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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꿈꾸는 교회(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한국교회의 모습을 바라볼 때(한국교회 전체를 살피든지 우리들이 속한 개 교회를 살피든지) 안타까운 모습이 아주 많이 있지만, 그래도 그 안에 교회의 참된 자태를 찾아 헤매는 모습이 또한 있기에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된다. 참으로 귀한 운동이 한국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맞추어 교회의 참된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운동이다.
마치 종교개혁 시대에 교회를 사랑하는 이들이 자신들이 속한 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바른 교회를 향해 어떤 의견을 내기도 하고, 그것 때문에 쫓겨나기도 하고, 또 그들과 함께 고난에 동참하기도 하면서, 이 땅 위에 있는 교회는 항상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나아가야 할 방향만은 성경이 가르치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운동이 일어난 것과 비슷하다.
문제는 주께서 이런 운동을 당신님의 섭리 가운데서 의미있게 사용하셔서 한국교회의 개혁과 부흥을 가져다주시도록 할 것인가, 아니면 교회의 교회다움에의 회복을 주장하는 이들이 후스(Huss)나 위클리프(Wycliffe)처럼 고난받고 급기야는 처형당하고, 우리는 다른 개혁자들을 기다려야 하는지는 우리로서는 아직 알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우리로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각자와 각 교회와 모든 기독교 기관들이 각각 또 공동으로 힘써 노력해야만 한다.
먼저 교회와 관련해서도 우리의 지향하는 바, 우리의 꿈꾸는 바를 정당화 할 수 있는 근거는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해야만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개혁자들의 후예들은 당연히 "성경", 그것도 "오직 성경"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유명해진 이 말이 너무 많이 사용되어서 그런지, 그 말이 이제는 무색해져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성경"의 의미를 분명히 하는 일에 해야 한다. 그것은 교회와 우리의 삶과 생각에 있어서 모든 논의점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특히 그 종국적 결론에서 우리가 다른 모든 것을 다 고려하되 우리의 최종적 판단 근거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해당하는 성경 구절들을 찾으려고 하거나, 자신이 성경의 전문가이므로 자신의 말만을 마땅히 따라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직 성경"은 성경의 영감과 권위와 명료성을 인정하는 터 위에서, 그러나 성경을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서 바르게 해석한 결과에 대해서만 할 수 있는 말이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여 놓고 그것이 오직 성경의 유일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늘날 우리들은 성경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의 전쟁 가운데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각각의 주장들은 그들이 "오직 성경"의 원리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한 것인지를 살피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 시금석에 비추어 검토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그 해석과 적용이 그 본문의 문맥과 인근 문맥에 맞는 해석에서 나온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주어진 문맥을 무시한 성경 인용과 해석은 결국 오직 성경의 원리를 파괴하는 것이다.
둘째로, 성경 전체의 사상과의 연관성과 조화를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전에는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 또는 성경의 유비(analogia scriptura)라는 말로 이해되던 이런 해석은 오늘날에는 주어진 부분(pericope)에 대한 성실성이라는 이름 하에 무시되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물론 우리는 각 성경의 각각의 부분에 충실한 해석을 하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성경 전체의 사상을 찾아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조화와 체계화의 시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상의 두 가지 시금석이 근원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도울 수 있는 다른 두 가지 시금석을 그저 보조적인 것으로 언급해 보고자 한다. 그 하나는 전통적 해석과의 비교라는 시금석이다. 물론 전통적 해석이 성경의 본래적 의미를 해치고 오랫동안 전통의 이름으로 그 본문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멀데 하는 일이 많이 있어 왔고(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한 고대와 중세의 해석을 생각해 보라), 또 지금도 있을 것이다(예를 들어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는 말씀에 대한 우리들의 일반적인 이해를 생각해 보라).
그러나 우리는 항상 주어진 정황에서 해석적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므로 일단은 나 자신의 해석이 전통적 해석들과 과연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런 작업을 끝없이 하려는 것은 그저 현학(玄學)적인 것이 되고, 우리를 전통과 역사의 노예로 만들어 끊임없이 과거 선배들의 견해들만을 언급하는 힘없는 해석자들이 되게 하기 쉽다(마 7:28-29의 "저희 서기관"들의 해석과 비교해 보라). 그러나 비교적 건전한 해석의 전통을 잘 살펴보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헤매고 방황하지 않게 하는 큰 기둥 역할을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그저 수구적인 전통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내가 하는 해석 작업과 그에 근거한 교회에의 적용 작업의 의미를 무색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서 개혁신학적 해석 전통을 존중하면서 해석과 적용 노력을 하는 것은 우리의 방종과 낭비를 많이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보조적 시금석은 우리의 해석이 과연 그 시대의 건전한 상식에 비추어서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비상식적인 교회 정황 가운데서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시금석이 된다. 사람들은 흔히 교회가 상식 정도라도 통하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고들 말한다. 이는 교회를 그 정도로 만들자는 의도는 아닐 것이고, 이 시대 우리네 교회가 얼마나 비상식적(몰상식적?)인지를 고발하는 말이리라고 생각된다. (우리 시대 교회의 대부분의 문제가 상당히 이런 수준의 것이지 않은가?)
