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선생이 지난 5일 0시40분에 별세했다. 삼가 명복을 빈다. 흔히 하는 말로 한국 사회와 사상계의 큰 별이 진 것이다. 국내언론들은 앞 다투어 리영희 선생의 죽음을 타전하고 있다. 큰 줄기는 역시 ‘실천적 지식인’ ‘사상의 은사’로 표현하고 있고, 일부 보수 언론에서는 ‘진보진영의 의식화 대부’ 정도로 선생의 영향력을 한정지어 보도하고 있다.
나는 전날 경남 삼천포에서 문학 강의를 하고 이튿날 아침에야 대구에 올라와서 오후 늦게서야 인터넷을 통해 선생의 부음 소식을 접했다. 선생께서 근래 편찮으시다는 풍문을 듣고 있던 터라 올 게 왔구나하는 마음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선생과의 인연을 떠올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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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영희 선생 ⓒ미디어오늘 자료사진 | 내가 선생을 직접 대면한 것은 1983년 10월 말 경이었다. 나는 그해 10월 13일 강원도 홍천 11사단에서 막 제대했다. 제대하기 전 군대에서 창작과비평사의 신작시집에 원고청탁을 받아 시를 보내놓고 책이 출간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려진 바처럼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문예지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을 비롯한 많은 의식 있는 잡지들이 강제로 폐간되었다. 그러자 창비에서는 ‘신작시집’이라는 형태와 ‘한국문학의 현단계’라는 비평집 형태, 그리고 ‘신작소설집’ 형태로 폐간된 잡지에 대신하는 일종의 출판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던 터였는데 그 신작시집에 원고를 보내놓고 있던 중이었다.( 이 책은 당초 계획과는 달리 이듬해 1984년 1월에 <마침내 시인이여>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당시 이 시집에는 오랜 기간 절필상태이던 김지하 시인이 10년 만에 장시 <다라니경>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이 스님들을 폄하하는 것이라 하여 불교계 일각이 반발하는 등 문단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제대하자마자 채 자라지 않은 군인머리를 하고 서울 마포에 있던 창작과비평사에 인사하러 들렀다. 당시 창비는 마포경찰서 뒤에 있었다. 지금도 기억에 선한 게 당대의 중심적인 두 잡지 창비와 문지(문학과지성)가 같은 건물에 있었다. 2층에 있는 창비사를 가기 위해 1층을 거쳐야 했는데 1층 복도를 지나가면서 낮은 창문을 통해 힐끗 안을 들여다보니 1층 사무실에서는 김병익 선생(경북 상주 출신, 문학평론가로 동아일보 해직기자출신이다)과 소설가 김원일 선생이 바둑을 두고 있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그 1층 풍경을 뒤로하고 2층 창비 사무실에 들렀더니, 마침 세 사람이 둥그렇게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첫 눈에 두 사람은 그간 많이 봐온 사진을 통해 알겠는데 한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창비 발행인이던 백낙청 선생이었고, 다른 한 사람이 바로 리영희 선생이었다. 내가 알아보지 못했던 한 사람은, 당시 창비 주간으로 나를 소개시키던 이시영 시인에게 물었더니 언론인 임재경 씨라고 했다. 이 분은 한국일보 해직 기자로 언론관련 글을 쓰던 분이었는데 내가 과문해서 알아보지 못했다. 이번 리영희 선생의 공동 장례위원장 세 사람 가운데 백낙청, 임재경 이 두 분이 포함된 것을 보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초면 인사에 리영희 선생은 열심히 하라는 짧은 덕담을 내게 건넸다. 그간 책에서만 봐오던 당대의 지성을 직접 대면하는 자리여서 나는 가벼운 흥분마저 느꼈다. 백낙청 선생과 리영희 선생은 생김새가 대조적이었다. 백 선생은 알려진 바처럼 흰 피부와 훤칠한 키로 귀공자 형인데 비해 리영희 선생은 각진 얼굴에 검은 피부로 뭔가 강인한 분위기를 풍겼다. 악수를 하면서 내 손을 힘 있게 꽉 잡던 것도 그런 겉 인상과 상통했다.
내가 리영희 선생의 글을 처음 접한 것은 그 유명한 책 <전환시대의 논리>(1974)였다. 1979년 계명대 대명동 캠퍼스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그 도서관은 개가식이어서 책장에 꽂힌 책을 직접 꺼내 볼 수 있었는데 그냥 뽑아든 책이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이 책을 단숨에 읽고 깊은 충격과 사회현실에 대해 눈을 뜨게 되고, 지적으로 각성하게 되며 이어 선생의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 등을 읽으면서 의식화되어 간 과정은 그들이 리영희 선생을 ‘사상의 은사’라고 부르며 존경하게 된 1970년대 중반 이후 학번들과 대동소이하다.
