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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암살범들의 최후 고백
손상대 ㅣ 현대사연구가
몽양암살사건은 아직까지도 암살에 가담했던 4인의 생존자가 있는데도 불구, 이 사건에 대한 시각이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암살가담자들은 몽양암살 45년이 지나도록 "배후없다"는 주장으로 일관하고 있는 반면, 이들의 고백을 믿으려 하지 않고 몽양암살에 숨겨진 배후가 있거나 이 사건이 조작됐을 가능성을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몽양암살과 관련 숨겨진 또다른 진실이 있거나 배후인물의 유무도 이들 암살관련자들의 입을 통해서 얻어질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푸는 방법으로 이들이 당시의 상황에서 왜 그같은 일을 하게 되었을까 하는 시대적 조명이 필요할 것이다.(편집자 주)
사실 현재까지 몽양암살사건은 언론 조차도 적지않은 편견을 갖고 배후(?)라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했고 또 결론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추측의 울타리를 맴돌았던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추측속에 거론되는 인물들은 몽양이 정치인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때문인지 누구라도 그와 사상을 달리했던 사람들이라면 약방감초처럼 언론에 거론되어 몽양암살의 배후가 아니겠냐는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이제 4인의 생존자(김흥성 74, 김영성 65, 김훈 66, 유용호 66) 모두는 70~80을 내다보는 고령인 반면 건강상의 문제로 거동조차 불편해진 사람도 있다.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가 인생의 황혼기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배후설을 진실인 것처럼 번복하면서 자꾸 매스컴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들은 현재까지도 자신들의 행동은 정당한 것이며 배후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내 죽는 그날까지 배후가 없다는 것만큼은 하늘에 맹세한다"는 이들의 고백 조차도 이제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는 세상으로 변했다.
오히려 말을 하면 할수록 배후의 의문을 더욱 더 증폭시키는 결과만 낳고 있다.
"참고 기다리면 분명 우리의 행동이 정당했다는 평을 받을 날이 올 것이다"고 말하는 이들의 주장과 당시 상황들을 근거로 암살과 배후에 얽힌 의문을 푸는데 접근해 보고자 한다.
1992년 7월 18일 거절당할 것을 예상하고 사전연락없이 찾아간 경기도 오산의 변두리 김흥성씨 댁.
수소문 끝에 찾은 김씨의 집은 너무도 조용했고 중풍에 시달리는 자신을 돌봐주는 부인과 둘이 생활하고 있었다. 낯선 방문객이라 다소 놀란듯 김씨의 부인은 창문을 열고 방문목적을 물었다.
김선생을 꼭 만나야 할 일이 있다며 거실로 밀고 들어가자 안방에서 체육복바지에 티셔츠를 걸친 김흥성씨가 거동이 불편한 듯 문을 열고 나왔다.
거실로 들어선 필자는 "내일이 몽양이 암살된지 45년이 되는 날입니다. 지금까지 숨겨진 사실이 있다면 꼭 밝혀 역사를 바로 잡는데 일조하시리라 믿고 찾아왔습니다"고 하자 김씨는 불쾌한듯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인데, 기자나 글을 쓰는 사람들은 진실을 이야기하면 항상 그 사실들이 뒤집혀져 지상으로 발표되곤 하는 것입니다. 물론 언론 특성상 흥미유발도 있겠지만 이 문제는 그저 흥미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당신도 나와 진실을 이야기할 수 없다면 돌아가시오.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똑같은 시각으로 우리를 보아왔습니다"며 특히 젊다는 것 때문인지 상당히 거부반응을 보였다.
"기록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대화가 시작됐지만 그냥 넘어가기에 필요한 증언들이 있어 필기구를 꺼냈다. 그러나 김씨는 만류하지 않고 제법 소상하게 당시 상황과 지금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3시간에 걸친 김씨와 일문일답은 이렇다.
● 여운형을 왜 빨갱이로 생각했으며, 그렇게 생각하게 된 동기는 순수한 개인적 생각인가, 아니면 누구의 지시인가, 또 당시 언론은 어떠했는가.