물론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세상의 상식 이상의 수준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네 교회가 세상의 상식으로 보았을 때 지탄의 대상이 되거나, 그들의 상식으로 보더라도 이상한 기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마다 다 성경에 근거해서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이 도무지 견디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 세상이 이 세상의 상식을 가지고 교회와 기독교회를 판단하게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님에 유의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해 가는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이 세상의 상식과 도덕의 수준 이상의 것을 드러내야 한다는 말일뿐이다.
요약하자면, 이제부터 우리는 건전한 전통(예를 들어서 정통주의적 전통)의 관점과 연계하면서 이 시대의 상식에 배치되지 않는 원리를 성경으로부터 (1) 그 문맥에 근거하고 (2) 성경 전체의 사상과 모순되지 않도록 찾아내어, 그것을 가지고 우리네 교회들을 살펴서 과연 주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나아가게 하는 방향이 어떤 방향인지를 같이 논의해 가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이런 점에 유의한다고 해도, 어떤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들의 해석과 생각이 서로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문제들에 충분히 유의하기만 한다면 우리들간에 차이는 우리들이 서로 재미있는 토론하며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차이가 될 것이고, 그런 것들로 여겨져야 한다. 이런 점에 유의하는 이들이 서로 의견이 다를 때 우리는 그 모두를 존중해야 하고, 그 각각의 의미를 깊이 따진 후에 우리들의 의견을 조정하고, 그래도 서로 다른 것에 대해서는 서로 존중하면서 다른 의견을 가지기로 동의해야 한다(agree to disagree).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나누는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여기에 연합과 사랑의 원리가 작용해야 한다. 모두가 다 하나님 말씀에 동의하기로 한 상황에서 서로 다른 의견의 차이가 있을 때는 서로 존중하면서 사랑하는 연합과 사랑의 정신을 잘 발휘해야만 한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는 사랑의 심정과 태도를 가장 잘 나타내는 쪽이 더 옳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승구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우리가 꿈꾸는 교회(2)
바른 예배
하나님 중심의 성격 회복해야
우리 모두가 다 성경이 바라는 바른 교회를 이루고 섬기기를 꿈꾸고 있다. 어떻게 해야 그런 교회를 바르게 잘 섬겨갈 수 있을까? 제일 먼저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무엇보다 먼저 '교회의 예배'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는 다 하는 것이기에 예배는 별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모든 교회가 다 예배하는데, 예배를 통해서 과연 교회의 개혁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는가를 의문시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개혁자들이 교회를 성경 말씀에 따라서 개혁하려고 할 때, 그들은 무엇보다 먼저 교회 예배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였다는 것은 이 예배 개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잘 말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예배를 행할 것인가 하는 것에 모든 신경을 다 써야 한다. 교회 개혁은 예배의 개혁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예배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들의 예배가 '하나님 중심의 성격을 회복하도록'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예배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구속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영혼의 무릎을 끓어 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예배가 하나님 중심적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예배는 상당히 인간 중심적인 특성을 많이 드러내고 있다.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않는 이들이나, 예배를 여흥거리로 바꾸어 그런 예배를 즐기려는 이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예배를 제대로 드린다고 하는 이들도 그 예배를 정성껏 최선을 다해 드려서 우리가 어떤 은혜를 받는가 하는 것에 많은 신경을 쓴다. 이처럼 우리의 예배는 우리네 인간 중심적이다. 물론 예배에서는 인간들이, 즉 구속받은 사람이 경배하는 것이므로 인간적 요소에도 신경을 써야 하지만(따라서 비인간적 예배와 같은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근본적으로 예배는 하나님 중심적인 것이다.
따라서 예배를 통해 내가 어떤 은혜를 받는가, 내가 어떻게 변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따라서 예배를 통해 변화하는 모습이 강조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역시 부차적인 것이다. 예배하는 일에서는 우리가 과연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께서 그 경배를 받으시는가 하는 것이 일차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들의 일차적 관심은 주께서 과연 우리가 하는 경배를 받으시는가 하는 것이다. 주께서 받지 아니하시면 우리가 최선을 다해 드린다고 해도 그것은 무의미한 일일뿐이다.
