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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함경도 北關
백두대간白頭大幹은 서남쪽으로 뻗어 나가, 함경도와 평안도 두 도의 경계를 나눈다. 북
쪽으로는 모두 숙신肅愼57)의 옛 땅이고, 서쪽으로는 평안도平安道와 인접해 있으며, 남쪽
은 철령鐵嶺을 한계로 하고 동쪽은 끝없는 바다와 접해 있다. 이곳은 팔도의 산맥 중 대간
에서 가장 처음 시작한 곳이므로, 모두 산세가 웅장하고 강하고 가파르며 깎아지른 듯하
다. 종성鍾城과 온성穩城 등의 읍들은 백두산 동쪽 산록에 있다. 툭 트인 들과 밝은 햇볕
이 대단히 따스하고 밝으며, 풍기가 본디 강하고 굳건하므로, 이곳 출신 사람들은 강하고
굳센 사람이 많으니 이곳은 절대적인 요새이다.
태풍이 불고 큰눈이 내려서 들판에서 갑자기 큰바람이 일면, 사람들은 모두 바람에 날려
가지 않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엎드려 땅에 붙어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지나가
야한다. 큰눈을 만나면 인근 마을과 통할 수 없으니, 하늘이 흐려져서 눈이 내리려고 할
때, 근처 이웃집에 미리 큰 밧줄을 묶어놓았다가 줄을 끌어 눈을 뚫고 찾아가야 한다. 토
질은 단단하고 조잡하며, 약간 찰지고 물은 차다. 절후는 경기도에 비해 꼭20 일이 늦다.
백성들의 습속은 부지런하면서도 검소하고, 질박하면서도 인색하며, 어리석으면서도 강
직하여 어떤 일을 세세하고 교묘히 꾀하는 일이 드물다. 남자들은 형편이 닿는 대로 농
사·사냥·어업·제염·상업에 종사하는데 모두들 힘써 일한다. 부녀들은 삼베 짜는
일에만 종사하니, 아무리 하천민이라도 마을의 여자는 밭이나 들에서 씨를 뿌리거나 김
매기하는 일을 하지 않고, 실만 잡을 뿐이다. 마청麻靑 이북에서 여자들은 직접 우물에
서 물을 긷거나 절구질, 음식 만드는 일을 하지 않고 남자들이 모두 이 일을 직접 한다.
마을에서는 사치스럽고 즐겨 노는 풍조가 전혀 없다. 그 해 농사가 큰 흉년이 아니면, 행
인이 양식이 없을 때 음식을 준다.
문예와 화려함은 다른 도에 비해 부족하지만, 무예는 정예로 훈련되어 있다. 향무鄕武를,
가장 멋지고 현달한 직무로 여긴다. 구별 짓는 습속이 있어서 혼인을 맺을 때 지벌地閥이
있는 집을 택한다. 향무 집안은 동류가 아니면 통혼하지 않는다. 신용을 우선시하는 사람
이 많아서 거래할 때에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다. 관기나 천인이라도 신용과 절개를 지
키는 사람이 많다.
육진六鎭58) 근처의 읍에서는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 머리 기르는 것을 좋아하며, 쌀 뜬 물
로 머리를 감는다. 송도의 습속에서는 익숙한 얼굴이라도 직접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면
밥 한 사발, 술 한 잔이라도 거저 주는 법이 없다. 이에 비한다면 함경도 사람들은 비록 생
면부지의 사람이라도 노자가 있는지 따지지 않고 머물러 있게 한다. 이처럼 이욕은 사람
의 마음을 변하게 하여 습속이 되는 법이다.【함경도의 풍속은 처음에는 대단히 강하고 사
나워서 교화하기 어려울 듯하지만, 차차 마음을 열면 친구처럼 머물러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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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숙신肅愼: 송화강 유역에 있던 부족으로 읍루揖累라고도 한다. 광개토왕 때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58) 육진六鎭: 조선조 세종 때에 우리나라 최북단最北端인 함경도의 경원慶源·온성穩城·종성鍾城·회령會寧·부령富寧·경
흥慶興의 6군六郡에 설치한 국방 요새國防要塞. 당시 여진족女眞族의 침입이 빈번했고, 또한 강대했으므로 그 대책으로 설치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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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는 농업이 모두 밭농사이고 논농사는 전혀 없다. 남관南關59)에 논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쌀의 성질이 찰지고 기름지지 않아서, 차라리 밭농사에 전념하는 편이 낫다. 모두
파종하고 모내기하지 않는다. 밭에 심는 것은 기장·조·귀리·콩·팥뿐이다. 봄보리는
이랑을 갈아서 씨 뿌리는 경우가 많다. 절후가 남방과는 달리 늦게 따뜻해졌다가 일찍 추
워진다. 그러므로 밭에서 두 번 경작할 수 없다. 북쪽 가까이에는 풍기風氣가 더욱 춥고
차서 한식이 된 뒤에나 봄보리를 경작한다.
씨 뿌릴 때에 두텁게 흙을 덮으면, 땅 속의 냉기가 껍질을 뚫기 때문에 싹을 틔울 수 없다.
