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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 하셨은 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 4:10-11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3.
율법의 본질이 사랑이라고요? 위의 성경 절을 타 교파 교인들에 내어 놓고는 ‘자 보세요!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계명을 지키는 것이지요. 그 중에 안식일 계명도 포함되는 것을 아시지요? 그러므로 당신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미쳐 준비되지 않았거나 이론이 딸리는 자들은 이 논거에 반박 할 수 없다. 그, 그, 그러네요! 통쾌하다. 그들은 억지로 대답 한다. 입으로는 시인 했지만 마음으로는 수긍할 수 없다. 그래도 난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우리는 적어도 십계명을 문자적으로 완전하게 이해하고 지키려고 노력 한다. 그러면 과연 십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가?
하나. 참된 사랑의 요구는 현재 그 사람이 행하는 행위를 보고 판단하는 것보다 그 사람의 동기에 관심을 둔다.
살인하지 않아도 그 사람을 미워 할 수 있다. 이 행동을 세상에서는 살인이라고 하지 않지만 그 동기는 살인이므로 하나님의 사랑의 법칙에서는 살인이다. 세상에서는 율법의 자구에 의해 적용받지만 하늘은 율법의 정신을 중시한다. (마 5:21.22) 실제 간음이 행하여지지는 않았지만 음욕조차도 간음죄라고 했다(마5:27,28) 예수님에 따르면 단순히 율법의 자구를 지키는 것은 전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 했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롬 13:10)
선행 자체는 율법의 성취를 완전히 이루지 않는다. 바리세인은 자선은 했지만 주기 전에 다른 사람이 알아보도록 나팔을 불었다.(마6:2) 그들은 열렬하게 기도는 했지만 거리의 중심가 사람이 많은 곳에서 모든 사람이 그 경건을 볼 수 있도록 했다.((마 6:5) 이런 선행은 무가치 하다 왜냐하면 그 배후의 동기가 자기 영광이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수한 행위에 율법을 지켰지만 성취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사랑으로 율법을 적용하지 않고 행위자체로 동기가 무익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하나. 규칙은 너무 많아서 부득불 조금씩 어기게 된다. 그렇지만 사랑이 있어 범하는 규칙들은 규칙의 원칙을 넘어 선다.
옛날에 텔레비전이 처음 나왔을 때 교회에서는 봐도 무방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 해악들이 밝혀진 후에는 교회에서 무언의 원칙을 적용해서 안식일에 보지 말라고 했다. 그리스도교는 이런 것 ,저런 것을 하라 하지 말라 세세히 규정하는 종교가 아니다. 세부적인 규칙을 모를 때 양심에 의한 행동이 요구되는 때는 사랑이 우선한다는 것이다. 젊었을 적에 목사님을 모시고 방문을 간 적이 있었다. 초신 자는 정성스레 게장과 새우를 내 놓았다 모두들 눈치보고 있는데 목사님이 기도하신 후 맛있게 잡수시라 주위를 정리해 주셨다. 원리의 중심은 사랑이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면 된다. 그러므로 사랑은 규칙 혹은 계명의 정신을 성취 시킨다.
사랑은 때로는 규칙에 의해 규정되어 행동을 촉발하여 동기에 다다름으로서 율법을 성취시킨다. 남의 재산에 손대지 않음을 교육받으면 그 교육으로 인해 원칙이 생기고 결국엔 양심을 고정시킨다. 그러면 남의 재산을 지키는 원리에 도달되는 사랑의 행위가 완성되기도 한다. 그러나 때로는 율법의 자구를 넘어야 할 때도 있다. 거짓말하지 않는 것은 율법의 큰 원칙이다. 우리 할아버지 형제는 아홉 분이셨다. 그중에 셋째 분은 홍성에서 알아주는 수재였고 당시에 드물게 경성제대를 나오신 재원이었다. 그 분은 평시에 독립군과 연계되어 지하 활동을 하셨다. 이윽고 일본 순사에 쫓기어 집의 모처에 숨어 지내셨는데 우리 할머니가 이실직고를 했다. 그리고 다시는 그 분을 보지 못했다. “거짓증거 하지 말라”(출20:16)는 자구에 충실한 행동을 보였지만 “살인하지 말라”(출 20:13)절은 위배 했다. 율법과 계명은 사랑의 완성이 기초해야 한다는 원칙에 충실하려면 침묵하던지 과장하던지 아니면 다른 거짓증거를 해야 했다. 지금도 의문이 간다. 우리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는가? 사랑한다면 어찌 그런 행동과 대답이 나올 수 있는가?
