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시절 도서관에서 몇 달 주기로 되풀이해서 빌려보던
오래 된 책이 있었다.
조선일보의 유명한 이규태 논설위원[2006작고]이 현역 기자 시절
전국 팔도 방방곡곡을 다니며 숨겨진 사람들과
사연을 취재하고 썼던 '맨발기자 남한 종횡기’라는 책인데
지금까지 나는 한국에서 나온 르포 관련 출판물에서
이 책을 능가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67년도에 출판된 오래된 책으로서 대단히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며칠 전 다섯 곳의 대형 도서관을 찾아 다니면서 이 책을 찾았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한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이렇게 좋은 책이 도서관의 먼지 구석에서 잠을 자고 있다는 것이
자못 애석하게 느껴져서 앞으로 이 책의 흥미있는 부분을
발췌해서 자주 선보일 예정이다,
이 규태씨[1933-2006]는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여러 요직을 지낸분이다.
1983년 조선일보에 이 규태 코너라는
국내 최장기 연재 컬럼을 시작해서
작고 직전까지 집필했었다.
매우 박학 다식한 분으로 독특한 주제로 쓴 많은 저서를 남겼다.
夜月 한라산 -이재수 누이 회고
이재수로 분한 이정재 - 박광수 감독의 이재수의 난
-----------------------------------
天主를 팔아 놀아난 자들
내가 오돌또기[할미 꽃]라 불리는 노성녀[老聖女]를
서귀포에서 수소문 한 것도 한국 여인이 살아 온 하나의 자세를
더듬어 보고 싶은 뜻에서였다.
서귀포 사람들은 거의 이 오돌또기 할멈을 모르고 있었으며
그의 오빠 이 재수가 60년 전에 저지른 반란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이름을 알고 있었기에 동회를 쫓아다니며 명부를 뒤져보고
바닷가 가까운 구멍가게를 찾아 들었다.
서귀포 665번지에 사는 이 순옥 씨. 이재수의 누이, 나이는
일흔 셋이었다.
역사의 현장 관덕정
----------------------
그 할멈은 전봉준 다음가는 민권 운동의 영웅으로 불리고 또
천주교도 700여명을 학살한 이단의 수괴라고도 불린
성교란[聖敎亂]의 주모자 이 재수의 친누이인 것이다.
이 오돌또기는 그 오빠의 그늘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고 하늘[神]을
우러러 본채 평생 피어있었다.
1901년 제주도에 있어서 천주교는 관권위에 있었고
신부[神父]는 제주 목사[牧使]위에 있었다.
신부가 목사의 관아에 구둣발로 들어가도 아무 말도 못했으며
한낱 신도가 염전에서 하느님의 뜻을 빙자하여 소금 가마니를
짊어지고 나갔다고 해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신흥세력에 아부한 사이비 교도들은 관을 팔아
사세[私稅]를 뜯었다.
교회에다 형틀을 갖다놓고 사형[私刑]을 가해도 감히 누구하나
탓할 사람이 없었다.
또 교회당은 그곳에만 숨으면 면죄가 되는 노트르 담의 사원이었다.
이 재수의 난이 있을 때의 제주 풍속
----------
이런 일이 있었다.
사이비 신도 하나가 대정[大靜]고을의 한 오름에서 말똥을
줍고 있는 처자에게 눈독을 들였다.
결국 이 처자는 치마를 찢긴 채 마을로 내려왔다.
격분한 마을 사람들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성 폭행 범을 뒤쫓아 갔다.
한데 이 간부는 성당으로 몸을 피했고 마을 사람들은 그 성당을
둘러싸고 고함만 지르다가 고함만 지르다가 돌아갔다.
성당에만 다니면 그보다 더한 죄도 면죄된다는 것이 통념처럼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의 3일 천하 영웅
이렇게 무법한 세상을 통분히 여기고 있는 사람 가운데
대정 고을의 관노 이재수란 젊은이가 있었다.
한라산에서 성폭행이 있었는지 한 달도 안 되어 이 재수의
아버지가 성당꾼들에게 붙잡혀 간 것이다.
사세[私稅]를 내지 않고 하느님이 시킨 성당의 사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성당 앞에 놓인 형틀에 묶이어 주리를 당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담 너머로 이 재수는 더 이상 분함을 참을 길이 없었다.