곡식은 껍질이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만 살짝살짝 덮는다. 그런 다음에 모를 심으면 5월
그믐부터 6월 초 사이에 수확할 수 있다. 그런데 뿌리를 붙이지 못하면 한재를 입는 경우
가 다른 도보다 심하다. 북쪽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는 4월에나 얼음이 풀리기 시작하여 7
월 그믐에 서리가 내리므로, 귀리만을 심거나 조와 팥을 심을 뿐이다. 어떤 도에서 곡물이
비싼 것이 다른 도의 2배나 되니, 비록 대풍이 되더라도 곡식이 풍족하지 않다. 밭에서는
겨릿소로 경작한다. 함풍과 영락 연간에 전차田車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60.)
함흥 이남은 풍토와 농업이 강원도와 그다지 다르지 않고 논도 비옥하다. 온 도의 풍습이
상을 치르기를 잘하고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궁마弓馬로 치달리는 것이 전국에서 제일이
다. 생리生利는 농업 이외에 삼베 짜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다. 바닷가에서는 어염魚鹽을
생업生業으로 삼는다. 소금은 철염鐵鹽이 많아서 맛이 쓰다. 함흥咸興 이북 사람들은 산
에서 살므로 초서貂鼠·인삼·녹용을 수입원으로 한다. 목면木綿은 원래 심지 않으니 남
북의 통상들이 모두 종이와 무명을 화폐로 삼는다. 목화씨는 땅 기운이 한랭하므로 꽃을
피울 수도 없고, 닥나무는 토산물이 아니므로 종이는 누런 지푸라기로만 만든다. 이곳은
가축을 기르기에 가장 적당하며, 말은 준마가 많다. 우리나라는 천하의 축방丑方에 있으
므로 목우가 천하에서 가장 성대하고, 게다가 함경도가 국내國內의 축방에 있어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목우가 가장 번성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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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남관南關: 마천령摩天嶺 남쪽의 지방을 일컫는 말로, 함경남도의 총칭이다.
60) 【두주: 이 조항들은 마땅히 민속조民俗條 가운데에 넣었어야 하는데, 여기에 잘못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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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목면은 극히 비싸므로 촌민들은 대개 겨울옷에 삼베를 사용한다. 개가죽과 갖가
지 가죽들로 만든 해척海尺61)과 산척山尺62) 등의 옷 꼴은 사람 같지 않은 것이 많다. 육진
六鎭 가까이에 있는 읍은 동전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른바 거부巨富의 자산資産은 소와
말, 포필에 불과할 뿐이어서, 양서와 삼남 지방의 부자들에 비견할 만한 것은 아니다. 함
흥 이남의 각 고을에는 홍시紅枾63)는 전혀 없고, 여러 가지 과일을 심지만 사는 데에는 크
게 보탬이 되지 못한다.
함흥과 관북 이북은 배나무와 밤나무 등 산과일이 있을 뿐, 삼수갑산三水甲山과 육진에
는 배와 밤도 전혀 없다. 한 도의 여러 읍들은 해변이 아니면 골짜기이니, 식량은 오직 귀
리와 조뿐이고 반찬은 바닷물고기와 산짐승 고기이다. 철염은 짜고 쓰므로 모두 맛이 없
는데, 깊은 산골짜기에는 철염鐵鹽조차 매우 귀하다. 가난한 사람들은 사철나무 싹을 꺾
어 물에 담갔다가 반찬을 한다. 오직 함흥咸興 이남의 들이 트인 곳에서는 벼와 여러 가지
먹고사는 것이 여러 도에 못지않다. 은맥銀脈과 금광金鑛이 곳곳에 있으니 함흥과 원산
元山이 국내의 큰 도회都會가 되었으므로 큰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백두대간白頭大幹64)이 구불구불 하늘에 우뚝하고 평안도와 이웃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나그네들이 통행하는 길이 있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험한 곳이다. 남쪽으로는 철령鐵嶺
이 한계이고 동쪽으로 큰 바다에 접해 있으니 거의 이역과 같다. 풍토가 굳고 단단하다.
백성들의 습속은 질박하고 어리석은 것이 다른 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관장이 백성들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도록 스스로를 올바르게 바로잡지 않는다면, 명령을 내려 교화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은혜와 위엄으로 무마할 줄 모르고 탐욕스럽고 방자할 경우, 어리
석고 굳은 풍속과 부딪힐 것을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함경도의 관액과 형편을 논한다면, 함흥 이북을 거쳐 육진과 삼수갑산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의 환경은 바다에 인접해 있거나 산골짜기에 있다. 산줄기는 모두 서북쪽에서 동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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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해척海尺: 어부를 말한다.
62) 산척山尺: 산자이. 산정간山丁干과 같다. 산속에 살면서 사냥과 약초 캐는 것을 업으로 사는 사람을 말한다. ‘메자이’, ‘산장이’ 라고도 한다.
63) 홍시紅枾: 연시, 연감으로 불리기도 한다. 생감의 떫은맛이 자연적 또는 인위적으로 제거되어, 붉은 색으로 말랑말랑하게 무르
익은 상태의 감을 말한다.