사랑하지 않으면 십계명이나 613가지 원칙을 다 지킨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자구를 지키는 것이지 성취하는 것은 아니다. 육법전서를 다 가지고도 인간의 모든 상황과 관계에서 발생되는 모든 문제를 다 다룰 수 없다. 오로지 사랑만이 그 모든 무한한 관계에서 오는 모든 문제를 충족시켜 줄 수 있다.
하나. 고린도 전서 13장에 나타난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낳으신 사랑의 모습
고린도 전서 13장의 사랑은 십자가에 전시된 아가페의 원칙이다. 이 원칙이 다섯 가지 사랑의 등식으로 되어 있다.
첫째, 돋보이는 영성 (방언) - 사랑 = 0
둘째, 무한한 지식(예언, 비밀, 지식) - 사랑 = 0
셋째, 극한적 믿음 - 사랑 = 0
넷째, 무한대의 관대함 – 사랑 = 0
다섯째, 궁극적 희생 –사랑 = 0 모든 것을 합쳐도 0 곱해도 0 빼도 0
사랑은 모든 성령의 은사에 첨가되어야 한다. 사랑이 모든 은사를 행사하는 토대가 되어야 한다.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한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는 한 모든 선한 행위들은 하나님이 보기기에 쓸모가 없다. 그렇다면 그것이 없다면 것을 절대적인 0을 만들어 버리는 이 사랑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소망과 믿음보다 사랑의 위치는 더 중요하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 :13)
믿음 소망 사랑의 내용과 관계에 관한 문제는 고린도전서 12-14장의 문맥에서 뿐만 아니라 바울 신학 전체를 조명하는 데에도 중요한 관건이 된다.
바울서신에서 믿음의 내용으로 제시된 것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것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믿음은 과거의 일과 관련되고, 그것에 기초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소망의 내용은 살전 4장 13절 이하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볼 수 있듯이 미래에 있을 일에 관한 것이다. 미래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일어날 일을 제시하면서, 그때에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것, 죽은 자나 산 자나 차별 없이 구원의 완성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소망의 내용으로 제시하고 있다.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신학적 근거는 물론 과거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과거의 사건에 대한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
사랑이 무엇인지는 고전 8장에서 알 수 있다. 믿음이나 지식에 근거해서 거리낌 없이 행동할 자유가 있을지라도,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태도를 말한다. 나만이 아니라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남을 배려하는 사랑의 근거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있다(고전 8:11).
이와 같이 믿음 소망 사랑의 내용과 근거를 살펴본다면,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도 믿음에 있고,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근거도 믿음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제일인 이유는 믿음이 과거의 일과 관련되고, 소망이 미래의 일과 관련되는 반면 사랑은 현재와 관련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고 있는 현실은 항상 현재일 따름이다. 현재 요구되는 것은 사랑이며, 현재 사랑을 하기 위해 과거 사건에 대한 믿음도 필요하고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한 소망도 필요한 것이다. 사랑은 지금 바로 실천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이 없는 믿음은 비록 그 믿음이 위대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어느 차갑다. 반면 사랑이 없는 미래에 대한 소망은 음침하고 어둠이 엄습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래서 사랑은 그 믿음에 더욱 불을 붙여 더 큰 믿음으로 향하게 하고, 사랑은 소망에 확실성을 부여하는 빛과 같은 존재다.
