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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부록_산천·풍토·관액 附 山川風土關扼
돌이켜 보면 한나라 재상 소하蕭何(?~BC193)가 관중關中에 들어가자마자 무엇보다 먼
저 승상부丞相府의 지도와 호적을 거두어 들였던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31) 그는 이
지도와 호적을 통해 천하 형세 중에서 강한 곳과 약한 곳, 요충지를 상세히 파악하여 대업
을 이루었으니, 풍요風謠·민속民俗·산천山川·관액關扼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과 깊
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공禹貢」32)을 보면 구주九州의
토질과 물산物産에 관한 내용이 모두 실려 있다. 이것이 이 부록을 <도읍의 건립> 뒤에
배치한 까닭이다.
우리나라가 소중화小中華로 일컬어진 것은, 우리나라가 중국의 예악문물禮樂文物을 본
받고자 하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산천과 풍속은 그 자체가 중국과 유사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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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돌이켜 보면 … 있다: 소하는 강소성江蘇省 패군沛郡 풍현豊縣 출생이며, 한신韓信 장량張良 조참曹參과 함께 고조의 개국공
신이다. 진秦나라의 하급 관리로 있으면서, 일찍이 고조 유방이 무위무관無位無官일 때부터 접촉을 가졌다. 유방이 진나라 토
벌을 위해 군사를 일으키자, 종족 수십 명을 거느리고 객원으로서 따르며 모신謀臣으로 활약하였다. 진나라 수도 함양咸陽에
입성하자, 진나라 승상부丞相府의 지도, 호적, 문서文書를 입수하여 한漢나라 왕조 경영의 기초를 다졌다.
32) 우공禹貢: 『서경書經』의 편명篇名으로, 중국 구주九州의 지리地理와 물산物産에 대하여 쓴 고대 지리서古代地理書이다.
이다.33) 중국의 산천은 모두 곤륜산崑崙山34)에서 갈라져 나와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뉘어져
있지만, 사해四海로 둘러싸인 넓디넓은 대륙은 애초에 강역으로 나뉘어져 있지 않아서,
사방의 노래와 풍속, 물산物産이 각각 달랐지만 서로 뒤섞여 있었다. 성인은 땅의 이치에
따라 이를 구분하였고, 그 결과 구주九州라는 이름이 생겼다. 우리나라 산천에서 백두산
은 중국 산천에서 곤륜산이 차지한 위상과 같다. 우리나라 수천 리 강역은 백두산으로부
터 시작하여 서로 얽혀들며 배치되어 있으니, 우리나라는 동쪽 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또
하나의 천지인 셈이다.
중국의 서북 지방에서 무를 숭상한 것은, 우리나라의 평안도에서 장수를 많이 배출한 것
과 같다. 중국의 동남 지방에서 문文을 숭상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안동 지방에서 재상을
많이 배출한 것과 비슷하다.35) 중국의 기북冀北 지방에서 좋은 말을 많이 생산하는데, 우
리나라의 평안도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준마駿馬가 많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면 중국
의 절동浙東은 장요미長腰米로 유명한데, 이것은 우리나라 호남 지방이 벼농사에 적합한
토질을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중국의 동쪽인 노魯 지방은 도서圖書의 고을이라고
할 만 한데, 이것은 경상도가 현송絃誦의 고장인 것과 같다.36) 중국의 대岱 지방에서는 삼
과 모시37)를 공납貢納하는데, 이것은 충청도에서 모시를 주업으로 하는 것과 같다.
그 밖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풍속과 노래, 특산물, 산천의 험준함, 요지要地의 위치가
중국과 비견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소중화小中華라는 말이 어찌 예악과 문물만을 기준
으로 하여 붙여진 것이겠는가? 풍속에 따라 백성들을 교화하고, 지형에 따라 군대를 배치
하는 것은, 본디 왕의 정치에 매우 중요하다. 나는 보고 들은 일을 대략적으로나마 제시하
여 정부가 관찰하고 채집하는 일에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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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우리나라는 … 때문이다: 명의 멸망과 함께 조선 사족들의 입장은 변화하여, 송시열이 “오랑캐의 땅이었던 곳이 중화가 되는
것은 다만 변화에 달려 있을 뿐이다.[土地之昔夷而今夏 惟在變化而已]”라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오랑캐 땅이 중화가 될
수 있는 길은 예악 문물을 받아들여 변화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우하영은 중국과 조선의 풍토가 같은 것이 아니라,
다만 구조적인 유사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이와 같이 구조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의 의미는 대상이 되는 두 영역이 독
자적으로 존재한다고 읽힐 개연성도 있지만, 이를 통해 문화적으로 보편적인 시각을 제공해주는 의미도 크다. 결과적으로 이
구절은 그의 관점이 어디까지나 조선 내부의 지리적 구조와 그에 따른 도읍과 팔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도입부로써 이해
할 필요가 있다.
34) 곤륜산崑崙山: 중국 서쪽에 있다는 전설상의 명산으로, 선녀나 불사약을 가진 선녀인 서왕모西王母가 산다는 낙원이다. 아름
다운 옥이 생산된다고 한다.
