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 지난해 탁상용 달력 고마웠다.
일 년 내내 내 곁에 두고 들춰본 달력이야... 신년 달력도 부탁해...”
순간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1년 전의 일들이 뇌리를 스친다.
그리고 종사(宗事)의 주체가 되고 있는 종회(宗會)의 주변을 돌아본다.
지난주 모임을 가졌던 재경서흥회에 22명의 종친들이 모여 송년모임을 가졌다.
두어 시간 넘게 자리를 같이 했지만 금년에는 달력이 없어 아쉽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물론 빠듯한 살림살이가 걱정이 됐겠지만....
그런데 종친도 아닌 다른 문중의 사람이 그 달력을 보물단지처럼 간직하고 있다니...
2013년 12월 7일 토요일. 한훤당선생학술대회가 열리는 대구에 다녀왔다.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이
한훤당선생기념사업회 후원으로 지난해 10월 경북대학교 캠퍼스에서 『한훤당 김굉필 학문』을 주제로
추계학술대회를 열고 영남학회지 12월호에 한훤당선생 기획논문집을 책으로 펴냈다. 이어 1년만에
『한훤당 김굉필과 한국의 도학사상』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었다.
한훤당 선생이 성큼 우리 곁으로 다가 오시는 것만 같다.
문경공 한훤당 김굉필(文敬公 寒暄堂 金宏弼 1454-1504)은 선생 나이 27세 되던 해 1480년(성종11) 생원시
(生員試)에 합격하고 41세가 되던 1494년(성종25)에 행의(行義)로 추천(推薦)되어 남부참봉(南部參奉)을
거쳐 1497년(연산군3) 정육품(正六品)의 형조좌랑(刑曹佐郞)을 맡아 불편부당하게 송사(訟事)를 처리하자
세인의 칭송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이후 평안북도 희천과 전라남도 순천 유배지에서
7년을 보낸 뒤 1504년 51세의 젊은 나이에 극형에 내몰려 최후를 맞는다. 광란의 정치로 뒤틀려진 사회에
짓밟혀 소학동자 선생이 품었던 맑고 밝게 바로 잡아보겠다는 광풍제월(光風霽月)의 꿈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선생이 한양에 계시는 동안 강학활동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요즈음과 비교하면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이 입시교육보다 인성교육에 더 비중을 두는 선생에게 배우러 더 몰려들었다. 선생의 한양에서
강학할 때의 모습이 경현록(景賢錄)에 남겨져 전해지고 있다. “쇄소(灑掃)의 예를 행하고 육예(六藝)의
학문을 닦는 사람이 앞뒤로 가득하였다.” 당시 선생의 절친한 벗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1450-1504)이
화가 생길까 두렵다며 강학 활동을 그만두도록 권유할 정도였다니 짐작이 간다.
한훤당의 강학에 왜 학생들이 그렇게 몰려들었을까...?
선생은 자신이 스스로 내세우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대학자 퇴계(退溪), 남명(南冥), 율곡(栗谷) 선생에 의해
조선의 도학(道學)을 선도한 선각자로 추앙되었고 조선시대 정신적 스승으로 칭송되었다. 그리고 성균관
유생들의 열화와 같은 상소로 조선 도학의 종사(宗師)에 자리매김하고 마침내 조선 오현(五賢 :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중 수현(首賢)으로 받들어 모셔져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한훤당 선생의 무엇이 그것을 가능케 했을까...?
또 유생들이 그들의 마음속에 품었던 선생의 철학은 무엇이었을까...?
선생의 수제자로 문묘종사를 주청(奏請)한 문정공 정암 조광조(文正公 靜庵 趙光祖, 1482-1519)는
보수 훈구파에 맞서 개혁의 정치로 반격해 나갔다. 그러나 기묘사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림파의 선봉에
서서 도학에 기반을 둔 정치를 구현하려 했지만 한훤당 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15년 뒤 정암선생도 조선을
개혁해 보겠다는 야망을 접어야 했다. 조선의 암흑기는 대화 없는 극단의 정치적 대립에서부터 비롯되나
보다. 조선조는 1498년 무오사화(연산군4)를 시작으로 1545년 을사사화(인종1)에 이르기까지 근 반세기
동안 참혹한 사화(士禍)에 얼룩져 급기야 임진왜란의 빌미를 제공한다.
이기간 중에 뭇사람들의 정신적지도자로 살아 남으셨다면 선생은 어떤 일들을 하셨을까...
또 다른 모습으로 순교자가 되지 않았을까...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한국 유학사에서의 金宏弼의 위상』이라는 주제의 학술발표에서 조선
도학의 시조로 받들어진 김굉필의 학문 기본은 『소학小學』이라고 단정했다. 『소학』으로 자신을
수양하고 남을 가르치는 방법을 삼았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김굉필이 『소학』을 통해 백성을 교화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려는 교화사업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상성 성균관대 한국철학과 교수는 지난해 학술발표에서 『소학』이 현대인의 삶의 지침서로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편데 이어 금년에는 『한훤당 학문에서의 ‘道學’ 문제』라는 주제발표에서
한훤당 도학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소학』에의 집중(集中)이었음을 강조하고 한훤당은 조선조
유학의 특성을 ‘도학’으로 결정지은 사상가이자 실천적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2013년 11월20일 한훤당기념사업회 이사회가 대구시내에서 열리던 날이다. 카메라를 든 한 젊은이가
회의장 안으로 들어왔다... 백용(柏容) 차종손이 촬영에 앞서 양해를 구했다. 지난 9월 도동서원 사액의례
재현행사를 주관한 달성군에서 한훤당 선생이 「달성을 빛낸 인물 7인」에 선정되어 새로 조성되는
현풍체육공원에 선생의 흉상제작을 건립하겠다는 계획을 알려왔다고 밝혔다. 하지만 선생의 영정이 없는
우리 문중에서 난색을 표하자 달성문화재담당 관리들이 서흥김씨 종친의 얼굴사진들을 컴퓨터그래픽으로
합성해 한훤당선생의 표준이미지를 만들자고 제안해 왔다며 영정이 만들어지면 일가들한테 사진을
보여주고 문중의 의견을 신중히 수렴하는 절차를 밟겠다고 부연 설명했다.
한훤당 선생이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얼굴을 드러낼까...
갈등과 대립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그리고 2013년 세밑에
『한훤당 김굉필 선생』이 학계, 문화계, 지역사회, 언론계에서 두루 조명 받고 있다.
한훤당선생이 소학의 가르침을 통해 펼치고자 했던 제대로 된 세상을
지금의 우리 사회와 접목시킬 수 있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선생을 이 시대의 정신적 스승으로 받들어 모시고자 하는 학계 일각의 시대적 요청에
우리 문중이 그리고 서흥인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어떤 것들일까...
비록 남아 있는 책 한권도 없지만 선생은 눈에 보이지 않는 더 귀한 책을 우리에게 남겨주셨나 보다.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삼가 졸필을 올리게 됨을 헤아려주시기 바립니다.
기 후(基 後) 올림
첫댓글 한훤당선생의 일대기를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하여 글을 올려 주셨어 감사 드립니다.
아주 이해하기 쉽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니 편안하게 잘 읽어 보았습니다.
서흥김씨 종원 여러분들이 모두 이 글을 다시 한 번 더 읽고 감동받아 후손으로써의 책임과
사명을 다 하도록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서흥인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해 보게 하는 요긴한 글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늦었지만 잘 정리된 글 감사합니다. 수고많이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