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시고행자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
ㆍ이러한 까닭으로 행자는 본각(本覺)으로 돌아간다.
요즘은 모든 기계작동이 첨단 시스템으로 되어있어 웬만하면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 시스템의 혜택을 받고 있어 우리 생활은 그만큼 매우 편리해졌고 불편함 없이 삶의 편익이 상승하여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날로그의 시계를 들여다보면 참 신기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초침이 ‘똑딱똑딱’하면서 한 바퀴 돌아갈 때 언제나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출발 시점이 정해진 자리는 없지만, 초침은 조금도 멈추지 않고 계속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초침의 자리는 어디가 될까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는데 초침은 제자리가 없으면서도 자기자리를 지키면서 본래 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결국, 본래의 자리는 쉬지 않고 돌아가는 그 자체의 작용이 본래의 자리이므로 시간과 공간을 떠나 본래의 역할작용으로 본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주 만물은 겉으로는 갖가지 모양을 띠고 있지만, 본체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부동과 고요함인 근원적 자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본래의 근원적 자리는 인간이 경험이나 느낌으로 분별해보는 그런 자리가 아니라 경험과 사고를 초월하여 무형상의 자리로 언제나 움직임 없이 항상 제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 점을 불교용어로는 본각(本覺), 본제(本際)라고도 하고 다른 용어들로도 많이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절대적으로 무실체로서의 자리이며 무자성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에서는 만물의 창조와 관련하여 유일자를 최초의 근원으로 여기어 실체성으로 나타내어 매우 신성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입장에서는 존재의 근원을 어떠한 실체도 없는 것이며 무아(無我), 공(空) 등으로 존재의 근원을 설명하면서 근원적 본래의 자리를 깨달음 그 자체인 실상적멸(實相寂滅)의 자리임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보살을 뜻하는 행자가 발보리심을 내어 수행을 통해 돌아가야 할 본래의 자리는 다름 아닌 본제(本際)에 있는 것입니다. 본제의 자리야말로 수행의 궁극적 도달이며 수행의 필요성이 본제를 체증하는 것으로 인해 일체 번뇌와 생사해탈을 이루며 일체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무량한 공덕과 지혜를 구족할 수 있는 본원의 자리입니다.
따라서 이 자리는 부증불감(不增不減)인 자리이며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자리이기에 만물의 근원으로는 진여법성의 자리이며 내심의 근원으로는 자성진공, 일심 등으로 표현합니다. 마음을 닦자고 하는 이유도 본래 마음의 근원인 실상적멸 즉,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본래 고요하고 맑고 청정으로 되어있는 진리성인 본심을 발현하는 것으로부터 깨달음을 체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선가에서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하며 반본환원(返本還源)이라 하여 본래의 깨침으로 있는 본각성품을 체증 체화하는 데 있습니다. 이처럼 보살인 행자는 6바라밀의 자리와 이타의 행법을 닦아 반야바라밀을 체득하여 본래의 본제로 회심하는 것이야말로 보살의 본래서원인 사홍서원을 성취하는 것이며 또한 본제로 환원하는 발심과 믿음생활이 이루어질 때 번뇌가 보리이고 생사가 열반이며 불행이 행복이라는 원융적 사고의 혜안과 깨침이 있어 현실 속에서 깨달음의 행복으로 생활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