35) 중국의 … 유사하다: 여기서 중국의 동남 지방은 양쯔강 하류의 강남 지방을 말하는 것으로, 수많은 과거 급제자들이 배출되었
다. 어쨌든 이곳과 거의 같은 위치라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 동남쪽에 안동에서도 많은 과거 급제자가 배출되었다.
36) 이것은 … 같다: 여기서 현송은 예악과 학문을 익힌다는 뜻인데, 조선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경상도를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예악을 익히고 학문에 힘쓰는 풍속이 아직까지 없어지지 않고 있다고 일컬어졌다.
37) 모시: 모시풀·저마로 짠 옷감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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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경기도 畿甸
서울은 오부五部로 이루어져 있고,38) 양주楊州와 고양高陽의 경계에 걸쳐져 있다. 백두산
白頭山 정상의 천지天池로부터 서쪽으로 물이 흘러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
혼돈강混沌江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豆滿江이 된다. 압록강과 두만강 두 강은 우
리나라와 중국의 경계가 된다. 이곳에서 혼돈강을 따라 서북의 산천으로 뻗어 가면, 오라
국烏喇國이 있고, 동북의 산천으로 차츰 뻗어나가면 여진국女眞國이 있는 곳이다.【오늘
날 영고탑寧古塔39)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백두산으로부터 남쪽으로 향한 정간正幹은
장백산長白山이니, 구불구불 수천 리를 뻗어가다가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면 그곳에 경기
도가 있다. 경기도로 들어서는 첫 번째 경계에서는 백운산白雲山과 운악산雲岳山이 있는
데, 평평한 곳에서 우뚝 솟아 있다. 그 맥이 휘돌아 축석현祝石峴과 불곡산佛谷山이 되고,
다시 우뚝 일어나 도봉산道峯山과 삼각산三角山이 되니, 그 지형은 용이 서려 있고 호랑
이가 걸터앉아 있는 형국이다.
산천이 험악한 산세를 벗어나면서 아름답고 밝으며, 토질은 모래와 돌이 뭉쳐 있다. 남산
에는 푸른 소나무가 울창하고 한강은 끝없이 넘실거리니, 겉옷과 속옷, 옷깃과 허리띠가
잘 갖추어져 있는 형세다. 이곳의 형세는 중국 금릉金陵의 세 호수를 연상케 한다. 푸른
삼태기 같은 기운이 이곳을 길이길이 보호하고 봉래의 오운五雲과 문물의 빛남, 예악으
로 화락해 진 것이 은주殷周 시대를 능가한다. 인심은 간략함을 좋아하지만, 습속은 화려
한 것을 숭상하여 사치를 좋아하고 근검하는 풍조가 적다.
이곳에서 사대부들의 생활은 벼슬자리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반면에 마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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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오부五部: 조선 시대에 한성漢城을 중부中部·동부東部·서부西部·남부南部·북부北部의 다섯 구역으로 나눈 행정 단위로
서, 각 구역안의 소송訴訟·도로道路·금화禁火·택지宅地 등을 관장하던 관아官衙를 말한다. 태조 3년에 설치하여 고종 31 년에 폐지하였다.
39) 영고탑: 중국 길림성 영안현에 있는 지명인데, 영고특寧古特이라고도 한다. 영고는 육六, 특은 좌坐를 뜻하는데, 청나라 시조
6형제가 이곳에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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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갖가지 기술과 녹봉이 나오는 자리로부터 요포料布40)·저인邸人41)·공인貢人42)·
좌판을 벌이는 시정의 행상·막비幕裨43)·시종꾼 등 여러 가지 직업으로 살아간다. 윗사
람들은 살아가기 각박하지만, 아랫사람들은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대단히 많다.
그러므로 사족은 과거로 관직을 얻지 못하면, 가난하여 생활하기조차 힘들어져서 끝내
떨쳐 일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여항의 평민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살아갈 방도가 있다.
빈손으로 일가를 이루기도 하고, 자산이 없는 데서 시작하여 생업을 꾸려나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족이 일단 관록을 잃으면, 알거지가 되어 자칫 여항의 평민만도 못한 생활을
하는 수가 있다.
서울의 동북쪽 지역에 있는 지평砥平·양주楊州를 거쳐 장단長湍·마전麻田까지의 고
을들은 산간 지대에 있다. 지평과 양주는 물이 가장 맑고 차다. 이곳의 백성들은 습속이
검소하고 근면하여 남자는 밭에서 일하고 여자는 비단 실과 삼으로 옷감을 짠다. 모여서
마시고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오직 설날에만 문안하고 선물을 보내는 예속禮俗이
있다.
동북쪽 지역은 산업과 생리生利44)가 강원도 영서嶺西 지방의 여러 고을과 대체로 같
다.【양주楊州의 서쪽 지방은 강원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풍속도 완전히 딴판이다.】
농업農業은 밭이 많고 논이 적으며 화전火田에 힘쓴다. 심는 곡식으로는 밀·보리·봄보
리·가을보리·팥·조·메밀·피·기장이다. 그중 가장 힘쓰는 것은 조·목면·삼베이
고 사이짓기를 한다. 삼은 적게 심고 양잠에도 힘쓴다. 밭농사를 하고 겨릿소45)로 경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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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요포料布: 급료로 주는 무명이나 베. 여기서 요料는 문무백관에 속한 사람들이 받는 녹祿과는 구별되며, 풍저창豊儲倉에서 수
령하였다.
