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운형암살범들의 최후 고백
손상대 ㅣ 현대사연구가
몽양을 왜 빨갱이로 보게 되었는가
암살가담자들의 주장을 근거로 여운형의 당시 행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운형은 1945년 8월 10일 패전을 눈앞에 둔 조선총독부가 한국내의 일본인 생명과 재산이 위협받게 될 것을 우려, 한국 지도자급 인사 송진우, 김준연 들이 공백기의 국내 치안유지의 모든 권한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한다.
이때 송진우, 김준연은 한국 행정기구는 점혈세력의 인가를 받아야 하고, 중경 임시정부를 정통성을 지닌 정부로 여겨야 하며, 패전국 일본에게 협조하여 이익을 줄 수 없기 때문이라며 단호히 거절햇다.
송진우와 김준연의 거절로 총독부는 제3의 인물로 여운형을 지목하고 8월 14일 아침 8시 정무 총감 관저로 급히 초대, 협력해줄 것을 요청했고 여운형은 이 자리에서 승낙을 했다.
이때부터 치안유지의 협력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은 여운형은 좌익계의 인물로 널리 알려진 정책, 최용달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건준'을 조직한 여운형이 위원장으로 발탁되었으며, 그해 8월 30일까지 1백 45개의 건준 지방위원회가 결성됐다. 이것만으로는 조직기반이 취약하다고 생각한 여운형은 남로당의 당수 박헌영과 제휴, 건준조직 확대에 나섰다.
특히 건준결성 후 '건준치안대'를 조직케 하였으며, 이 치안대를 9월 2일부로 건준에 통합시켰다. 건준은 이같은 세력확장으로 덩치가 비대해지자 내분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건준은 창립때 제시했던 본직적 사명은 뒤로하고 점차 좌경으로 변질되어가지 시작, 결국 건준부위원장인 안재홍 및 민족진영 인사들이 이같은 사실에 분개, 건준을 사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준은 같은해 9월 3일 2차 개편대회와 함께 이강국을 비롯한 골수 공산주의자들을 간부로 등용했고 결국에는 박헌영계열의 공산당과 연합, 9월 4일 경성의전 허헌의 병실에서 바헌영, 여운형, 정백등 4명이 '인공설립준비위원회'를 거친 뒤, 9월 6일 바로 해외에서 아직 귀국도 하지 않은 민족진영인사들 중 이승만을 주석으로, 김구를 내무장관에 정해 놓고 일방적으로 내각 명단을 발표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더욱이 인공의 중앙인민위원의 내각 구성원을 살펴보면 전체인원 52명 중 72%인 38명이 공산당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김일성과의 밀담이 준 부산물
여운형은 결가가 어떻게 나타났든 김일성을 찾아 7번이나 38선을 넘어갔다. 김일성을 만나 구체적으로 어떠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지는 알길이 없으나 결과는 그의 자식들을 모두 북한에 보내 김일성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했다는 것과, 7번의 월북사실만 남아 있다.
여운형은 1946년 2월 1차 월북을 시작으로 4월(2차), 5월(3차), 7월(4차), 9월(5차), 47년 1월(6차), 3~4월경(7차)까지 모두 38선을 14번 넘나들었다. 전 북한 고위관리 서용규씨의 증언을 보면 여운형의 방북에서 나타난 행적의 일부를 알 수 있다.
여운형은 7년 1월경 김일성 사택에서 머물고 있을 때(서울로 되돌아오기 2~3일전) 김일성의 처 김정숙에게 자식일부를 이북에 맡기려 하니 맡아 교육을 시켜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여운형이 "지금은 방학중이다. 새학기 시작 직전에 자식들을 평양으로 올려 보내겠으니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돌봐달라"고 요청하자 김정숙은 이같은 요청에 당황, 여운형같은 큰 정치가가 딸 둘과 아들 하나를 자기에게 맡아달라고 하는데 선뜻 대답을 못하고 생각할 시간을 좀 달라고 했고, 여운형은 평양을 떠나기전 확답을 달라고 했다는 것.