이후 선생을 문학행사장에서 몇 차례 뵈었다. 리 선생은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민족문학작가회의에는 수필가 회원이 없었는데 유일하게 수필가 이름으로 회원이 된 분이 리영희 선생이었다. 내가 출간한 시집을 보내면 답장으로 관제엽서에다 그 시집 가운데 선생 자신이 마음에 들었던 시를 1편 손수 적어서 보내면서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덧붙였다. 한 번은 4.19관련한 내 시를 적어 보내주기도 해서 선생이 이런 유의 시를 좋아하는 구나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나는 선생을 대구에 두 번 모셨다. 첫 번째는 1994년 가을이었다. 당시 나는 계명대학교 대학원 학생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학생들 공부를 위해 심포지엄을 열었다. ‘한반도와 핵’이라는 주제로 리영희 선생과 녹색평론 발행인이자 영남대 교수이던 김종철 선생을 모셔서 발제하고 토론했다.
그때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초청일자에 맞춰 새마을 기차표를 끊어서 등기우편으로 넉넉하게 시간을 두고 서울에 있는 선생의 자택으로 보내드렸다. 그리고 행사 바로 전날 다음날이 행사라는 사실과 기차표를 잘 받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드렸더니 기차표를 못 받았다면서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차가운 목소리로 화를 내셨다. 내가 보낸 일자를 생각하면 받아도 벌써 받아야할 기간이 지났는데 나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보냈다고 다시 말했더니 선생께서 내게 언제 보냈냐고 물었다. 당황해서 경상도 식으로 “어제 아래 저아래” 보냈다고 대답했더니 ‘저아래’가 무슨 말이야? 대학원생이 우리말도 제대로 모르냐고 더욱 화를 내셨다.(저아래는 경상도 사투리고 ‘그저께’가 표준어이다.) 그래서 더 당황한 나는 기차표를 못 받으셨다면 내일 아침 일찍 승용차로 서울까지 모시러 가겠다고 말했더니 선생께서 내가 언제 승용차 탄다고 했느냐 하시면서 더욱 화를 내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대략 난감이면서도 나도 화가 났다. 당대의 대가라는 분이, 그렇게 훌륭한 책을 펴내신 분이 속은 저렇게 좁고 협량하나? 하면서 쌍욕이 막 튀어나왔다. 그러면서 순간 깨달은 게 내가 승용차로 모시러 가겠다고 했을 때 격하게 화를 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당 하던 시절 고속도로 위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 불구가 된 사실이 떠올랐다. 당시는 워낙 흉포하던 시절이라 군대에 끌려간 젊은 대학생들이 의문사 형태로 많이 죽던 시절이었다.
군사정권의 눈엣가시였던 선생이 고속도로를 타고 몇 시간을 달려온다고 할 때 교통사고를 가장한 테러가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던 그런 시절에 철없는 지방대학원생이라는 자가 승용차 운운했으니 격하게 화를 낼 법도 했다. 다음날 행사는 해야되는 데 정말 난감하게 되었다. 고민하다가 결국 영남대 계시던 염무웅 선생에게 사정을 말씀드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염 선생께서 혹시 기차표가 중간에 분실됐을 수 도 있다면서 끊어 보낸 기차표의 열차번호와 좌석번호를 묻기에 마침 내가 표를 보내면서 수첩에 적어둔 게 있어서 그 걸 알려드렸더니 다음날 리영희 선생께서 무사히 대구에 와서 일정을 마쳤다.
그 며칠 후 서울의 리영희 선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 기차표가 집에 배달됐을 때 사모님이 집을 비우셔서 등기우편물이라 수취인이 없으면 그냥 돌아가는 관례대로 몇 차례 되돌아갔다가 뒤늦게 받았다면서 표를 못 받은 것은 자기 쪽의 과실인데 나에게 화를 낸 것에 대해 사과한다고 말하시면서 늦게 받은 기차표는 반환해 그 돈은 자기가 쓰시겠다고 말했다. 나는 당시 그 큰 어른이 전화까지 해서 쿨 하게 사과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난번 화 낼 때와는 다르게 대가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참 정직한 분이구나 하는 감동을 느꼈다.
두 번째 선생을 대구에 모신 것은 2003년 10월 24일이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대구지회 초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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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대구 강연 / 사진제공.작가회의 | 이 단체 대표를 맡고 있던 나는 당시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북핵 문제 등에 대해서 지역민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주고자 어렵게 선생을 모셨다. 선생은 이미 그때 기관지염과 뇌출혈 등으로 인해 사회활동을 거의 중단하고 있었다. 그날도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연단에 올라 대구교육대 소강당에서 강연했는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열강했다. 복도까지 가득 메웠던 3백여 명의 청중 특히 민자통운동 등 지역에서 민족운동을 하시던 어른들이 특별히 연락을 드리지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모여들어 강연 듣고 질의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나 재미있는 것은 당시 평화방송 기자였던 유지웅 씨(현재 평화뉴스 발행인)가 선생의 강연을 녹취했다가 풀어서 전해주어서 <대구사회비평>(2003년 9-10월호)에 실었다. 우리도 생각 못했던 바를 취재 차 왔던 유 기자가 기록해 주는 것을 지켜보면서 리영희 마니아가 있구나 생각했는데, 이 글을 그 유지웅 씨가 관계하는 지면에 싣는 것을 생각하면 인연이란 게 참 묘하구나하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강연 후 뉴영남호텔에 사모님과 함께 묵으시고 다음날 아침 홍덕률 교수, 김윤곤 시인 겸 영남일보 기자 등과 아침을 드시면서 지역에서 민족운동, 지역운동을 하시는 분들에게 덕담을 하시고는 기분 좋게 상경했다. 며칠 후 당시 내가 관여하던 잡지 <대구사회비평>에 대해 ‘망존하는 영호남 지역감정 타파가 급선무’ 라는 휘호 겸 격려 문구를 200자 원고지 뒷면에 푸른 싸인펜으로 쓴 글과 안부를 묻는 사신을 함께 보내주셨다. 이미 손이 떨려 글씨는 알아보기 쉽지 않은 악필 수준이었다.