41) 저인邸人: 서울에 주재하면서 지방 관청의 일을 대행하는 아전으로서, 이들은 주로 그 지방의 공물貢物·입역立役 등의 일을
대행했다. 경저리京邸吏, 경주인京主人·경저인京邸人·저리邸吏 등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42) 공인貢人: 조선조 때 왕궁과 각 관청에서 쓰는 물품을 납품하는 일을 청부 맡은 사람을 말한다. 15대 광해군 이후 대동법大同
法이 실시되어 모든 공물을 대동미大同米로 대신 바치게 되자, 민간에게는 공동 출자 기구인 공계貢契를 조직하여 나라에서
필요한 물품을 공인으로 하여금 납품하게 하고, 그 대가代價를 대동미로 받았다.
43) 막비幕裨: 우하영은 막비의 폐단에 대하여 『천일록』제7책에서 지적하고 있다. 이 글에 의하면, 막비는 도수신道帥臣들이 각
고을의 치적治績과 민정民情을 염탐케 하고 영부營府의 재물과 곡식의 장부도 담당하게 하기 위해 데리고 간 그의 사인私人과
문객門客을 가리킨다.
44) 생리生利: 그 땅에서 생산되는 이익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농업과 구별되며 시장에 내다팔 수 있는 물건들을 생산하는 부업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45) 겨릿소: ‘겨리를 끄는 소’라는 뜻이다. 겨리란 ‘소 두 마리가 끄는 쟁기’를 말하므로, 겨릿소는 두 마리의 소로 밭을 갈 때 ‘겨릿소
를 부린다.’ 라고 한다. 겨릿소는 안쪽에 있는 소와 바깥에 있는 소가 한 쌍으로서, 각각의 소는 맡은 자리에 따라서 근육이 달리
발달하므로 자리를 바꾸어 사용할 수 없다. 따라서 이와 같은 기능 분화로 인해 각각의 소를 가진 두 집안이 사회적으로 결합하
는 조건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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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 밭을 깊이 갈므로 밭작물의 착근이 단단하다. 밭의 경우는 파종播種하는 경우가 많
고 모내기는 적다.
벼의 모내기는 시기가 빠르므로, 가물어도 한재旱災가 되는 경우가 드물다. 토지는 본디
척박한 곳이 많고 토질이 단단하다. 농가가 부지런하여 밭에 거름을 쓰고 자주 김매기를
하므로, 수확량이 삼남三南 지방46)이나 양서兩西 지방47)의 비옥한 땅만큼은 못해도, 경기
좌도[경기 동부 지방]의 약간 비옥한 곳보다는 낫다.
서울의 동북쪽 지방은 생리生利가 삼농三農48)의 여가에 땔나무와 숯을 생산하는 데 있
다. 배와 소, 말은 연해와 협로 등을 상황에 맞게 이용한다. 판재板材와 가재家財에 사용
될 나무들은 거주하는 곳에서 얻기 쉬운 것을 택한다. 1년 내내 고생이 많지만, 흉년을 만
나 유리도산遊離逃散할 염려는 없다. 그 밖에 울타리나 밭의 주변에는 모두 뽕나무·과
일나무·닥나무·칠나무를 심고, 담배·벌꿀·산나물에서 이익을 얻는다. 대개 오곡은
나무 그늘에서는 잘 자라지 않지만, 뽕나무와 닥나무 아래서는 무성히 자라니, 이에 옛날
부터 백성들이 재배하였다.
경기좌도[경기도의 동북쪽 지방]에는 평야 지대의 고을들이 있다. 이곳에서는 원래 파종
이 없다. 이것은 풍토 때문이기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뽕나무를 심도록 권장한 안주安州
의 상공相公 같은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1547~1634)49)이 황해
도와 평안도에 부임하였을 때 안주安州의 북문 바깥에 뽕나무를 심고 양잠養蠶하도록 권
하였다. 황해도와 평안도에 명주가 많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
서울 서쪽 지역의 여러 고을 가운데에서 고양과 파주 두 고을만은 서울과 그다지 멀리 떨
어져 있지 않다. 이곳은 산과 들이 서로 섞여 있어 벼와 조를 절반씩 재배한다. 게다가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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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삼남 지방: 경상도·충청도·전라도를 말한다.
47) 양서 지방: 황해도와 평안도를 말한다.
48) 삼농三農: ‘씨앗을 뿌리고’, ‘김을 매서 가꾸고’, ‘수확하는 봄·여름·가을의 농사철’을 말한다.