평양 출발 전날쯤 김일성은 여운형에게 "맡겨 달라. 마침 북조선에서 학생들을 선발하여 모스크바로 유학보내고 있으니 그편에 딸려 모스크바로 보내 제대로 공부 시키도록 조치하겠다"고 승낙했다.
이때 여운형은 "자식들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 새조국 건설에 기여할 수 있도록 재목으로 키워달라"고 부탁. 김일성의 약속에 따라 1947년 3월 이북에서 사람이 내려와 여운형의 두 딸과 아들을 평양으로 데려갔다. 이들은 김일선의 사택에서 4개월여간 머물면서 김정숙의 보살핌을 받다가 그해 7월에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다.
이들은 각각 모스크바에서 대학을 마치고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52년말 평양으로 돌아왔다.
여운형의 자식들은 유학 전까지는 김정숙이 돌봐주었으며, 그기 1949년 사망함에 따라 유학갔다 돌아온 후로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다.
화려한 변신이 주는 느낌
여운형의 자식들은 이북으로 간 후 2녀인 연구는 모스크바 종합대학에서 공부를 했으며, 3녀 원구는 모스크바의 다른 대학에서, 4남인 붕구는 화학공업대학을 나와 이북에 다시 돌아갔다.
이들의 이북에서의 처음 생활은 그리 유족한 생활만은 아니었다. 연구는영어를 전공, 평양 외국어대학의 교원으로, 원구는 함경남도에서 중학교 교원, 붕구는 함흥의 화학부문 연구소에서 일했다.
이들의 생활은 1978년 11월경 화려한 변신을 하게된다. 김일성은 대남사업담당비서 김중린에게 여운형의 자제들을 찾아보도록 했는데 이때 대폭 승진이라는 기회를 맞게 된다.
김일성의 지시대로 여운형의 자제들은 주석궁으로 불려갔고 며칠후 여연구는 아벚의 뒤를 이어 통일사업을 하라는 뜻에서 조국전선 서기국장으로 원구는 중학교 교장으로, 붕구는 연구소 실장으로 각각 승진발령을 받았다.
현재까지 알려진바에 의하면 여연구는 조국전선 의장과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맡고 있으며, 원구는 보통교육부 부부장, 붕구는 조국전선 서기국장으로 일하다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여연구는 1991년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서울토론회 참석차 북한 여성대표단을 이끌고 서울에 와서 그가 보여준 행동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여운형의 친딸이라는 것 때문에 국내 유수 언론들의 집중적 수포트라이트를 받았으나 오히려 민족주의자로 일컬어지는 아버지의 친딸치고는 너무도 이해하기 힘든 행동만 보여왔다.
아버지 묘소 참배시 김일성의 화환을 세워놓고 '장군님'을 연발햇던 것이다. 혼란했던 미군정 당시 정치지도자에 대한 여타의 제거공작은 좌 · 우 할 것 없이 연속이었다. 특히 여운형은 좌익계열과 손을 잡으며 중간좌파적 노선을 걸어온 정치인이었다.
당시의 정치풍토는 이러한 노선을 걷는 여운형을 이기주의자 또는 기회주의자로 평가했던 것도 사실이다. 여운형은 해방 3일 뒤인 1945년 8월 18일 밤 서울 계동 140-8 자택으로 돌아가던 중 집앞 골몰길에서 잠복중이던 괴한 2~3명으로부터 몽둥이 세례를 받고 전치 1주의 부상을 입은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테러를 당했다.
여운형이 이같은 테러를 받은 것은 남로당이 결성된 이래 좌익과의 사이가 벌어졌고 의장단의 일원으로 있던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에 사표를 내고 거의 발길을 끊은 것과도 연관이 있다.
대담한 좌익적 중간노선을 택하고 있던 여운형은 좌우의 간격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양쪽으로부터 몰리기 시작했다. 차차 지지세력을 잃은 여운형은 한때 정계은퇴(46영 12월)를 선언하기까지 하는 곤경에 처해 있었다.