그리하여 성 어거스틴은 이 구절을 이렇게 주석했다. “사랑은 어떻게 생겼는가? 그것은 손과 같아서 다른 사람을 돕는다, 그것을 발과 같아서 가난한 자와 곤핍한 자에게 서둘러 간다. 또 그것은 눈과 같아서 불행과 결핍을 본다. 또한 귀와 같아서 사람들의 한숨과 슬픔을 듣는다. 사랑은 그렇게 생겼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배우기를 원하시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사랑하는 방법이다. “네가 누구를 사랑하는지를 말해 달라 그러면 네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 줄 것이다”라는 격언도 있다.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랑이란 말 대신 예수를 넣어 보라. 이보다 더 완벽하게 예수님을 묘사한 말은 없다. 그리고 사랑이란 말 대신 율법의 정신이라는 말로 대체해 보라 이보다 더 예수님의 나라의 특징을 묘사한 말은 더더욱 없다. 그런 다음 불쌍히 여김 혹은 자비라는 단어로 대치해보라 그러면 엄청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표준이나 율법을 최대한으로 보지 않는다.“최소한”으로 읽는다. 그래서 재림교인들은 최소한의 사랑을 가지고 러브스토리를 이어가는 따뜻한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
하나. 사랑이 없으면 감동이 없다
젊은 부자 관원은 신앙의 감격이 없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를 돌보아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신학용어로 해야 하는데 하지 않는 죄를 부작위죄(不作爲罪)라 한다. 그런데 율법은 내가 사랑으로 했어야 하는데 하지 않은 것을 모두 죄로 정죄한다. 숨 막힌다. 답답하다. 죄가 아닌 것이 어디 있으며 죄를 짓지 아니하는 자 어디 있으랴? 그래서 신앙의 끝자락에 맴도는 하급신앙자로 전락해 버린다. 이런 신앙은 ‘아기 보기가 귀찮아서 수면제를 먹이고는 집안에서 편안하게 놀다가 시간되면 퇴근하는 보모가 떠오른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은 율법을 사랑으로 지킨다. 십계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계명을 준 이유가 계명을 지키면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로 계명을 주신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너를 애급 땅 종 되었던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로라.”(출 20:1) 구원은 계명을 지킬 의무에 앞서 주어졌다. 인간의 원리는 절대로 먼저 일하기 전에 선불로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어떤 인간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줄 수 가 있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이 원칙이 깨어지는 경우가 있다. 바로 지극 사랑의 원형인 혈연관계에서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이렇다. 하나님께서는 계명에 대한 준수가 구원에 대한 감사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이 되기를 바라셨다. 이런 신앙은 ‘밤새워 아이를 간호하고 수없는 사랑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엄마가 생각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은 의무가 아니라 “사랑”이요 이런 이미지가 먼저 떠올라야 한다.
이런 일이 반복될 때 비로소 품성의 완전히 성취된다.
“사랑은 경건의 토대이다. 우리의 공언이 어떠하든지 그의 형제에 대한 이기심 없는 사랑이 없다면 어떤 사람도 순결한 사랑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고 시도함으로써는 결코 이 정신을 소유 할 수 없게 된다. 필요 되는 것은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갖는 것이다. 자아가 그리스도 안에 몰입될 때 사랑이 마음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우러나온다. 그리스도의 품성의 완성은 다른 사람을 돕고 복 주려는 충동이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올 때 달성 된다”.(실물교훈 384)
죄를 안 짓고 살고 싶은가? 방법은 간단하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 죄 없는 생애를 살려고 애쓰는 것 보다는 사랑하고 사는 방법이 훨씬 더 죄를 짓지 않는 방법의 으뜸이다. 성경은 죄를 짓지 않는 완전한 사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요구한다. 재림교회 석학 마르지트 헤펜스톨(Marzit Happenstall)은 이렇게 얘기 했다 “우리가 완전하게 된 본성을 하나님께 가져 갈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의 완전을 가져 갈 수는 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 우리가 하나님의 품성을 십자가에 비추어서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그의 자비와 온유와 공평과 의로 섞인 사유(赦宥:죄를 용서함)를 깨닫게 되는 것이요 또한 그의 무한하신 사랑의 무수한 증거와 자기의 불순종하는 자녀에 대한 자애로운 어머니의 애정보다 뛰어난 인정 깊은 자애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정로의 계단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편 맨 마지막 구절)
사랑이 신앙의 깊이를 형성한다.