49) 이원익李元翼: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한성부 출신이다. 태종의 아들 익녕군 치益
寧君錙의 4세손이며, 수천군秀泉君 정은貞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청기수靑杞守 표彪이고, 아버지는 함천성咸川正 억재
億載이며, 어머니는 감찰 정치鄭錙의 딸이다. 강서姜緖 조충남趙忠男 등과 교유하였다. 키가 작아 키 작은 재상으로 널리 불
렸다. 성품이 소박하고 단조로워 과장이나 과시를 할 줄 모르고, 소임에 충실하고 정의감이 투철하였다.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나, 집은 두어 칸짜리 오막살이 초가였으며, 퇴관 후에는 조석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청빈했다 한다. 인조로부터 궤장几
杖을 하사받았다. 저서로는 『오리집』 『속오리집』 『오리일기』 등이 있으며, 가사로 「고공답주인가雇貢答主人歌」가 있다. 인
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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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과 뽕나무, 땔나무, 숯으로 이익을 내는 물건으로 삼고, 교통이 편리하며 풍속이 인후하
고 부유하다. 김포와 양주 등 여러 고을들은 바닷가나 강가에 위치해 있어서, 땅이 척박하
고 갯벌이며 물은 탁하고 짜다. 그러므로 오직 벼농사에만 힘쓴다.
백성들의 습속은 고양과 파주 두 고을이 양주·포천과 대략 같다. 그 밖의 여러 고을들은
백성들이 거칠고 게으르며 절약하는 풍속이 전혀 없다. 모여 술 마시고 놀기를 좋아하며,
사회社會50)에서 활쏘기만 한다. 농사철 4~5개월을 제외하고는 모두 잡기雜技만을 능사
로 하여, 부녀들도 길쌈에 힘쓰지 않는다. 농업에서 밭은 매우 척박하다. 높은 곳은 건조
하고, 낮은 곳은 갯벌이다. 보리·밀·콩·팥만을 심고 물가에는 사탕이나 기장을 재배
한다. 바다 가까이에 심은 보리와 밀은 자주 독 안개에 의해 손실을 입기도 한다.
논은 작은 샘만 있어도 모내기할 수 있는데, 수원지가 있는 곳 이외에는 건파乾播하는
곳이 많다. 모내기하는 곳도 많으므로 다른 지역보다 한재旱災가 더 심하고, 강 연안의
물 가까운 곳에서는 매번 수재를 입는다. 땅이 넓기 때문에 전적으로 광작廣作를 한
다.51) 풍년을 만나면 수고하지 않고도 수확이 많아서, 쌀밥에 생선국을 먹는 즐거움이
있지만, 흉년에는 열 집에 대여섯 집은 유리도산한다. 밭에서는 호릿소로 경작하므로,
내린 뿌리가 깊지 않아서 한재를 입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고, 밭에 거름을 쓰지 않으므
로 수확량도 적다.
경기좌도에서는 목면·뽕·채소·과일로 이익을 낼 수는 없지만, 생리가 곡식 농사 이외
에도 바다 가까이에서는 물고기와 소금을 생산하고, 강 연안에서는 땔나무 장사를 한다.
남자들은 농사에 게으르고, 여자들도 길쌈에 힘쓰지 않으니, 옷과 음식이 모두 모자란다.
서울 이남의 여러 고을 중에서 오직 안산安山만이 산과 들이 서로 섞여 있고, 토질이 비교
적 비옥하다. 목면과 삼에서 이득을 보진 못하지만 보리·밀·콩·팥·쌀·기장을 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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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사회社會: 사일社日에 모이는 촌민村民의 모임을 말한다. 이 때 사일社日은 입춘·입추가 지난 뒤 다섯 번째의 무일戊日이다.
입춘의 것을 춘사春社, 입추의 것을 추사秋社라고 하는데, 춘사에는 곡식의 발육을 빌고, 추사에는 그 수확을 감사한다.
51) 광작廣作: 우하영에 관한 초창기 연구에서는 그를 농업 관련 전문가로 위치 짓고, 그런 관점에서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중 큰
논란이 된 것은 소농 경영과 광작의 문제다. 우하영은 겸병에 의한 광작을 비판하고, 집약적 농업을 통해 노동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소농 경영을 주장하였다. 김용섭은 당시의 시대적 진전을 소농을 극복하고 광작 경영으로 진전하는 것으로 인식하였
으므로, 소농 경영을 광작 이전의 미발달된 농업 경영으로 본다. 한편 미야지마 히로시는 소농 경영을 주장하는 우하영의 광작
비판을 근거로, 19세기 초에 가서나 광작에 집약 농법이 가세한 것으로 보고 우하영의 시대에서 광작은 아직 미성숙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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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적합하며, 어염과 땔나무·감나무를 이익을 위한 산물로 삼는다. 사람들은 많지만 선
비는 드물다. 농업은 광작하지 않고, 풍년이 들더라도 쌀 한 톨도 낭비하지 않으므로 흉년
을 만나도 유리도산하는 사람이 적다.