64) 백두대간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금강산, 설악산, 태백산, 소백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큰 산줄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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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으로 뻗어있으므로 함관령咸關嶺·마운령摩雲嶺·마천령摩天嶺 등 여러 큰 고개들이
모두 바다 옆에서 허공에 높이 솟아 있다. 이들 모두는 한 사람이 만 사람을 감당할 수 있
을 만큼 아무도 열 수 없는 험한 곳이다. 다만 외줄기 길만이 남북을 가로지르니, 단천端
川은 큰 두 고개의 사이에 걸쳐져 있다. 지금 이곳에 방영防營65)을 설치하여 길주吉州와
표리를 이루게 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만전을 기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이다. 이전에 단천端
川 수령이 당상관으로 파견된 적이 있어 절제節制를 높였다. 군에서 부로 승격되는 것으
로 의견을 두었지만, 지금 창원昌原과 서로 바꾸어 강등되어 당하堂下의 자리가 되니, 이
것은 참으로 개탄할 만하다.
고려 태조가 삼한을 통일하였지만, 그 권력이 삭방朔方66)에까지 미치지는 못하고 철관鐵
關만을 경계로 삼았다. 그 뒤 점차 개척되어 동북면東北面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이곳
은 여전히 야인野人들의 차지이다. 조선의 태조께서 삭방에서 일어나 전국을 소유했지
만, 경성鏡城 이북은 오랫동안 적의 손아귀에 있었다. 세종 때에 가서야 김종서金宗瑞에
게 명령을 내려 육진을 개척하였으니 이것은 전에 없던 일이다.
육진六鎭의 여러 고을들은 모두 큰 문에 있다. 큰 고개의 동북쪽은 그 경계와 겨우 허리띠
정도만 떨어져 있을 뿐이다. 길주吉州는 요충지 가운데서도 으뜸이니, 옛날부터 그곳에
방영을 설치하였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게다가 단천端川은 길주吉州의 남쪽에 있
고 이북의 여러 도는 모두 단천을 통해 통행하니, 이곳은 그 길목이기도 하다. 설한령雪寒
嶺의 한 줄기는 남쪽으로 뻗어 장진계長津界가 되고, 서북쪽으로 방향을 틀면 총전령蔥
田嶺과 화통령火通嶺이니 평안도의 강계부江界府이다.
폐지된 사군四郡67)은 그 사이에 끼어 있다. 모두 깎아지른 듯한 계곡 사이에 있지만, 가끔
평평한 곳에도 있으니 둘레가 400~500리다. 거주지가 모두 개척된다고 하더라도 인가가
1만호가 되기 어렵고, 험하고 치우친 곳이다. 오래 전에 묵어서 폐기되었고, 초목이 무성
하고 줄기와 잎이 퇴적되었다. 해마다 땅을 일구어 풀을 불살라 벤 뒤에 파종하여 수확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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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방영防營: 방어사防禦使를 둔 병영兵營의 약칭이다.
66) 삭방朔方: 함경남도 안변安邊의 옛 이름이다.
67) 사군四郡: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압록강鴨綠江 방면方面에 출몰하는 야인野人를 정벌征伐하고, 이 지역地域에 설치設置한 여
연閭延·자성慈城·무창茂昌·우예虞芮의 네 군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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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2배나 된다. 그러므로 땅이 비옥하기 때문에 곤궁한 백성들이 점차 흘러들었다. 조가
朝家는 이 때문에 장진부長津府를 처음 설치하였다. 근래에 또 후주厚州를 창설하자는
의논이 나왔는데, 그것은 내 견해와 맞지 않는다.
폐사군廢四郡에 대해 말해 보면 다음과 같다. 토질이 비옥하고 두터우면 기름지고, 그 성
질이 마르고 소금기가 있으면 척박해지는 것은 변함없는 이치이다. 척박한 땅이라도 처
음 개간할 때에는 지력地力이 온전하여 수확량이 2배나 된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지나면
비가 흙의 척박한 것을 씻어내고, 지력이 점차 쇠퇴되어서 수확량이 많지 않게 된다. 골짜
기에 사는 백성들이 화경火耕할 때마다 해를 걸러 묵혀서 지력을 북돋웠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지금 이 사군四郡의 땅은 몇 백 년 동안 묵히고 황폐화되었으니, 처음 개척할
때와 같다. 그래서 간혹 파종播種하여 수확한 것이 많겠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 결코 그
럴 수 없다. 전토 없이 신역을 피하는 무리들은 소문을 듣고 유입하여 막사를 짓고 파종하
면 거의 힘든 짐을 덜어주는 듯하다. 지금 만일 읍을 설치하여 관을 두고, 세금을 덜어주
고 역을 면해주어서 불러 모으고, 무마撫摩하는 방도를 얻는다면 유민들은 틀림없이 수
확량이 많고 세역稅役이 줄어드는 것을 보고 낙원이라고 여겨 모여들 것이다.
얼핏 보아 이것이 국가에 이득이 될 듯하지만, 그 실제를 찬찬히 살펴보면 조금도 이득
이 없으며 오히려 허다한 폐단만 있을 뿐이다. 이른바 불러 모은 백성들은 모두 이웃나
라에서 온 사람들이 아니라 국내에 원래 있던 사람들이다. 이것은 저쪽에서 흩어져 이
쪽으로 모인 격이라서 동쪽을 깨뜨려서 서쪽을 메우는 것과 다름없으니, 의논해 보았
자 득실이 없다. 그런데 어찌 이와 같이 신설할 읍 때문에, 원래 있던 온전한 읍들이 민
호民戶를 잃고 쇠락하게 하여 군부軍簿의 공세公稅를 날로 감축하게 할 것인가? 이것
이 첫 번째 폐해다.