해방직후 50여명에 이르던 경호원은 피살 당시는 불고 2명뿐인 실정이었다. 이러한 여운형을 우익헤서는 "아까운 사람이 빨갱이와 손을 잡는다고 비난 했으며 , 좌익에서는 허울좋은 미인이 '하지'품에 안겨서 자기노선을 못 지킨다는 비라를 돌리며 기회주의자로 몰아세웠다.
그는 결국 여러번의 테러에서 생명을 구했지만 1947년 7월 19일 이날만은 이를 피하지 못하고 혜화동 로터리에서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암살을 사전조작으로 보는 시각
여운형 암살사건에서 지금까지 사전조작이 아니냐는 의문을 풍기고 있는 것은 단연 경찰 수사과정일 것이다.
사건이 발생후 3일을 헛되이 보낸 경찰은 22일 오후 구속했던 여운형의 운전사 홍순태, 경호원 이제광, 박성복을 석방하고 뒤이어 수도청은 범인이 무기를 갖고 있는 이상 생포가 어려우면 사살해도 무방하다는 지시를 내렸다.
경찰수사가 장기체제로 전환될 무렵인, 사건발생 4일째인 22일밤, 테러전과자들에 대한 탐문수사를 계속중이던 수도청 수사과에 24세 가량의 청년 한명이 연행되어 왔다.
테러전과범인 이 청년은 형사들이 끈질기게 캐묻자, "걸핏하면 왜 못살게 구는거요. 이거 도대체 생사람만 잡으려드니, 그러지 말고 김영성이라는 사람을 한번 만나보시오, 어쩌면 그쪽이 훨씬 빠를지도 모르니까" 하면서 귀찮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수도청 형사대는 이말을 단서로 극우행동파의 일원으로 알려진 그들 다음날 점심나절에 붙잡았다. 이때 수사과장 노덕술은 그를 밀실로 데러가 단독 심문을 끝내고 풀어주었다. 노덕술 수사과장은 그를 돌려보낸 뒤 수사부장인 김재곤 경감과 강력주임인 박경림경위를 불러 귀엤말로 무언가 은밀히 지시했다.
박경위는 즉각 헝사 3명을 대동하고 충무로쪽을 향해 부리나케 찝차를 몰았다. 박경위가 저동 2가 72~4 유풍기업회사 2층 살림방으로 밀어닥쳤을때 방안에 누워있던 청년 한명이 소스라치듯 몸을 일으켰다. 박경림 경위는 여유를 주지않고 "한지근인가" 말을 뱉는 것과 동시에 권총을 내밀었다.
한지근은 순순히 따라 나섰고 사건발생 5일째인 23일 낮 12시 범인은 잡힌 것으로 일단락된다. 이 과정에서 신동운의 제보로 노덕숙이 범인이 누구인지 이미알고 있으면서도 신동운과 박경림 경위는 노덕술의 지시대로 유풍기업 2층에서 유독 한지근만 연행하면서 기념 촬영까지 했다는 것과, 다음날 유용호가 비상집결지를 찾아 갔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종로서로 연행되었으나 열흘만에 석방된 점 들이 사건조작 시각으로 비춰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사건확대를 막기위한 경찰의 의도인지, 아니면 신동운과 노덕숙 사이에 어떠한 조건부가 걸려 있는가는 현재까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단독범행과 우연일치 주장
그러나 암살에 가담했던 생존자 4명은 사건확대를 막기위한 노덕술과 신동운간의 조건부였다는 주장이다. 이 사건을 어떠한 조직과 연결해 그 소행으로 바꿔치기한 것이 아니면, 어떠한 사리사욕을 채우려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동운이 경찰과 상당히 친했다는 것과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었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는 이들의 주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단독범행은 신동운과 노덕술, 다시 신동운과 한지근으로 이어지는 완벼한 시나리오였다. 한지근은 평양 출신으로 기림소학교를 거쳐 해방 다음해 영변 용문중학교를 졸업했으며, 졸업 후 형을 도와 농사일을 하던중 북조선의 정치노선에 분개, 1946년 10월 중학교 동기생인 김인천이 영도하는 비밀단체인 건국단에 입단했다.
