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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물건도 없는데 먼지가 끼겠는가?〈62〉혜능(慧能)대사 ⑦ |
又偈云 菩提本非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또 게송으로 말씀하였다. “보리란 본래 나무가 아니며 밝은 거울도 또한 형상이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먼지가 끼겠는가?”
보리란 본래 나무가 아니며
밝은 거울도 형상이 아니다
![]() “내가 그대들에게 말하나니, 세상 사람의 나고 죽는 일이 크거늘 그대들은 종일토록 공양을 하며 다만 복을 지을 일만을 구할 뿐이구나. 나고 죽는 괴로움의 바다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대들의 자성이 미혹하면 복의 문이 어찌 그대들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모두 방으로 돌아가 스스로 잘 살펴보아라. 지혜가 있는 자는 본래의 성품인 반야의 지혜를 스스로 표현하여 각기 게송 한 수를 지어 나에게 가져오너라. 내가 그대들의 게송을 보고 만약 큰 뜻을 깨친 자가 있으면 그에게 가사와 법을 부촉하여 육대(六代)의 조사(祖師)가 되게 하리니, 어서 빨리 서둘도록 하라” 하였다.
5조 스님의 회상에 교수사로 있는 신수(神秀) 상좌는 이렇게 게송을 지어 올렸다.
‘몸은 보리의 나무요(身是菩提樹)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나니(心如明鏡臺)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時時勤拂拭) 때와 먼지가 묻지 않게 하라(莫使有塵埃).’
한 동자가 방앗간을 지나면서 이 게송을 외우고 있었다. 혜능스님은 한 번 듣고 이 게송이 견성(見性)을 하지도 못하였고 큰 뜻을 알지도 못한 것임을 알았다.
혜능스님이 동자에게 묻기를,
“지금 외우는 것은 무슨 게송인가?”
“행자는 모르는가? 큰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고 죽는 일이 크니 가사와 법을 전하고자 한다’ 하시고, 문인들로 하여금 각기 게송 한 수씩 지어 와서 보이라 하시고는 큰 뜻을 깨쳤으면 곧 가사와 법을 전하여 제6대의 조사로 삼으리라 하셨다. 그런데 신수라고 하는 상좌가 문득 남쪽 복도 벽에 모양 없는 게송(無相偈) 한 수를 써 놓았더니, 5조 스님께서 모든 문인들로 하여금 다 외우게 하셨다.”
이 말을 들은 노(盧)행자 혜능스님은 앞에서 소개한 게송을 지어 올렸다. 이 게송 하나로 5조 스님의 법을 이어받아 천하의 6조 혜능스님이 되었던 것이다. 두 스님의 게송은 불교의 큰 두 줄기의 사상으로 나뉘는 계기가 되었다. 소위 남돈(南頓)과 북점(北漸)이다. 불교수행이란 점점 닦아서 성불의 길로 나아간다고 보는 입장과,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달리 더 닦을 것이 없이 지금 이대로 완전무결한 부처라고 보는 입장이다. 이 두 가지의 입장은 부처님 당시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하여 견해를 달리하면서 내려오는 사상이다. 마치 시작과 그 끝이 넓어지지도 않고 좁아지지도 않는 철길의 간격과 같다. 사람은 같은 사물을 보고도 그 견해와 안목에 따라 다르게 본다. 하물며 높고도 심오한 불교의 진리에 대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사람인데 다르게 본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면 문제는 사라질 것이다.
혜능스님은 “세상에는 오직 사람이 있을 뿐이다. 몸이니 마음이니 나눌 것도 없으며 보리니 마음 거울이니 하는 것도 나눌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본래로 한 물건도 없기 때문에 먼지나 번뇌가 낄 까닭이 없다”고 보았다. “한 물건도 없다”라는 말은 인간의 절대적 존귀성을 뜻한다. 무한 광명과 무한 청정을 뜻한다. 마음을 닦는 일이 따로 있다고 보아 늘 부지런히 닦아서 먼지가 끼지 않게 해야 한다는 신수스님과는 전혀 다른 견해이다. 실은 마음을 닦는다는 주장은 영원히 끝이 없는 일이다. 오직 닦아야 하는 줄 알고 닦으면서 살아갈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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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인간의 절대적 존귀성...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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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물건도 없다 라는 말은 인간의 절대적 존귀성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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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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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기에 따라서 돈도 점도....나무석가모니불 _()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