여주驪州·이천利川·안성安城·죽산竹山·양성陽城·진위振威 등의 고을들은 모두
평야 지대이니 토질이 비교적 비옥하며, 논이 많고 밭은 적다. 용인과 광주는 산과 들을
모두 아우르고 있고, 금천衿川과 과천果川의 토양은 모래와 돌이 많다. 백성들의 습속에
대해서 말한다면 서울 가까이에 있는 여러 고을들은 대체로 게으르고 무리지어 놀고 술
마시기를 좋아하며 잡기를 즐기지만, 그 밖의 고을들은 대체로 부지런하고 재산 모으기
를 좋아하여 술 먹고 노는 것을 좋아하지만 일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다. 사회社會에
서 활쏘기하는 풍속이 있는 데, 풍속 때문에 그런 것이지 그것을 전적으로 숭상하는 것
은 아니다.
농업은 대체로 밭은 적고 논이 많아서 벼농사를 많이 한다. 토질에 따라 밀·보리·콩·
팥을 심는데, 봄보리를 많이 심는다. 밭에 거름을 쓰지 않고 깊이 경작하지도 않으므로 한
재旱災를 당하는 일이 많고 수확량도 적다. 뽕과 삼만을 재배하지 않고 목면을 사이짓기
하지만 서너 차례 김매기를 할 뿐이고, 게다가 사탕과 깨 등 여러 종을 심는 경우가 많다.
밭에서는 모두 호릿소로 경작하며 논은 파종이 적고 모내기가 많다. 여주와 이천에서는
올벼만을 재배하니, 그 토질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여주 등에서의 생리로는, 서울 가
까이에 있는 2~3읍이 삼농三農을 제외한 여가에 소와 말을 부려 땔나무를 파는 것을 오
로지 업으로 삼는다. 그 밖에 여러 고을들은 농업 이외에 살림에 달리 보탤 것이 없어서,
곡식을 팔고 소금을 싣고 가서 면과 바꾸는 일에 의지하는 수도 있지만, 마을의 돈벌이는
농업에만 있고, 채소와 과일에서 얻는 이익은 없다. 남양南陽·인천仁川 등의 고을은 물
고기와 소금, 감에서 이익을 낸다.
화성부華城府는 동쪽으로 용인龍仁과 인접해 있고, 남쪽으로 진위振威와 이웃해 있으며,
서남쪽으로는 바다와 접해있고, 서쪽으로는 남양南陽과 붙어 있고, 북쪽으로는 광주廣州
와 인접해 있다. 광교산光敎山이 진산鎭山이고, 화성부성의 근처에는 모래와 돌이 많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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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쪽 먼 마을에는 누런 진흙이 많다. 대개 부의 경내 전체가 들이고, 명산대천은 없다.
화성부는 백성들의 습속이 게으르고 어리석으며 거칠어서 근검하는 풍조가 적은데, 서남
쪽의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 사람들은 더욱 어리석고 거칠다. 옛날부터 문예가 적고 농사
일을 하는 여가에 사회社會에서 활쏘기하는 것을 능사로 여겼으며, 무리지어 술 마시고
모여 놀기를 좋아한다. 마을에서는 잡기雜技가 풍조를 이루어, 부녀婦女들도 방적하는
일이 적기 때문에 식량을 구하는 것보다 옷 구하기가 더 어렵다. 이곳의 인심은 사치와 분
수에 넘치는 것을 좋아하고 두려움이 많다.
화성부의 농업農業에 대해서 말한다면, 이곳 사람들은 모두 농사에 근면함이 부족하다.
밭에는 보리·콩·팥을 심는다. 오직 벼농사에만 힘쓰며 광작廣作한다. 파종이 적고 모
내기하는 경우가 많다. 땅이 척박하고 부세가 무거워서,52) 농민들은 먼 미래의 계획을 세
우지 못한다. 서남쪽은 평야니 건파乾播하는 경우가 많다. 곡식이 익으면 벼의 낱알이 낭
자할 만큼 식량이 풍부하다. 그러나 이삭이 팰 때, 비가 늦게 내리면 혹독하게 재난을 당
하여 유리도산하는 백성들이 많다. 밭은 호릿소로 경작하고, 거름을 쓰지 않고 깊이 갈지
도 않으므로 수확량이 대단히 적어서, 마을에 부유한 집이 드물다.
화성부의 생리生利에 대해 말한다면, 서남쪽 바다 가까이에서는 어염을 수입원으로 삼
고, 전체적으로 목면·뽕·채소·과일에서 이익을 내는 일은 없다. 감을 심기도 하지만
많이 심지는 않는다. 약간의 자산이 있는 사람은 미곡·목면을 판매하는 것에 의존한다.
마을사람들이 돈을 곡식에만 사용할 뿐이고, 그 밖에는 생활에 보탤 것이 없다.
강화부江華府는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서남쪽은 끝없는 대양이고 동쪽으로는 통진通津
과 물을 경계로 삼으며, 북쪽으로는 교동喬桐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마니
산摩尼山이 진산鎭山53)이다. 이곳은 비록 섬이더라도 산과 들이 서로 섞여 있고, 땅은 붉
은 점토가 많고 토질은 약간 비옥하며, 바다 가까이에 갯벌이 있다. 백성들의 습속은 어리
석고 거칠며, 부지런하지만 인색하다. 여럿이 술을 마시고 즐겨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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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땅이 척박하고 부세가 무거워서: 우하영은 화성의 부세가 무겁다는 주장을 정조와 순조 때 올린 응지상소에서 밝히고 있으며,
여기에서 토지를 다시 측량하고 토품에 따라 등급을 다시 매길 것을 청하고 있다.