이후 간간이 전화로 안부 인사를 드리곤 했는데 겨울이면 건강을 위해 두어 달 씩 남쪽 바닷가 가서 지내기도 한다고 했다. 근래 선생의 자전적인 책 <대화>를 함께 엮은 임헌영 선생(민족문제연구소장, 문학비평가)을 통해 그 책 작업을 2여 년을 함께 했는데 건강은 나빠도 기억력은 비상하더라는 안부를 듣기도 하다가 올 봄에는 뜻밖의 엽서를 받았다. 내용은 자신은 문인이 아닌데 왜 <사람의 문학> 잡지를 자기에게 보내느냐는 항의(?)성 엽서였다. 이전보다 악필 수준이 훨씬 심해져 있었다. <사람의 문학>이 출간되면 항상 증정하곤 했는데 그 동안 가만히 계시다가 난데없이 엽서를 보내왔기에 상태가 많이 좋지 않으신가 염려하면서도 예의 그 꼬장꼬장한 성격 탓에 사소한 것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선생이 그간 우리사회나 지식인 집단을 향해 해온 작업은 한 때 자신이 관여했던 한겨레신문의 표현대로 “ ‘야만의 시대’에 맞선 ‘이성의 시대’ 개척자” 임은 부인할 수 없다. 이 과정에 선생이 겪은 고난과 고통, 또 다르게 선생의 업적에 대한 상찬은 이미 다른 지면에서도 넘쳐 남으로 여기서 새삼 중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글을 쓰는 내 입장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선생의 말씀이 가슴에 맺힌다.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괴로움 없이는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의 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우상과 이성>)
“ 글은 자신의 피로 쓰는 거야. 그러니 내가 직접 나의 피가 펜에 들어가는 것을 눈으로 보듯이 경건한 마음으로 잉크를 넣고 펜촉을 닦고, 잉크가 다 소모되면 내 피가 그만큼 나갔구나 생각하고 다시 경건한 마음으로 잉크를 넣고 해서 써야지, 어떻게 볼펜처럼 대량생산된 소모품으로 글을 써. ”(손호철 교수 증언 <프레시안> 2010. 12. 6)
선생의 말처럼 글을 쓴다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고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글은 ‘피’로 써야 하는 것이다. 과연 나는 선생의 이 명제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자기 성찰을 다짐한다.
두 번째 대구 강연에서 선생은 자신의 이야기는 막연한 주장을 펼치는 게 아니라 객관적 사실과 자료를 근거로 한 강연이라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했다. 말 그대로 실사구시적 태도이다. 나는 선생께서 이 말씀을 선생이 몸담고 이끌었던 오늘의 진보진영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어 했다고 생각한다. 자기논리에 도착돼서 한 사람도 설득하지 못하는 큰 주장만 소리치는 스스로가 시대의 우상이 될 게 아니라, 자료에 근거해서 냉철하게 이성적으로 담화해야 우상이 파괴 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말했다고 생각한다.
선생의 저서를 완벽하게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대략 다 읽었다. 특히 <대화-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한길사, 2005)는 읽다가 자려고 자리에 누웠지만 너무 재미있어서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다시 일어나서 740쪽을 단숨에 다 읽어 치우기도 했다. 어떤 문인 모임자리에서 책 이야기가 나와 내가 <대화> 읽은 사정을 이야기 했더니 학창시절 명문 학교를 다녀서 평소 유난히 엘리트연 하던 한 시인이 나를 보고 김 선생이 그래서(지방의 평범한 대학을 다녔지만, 그렇게 책을 좋아해서) 출세하는구나 하고 말해 고소를 금치 못했던 기억도 있다.
그때 읽은 리영희 선생의 가르침이 지금 내 몸의 살과 피를 덥히고 늘이는 데 기여하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내 젊은 날 의식의 스승 리영희 선생, 오늘은 선생의 영전에 꽃을 바치고 와야겠다. 늦은 밤 시작한 글에 어느 새 먼동이 동터 온다. 2010. 12월 7일 신새벽에 김용락 씀.
[기고] 김용락 / 시인. 경북외국어대 교수. yrk525@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