽃이 보란 듯 만개한 꽃무더기를 조심스레 비켜갔다.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무릎이 상하는 아픔 쯤은 꾹 참고 견뎌내야할 침니가 있었으며 산양처럼 가볍게 폴짝 뛰어 넘어야할 뜀바위도 있었다.
심마니도 피해 갈 음습하고 빽빽한 덩굴과 수풀을 헤고 산도처럼 비좁은 바위 틈새를 꿈틀거리며 기어나왔다. 능선 전체가 하나의 암릉으로 연결되어있지 않고 여러 개의 독립봉으로 띄엄띄엄 이어져 있어 봉우리 하나를 오르고 나면 바로 내려갈 궁리를 해야했다. 그냥 걸어 내려가거나 잠깐 다운 클라이밍이 필요한 곳이 있었고 로프 하강을 해야할 절벽도 여럿 있었다.
암각에 로프를 걸고 내려가거나 슬링과 카라비너를 남겨두고 하강을 해야했다. 물론 등반 가능한 라인이 전혀 없거나 너무 작아서 가치가 없는 작은 암봉을 좌우로 비켜간 적도 없지 않았다. 이따금 점점 아련해지는 바다와 지나온 능선을 뒤돌아보며 땀을 식히고 다시 앞에 나타난 암봉들을 마치 스무고개 퀴즈를 풀어가듯 타고 넘는 것은 마치 유학재와 내가 공군 졸병 시절 국군의 날 특식으로 보급된 종합선물세트 상자 안의 각기 다른 맛의 과자를 까먹던 것처럼 재미가 쏠쏠했다.
그리하여 능선을 통틀어 가장 장엄하게 솟은 독립된 봉우리 앞에 당도했을 때 하루 해가 저물고 있었다. 멀리서 볼 때 그 곳에는 곧게 잘 뻗어 탐나는 크랙이 두 갈래 있었다. 등반을 계속하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지만 구경이나 할 셈으로 가까이 가봤더니 놀랍게도 크랙을 따라 볼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오늘 올라온 능선엔 사람이 다닌 흔적이 전혀 없었지만 이 준수한 봉우리의 잘 생긴 크랙은 남아나지 않은 것이었다.
아마 한 동안 중국에 거주하면서 노산 일대에 많은 바위길을 개척했다는 양정산악회 김상일씨나, 그가 가르친 중국 클라이머들의 작품이 분명했다. 그것은 우리가 잘 닦인 길을 버리고 능선을 택한 후 처음 만나는 사람의 흔적이었다. 어떻게 여기서 내려갈까 궁리를 하고 있던 차에 볼트를 발견했으니 반가웠다. 골짜기 방향의 절벽 끝에서 볼트 앵커를 찾아 60미터 짜리 하강 한 번으로 바닥까지 내려왔다. 반듯한 화강암이 깔린 보도를 마다하고 미로 같은 산등성이를 더듬거리며 오른지 꼭 열시간 만이었다.
흔한 개념도나 지도 한 장 없이 저지른 예측불허의 산행이라 내내 팽팽했던 긴장이 하강기를 감아돌은 로프를 풀어내는 순간 스르르 풀렸다. 온종일 동물적 감각으로 길을 찾아내고 머뭇거림 없이 앞장을 선 영직과 바로 뒤에서 줄을 잡은 학재는 10월 아마다블람 동벽 원정을 앞두고 유익한 튜닝 등반이었다고 흡족해했다. 젊은 한 때 부산의 한 실내 암장에 기숙하면서 등반에 열심이었지만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동안 제대로 산에 갈 기회가 많지 않았던 희도도 오랫만의 뻐근한 산행으로 만면에 웃음꽃이 폈다.
집 가까이 실내 암장이 생긴 다음부터 먼 길 가는 게 귀찮아 산을 멀리온 나에게는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힐링산행이었다. 온실같은 암장의 편안함에 한껏 늘어져 약초꾼의 등짐처럼 무지막지한 키슬링을 걸메지고 설악산 골짝 골짝을 헤매던 시절의 야성을 상실했던 내가 오늘 산행에서 원초적 본능이 되살아나는 것을느꼈으니 말이다.
로프를 사리고 장비를 챙기느라 숙였던 고개를 드니 어느 새 사방이 어두워졌다. 예의 그 잘 닦인 돌포장 길을 되짚어 내려오는 우리들 발자국 소리에 놀라 일어난 반딧불들이 길섶에서 흥겹게 너울춤을 추었다. 오늘같은 날은 돌계단을 내려 딛을 때마다 시큰거리는 무릎 쯤은 까맣게 잊어도 좋았다.
정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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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다시한번가고싶은곳이네요~~재미난곳 바위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