53) 진산鎭山: 나라나 국도國都, 고을 뒤에 있는 큰 산을 가리키는 말로, 흔히 주산主山이라고도 한다. 혈 자리가 있는 명당 뒤에 위
치하기 때문에 후산後山이라고도 불리며, 그것을 진호鎭護한다는 의미에서 진산이라는 명칭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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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생산에만 힘쓴다. 장교와 서리들은 분수를 모르고 제멋대로 날뛰니, 명분이 거의 없
고 문예의 풍조도 적다.
강화부 사람들은 다른 고을로 이사 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서 식량 부족에 허덕인다. 해
호海戶는 어염魚鹽를 생업으로 삼고, 육지의 백성들은 농작을 생업으로 한다. 목면과 뽕
이 토산물은 아니지만 부녀자들은 방적紡績에 힘쓴다. 농업은 밭에 밀·보리·콩·팥을
심는데, 밀과 보리는 대체로 토질에 맞는다. 논에서는 파종도 하고 모내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은 많고 땅은 좁으므로 광작廣作할 수 없다. 오직 노동력에만 의거해 열심히 농사지
으며 산다. 밭에 인분을 쓰는 일에 힘쓰고, 호릿소로 밭을 간다.
강화부에서 이익을 내는 곳은 해호海戶인 경우에 어염이다. 배를 운행하여 어염을 판매
하니, 온 집안사람이 어염을 배에 싣고 다른 경내로 가서 한 해를 보내는 경우도 있다. 뭍
에 사는 사람들은 농업 이외에 자리를 짜거나 감나무 재배를 업으로 한다. 비록 해도海島
라도 땔나무와 풀이 흔해서 밥 해먹기가 매우 편리하므로, 사람들은 이곳을 낙원이라고
한다.【교동喬桐은 풍속이 본부本府와 대체로 같고, 왕골자리 짜는 일을 업으로 삼는다】 .
개성부開城府는 경기도의 바다와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다. 동쪽으로는 장단長湍, 남쪽
으로는 풍덕豐德, 서쪽으로는 해서海西의 배천白川과 물을 사이에 두고 경계를 이루고
있고, 북으로는 금천金川과 접해 있으며, 송악崧嶽을 진산鎭山으로 삼고 있다. 땅에는 모
래와 돌이 많고 토질은 굳고 단단하지만 비옥하다.
개성부는 백성들의 습속이 부지런하지만 인색하고 장사에만 힘쓴다. 어린 아이라도 저울
질할 줄 알 정도로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니, 교활하게 속이는 습속이 많다. 이곳에서 유업
儒業을 닦는 사람들은 대체로 문예가 있고 화려한 것을 숭상하지만, 재산이 풍족해지고
편안해져서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 적다. 봄에 꽃피고 가을에 단풍이 들면, 남녀가 날을
정해 무리지어 음식을 싸서 놀러 다닌다. 이익만을 좇고 예의는 저버리므로, 부녀들이 송
사를 벌여 관정이 늘 시끄럽다. 장사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팔도에 두루 퍼져 있지만,
연말만 되면 어김없이 집에 돌아와서 과세過歲하고는 또 떠나는데, 이것은 관官이 기한
을 정해 그렇게 하도록 명령을 내린 때문이다. 이러한 규칙이 없었다면 이익을 좇아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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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가서 집안사람끼리도 서로 만날 기약이 없었을 것이다.
개성부는 농업에서 밭과 논이 절반씩이다. 토지가 극히 귀하므로 농가는 밭에 인분을 쓰
고, 농사에 부지런하다. 밭에 심는 작물은 밀·보리·기장·조·사탕·수수·콩·팥·
목면이다. 논에서는 파종과 모내기를 절반씩 한다. 뽕과 삼도 토질에 적합하다. 밭에는 겨
릿소나 호릿소로 경작한다.
개성부에서 이익을 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장사뿐이다. 부내府內에는 옛 도읍의 문물이 있
으므로, 거리와 시장의 온갖 물건들은 서울과 마찬가지다. 바깥 마을은 농업 외에도 채소,
과일, 물고기로 먹고 살며, 강 연안에서는 선박업을 하고, 협곡 가까이에서는 땔나무와 탄
으로 이익을 낸다. 비록 폭은 적으나 농상과 채소·과일·물고기·소금·목면·삼·닥·
칠 등 여러 물건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그래서 큰 흉년을 만나도 하민下民들이 유리도
산하는 폐해는 없다.