남한으로 내려온 후 신동운을 알게됐고 그 후 암살에 가담했던 4인을 알게된 것이다. 사건은 신동운의 제보로 범인이 잡히게 됐고 4명중 한지근만 단독범행이라는 책임을 지고 붙잡혀갔다.
신동운과 한지근간의 이야기는 알길이 없으나 한지금의 완벽한 위장으로 몽양암살사건을 단독범행으로 결론짓게 만들었다. 사건 뒤 신동운은 수사책임자였던 노덕술과 몇 차례 만났으며, 한지근이 송치된 뒤 김섭변호사에게 변호까지 의뢰했다.
한지근은 단독범행의 죄를 혼자 뒤집어 쓰고 그해 10월 21일 제3회 공판에서 사형이 구형됐으나 김섭변호사의 변론으로 1948년 3월 29일 무기징역으로 형이확정, 소년수라는 이유로 개성소년형무소로 이감 복역중 6.25와중에 행방불명, 단독범행의 영원한 수수께끼를 안고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한지근은 6.25때 인민군에게 피살되었다는 설이 있음)
한편 우연의 일치라는 현장상황은 몇군데서 나타나고 있다. 한지근은 7월 9일과 18일경 창덕궁경찰서 앞 돈화문 부근에서 여운형의 승용차와 마주쳤으나 거리등 여건이 여의치 않아 저격할 기회를 놓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사건 당일인 7월 19일 혜화동 로타리 동쪽 플라타너스 그늘에 앉아있던 한지근은 돈암동쪽에서 달려오는 승용차가 우편국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따라 갔으나 실패하고 기회를 기다리던 중 오후 1시 15분경 로타리를 나오는 승용차에 여운형이 타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서행하는 자동차의 뒤를 따라 차도로 뛰어든 한지근은 권총의 안전장치를 밑으로 내리는 것과 동시에 연속 3발을 쏘았다. 이때 자동차와의 거리는 후방 약 2미터로 제1탄 차뒷유리를 깨고 차안으로 들어갔고, 제2탄이 발사되자 여운형은 오른쪽으로 쓰러졌으며, 제3탄은 자동차 철판에 꽂혔다.
차뒷편에서 들려오는 연속적인 3발의 총성으로 멈칫하던 리무진승용차는 그대로 10여미터를 미끄러져가 약방옆에서 멈춰섰다. 차가 멈춰서는 것과 동시 경호원 박성복이 차뒷문을 박차고 황급히 뛰어내리면서 권총을 양손에 한자루씩 뽑아들고 따라 뛰었다. 혜화국민학교로 들어가는 골목길에 접어든 박성복이 공중을 향해 한발을 쏘고 2~3보를 뛰다가 또다시 한발을 위협발사했다.
이때 박성복은 골목길에서 동대문경찰서 외근감독 최태화 경위로부터 범인으로 오인, 붙잡혔다. 최경위는 관내를 순시중 동대문파출소를 들러 나오는 길에 현장을 목격하고 박성복보다 한걸음 먼저 범인을 쫓고있었던 것이다. 좁은 골목안 길에서 쫓고 쫓기는 추격전 끝에 최경위와 범인과의 거리는 불과 20미터로 단축되어 있었다.
최경위는 범인을 향해 "뛰면 쏜다"고 고함소리를 질렀다. 바로 이 순간 범인이 막 뒤를 돌아보려는데 최경위의 등뒤에서 총소리와 뛰는 발자욱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순간 최경위는 공범이 있는 것으로 판단, 추격을 멈추고 커브길에 숨어 있다가 박성복을 공범으로 보고 잡았다. 박성복은 신분이 확인된 후 둘이서 범인이 사라진 골목을 뒤따라 갔지만 검거에 실패하고 말았다.