하나. 최고수의 사랑. -불쌍히 여기는 것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 어느 것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마 22:35-40
본문 36절에 율법사가 등장해서 예수님께 질문을 한다.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율법사가 묘한 질문을 한다.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계명이 크고 작다. 만일 내가 예수님을 뵈었다면 이렇게 여쭤보았을 것 같다. ‘주님 어느 계명이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것입니까?’ 율법사란 지금의 법률가이다 그들의 머릿속에 가치는, 법의 등가가 많고 적음 혹은 크고 작음의 가치로만 계산되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질문의 의도를 알아 차리셨고 율법사의 가치관을 꿰뚫고 계셨다. 그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본문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강조하신 두 가지 계명을 살펴보면 대상은 다르지만 '사랑'이라는 공통인자(共通因子)가 나타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예수님은 왜 사랑의 대상을 단 세 가지 ‘ 하나님, 이웃 그리고 나’로 한정해서 말씀하셨을까?
그러면 되는데 왜 하나님, 이웃, 나, 이렇게 열거해서 사랑의 대상을 한정하는 것처럼 말씀을 하셨을까? 하나님 가족 이웃이 아닌 하나님, 이웃, 그리고 나, 이렇게 세 가지로? 그렇다면 이웃 말고 저 멀리 있는 아프리카 사람은 이 셋 중 어디에 포함되는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교훈은 이웃이란 이 세상에서 나를 뺀 나머지 모두를 말씀하시기 위함이다. 아내 남편 아이들 가족 친척 등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이웃이다. 아들 딸 아내 등 가까운 사람들만 사랑하지 말고 동일한 사랑을 전혀 관계없다고 느끼는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행하라! 이게 가능한 일인가? 이에 대한 해답과 비밀이 누가복음에 있다
본문은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기록이 되어 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이 말씀을 예수님이 하신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은 다르다. 누가복음을 다시 한 번 보자.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눅 10:25~28)."
누가복음에서는 "(율법교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계속해서 읽어 보면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눅 10:29)."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핵심이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여행하는 중에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로되” (33절)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틑 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33-37
이 이웃을 보자. 사마리아인이 이 이웃을 돌보지 않아도 누가 뭐랄 사람은 없다. 본문을 보아하니 채무관계나 친척 혹은 같은 동네사람이나 지인 같지도 않다. 아무 관계가 없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나 행한 것뿐이다. 오지랖 넓게도 그는 많은 돈까지 쓴다. 그리하여 그는 자비를 베푼 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웃이 되려면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라고 명령한다. “너”라는 단어 대신에 “각자의” 이름을 넣어 보자.
자비를 베푼 자란 사랑이 온전하게 된 자라는 말과 동일하게 쓸 수 있다. 그리고 자비를 베푼 자라는 말은 그 분의 사랑을 반사한 자라는 의미와도 동일시한다.
몇 가지 성구를 비교해 보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저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과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 6:36)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마 5:45)
“주님 그가 주님인 줄 알았다면 즉시 찾아 갔을 것입니다.”
명료해진다.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점점 확실하다.