따라서 문제는 과연 어떻게 해야 우리의 경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것이 되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는 미가와 같이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막 6:6)라고 물어야 한다. 그런데 이 점에서 어떤 이들은 우리의 최선을 다해서 우리의 지고한 것을 다 주께 드리면 주께서 받으신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고, 또 지금도 있다. 그들은 자신의 지고(至高)한 것을 정성을 다해 드리면 주께서 가납(加納)해 주시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 신경을 많이 쓰고 최선의 것을 마련해 보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이 주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따져 보면,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이 최선을 다해 드리는 것이 주께서 받으실만한 것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선(善)은 다 떨어진 누더기와 같다고 한다. 여기서 동양 사상과 기독교의 본질적 차이가 아주 극명하게 드러난다. 동양사상에서는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최고의 것도 하나님께서 가납하실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배는 과연 어떻게 하나님께 가납되는 것일까? 성경의 가르침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그 공로만이 우리를 하나님께 가납적(加納的)이게 하며, 따라서 우리의 경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하게 만든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할 때나 그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에 철저히 의존할 수밖에 없다. 십자가의 공로에 의존해서 주께 드리는 것이 아니면 우리의 최선의 예배라도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것이 못 된다. 따라서 우리 예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 공로에 의존하여 드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온전히 성령님께 의존하여 항상 성자의 구속의 적용함을 받아야 한다. 성령님께서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구속과 관련되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1) 성령님 안에서 (2)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하여 (3)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고, 우리들로 하여금 이 경배를 드리게 하시는 이도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런 경배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합당한 것만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자가에서의 구속 공로에 의해 죄 속함을 받아 새롭게 된 사람들만이 성령님께 의존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께 하는 경배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높이며, 하나님을 존중하며, 하나님의 뜻이 온 세상에 극명하게 선언되도록 한다.
여기까지 말한 것을 부정의 형태로 바꾸어 진술하면 그것에는 동의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모순에로 나아가지 않도록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한번 그 요점들을 부정의 형태로 제시해 보기로 하자.
첫째로,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존해서 하는 경배가 아닌 것은 예배가 아니다.
둘째로, 성령님 안에서 하는 예배가 아닌 것은 예배가 아니다.
셋째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하는 예배가 아닌 것은 예배가 아니다.
만일에 이 세 가지 요점을 잘 유념한다면, 우리는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하는 배가 폭풍이라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 선상에서 벌어졌던 선상 기도회 같은 것은 진정한 의미의 예배도, 기도회도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오늘날 종교다원주의의 다양한 영향 가운데서 여러 종교에 속한 이들이 각기 그들의 방식을 살리면서 함께 경배하거나 기도하는 것이 그런 대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점점 보편화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해야 참으로 보편적이며, 폭 넓은 사상을 가진 것이며, 인도적 사상을 가진 이들이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상당히 교조적이어서 서로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이 늘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 이야기한 예배의 본질을 가지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할 것이다.
이 문제와 연관해서 우리야 하나님을 아니까 그렇게 예배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다른 이들이 잘 모르므로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예배하는 것은 그냥 허용하고, 심지어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늘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이들에 대해서는 불쌍히 여기면서 그들이 참 하나님과 참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인 십자가에 철저히 의존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앞서 이야기한 예배의 본질을 잘 의식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참으로 예배하는 이들은 아직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하는 이들이 매우 적다는 것과 관련해서 매우 강한 선교적 동기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바르고 참된 예배는 우리들로 하여금 복음 전하는 일에 힘쓰도록, 선교하는 일에 힘쓰도록 만든다.
또한 예배에서 사람이 높임을 받거나 영예를 받도록 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라면 우리의 예배에서는 하나님께서만이 높임과 존귀와 영광을 받으셔야만 한다. 어떤 사람의 영광과 뛰어남과 아름다움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은 바른 예배에 적합한 것이 아니다. 사람을 기념하는 예배도 있기 어려운 일이다. 사람을 많이 신경 써서 그들의 눈치를 보는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니다. 예배 중에서 사람에게 박수를 치거나 영예를 돌려 드리는 것도 없어져야 할 일이다. 이렇게 예배는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한다. 사람이 중심이 되거나 사람의 받는 은혜가 중심적인 것이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가 즐기는 것 중심의 예배가 되어서도 안 된다. 예배는 여흥(entertainment)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예배는 음악회나 연극을 구경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부디 우리가 하는 예배가 진정으로 하나님 중심적 예배가 되기를 우리는 꿈꾼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만이 높임을 받으시며, 그 예배와 과정과 결과가 하나님 중심의 사상과 행동으로 우리를 인도하며, 참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 가운데서 수행해 나가는 이들이 되도록 하기를 바란다. 이렇게 참으로 예배하는 이들을 주께서 찾으시며, 주께서 만나주시고, 주께서 이끌어 주신다. 참으로 성령님 안에서 그리스도에 의존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이들은 예배할 때마다 자신들이 주께 예배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에 대한 벅찬 감격을 느끼게 되고 감사하며 예배할 것이다. 우리가 항상 그런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되기를 꿈꾼다.
이승구 교수 /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