ㅡ 여운형을 빨갱이로 생각한 것은 순수한 개인적 생각이며,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여운형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배후도 없고 지시한 사람도 없다. 당시 여론은 여운형과 김일성이 모의해서 나라를 망쳐먹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팽배했었다. 또 여운형은 빨갱이나 우익에서 포섭해야 한다는 여론이 고조됐었다.
● 당시 암살현장 상황이 경찰과 짜고했다는 오해를 충분히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조작은 아닌가.
ㅡ 조작은 아니다. 정말 우연의 일치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암살을 계획하고 부근에서 2일간 잠복하다 첫날은 실패하고 다음날 그같은 일이 발생했다. 정말 우연의 일치라고 다시한번 강조한다. 우리는 경찰의 지시를 따를 사람들도 아니고 누구의 조종을 받을 사람도 아니다. 오로지 빨갱이는 없애야 한다는 의견이 일치, 암살을 계획하고 행동으로 옮긴것 뿐이다. 그리고 경찰인 노덕술이 어쩌고 하면서 모 잡지에 나오던데 노덕술은 우리와 상대할 인물도 아니며 그의 지시를 따를 우리도 아니다.
● 여운형의 암살은 한번 계획으로 이루어졌는가, 아니면 또다른 계획을 했었는가.
ㅡ 아니다. 사전에 계획을 세우고 있던 중 지금은 확실히 모르겠으나 우연한 기회에 수류탄을 하나 구했었다. 그래서 우리와 동지인 장일을 시켜서 여운형을 죽이라고 내 코트(외투)까지 입혀서 보냈다. 당시 장일이와 3~4명이 갔었는데 수류탄이 불발되어 실패했다. 장일은 우익청년으로 우리와 뜻을 같이했다. 하지만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우리는 일을 잘못했다는 핀잔을 주고 그때 공주로 내려보냈다. 이날 내 외투까지 현장에 벗어던지고 도망온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 그 다음 계획은 어떠했나.
ㅡ 장일이의 실패로 우리가 여운형을 암살하려 한다는 것을 신동운이가 알았다.
때문에 암살계획이 수포로 돌아갈까 싶어 신동운이 몰래 계획에 따라 본격적인 실행에 옮긴 것이다. 믿었던 신동운도 알고보니 여운형이와 내통하고 있었다. 엄격히 말하면 여운형의 끄나불이었다.
● 왜 암살장소를 혜화동 4거리로 택했는가.
ㅡ 헤화동 4거리는 여운형이 가장 많이 다니는 도로이며, 도로 사정상 속도를 낼 수 없다는 것으로 판단 그곳을 택하게 되었다.
● 조직을 만들면서 명칭을 붙이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한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ㅡ 당시만해도 임정상태의 결사대가 남한에 와서 많은 활동을 펼쳤다. 우익청년들은 이들과 유대강화를 맺고 나름대로 활동을 했었다. 빨갱이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부분 동지라는 호칭을 썼으며, 마음만 일치하면 바로 결사대 형식의 조직을 만들어 실행에 옮기곤 했다. 조직의 명칭을 만들 이유도 없었다. 뜻을 같이하면 모두가 동지였기 때문이다.
● 활동한 것으로보아 임정결사대와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들과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ㅡ 임정간부들은 대부분 만주에 있었고 우리나라에는 결사대 조직이 내려와 주로 활동했다. 사실상 뜻이 비슷하다보니 자주 접할 기회가 있었고, 그같은 우리 활동상황이 위에도 전해졌을 것으로 본다. 특별히 조직중의 일원으로 활동한 것은 아니고,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것과 빨갱이는 무조건 없애야 한다는 것 하나 만으로 우리는 뭉쳤다.
● 활동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필요했을텐데 어떤 방법으로 충당했는가.
ㅡ 활동자금의 대부분은 내가 부담했다. 또 신동운이도 조금은 도움을 주었다. 신동운이는 금성장군의 아들인 금우경씨(일명 금열이라고도 부름)가 당시 은행에 근무했으며 상당한 부자였는데 그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안다.