그리고 그 지세는 본래 궁박한 계곡이라 그늘지고 추운 곳이다. 강 가까이 약간 낮은 해가
뜨면 자못 따뜻해진다. 오래된 황무지에 곡식을 심고 북도의 연이은 풍년을 만나면 거주
할 만하다고 한다. 그런데 가뭄과 긴 장마를 만나면 곡식이 익을 수 없어서 백성들이 이곳
에 거주할 수 없는 필연의 형세이다.
백두 (白頭)
포항창浦項倉을 설치하였던 것은 진정 함경도 백성들을 위한 것이고, 영남의 곡식을 옮
겨 진휼하는 것은 조가朝家가 하늘과 같은 은택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바다까지
500~600리이고, 험한 산골짜기이고 험한 길인데, 어떻게 곡식을 운반하여 백성들을 먹
일 수 있겠는가? 100리만 떨어져 있어도 양식을 수매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이와 같이 매우
험하고 먼 곳에는 때 맞춰 진휼할 수 없다는 것을 삼척동자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가령 한
번도 수재와 한재가 없어서 매년 풍년이 든다면 마침내 편안히 거주하고 풍성할 수 있지
만, 그 토지에서 내는 세금을 따져 보면 조가에 조금도 이득을 주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하물며 그곳에 관부를 건설한다면 많은 경비와 백성들의 노동력을 허비할 것이다. 이것
이 두 번째 폐해다.
관부가 창설된다면, 초기에 이른바 서리胥吏와 관노官奴들은 각 고을에서 분배하여 이속
될 것이다. 이들은 모두 안주할 땅을 찾아 거듭 이전하는 백성들로서 위엄 있는 명령에 겁
을 먹는다. 친척을 떠나 전토를 버리고, 춥고 고생스럽고 궁벽한 곳으로 무단으로 옮겨가
는 것이니, 반드시 슬프고 원망하며 감당하기 어렵다는 탄식이 있을 것이다. 읍을 설치하
면서 이득을 보지 못하고 당장 이전하는 고통만을 준다. 이것이 세 번째 폐해다.
유민流民들은 지금 비록 수확량이 많고 부역이 덜하다고 생각하여 잠시 와서 모일 수 있
다고 생각하지만, 만일 개간한 지 오래되고 지력이 점차 쇠퇴하여 2배로 나올 것이 없어
지면, 그리고 관민이 거주한 뒤에 신역身役, 호역戶役과 토지세土地稅를 차례차례 매긴
다면 그들은 아침에 동으로, 저녁에는 서로 떠도는 부류이니 결코 영원히 거주할 작정을
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떠날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어찌 사람 없는 궁박한 골짜기에,
관부를 설치하는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필시 관부를 옮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
이 네 번째 폐해다.
그리고 그 지세가 장대한 산에서 처음 떨어지니 살을 품은 국면이다. 인걸은 그 지령地靈
이 모인 곳이니 선과 악이 모두 매한가지다. 앞으로의 백성들의 습속은 반드시 강폭하고
사나운 습속이 많을 것이다. 하물며 당초에 유입한 것은 본시 조가에서 백성들을 허락해서
가 아니라 감히 몇 백 년 동안 금지되어 왔던 곳에서 스스로 경작하고 개간하는 것을 감히
자임한 것이니 좋은 시작이 아니기도 하고, 불러 모을 때에 도망가서 도둑이 되는 소굴이
되기 쉽다. 이것은 모두 끝없는 깊은 사려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이 다섯 번째 폐해다.
오늘날 입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들 “이곳은 흙이 비옥하고 백성들이 모두 기꺼이 나온 곳
이며, 삼蔘과 녹용, 초서貂鼠68)는 모두 이곳의 토산물이니 백성들이 들어가 거주하여 채
취하기를 허용하면 국용에 보탬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
르는 소리다. 삼과 녹용, 초서貂鼠는 북쪽 지방에서 나는, 필시 사람이 없는 곳에서 많이
생산되는 본토의 산물이다. 그런데 만일 고을을 설치하여 인민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면,
삼과 녹용, 초서가 결코 전처럼 많이 생산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것을 채취하여 사용
하는 방법으로 말한다면, 산에서 채취하고 사냥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전부터
각각 생계를 위해 가서 취하였으니 고을의 설치 여부와는 전혀 무관하다.
관방關防에 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사군四郡의 경계는 압록강 상류에 걸쳐 있다. 명색
이 강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계곡의 개천에 불과하여서 옷을 걷고 왕래할 수 있고, 물
의 밖은 중국 쪽 경계이다. 만일 급한 변고가 생기면 그곳의 관장이 멀리 흩어져 사는 백
성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모아야 하므로 때맞추어 방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府
의 창고에 쌓인 군기들도 별 소용이 없다. 이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둘레가 4~5백 리가 되는 큰 고개와 큰 개천이 가로로 끊어져 서로 얽혀 있으니, 백성들이
다니는 도로를 없애 버린다면, 나는 새가 원숭이를 잡듯이 뛰어 넘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무들이 하늘을 빽빽이 가려서, 일단 그 안으로 들어서면 동서남북을 변별할 수 없다. 만
일 수목을 길러 백성들의 통행로를 끊을 수 있어서, 한 사람도 금지 구역에 살지 못하도록
한다면, 큰 읍과 큰 진보다 더 잘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만일 백성들에게 모여서 살도록 허락하고, 관부를 설치하여 이미 기른 나무들을 작
벌하여 막혀있는 도로를 뚫는다면, 이것이 만전을 기해 먼 곳을 경영하려는 뜻은 아닐 것
이다. 그렇다면 장차 어떡해야 할까? 이전대로 금지하고 백성들을 몰아내어 거주할 수 없
게 해야 한다. 이미 들어간 민호民戶는 모두 합병하였기 때문에, 몰아내서 거주지를 잃게
하는 것이 어렵다면, 각각 그 지방관과 근방의 변장邊將으로 하여금 호구의 수를 조사하
여, 그것을 총괄적으로 다스려서 깊이 들어가 있는 곳을 다시는 점거하지 말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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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초서: 노랑가슴담비. 족제빗과의 하나이다.