“세상에 전파되어야할 마지막 긍휼의 기별은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을 드러내는 것이다”(실물교훈 415) 성경에서 완전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일에 더 성숙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인간에게 있어서 그 사람의 숨겨진 적나라한 성격이 드러나는 때는 언제인가 ? 돈에 얽혀있거나 자신이 불리한 상황에 억울하게 봉착했을 때. 극한에 몰려 있을 때이다.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데 어찌 극한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이 드러나겠는가? 성숙한 사랑이 없는데 성숙한 사랑이 드러나는가? 미숙하기에 아무리 그럴 듯하게 포장해도 미숙한 것이 드러난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과오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의무를 전혀 다른 두 종류로 구별하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율법에 규정된 커다란 일들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나타나 있지 않은 소위 작은일 즉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와 같은 작은 일들이다. 이러한 범위에 속하는 일들은 사람의 변덕스러움에 맡겨져서 충동과 기분의 지배를 받는다. 이리하여 품성은 훼손되고 그리스도교는 오해를 받는다.“ (실물교훈 260 보급판)
“우리가 이 일을 종사할 때에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동반자를 갖게 된다. 상해를 입힌 사람을 보살펴 준 사마리아 인 곁에는 하늘의 천사들이 모여 있었다. 하늘 조정에서 내려온 천사들이 자기 동료들에 대한 봉사를 통해 하나님의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모든 사람의 곁에 서 있다...... 우리가 이 일을 충실히 행하면 이웃의 행복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영원한 운명도 결정된다.(상동 265)
하나. 사랑의 개념은 많지만 “그 분의 본성 그분의 율법은 사랑이다” 부조와 선지자 33
“너희가 내 십계명을 준수하라. 그러면 이로써 이 모든 사람이 내 제자인줄 알리라”
“너희는 하늘을 사모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사람이 내 제자인줄 알리라”
“너희는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거룩한 행위로 너를 지키라 그리하면 이 모든 사람이 내 제자인줄 알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곧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이 모든 사람이 내 제자인줄 알리라”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여태껏 재림교인들은 십계명의 정신을 거기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이렇게 읽었다. 그런데 이것이다. 많은 재림교인이 신약성경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 규칙들과 규정들은 가지고 있지만 율법의 대원칙은 놓치고 있다. 하늘나라 가기 위해 율법의 본질을 붙잡기 보다는 조항을 원칙으로 알았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5)
우리는 “사랑하면”과 “서로 사랑하면”을 혼동하고 있다
하나, 서로 사랑한다는 의미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 4:10-11
성경 절이 묘하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해도 된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신다. “서로” 라는 단어 안에는 “관계”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가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사랑을 주셨으니 마땅히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명하신다.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가까운 서로간의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이다. 그리고 혈연 간 서로 사랑하기. 그리고 이웃 간 서로 사랑하기 등이 있을 수 있다. 남녀 간 행복하기 위해 결혼한다. 그런데 남녀 간의 서로 사랑은 고약하기 이를 데 없다. 친구 간의 서로 우정은 주로 의리만 있으면 된다. 아름다운 동업에는 신용이 최우선 한다. 동업하는데 외모와 학벌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남녀 간은 참으로 많은 것을 따진다. 신체가 어떠한 가, 외모, 학벌 ,신용, 재산, 집안 가문, 성격 취미, 패션 감각, 심지어 혈액형 까지. 이 모든 것을 요모조모 따지는 이유는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사랑 하려고 하기 때문이 아닌가? 참으로 이기의 극치요 욕심의 발현이다. 그래서 법륜 스님의 말을 인용하지면 서로 사랑이 아닌 “서로 욕심을 추구하는 사이”로 된 것이 아닌가? 그 욕심을 추구하기위해 서로에게 약간의 변형과 거짓을 첨가한다. 잘 보이려고 성형한다든가 미용을 하고 또 화장을 한다. 자기에게 별로 필요 없는 학벌로 세탁을 하고, 키를 잘 보이게 구두를 높이고, 별로 돈도 없으면서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무리하게 식사를 한다. 좋은 차로 렌트도 한다. 그리고는 결혼에 골인하고는 서로에게 속았다고 후회하기도 한다. 이것은 서로 사랑하기 위해 치루는 인간의 고전적인 수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여 결혼 했다고 착각을 했는데 “죽고 못 사는 사이”가 아님을 금방 알아차린다. “내가 미쳤지 저 인간이 뭐가 좋다구...,” “으이그” 이 얼마나 허무한가? 서로 사랑하는 사랑은 죽고 못 사는 사이가 아니다. 죽고 못 사는 게 사랑이라면 그것은 약간 미친 사람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나와 다른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더 나아가서는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빌 2:3)는 것이다. 깊은 물이 조용한 것처럼 상대를 깊이 배려하는 것이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기만이요 독선이다.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니 나에게 맞추어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니다. 또 “서로 사랑하는 것”은 나와 다른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해 없는 사랑은 폭력이다. 서로 다른 사람이 모여서 함께 가고 나와 다른 점들을 서로 이해하는 것이 새 계명의 중심이다.