● 왜 몽양암살을 계획하게 되었으며 그 동기는 무엇인가.
ㅡ 동생(김인성)이 고하 송진우 사건에 열루돼 투옥된 일이 있을 때다. 나는 옥바라지를 위해 형무소를 왕래하던 중 우연히 신동운을 알게됐고, 신동운은 나를 대한소년단을 창설한 점백이라는 사람한테 소개시켜주었다. 점백의 사무실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당시 신한은행골목 김현탁씨(김천 갑부아들로 소문난 인물)의 사무실 2층이었다. 점백이도 나중에 알고 보니 여운형의 끄나풀이었다. 그때부터 빨갱이는 모두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되었고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뭉치게 되었다. 임정결사대도 만났으며 좌익세력의 척결에 앞장서겠다고 개인적으로 마음먹었다. 때문에 여운형의 암살까지도 실행하게 된 것이다.
● 같이 활동한 사람들은 어떻게 뭉치게 되었으며, 주로 어떠한 계획아래 활동했는가.
ㅡ 김훈, 유용호, 한지근(이필형)은 영변중학교 동기동창으로 공산당과 투쟁하다 우익단체사건으로 월남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동생 영성과 나 이렇게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되었다. 모두가 동지적 입장에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 특히 빨갱이는 모두 죽여야 한다는데 마음이 일치했다. 우리는 한결같이 반공정신이 강했다. 그래서 죽여 없애야 할 좌익분자들은 차례대로 암살할 계획이었다. 첫번째 계획은 박헌영을 없애는 것이었다.
당시 별다른 장비가 없었던 관계로 자갈을 이용, 죽이려고 했지만 장비부족으로 실패했다. 너무 분했다. 그 다음은 김일성이도 여러번 암살을 계획하고 잠입했지만 경비가 철통같고 나들이가 일정치 않아 역시 실패했다. 그래서 여운형을 암살하기로 했고 그 뒤로 허헌, 김원봉 등 모조리 제거할 계획이었다.
● 여운형을 꼭 암살해야 했던 근본적 이유라면 무엇인가.
ㅡ 여운형은 당시 여론을 말하지 않더라도 평양을 7번이나 갔다왔고 또 김일성이 하고는 상당히 친했다. 그래서 남쪽의 좌익세력들은 모두 여운형에게 빨려들어갔다. 워낙 달변가로 머리가 비상해 어지간하면 말려들어간다.
이것을 김일성이가 잘 알고 여운형을 근거로 남쪽을 공산화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여운형을 제거해야 김일성의 세력이 남한에 더이상 발붙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몽양이 제거되자 김일성이 자신의 뜻대로 공산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무력침공을 결심하게 된 것이고, 또 6.25를 불러 일으킨 것으로 보고 잇다.
특히 엄연히 임정이 있는데도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을 만들어 조작을 발표하는 등 임정자체를 무시한 독단적 행동을 했다.
● 정말 배후가 없는가. 4~5명의 의사일치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 것인가.
ㅡ 우리는 누가 뭐라고해도 할일을 했고 그렇기 때문에 비록 초라하게 살고 있지만 떳떳하다. 누구의 지시를 따를 사람들도 아니라는 것을 또 한번 밝힌다. 항간에 일부 언론이 경찰, 이동만 등을 거론하는데 우리는 이런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사람이 틀리다. 설령 이런 사람들이 시켰다고 해도 우리는 말을 듣지 않는다. 이해해 달라. 멩세를 하지만 우리들의 의사일치로 몽양을 암살한 것이다. 안중근, 윤봉길도 누가 시켜서 그런 일을 한것이 아니라고 본다. 내 마음이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꼭 없애야 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혼자서라도 해아만 하는 시대였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4~5명 되다보니 배후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리들의 자발적 행동이었음을 맹세한다.
● 안두희씨가 수십년을 배후가 없다고 하다가 최근 자의건 타의건간에 있다, 없다, 하면서 심경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혹 심경변화는 없는가.