막다른 골목에서 위기를 모면한 범인은 골목끝에 이르자 때마침 대문이 열려 있는 한 집을 발견했다. 혜화동 80의 1 홍순정이란 문패가 걸린 집이었다. 왼쪽담을 기어올라 혜화동 71-4 이길호의 집 사랑채 뒷마당으로 뛰어내린 뒤 사랑채에서 본채로 통하는 출입문까지 갔지만 출입문은 닫혀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문옆 담벽에 기대어 있는 1.5미터 가량의 사다리를 발견, 이를 이용해 마당에 뛰어내려 대문을 통해 돈암동 쪽으로 넘어가는 구도로로 도망쳤다.
범인이 담을 타고 도주한 집가운데 김구가 한때 유숙했던 집이 있다는 박성복의 진술에 나타난 혜화동 71-4 이길호의 집은 1946년 임정주석 당시 김구가 심장병으로 입원했다가 퇴원하면서 독립운동을 함께 한 옛동지의 아들집인 것으로 밝혀져 범인니 이집을 지나간 것을 우연일 뿐이었다.
현장에서 교통사고와 경찰과의 합작품이라는 오해
현지까지도 가장 의문을 남기고 있는 부분은 현자에서의 교통사고다.
여운형이 탄 리무진이 혜화동 로타리에 이르렀을 때 로터리 파출소 앞에서 트럭 한대가 갑자기 달려나와 급감속을 하게 되었며, 이로인해 한지근이 2미터 후방까지 바짝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파출소 앞에서의 교통사고로 주변에는 경찰차와 경찰도 있었다는 것이 당시 현장상황이었다. 여기에서 나타나 몇몇 우연일치 상황이 지금까지도 경찰과의 합작품이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우연의 일치라면 첫째 현장에서의 교통사고로 인한 감속, 둘째 범인을 추격하던 박성복이 최태화 경위로 부터 공범으로 오인된 점, 셋째 도주로가 막힌 상태에서의 사다리와 김구선생이 한때 투숙했다는 이길호의 집등 여러가지가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날 일어난 우연일치는 나중에 나타난 사실이지만 당시 여운형을 암살한 사수들은 은행앞에 있던 확인조의 성공여부를 알리는 실호에 따라 즉시 뛰어 달아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교통사고로 여운형이 탄 차가 감속되자 흥분한 사수들이 그만 차를 따라 뛰어가자가 계획된 도피로를 찾지 못하고 무조건 눈에 보이는 골목을 향해 도망하다 한지금은 박성복과 최태화경위의 추격을 받았으며, 막다른 골목길에서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것으로 알려져 우연일치라는 주장을 다고나마 입증하고 있다.
이같이 복잡미묘한 부분들이 보는 사람들마다의 시각차로 츠측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야운형은 여러 자료에 나타나듯이 그는 공산주의를 찬양햇고, 또 민족주의 통일후에는 공산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노선을 지향했다. 특히 그가 주장하던 좌우합작은 김일성으로부터도 이해를 구하지 못했으며 좌익계 인사라는 점에서 우익과의 융합은 더욱 어려웠다.
민족주의 우익세력은 공산당과 합작할 수 없었다는 시대적 상황과, 미군정이 남한내에서 중도파를 지지하게된 이유가 극우세력을 지지할 경우 중도파들은 모두 공산당과 합류할 것이라는 우려를 감지했다는 것이 이를 잘 뒷받침하고 있다.
해방 후 정치, 사회적으로 대립과 충돌이 격렬했던 시대적 상황에서의 좌익계 정치인으로 활동했던 여운형은 우일과의 관계라면 물과 기름사이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여운형, 그는 맑스의 이론을 찬성했고 공산주의 이론에는 누구보다 밝은 정치지도자였다. 이제 그가 지향하던 공산주의가 허물어져 내리는 시점에서 당시 상황과 현재를 접목해 본다면 그의 구상과 행위는 다시한번 역사의 조명을 받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