1.4.3. 평안도 西關
장백산長白山에서 방향을 틀면 낭림산狼林山이 되고 그곳에서 뻗은 서쪽 지류는 평안도
의 경락이 된다. 북쪽은 강변의 7개 고을이 있으니, 중국과 거의 붙어 있다. 서쪽으로 끝없
는 큰 바다와 접해 있고, 남쪽으로 해서海西와 경계하며, 동쪽으로 함경도咸鏡道와 고개
하나를 두고 접해 있다. 평양에서 의주까지 대로의 서쪽 지역은 모두 평야 지대의 고을들
이고, 동쪽 지역은 모두 산간 지대의 고을들이다.
평안도는 풍요風謠와 토속土俗이 산간 지대와 평양 지대가 각각 다르다. 산은 웅장하고
널찍하며 개천은 범람하는 곳이 많다. 이곳 출신들은 장대하고 걸출한 사람들이 많은 반
면, 순후하지만 조심성 있는 사람은 적다. 풍기風氣가 굳세고 토질이 단단하고 비옥하며
누런 점토가 미끄럽다. 물맛은 맑고 차다. 절후는 경기도보다1 0여 일이 늦다.
평안도는 백성들의 습속이 농업과 잠업에 힘쓰고 근면하다. 읍저 사람들과 서울을 출입
하는 사람들은 사치하고 놀기 좋아하고 기氣를 숭상하여, 분수를 넘어 오직 유세가를 좇
아 다니는 것만을 능사로 여긴다. 민심民心은 두터운 풍조를 숭상하는 한편, 세력 있는 사
람에게 붙는 세태도 많다. 민간에서는 신 섬기기를 좋아하여 토사土祀를 설치하였다. 마
을마다 모두 총사叢祠69)를 짓고, 최영崔瑩(1316~1388)70)과 박엽朴燁(1570~1623)71)의
소상塑像를 설치하고 기도한다. 기성箕城부터 의주까지 대로의 서쪽 지역에는 평야 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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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총사叢祠: 본래는 숲 속에 있는 신묘神廟를 가리키지만, 일반적으로 신을 모시는 사당을 의미한다.
70) 최영崔瑩: 고려후기 명장이다. 처음에는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 휘하에서 왜구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59년
홍건적이 서경西京을 함락하자 이를 물리쳤고, 1361년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하였을 때 이를 격퇴하여 전리판서에 올랐다. 이
후에도 1363년에는 공민왕을 시해하려 했던 흥왕사興王寺의 변變을 평정하였으며, 1376년에는 왜구가 삼남 지방을 휩쓸자
홍산에서 적을 대파했다. 1388년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 하자 요동정벌을 감행했지만,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
로 좌절되었다. 이성계에게 잡혀 고향인 고봉현高峯縣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12월 참수斬首되었다.
71) 박엽朴燁: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숙야叔夜, 호는 약창葯窓이다. 1597년(선조 30)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광해군 때 함경도병마절도사가 되어 광해군의 뜻에 따라 성지城池를 수축해 북변의 방비를 공고히 하였다. 황해
도병마절도사를 거쳐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6년 동안 규율을 확립하고, 여진족의 동정을 잘 살펴 외침을 당하지 않도록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평양 임지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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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들이 많은데, 이 고을들의 풍속은 의복과 음식이 사치스럽다. 대로의 동쪽 지방은 산
간 지대 고을들이 많은데, 이 고을들의 풍속은 의복과 음식이 자못 검소하다.
평안도 사람들은 무예武藝의 정련이 팔도에서 으뜸이고, 유업儒業에도 열심이지만 실제
에 관한 공부가 적어 화려하고 사치스럽다. 그들은 유세가와 인연 맺는 짓을 일삼으며, 문
자를 조금이라도 깨우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서울에 줄을 대고 있으니, 현재 서울의 사대
부가에는 거의 집집마다 이곳 출신 사람들이 머물러 있을 정도다. 이것은 다른 도에는 없
는 풍조이다. 향임鄕任72)과 무열武列은 모두 지벌을 기준으로 차출할 수 없으므로, 오직
청탁만을 일삼으며, 게다가 서로 다투는 습속이 전국에서 가장 심하다.
우리나라의 풍속에는 평안도를 천향賤鄕으로 얕보고, 문관文官은 국자감國子監73)을, 무
관은 부천部薦74)을 넘지 못하게 한다. 그 중에서 한 대를 의관을 이어오는 벌족閥族과 벼
슬길에 나아간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본토의 천류와 구분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명분이
지리멸렬하게 되어서, 뇌물을 써서 향임 자리를 다투는 고질병이 있게 되었다.