ㅡ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마라. 내가 10년전 중풍이 왔고 또 얼마전 중풍이 와 쓰러졌다 일어났지만 기억을 핑계로 변명하지 않는다. 안두희는 말도 하지 마라 소위로 하수인 노릇을 하고 그 댓가로 대령까지 지냈으니 더 할말이 있는가. 그의 소행은 우리와는 백팔십도 다르다, 자꾸 우리를 하수인처럼 보지말기 바란다.
● 그렇다면 왜 범행일체가 조작되었다가 27년만에 밝혀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고 보는가.
ㅡ 이 사건은 당시 신동운이 노덕술과 짜고 단독범행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그대로 넘어간 것이다. 27년 후 이 사실이 알려졌을 때 우리 동지였던 한지근에게 너무 큰 짐을 지게했다는 최책감으로 자진 출두, 하나에서 열까지 숨김없이 소상하게 털어놓았다. 숨길것도 없었고, 숨길필요도 없었다. 신동운과 노덕술의 단독범행 시나리오라는 것을 처음엔 물았지만 얼마 후 그 사실을 알게 됐다.
● 처음엔 단독이었다가 그것도 27년후 공범이 있었다는 것으로 밝혀져 누가 들어도 의문시되는 점이 많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ㅡ 당시 사건이 발생하자 미군정 사령관 하지가 수도청 노덕술에게 범인을 잡으라고 다그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 노덕술은 사건만 터지면 경찰에 붙잡혀가는 신동운을 불러 들였다. 이때 신동운 혼자가 아닌 김영철, 신일준이도 붙잡혀 갔는데 신동운은 노덕술과 짜고 단독범행을 조작했다. 신동운은 경찰과 상당히 친했다. 알기로는 경찰에게 돈도 얻어 쓰는 비상한 인물이었다. 사건 당시 신동운은 우리가 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 이름을 숨긴채 어떠한 조건을 내걸었을 것으로 본다. 물론 이 사실을 노덕술도 신동운을 통해 알고 있었으리라 본다. 그러나 신동운은 노덕술과 짜고 조건부 약속을 한 후 단독범행 시나리오를 만들고 사건을 마무리한 것으로 안다. 그 조건부 약속은 그들 둘만이 알뿐 아무도 모른다.
● 암살당시 갑작스럽게 제1저격수를 제2저격수로, 제2저격수를 제1저격수로 바꾼 이유는.
ㅡ 제1저격수는 누구보다 운동을 잘해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생각을 바꾼 것이다. 한지근은 운동도 많이 했으며, 특히 달리기에는 아주 능했다. 상황으로 보아 한지근이 적격이라고 생각, 택하게 된 것이다.'
● 권총은 누가 구했는가.
ㅡ 신동운이가 구해주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2정 모두 내가 구했다. 1정은 양건환씨에게 또 한정은 염동진씨에게서 구했다. 권총은 주로 천정위에 숨겨놓고 필요할 때만 사용했다.
● 권총을 구할때 무엇을 하겠다고 사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ㅡ 여운형을 제거해야 되겠다고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권총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너희들 할테면 해 보아라 하면서 선뜻 권총을 내놓았다. 그만큼 우리를 믿었던 것이다.
● 사건발생 후 만난 사람들은 없는가.
ㅡ 있다. 당시 사건발생 후 김두한씨를 만나 많은 도움을 받았다. 상당히 친하게 지냈으며 얻어먹기도 하고 물질적 도움도 많이 받았다.
● 소문에 국가에서 특혜를 주겠다는 제의가 여러번 있었던 것으로 안다. 사실인가. 왜 끝까지 마다했는가. 그 이유는.