한강 이북의 여러 읍들은 산천이 모두 강원도의 큰 산골짜기로부터 나오고, 조산祖山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므로 모두 산간 지대에 있는 읍이다. 밭이 많고 논이 적다. 풍속은
근검하고 농사에 힘쓰며 장시場市는 드물다. 그러므로 이익을 좇는 계산이 적고, 노동력
으로 살아가는 습속이 많다. 농작農作 이외에도 목면·뽕나무·땔나무·숯·닥나무·
칠나무·산용·나물·과일 등을 수입원으로 삼는다.
한강 이남의 여러 군들의 산천은 모두 속리산俗離山에서 뻗어 나와 충청도 이북을 지난
다. 조산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모두 평야의 고을이니, 논이 많고 밭은 적다. 여
주·이천·안성·죽전은 모두 땅이 비옥한 곳으로 유명하고, 그 밖의 나머지 읍들은 모
두 척박하다. 농사에 나태한 사람이 많아서, 농사를 시작하는 시기가 매번 늦어지고, 올벼
인 경우만 세 번 김매기하고 나머지는 두 번 김매기하며, 모내기한 것은 한 번 김매기 할
뿐이고 광작廣作한다. 장시는 날마다 여는데, 사방의 경계가 서로 가까우므로 말단의 이
익을 좇는 장사치들이 많다. 술 마시며 한가롭게 노는 풍습이 있다.
경기도의 상황을 총괄적으로 논하자면 동쪽은 산골짜기에 가까우므로 골짜기 밭이 많아
서 메마르고, 자갈이 많아 수확이 적다. 서쪽은 바닷가이므로 갯벌이 많아서 수확이 적다.
밭갈이로 하루의 수확량은 기껏해야 4~5섬에 불과하고, 논에 1말을 뿌려 얻은 수확량도
많아봐야 20~30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곳의 전답들은 모두 서울의 사대부와 여항閭巷의
크고 작은 여러 집안들이 차지하고 있다. 농민들은 고생스럽게 애써 경작하여도 답주畓
主와 절반씩 나누고 나면 남는 것이 거의 없다. 환곡還穀·신포身布·관납官納·아전衙
前54)들의 토색討索을 그 남은 것에서 마련해야 한다. 이것이 경기도의 백성들이 팔도에서
가장 곤궁한 까닭이다. 그러나 한강 북쪽 산골짜기 가까운 곳의 백성들은 이미 목면과 뽕
나무, 배나무, 밤나무에서 얻는 이익이 있으므로 관혼상제冠婚喪祭를 당하더라도 집안에
서 마련해 내는 경우가 많고, 낫을 짊어지고 산으로 들어가서도 하루 동안 먹을 것을 마련
할 수 있었으므로 약간 보존하는 경우가 있다.
한강의 남쪽 들에 사는 백성들은 크고 작은 일에 필요한 물건들을 어느 한 해 풍년이었을
때의 곡식으로 마련한다. 만일 흉년이나 의외의 사고를 만나면 모두 다 싹 쓸려나간다. 이
른바 양반 족속들은 친히 맡아 할 겨를이 없어서 대체로 종들이나 고용인의 손에 맡긴다.
밭 갈고 씨 뿌리고 김매기하고 수확하는 방법은 농민들이 자력으로 하는 것만 못하고, 수
확도 상천常賤이 직접 마련한 것보다 적다. 따라서 점차 빈궁해져 죽음에 이를 정도로 넉
넉지 않게 된다. 문학文學의 도道도 이에 따라 무너지게 되었으니, 비록 경기도가 근본이
되는 땅이지만, 살아가기가 힘들어 헐벗으며, 문물이 어리석고 거친 것도 참으로 이 때문
이다. 왕의 교화가 나온 곳이지만, 법의 강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전을 능멸하는 풍속이
오히려 다른 도보다 심하다.
경기도 전체의 관액과 형편을 논한다면 송악산崧嶽山과 천마산天摩山은 북관北關의 대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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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아전衙前: 조선 시대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 근무하던 하급 관리. 일명 이서吏胥라고도 불리는데, 크게 경아전京衙前과 외아
전外衙前으로 구분된다. 중앙의 각 관청에 근무하는 하급 관리로는 녹사錄事·서리書吏·조례誓隷·나장羅將·차비군差備軍 등
이 있었다. 이들 아전은 모두 중인 계층이었는데 경아전의 녹사는 종6품까지 승진할 수 있었고, 서리는 종7품 또는 종8품까지
승진할 수 있었으며, 거관去官(다른 관직으로 옮김) 후에는 체아직遞兒職 또는 산관직散官職 및 무록검교직無祿檢校職을 받
을 수 있었다. 외아전은 향리鄕吏와 가리假吏로 나누어지는데, 향리는 그 지방 출신으로 대대로 아전을 하는 사람을 말하고,
가리는 다른 지방에서 와서 임시로 근무하는 아전을 말한다. 아전이라는 말은 군수·현령 등 지방 수령이 근무하는 정청正廳의
앞에 그들이 근무하는 청사가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인데, 정청 앞에 있는 이방청吏房廳을 비롯한 육방청六房廳이 외아전
의 주 근무처였다. 한편, 이들 경아전과 외아전은 양반으로부터 심한 차별을 받았다. 경아전은 고려의 녹과전제祿科田制 실시
때부터 과전을 지급받지 못했고, 양반보다도 승급을 위한 근무 일수가 많았으며, 녹봉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외아전
인 향리는 조선 초부터 과거 응시 자격이 대폭 제한되었으며, 녹봉도 없었다. 세종 조부터는 이들에게 주어오던 외역전外役田
도 혁파되었으며, 원악향리처벌법元惡鄕吏處罰法으로 향리의 토호적 성격을 억제했을 뿐만 아니라, 유향소로부터도 철저한
규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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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幹과 직접 닿아 있다. 장백산長白山으로부터 구불구불 뻗어 나와 낭림산狼林山이 되고
더 뻗어 두류산頭流山이 된다. 방향을 틀면 개연산開蓮山이 되고 다시 방향을 바꾸면 기달
산箕達山과 학봉산鶴峯山,【토산현계兔山縣界이다.】 수룡산首龍山【마전군계麻田郡界이
다.】이 된다. 백치白峙와 해서海西의 수토遂兔와 신곡新谷 등의 읍들은 고개를 등지고 경
계를 나누어, 바다 끝까지 다하여 분수령이 된다. 대간은 구불구불 뻗쳐 관동 대로에서 불
곡산·도봉산·감악산·소요산이 되어 큰 여울로 금대를 삼고 벽처럼 서 있다.