재가승在家僧이라는 칭호는 평안도에만 있을 뿐인데, 대개 역을 피하기 위해 처자妻子
를 이끌고 마을에 와서 사는 무리이다. 청천강 이북 지역에서 더욱 심하니 이것은 오랑
캐 풍속에 가까워서 그런 것이다. 양덕陽德과 맹산孟山 등에서는 옛날부터 집안에 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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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향임: 조선 시대 지방 수령의 자문·보좌를 위해 향반鄕班들이 조직한 향청鄕廳의 직임職任이다. 조선 건국 초기에 고려 시대의
사심관제事審官制를 본떠 유향품관留鄕品官들이 향리鄕吏를 규찰하고 향풍鄕風을 바로잡기 위해 유향소를 조직하였다. 그
러나 향임들이 수령권을 능멸하는 등 중앙집권화에 저해되는 사례가 빈발하였다. 태종 때 이후 치폐置廢를 거듭하다가, 1488 년(성종 19) 다시 설립되었다. 이듬해에는 향임으로 유향품관 가운데에서 좌수座首 1인과 이를 보좌하는 별감別監 3~5인을
두어 유향소를 운영하도록 하였다. 그 뒤 점차 각 지방마다 지역 사회의 지도층인 사족士族로 구성되는 계契가 조직되고, 그
명부를 향안鄕案라 하였으며, 향안에 등록된 구성원을 향원鄕員라 하였다. 유향소의 향임은 계의 집행 기구로서 향원 중에서
선출하였다. 향원 전원이 참석한 향회鄕會에서 향규鄕規에 따라 50세 이상의 향원은 좌수를, 30세 이상의 향원은 별감을 각
각 선출해 중앙의 경재소京在所에 추천서로 보고해 임명되었다. 1603년(선조 36) 경재소가 혁파된 뒤에는 향회에서 추천하
였지만, 실제 수령이 임명권자가 되면서 기능도 크게 변화하였다. 그 밖의 향임으로 창감倉監 감관監官 풍헌風憲과 그 아래
소리所吏 사령使令 소동小童 식모 등이 있어 인원은 보통 10~30명이었다. 이들은 좌수가 임명하였는데, 창감·감관은 수십
내지 수백 명에 이르는 아전들의 업무를 감독하거나 직접 그 일에 종사하였다. 따라서 전정田政·환정還政·진정賑政 등의 실무
나 사소한 송사는 향임들의 입김에 의해 좌우되었다. 또한, 풍헌은 각 면내의 수세收稅·차역差役·금령禁令·권농勸農·교화 등
모든 일선 행정 실무를 주관해 1면의 민정을 장악했다. 그러나 1654년(효종 5)에 「영장사목營將事目」이 반포된 이후로 군역
차정軍役差定에 관한 책임까지 향청이 떠맡게 되면서 향임은 천례賤隷와 같이 취급되었다. 이에 따라 사족들의 향임 기피 현
상이 심화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세력, 즉 비사족인 향족鄕族들이 향청을 점거해 향안 입록도 감사監司 수령 토호들의 축
재 수단이 되어, 무자격자에게 입록을 허용하는 등 이른바 매향賣鄕의 풍조가 나타나면서 향임의 질은 크게 저하되었다. 좌수
의 인사마저 이방의 손에서 조종되었고, 풍헌이나 감관은 간사한 백성들이 향임의 빚을 대신 내고 훔쳐 얻는 자리가 되었다.
말단 행정의 부정부패는 극한에 이르러 비록 양반 위주이기는 하지만 지역 사회의 권익을 대변하던 향임들은 일반 백성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73) 국자감國子監: 고려 시대의 국가 최고 교육 기관으로, 이후 성균관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그 명칭과 기능은 조선 시대로 이어졌
다. 국자감의 학생에게는 과거 응시에 대한 특전이 주어졌다.
74) 부천部薦: 오위체제하의 각 부를 통솔할 부장部將이 될 만한 사람을 무관 중에서 천거하는 일로, 주로 신분이 낮은 사람과 서족
庶族으로 충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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豢神으로 일컬어지는 뱀 모양의 귀물鬼物을 두었다. 사람들이 혹시 그 집에 들어갔다가,
그 기를 잘못 흡수하여 중독되면 종신토록 가슴과 뱃속에 병을 앓았다.【근래에는 약간
줄었다.】
옛날 청천강 이북 지역에는 학문이 없었는데, 문인 강백姜栢(1690~1777)75)이 귀양 와서
후진들을 가르치고 기른 이후부터 문예가 점차 흥기되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고을마다
학생들이 있고 서당이 없는 마을이 없어서, 기호 지방에서 학문이 성행하고 있는 고을들
조차 이곳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이다.