ㅡ 27년만에 입을 열고 보니 이범석장군(국무총리)이 우리 4명을 헌병장교로 특채해 줄테니 근무하겠냐고 하는 제의가 있었다. 또 박정희 정권때는 청와대에서 나온 오 비서라는 사람이 어느날 새벽 5시에 집에 찾아와 사진찍으러 왔다며 조사할게 있으니 이야기좀 하자기에 집앞 신길동 지서에 가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그는 청와대에 와서 일할 생각은 없느냐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할 일을 했을뿐이지 아무런 조건도 특혜도 필요없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당시 우리가 누구의 지시를 받아 암살을 했다면 조건부암살을 했을 것이고 지금 이렇게 초라하게 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런 이유없이 국가에서 주는 특혜를 누린다면 큰 누명을 덮어 쓰게 될 것이고 그 자리가 탐이 나 암살을 했으면 오히려 정당하게 한 일에 먹칠을 하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명 민족의 앞날을 위해 한 일이었고 아직까지 떳떳하게 생각하고 있다. 때문에 피나는 고생을 하며 살아왔다. 나의 이같은 결백으로 그동안 처자식을 너무도 고생시켰다.
● 여운형을 떠나 사람을 죽였다는데 대한 죄책감은 없는가.
ㅡ 물론 시대적 상황이 그를 죽이지 않으면 안되었고 또 그렇게 했던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을 죽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항상 죄스러운 마음으로 살아왔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놓고 뻔뻔스럽게 산다는 것은 인간적 도리가 아닐 것이다. 때문에 온갖 특혜라는 회유에도 마다했고 이렇게 고생속에 살아가고 있다. 사람을 죽였다는 죄의 대가는 한인간으로서 충분히 받았다. 나도 인간인 이상 죄책감은 있다.
● 김구선생은 잘 알고 있는가. 관계는?
ㅡ 김구선생은 여러번 보았다. 직접 말을 건네지 않았지만 그분의 뜻을 충분히 아는 상태였다. 김구선생이 암살되었을 때 나는 직접 찾아가 이범석장군과 나란히 하관을 했다. 그때 동양극장에서 이 장면이 사진으로 방영됐다. 요즘도 당시 김구선생 비서였던 사람을 찾아가 안부도 묻곤한다. 시간이 날때면 묘소에 찾아가 참배도 드린다.
● 그토록 배후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앞으로 어떠한 일을 할 것인가.
ㅡ 이제 나이도 많고 건강고 좋지 않아 지난 세월을 들이켜보며 살아 있는 동안 회고록을 쓸 계획이다. 중풍으로 몸이 마음대로 말을 듣지 않아 걱정이다. 그러나 꼭 해야될 일이다. 또 아직까지 생존자가 4명이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얼마씩 각촐해 사업회를 하나 만들 예정이다.
● 계획하고 있는 사업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ㅡ 아직 구체적인 것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개인의 힘이라도 모아서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람들을 돕거나 이와 유사한 일을 할 예정으로 있다.
● 앞으로 생존자모두가 모여서 지난 일을 회고하는 공개적 증언을 할 생각은 없는가.
ㅡ 물론 하고 싶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이를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답답한 심정뿐이다. 하지만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는 우리의 진실됨을 알아줄 날이 분명 올 것으로 믿고 있다.
3시간 동안 계속된 김씨와의 대화는 중풍으로 귀가 멀어진데다 건강악화로 일단 끝마치고, 다음날 당시 제2저격수였던 김훈씨를 만났다.
그 역시 언론에 보도된 몇가지 기사들을 지목하면서 "언론에는 더이상 말하기 싫다"는 불만으로 일축했다. 서울 변두리 한약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 김씨는 전날 김흥성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바 있다는 말에 "언론은 항상 우리의 진실은 뒷전으로 돌리고 배후인물을 마음대로 추측, 고통을 준것이 사실이 아니냐:"며 이해해줄 것을 요구했다.
김씨는 "지금은 때가 아니니 조금만 기다리면 우리의 진실을 이해할 날이 올 것이다"며 그때 생존자 모두 공개적인 대화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김흥성씨의 이야기가 진실이니 우리의 생각도 다를 바 없다"며 세상이 조금만 더 변하면 우리 뜻을 알게될 것이하고 재차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