요한복음 13장에는 분명히 명확하게 설명 한다 .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35)
바울 선생은 이렇게 첨언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서로)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32)
예수님을 서로 사랑하는 것이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율법을 새 계명 이라고 의미를 부여하시고는 사랑으로 읽으셨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키는 자는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단순히 안식일을 포함하는 십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롬 13:8-10
그러므로 바울에 따르면 율법은 사랑의 “최대한”이 아니라 사랑의 “최소한”이다.
하나. 바울은 말한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원칙이라고.
“그리스도인 품성의 완성은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축복하고자 하는 충동이 솟아오를 때에 달성된다. .. 이것이 영혼을 둘러 싼 사랑의 분위기이다...... 사랑은 충동이 아니요 거룩한 원칙이며 영구적인 능력이다. 성화되지 않은 마음은 이 사랑을 일으키거나 산출 될 수 없다. 예수께서 다스리시는 마음속에서만 이 사랑이 나타난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거룩한 은혜로 새롭게 된 마음속에서 사랑은 행동을 지배하는 원칙이다. 이것은 품성을 수정하고 충동을 지배하고 감정을 억제하고 애정을 고상하게 한다. 마음속에 간직된 이 사랑은 생활을 유쾌하게 하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품위 있는 감화를 끼친다.” (사도행적 551 국문 541 542.)
사랑은 상황이 어떠하든, 변치 않는, 언제나 적용되는, 기분에 좌우되지 않는, 하늘에서 하늘에게서 난 원칙이다.
사랑은 기꺼이, 스스로 원해서, 요구하지 않는 것까지 보수를 원하지 않고, 죽도록 일하게 만드는 힘이다. 우리의 모든 이야기도 사랑 즉 러브스토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야기, 서로서로 이웃을 사랑하는 이야기, 교회를 사랑하는 이야기, 그리고 사랑의 독에 빠져 사는 일상 이야기로 가득 찬 삶이 되어야 한다. 사랑의 향기는 전염되며 사랑의 주사는 마비시키며 사랑의 음식은 만족하며 사랑의 잠은 하늘의 침대에서 실컷 잔 후 만족하여 일어나는 기쁨이다. 예수님은 사랑의 화산이시다 폭발하는 거대한 힘을 어찌 막으랴?
부록
인간 뇌의 해부학적인 구조를 살펴보면, 가장 안쪽에는 호흡과 순환, 체온 조절 등 신체의 신진대사를 관장하는 부위가 있고 그 위를 순서대로 번연 계와 신피질이 덮고 있는 것이 보인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이 세 개의 뇌 중 포유동물에 이르러서야 번연계가 뚜렷해지고, 인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신피질이 뇌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의 기능을 살펴보면 번연계는 감정과 직관과 사랑을, 신피질은 논리와 이성과 언어를 관장한다.
번연계와 신피질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으며, 번연계는 신피질의 이성적 회로를 압도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우리는 흔히 ‘네 말이 머리로는 이해 가능하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가.