평안도 용만龍灣76) 직로直路의 서쪽 지역에는 밭과 논이 절반씩이고, 동쪽 지역은 밭이
많고 논이 적다. 동쪽과 서쪽을 막론하고 논은 모두 파종播種하고 모내기하지 않는다. 밭
에는 보리·귀리·기장·조·사탕·메밀·콩·팥·목면을 심으며, 그 중에서 조를 심
는 데 더욱 힘쓴다. 오직 사탕과 기장만은 물 가까이에 있는 포전浦田에 심는다. 중산中山
의 각 고을에는 화경火耕이 많고 목면이 적다. 뽕과 삼을 업으로 삼는 경우가 많고, 강변
과 깊은 계곡에 있는 고을에서는 전혀 목면을 심지 않는다. 풍기가 한랭하기 때문에 꽃이
피어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평안도 사람들은 대체로 놀고 즐기며 출입하기를 좋아하니, 모두들 농사에 힘쓰지 않는
다. 그 가운데에서 노동력으로 사는 농민들은 근면하다. 봄과 여름에 두둑에 농사짓고, 아
침 일찍 들로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온다. 평평하고 넓은 들에는 남녀가 흩어져 모를 심으
며, 힘을 모아 호미질하고 곰방매질하며 입을 모아 농요를 부른다. 그 풍경이 흡사 서빈西
邠에서 농사에 힘쓰는 풍습과 같은 점이 있다. 밭에는 겨릿소를 쓰고, 두텁게 거름을 덮고
서 각각의 곡식을 심은 뒤에 호릿소에 쟁기를 매달아 모 사이의 땅을 살금살금 갈아 곡식
의 뿌리를 배양하고 호미로 잡초를 제거한다. 모를 심은 뒤부터 이삭을 털기 전까지 2~3
차례 쟁기로 경작하고, 3~4차례 김매기한다. 그러므로 곡식의 뿌리가 두텁게 배양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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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강백姜栢: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청子靑, 호는 우곡愚谷이다. 15세에 승보시陞補試에 합격, 1714 년(숙종 40) 사마시에 1등, 1727년(영조 3) 정시문과에 장원하였다. 1728년 성환찰방 재임 중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
났는데, 이때 무고한 죄를 입어 철산鐵山에 유배되었다. 유배 기간 동안 철산 지방의 젊은이를 교육하여 조선 건국 이래 처음
으로 과거에 많은 합격자를 낸 공로가 참작되어, 1732년 죄가 감형되고 정산현감에 제수되었다. 1769년 통정에 오르고 한성
부윤이 되었으나, 곧 체직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76) 용만龍灣: 평안북도 의주시의 옛 별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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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근하는 것이 깊다. 지나치게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바람을 만나도 쓰러지지 않는다. 구
혁溝洫이 깊으므로 장마를 만나도 소멸되지 않고, 또 잡초와 가라지가 모를 침범하지 않
는다. 이것이 수확량이 다른 도의 2배나 되는 이유이다. 토성이 비록 단단하나, 비옥하기
가 평안도만 한 곳이 없다.
기성箕城77) 이외의 다른 군에서는 수확량이 2배인 곳은 없고, 결부結負는 전국에서 가장
가볍다. 청천강 남쪽 지역은 밭 1일지기와 논 1섬지기에서의 수확량이 모두 15부씩이며,
청천강 이북 지역은 밭 1일지기, 논 1섬지기에서 5~6부씩을 수확하므로 농민들이 모두
힘쓰지 않고도 편안히 거주할 수 있다.
생리는 농업 이외에도 잠농蠶農에 힘쓰므로, 평안도의 명주가 팔도에서 유명하다. 기성
箕城·안주安州·만부灣府78)는 예전부터 재화가 모이는 대도회이므로 많은 상인들이 모
여들었다. 강계江界부터 중산中山까지 각 고을은 삼蔘을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하였는데,
다른 한편 고질적인 폐해가 되기도 하였다. 삼蔘도 그곳의 토산물이므로, 부녀들은 뽕과
삼, 목면 3종으로 방적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남초南草도 토산물인데, 삼등향초三登香
草는 국내에서 유명하다. 강동江東·성천成川·중산中山 등 각 고을에서 성행한다. 연해
의 각 고을들은 어염의 이익을 누리는 경우가 많지만, 동해나 남해안에서 잡는 것에 비할
정도는 아니다. 과일은 전혀 없다. 산군山郡에서는 벌꿀로 이익을 내는 일이 많고, 은맥과
금광도 곳곳에 있어 몰래 채굴하는 일이 점차 늘고 있다.
평안도를 개괄하면 계곡이 많고 들이 적으며, 밭이 많고 논이 적다. 토질은 비옥하고 농사
에 근면하다. 사람들이 많고, 의식은 풍족하며 군사와 말은 강하고 우수하다. 한묵翰墨에
도 힘쓰므로 과거급제자가 많이 나오니, 공부하는 것이 최선의 첩경이다. 다만 명분이 분
명치 않아서, 그 중 벌족閥族들은 억울하게 느끼는 일이 많지만, 천류들은 여전히 어리석
고 분수를 넘는 습속에 빠져 있다. 근년 이래로 집안에 흠이 있는 사람은 대체로 이전의
자취를 숨겨, 다른 도로 이사하는 류가 계속 이어진다. 이와 같이 매우 중요한 변방의 방
위가 점차 비게 되니, 이것은 결코 범상한 문제로 여겨서는 안 된다. 절기는 함경도에 비
해 약간 이르지만, 삼남 지방에 비해 늦는다. 그러므로 농사는 그루갈이하는 경우가 적다.
기장과 조는 모두 7월 전에 익으므로 서리 걱정은 없다. 재화는 풍족하고 명분이 밝지 않
으므로, 선비 향임 향리 장교의 직임을 모두 뇌물로 얻으려 한다. 이것은 본토의 민습民
習이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니, 조정 사대부들이 수치스럽게 여길 만한 점이다.