서쪽에서 오는 길은 만일 송경松京의 직로直路를 제외한다면, 수토遂兔~신곡新谷~마전
磨田~연천漣川의 길을 택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북쪽으로부터 오는 길은 철원
鐵原~회양淮陽~김성金城~영주永州의 직로直路를 택하지 않는다면, 추가령楸加嶺을
넘어 큰 여울을 취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으며, 모두 구불구불 험하고 막힌 곳이다. 만
일 급한 사변이라도 생기면 방어하는 사람은 믿을 만한 요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오직 동
남쪽만이 텅 빈 곳이므로, 위세를 떨칠 만한 방어 진영을 이곳에 설치하려는 계책을 반드
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아래의 「관수만록觀水漫錄」을 참조하라.】
지금 여기에 병영을 설치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과 화성華城 두 성과 짝을 이룬다면 참으
로 만세의 좋은 방책이 될 것이다. 동쪽 길은 원주영原州營으로부터 서쪽으로 올라가는
직로이니, 차단되는 곳이 조금도 없다. 협로峽路가 비록 험준하고 굳건하다고는 하지만,
양서兩西 지방의 가운데에 있는 여러 산간 지대의 읍들에 비한다면 들과 같으니, 하물며
그 도로가 일직선에서 나와서 다시 다른 길이 없는 것임에랴. 이것이 진鎭을 특별히 설치
하여 길을 차단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이에 대한 나의 견해는 이렇다. 흥인문興仁門에서 동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봉안역奉
安驛이 있고, 그 역의 동쪽에 고랑진皐浪津이 있으며, 그 사이의 산세는 둘러싸여 험하고
감겨든다. 가운데는 평평한데 바깥은 자른 듯하니, 여기에 만일 서너 길의 흙성을 쌓고 여
첩女堞55)을 설치한다면 바로 철옹성이 될 것이고, 바깥은 가파르고 안은 평평하며 수원水
源이 깊고 풍족하니 참으로 천연의 요새가 될 것이다. 앞에 큰 강에 임해 있고, 월계月溪
와 흑수黑水의 사이에 있으니, 참으로 이른바 한 명이 만 명을 감당할 수 있으며 아무도
열 수 없는 곳이다. 만일 이곳에 성을 쌓고 진장鎭將을 두어 물과 뭍을 관할하여 방어하는
것을 책략으로 삼는다면 관동 일대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광주계廣州界 안에 중
영中營을 옮겨 설치하면 대단히 좋다】.
경기도에서 산성山城을 설치할 만한 곳으로는 옛날부터 홍복洪福【양주부楊州府의 서남
西南이다.】과 산내山內【양주부楊州府의 동북東北이다.】를 꼽았지만, 지세地勢는 고량진
皐浪津만큼 긴요한 곳이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국면局面이 협착한 것만을 기준으로 삼
는 일이 많지만, 평상시에는 수백 호가 거주할 수 있고 위급할 때에는 수천 명의 병사를
수용할 수 있으며, 두 개의 큰 강이 합류되는 안에 있어, 실로 한 사람으로도 막을 수 있을
만큼의 험한 땅이다. 아는 사람이 이곳의 형편을 상세히 살피게 한다면 마땅히 조치할 만
한 책략이 있을 것이다. 파사성婆娑城56)은 양근楊根과 여주呂州 사이에 있으며, 바로 앞
에는 큰 강이 흐르니, 참으로 지형이 뛰어난 곳이다. 그런데 별 이유 없이 폐기되었으니
참으로 애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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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여첩女堞: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성 위에 낮게 덧쌓은 담을 말한다.
56) 파사성婆娑城: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과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에 걸쳐 있는 삼국 시대의 성곽으로, 현재 사적 제251호로 지정
되어 있다.
우하영의 천일록 --도읍의 건립 建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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