학자들은 사랑 역시 번연계의 작용으로 보고 있다. 번연계는 사랑뿐 아니라, 증오와 미움, 분노와 공격성, 충만함과 황홀함 등의 감정을 모두 관장한다. 이러한 번연계의 작용 메커니즘은 직관적이고 내재적이어서 논리적 회로로 구성된 신피질의 언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한국인이라면 보편적으로 느낄 수 있는‘한(恨)’이라는 정서를 외국인들은 이해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류가 그토록 오래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에 목말라 했음에도 정작 사랑의 실체를 설명해내지 못했던 이유가 된다.
사랑이란 호르몬들의 합주곡
그렇게 해서 누군가와 처음 사랑에 빠지게 되면, 신체 내에서도 변화가 나타난다. 앞서 말한 번연계에서 다양한 호르몬들을 분비해 사랑의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가장 먼저 분비량이 늘어나는 호르몬은 도파민이다. 도파민은 감정을 조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경전달물질로 신경흥분을 유도하여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작용을 한다. 처음 사랑에 빠진 사람의 뇌에서는 도파민 분비량이 늘어난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사랑하는 이의 얼굴만 생각해도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 웃음이 나오고, 행복한 감정이 마구 솟아오르는 이유는 바로 도파민의 분비량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도파민의 기분 고양 효과는 매우 뛰어나다. 그런데 사랑하는 이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게 되면 늘어났던 도파민의 양이 줄어들면서 불안하고 우울해지며, 다시금 그때의 고양된 상태를 그리워하게 된다. 그것을 우리는‘상사병’이라는 말로 표현하지만, 신체현상으로 말한다면 도파민 부족에 의한 현상인 것이다. 또한 도파민은 성충동과 상당히 밀접한 연관이 있어서 사랑에 빠지면 자신도 모르게 성적으로도 흥분하게 된다. 사랑이 더 깊어지게 되면 번연계는 도파민뿐 아니라 페닐에틸아민도 만들어낸다. 페닐에틸아민은 체내에서 마치 각성제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페닐에틸아민의 체내 수치가 높아지면, 커피나 각성제를 다량으로 마신 것처럼 정신이 맑아지고 흥분되며,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애정이 퐁퐁 솟아나게 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페닐에틸아민이 우리가 먹는 음식 중 초콜릿에 많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고대 잉카 제국에서는 초콜릿을 최음제와 강장제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밸런타인데이에 연인에게 유독 초콜릿을 선물하는 풍습도 아마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도파민과 페닐에틸아민이 몸을 한껏 들뜨게 만들면, 뇌는 이제 이 인간이 사랑을 빌미삼아 자신의 후손을 남기고 싶다는 욕구를 분출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쨌거나 생명체의 궁극적인 목적은 유전자의 지속과 번성일 테니 말이다. 그리하여 이제 뇌는 옥시토신을 분비하기 시작한다. 원래 옥시토신은 출산 시에 많이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자궁 수축 기능이 있어서 아기를 밀어내는 작용을 하는 호르몬이다.
그래서 이 기능을 역이용해서 인공 유산을 시키거나 유도분만제로 쓰이기도 한다. 이뿐 아니라 옥시토신은 번식과 매우 관계 깊은 호르몬으로 짝짓기, 성적흥분의 유도,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출산, 수유 등 모성행동이 필요할 때 다량으로 분비되는 호르몬이다.
사랑을 하는 동안에 분비되는 또 하나의 호르몬은 바로 엔도르핀을 비롯한 체내 마약 물질들이다. 체내 마약 물질이란, 체내에서 마약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지만 실제로는 마약이 엔도르핀으로 대표되는 이들을 모방하는 것이다. 이들은 뇌 속의 수용체와 결합하여 통증을 잊게 하고, 쾌락과 극치감, 오르가즘을 느끼게 하는 물질들이다. 이런 물질들의 효과는 매우 뛰어나서 사람들은 일단 이런 물질이 주는 환희를 맛보게 되면 이를 오래도록 잊지 못하곤 한다.