이곳의 수령은 마땅히 공공성과 염치로 자신을 규율하고, 명분을 바로잡고 문무文武를
기르며 절행節行을 숭상하는 것을 우선시하고, 공평하고 너그럽게 보듬어주는 정사를 펼
쳐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풍속을 통해 훈도하는 좋은 방도를 얻어 변방에서 백성들을 기
르면서 외적을 막는 책무를 다할 수 있을 것이다.
평안도의 관액과 형편에 관해 논한다면, 용만龍灣의 동쪽 지역은 강변에 줄지어 있는 고
을들이 모두 낭림산狼林山의 서쪽 줄기로부터 구불구불 내려오는 골짜기에 의거하여 강
가에 바둑판처럼 포치되어 있다. 계반령鷄攀嶺과 적유령狄踰嶺 두 큰 고개가 통행하는
길이니 모두 자연적으로 험한 지형이다. 그 사이 산천은 거의 칠백七百보다 더 험하고 음
평陰平과 표리가 되어 있어 방어하도록 이미 조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니, 지금 다른 우려
는 없다. 오직 직로만 계획되어 있어 오히려 다하지 못한 것이 있다. 대개 안릉安陵으로부
터 용만龍灣에 이르기까지 300여 리 떨어진 사이에 선천방영宣川防營을 설치하여 당로
當路에 두면 방어가 되지 않을 리가 없다.
동림東林을 파읍罷邑하고, 읍을 숲 가로 옮겨 설치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생각
한다. 적을 막는 데에는 성으로 막는 것이 가장 좋다. 지금 동림東林의 성은 비록 자그마
하지만, 지키기에 믿음직한 곳이니, 숲가의 텅 빈 읍 터에 비하여 지리적으로 많은 이점이
있다. 다만 잔폐한 진영鎭營의 별장別將으로 하여금 당로를 관할하게 하기에, 이곳은 이
미 극히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평원에 있으면서 방어하는 중진重鎭79)으로 의지할 곳도 없이 전곡과 갑옷, 병기만
을 높이 쌓아놓고 있을 뿐이다. 만일 변고라도 생긴다면 무엇에 의지하여 막아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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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중진重鎭: 병권을 쥐고 요해지要害地를 지키는 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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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림西林에 성을 쌓고 장수를 둔다고 할지라도, 서림西林으로부터 용만龍灣에 이
르기까지 수백 리나 멀리 떨어져 있고, 게다가 철산鐵山과 용천龍川 두 부府가 모두 치우
친 곳에 있다. 운암雲巖과 용골龍骨 두 성도 직로直路가 아니니, 혹시 위급한 일이 있더라
도 병사를 모으고 예봉을 피하기에 충분하며, 길을 막고 적을 막으면 참으로 그 형세가 이
곳만 한 곳이 없을 것이다. 이곳을 파고 이곳을 쌓는 것이 변방을 수호하기 위한 긴급한
책무이다.
선천읍宣川邑을 동림東林으로 이전한 것은 지세의 편의를 살폈기 때문이다. 고을의 크기
를 확장하여 양식을 쌓고 갑옷을 수선한다면, 사변이 일어날 때 반드시 이곳을 지킬 수 있
을 것이니 믿을 수 있는 곳이다. 오늘날 입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당초에 고을을 옮긴 것에
는 반드시 까닭이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동림을 보면 즐비하고 성대하니 읍
터로서 이롭고 길함은 이만 한 곳도 없다.
일찍이 이전 사람의 기록한 것을 보니, 읍을 옮긴 이후 선부宣府의 민인民人들이 순로巡
路80)할 때에 말을 안고 호소하기를, “일찍이 동림東林에 있을 때 민읍民邑의 부유하고 성
대한 것이 도내에서 으뜸이었습니다. 읍을 옮긴 이후에 점차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즉각
옛 읍으로 다시 옮기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순찰사는 이 말을 임금께 보고하
였다. 이것을 미루어보면 숲의 가는 성대함에서 이전보다 나을 것이 없고, 동림 읍터의 이
익과 길함이 오늘날 임반林畔보다 아름다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림西林은 영남의 요충지라고 할 수 있으므로, 성을 설치하고 장수를 두어 하나
의 잔폐한 진영을 맡기면 도리어 지름길의 약점이 되니, 단단히 지키는 계책이 아니다. 이
것은 고을로 승격되어 겸영兼營이 되니 반드시 지망이 있는 이름을 택하여, 머리에 획부
하고 인근 2~3면을 떼어 부쳐 그 군액을 증가시켜, 그 절제를 존숭하고 동림과 서로 의지
하게 하여 위급한 일이 있으면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한다. 거련관車輦館은 철산鐵山의 출
참出站81)하는 곳이고, 지세地勢가 밝고 고우며 민호民戶가 즐비하다. 지금 이곳으로 철산
읍鐵山邑을 이전하려 한다면, 재용이 풍부해지고 백성들의 노고가 덜어지기를 기다렸다
가 성城을 쌓아야 하니, 이 일은 변방에서 긴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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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순로巡路: 감사가 도내 각 고을을 순회하는 일을 말한다.
81) 출참出站: 사신使臣·감사監司를 영접하려고 그의 숙역宿驛 가까운 역에서 사람을 내보내던 일. 필요한 전곡과 역마를 주기
위해서였다.
우하영의 천일록 --도읍의 건립 建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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