마약이 인간을 망가뜨리는 이유 중 하나는 이들은 체내에 들어와서 엔도르핀의 수용 체와 결합하여 비슷한 작용을 하는데, 엔도르핀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절로 분해되고 뇌세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반면, 마약으로 분류된 물질들은 제대로 분해되지 않고 독성을 지니며 뇌세포를 파괴하여 결국 심신을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랑은 뇌와 호르몬의 정교한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런 과정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2000년대 신시아 하잔 박사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이들 호르몬들이 나와서 사랑을 유지시키지만, 18개월에서 30개월 정도 지나면 이들 호르몬의 영향력이 감소된다고 한다.
마치 처음에는 술 한 잔만 마셔도 취하던 사람이 자꾸만 술을 먹게 되면 한 병을 다 마셔도 모자란 느낌이 드는 것처럼, 이런 호르몬들이 자꾸 방출되게 되면 어느덧 뇌에 이들에 대한 내성이 생긴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는 기간이 약 18개월에서 30개월 정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토록 열렬히 사랑했던 이들이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열정도 열망도 줄어들고, 서로에 대해 무심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의 연구 결과들을 살펴보면 사랑은 인간의 언어로 설명해낼 수 없는 종류의 것이며, 일종의 중독 현상과 비슷하다. 행복한 감정을 느끼게 했던 호르몬에 의한 중독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약물에 중독되어 점점 더 많은 약이 필요 하듯이, 시간이 흐를수록 상대에 대해 점차 기대하는 것이 커지고, 단지 서로 바라만 봐도 족했던 시절을 지나 상대에게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약을 끊으면 고통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중독자처럼, 소홀했던 상대가 떠나간 후에야 그 빈자리의 아픔에 몸서리치고 괴로워하게 되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일정한 기간에만 사랑을 나눈다. 그들에게 있어 사랑은 짝짓기와 자손을 번식시키기 위한 것으로 그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서로에게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람은 유일하게 평생을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존재이다. 유독 크고 복잡하게 발달된 인간의 뇌는 인간을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사랑을 잘 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준 것이다. 인간 마음의 실체가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최근 영국 과학자들은 사람이 사랑에 빠졌을 때의 두뇌 변화를 관찰해 사랑과 우정의 차이를 과학적으로 규명했다.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인지신경학자들은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이 애인 사진을 볼 때와 친구 사진을 볼 때, 뇌의 어느 부분이 활성화되는지를 기능적 자기공명영상장치(fMRI) 기법을 이용해 분석했다. 실험 결과 애인 사진을 볼 때의 두뇌는 친구 사진의 경우와는 확연히 다른 부위에서 활성화된다는 점이 확인됐다.
두뇌에서 사랑의 감정을 담당하는 특정 부위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인간 정서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인간의 이성적 의사결정이 사랑과 미움 등의 감성에 의해 좌우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미국 아이오와대 안토니오 다마지오 교수는 정서를 담당하는 안와전두엽(눈 뒤쪽 머리 앞부분)이 손상된 환자와 그렇지 않은 정상인을 비교 실험했다. 두 피험자에게 평화롭고 아늑한 농가 사진과 처참한 재난 사진을 보여준 결과 정상인은 두 사진에 대해 안정과 흥분 반응을 각각 나타낸 반면, 환자는 동일한 흥분 반응을 보였다.
어떤 상황을 보고 판단할 때 정서가 그 밑바탕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결과다. 다마지오 교수에 의하면 판단과 의사결정 과정에 정서가 개입되며, 인간은 충분한 시간을 들여 합리적 결정을 하기보다는 과거의 정서적 기억에 따라 효율적이었던 행동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선택한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서로를 그리워하라고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만 살아갈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사랑으로 인해 더욱 살기 좋은 세상으로 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