지금의 대정읍 인구 17,000명
----------------------------------
마침내 학대당한 사람끼리 반천주교의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 봉기에는 당시 제주 사람의 호응을 알고 의병들이 하루하루
늘어났다.
대정에서 양군[兩軍]으로 나눈 의병은 좌군을 한림을 거쳐
제주로 진군하게 하고 이 장수가 거느린 우군은 서귀포를 거쳐
제주에 이르기로 했다.
이 양군이 제주를 협공하기까지 군사는 수만으로 늘어났다.
제주 성을 포위하고 열흘이 지났다.
성안에서는 관군이 농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유리한 화총[火銃]으로 무장했기에 죽창과 몽둥이로
무장한 의군이 뚫고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성안에 갇힌 제주 사람들은 식량 조달이 안 되어 굶기 시작했다
도둑이 성하고 심지어는 살인까지 일어났다.
관군은 원병을 기다렸고 프랑스인 신부는 프랑스 함대의
원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주성
----------------------------
그것은 부녀자들의 봉기였다.
이 용감한 부녀자들은 관군과 방망이로 싸워 화총을
빼앗아서 성 밖의 의군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많은 피를 흘리며 기어코 성문을 열어주었다.
그 성문을 열려는 의군과 관군의 싸움에서 죽어 간 제주의
부녀자는 수 백 명을 헤아렸던 것이다.
입성한 의군은 천주교도를 잡아다 관덕정 앞뜰에서
집단 학살을 했다.
그때 죽은 천주교도는 700명을 헤아린다.
이재수의 3일 천하는 관군의 원병[援兵]으로 끝났다.
사실 관군의 원병이 없었다 해도 제주 섬에서 못된 짓을
다하는 천주교도들을 모조리 없애버린다는 거병의 목적을
다했기 때문에 이 성교란은 이미 끝났을 것이다.
제주민란 뒤 -관덕정 앞.
요청에 출동한 프랑스 군함 함장이
찍은 사진
------------------
가도록 손을 내어 밀었다.
이렇게 많은 병사를 이끌고 오지 않아도 손수 찾아 가려했던
참이라고 하면서 끌려갔다.
이때 의군의 밥 시중을 하며 제주까지 따라왔던 누이 오돌또기가
울며불며 오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몸부림치자 이 재수는
누이를 달래면서 비장하게 말했다.
“ 너는 죄인의 누이가 아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을 그릇 섬기는 악한 무리를 무찔렀다고
나를 축복해줄 것이다.
너는 그런 진정한 하느님에게 유명을 달리한
나의 명복을 빌어 달라.”
하는 유언을 남기고 침착하게 압송되어 갔다.
수절하는 두 할미꽃 오돌또기
제주도는 다시 잠잠해졌고 오돌또기는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었다.
그리고 오돌또기는 대역(大逆)을 한 죄인의 누이라는 낙인을 받고
거리로 내쫓기게 되어 문전걸식을 해야만 했다.
오돌또기는 문전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모두 겁을 먹었다.
밥을 주면 대역죄를 동정 한다 해서 화를 입을까봐 더러는
내어 쫓고 더러는 달래서 보내기도 하였다.
그래도 오돌또기는 틈틈으로 오빠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글로 써보았다.
쓰다 보니 하나의 전기[傳記]가 될 것 같았다.
오빠의 누명을 벗기는 것은 내가 살 길이다고 굳은 마음을
먹은 다음 그 전기를 들고 서울로 갔다.
열다섯 살 때였다.
오돌또기는 총독부 문 앞에서 사흘 동안을 노숙하며 출판을
허가해 달라고 관계 관리를 귀찮게 졸랐다.
그러나 뜻을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오돌또기는 그 전기를 들고 일본으로 현해탄을 건너갔다.
머리를 땋아 내린 이 소녀는 도둑차를 타고 또 어떤 때는
애걸해서 공배를 타고는 해서 하면서 돈 한 푼 없이
현해탄을 건너갔다.
오돌또기는 나쓰메 쇼오세키[夏目漱石]등 이름있는
일본의 문인들을 찾아가 그 문전에 자면서 출판해 줄 것을
애걸하고 다녔다.
한 소녀의 정성을 저 버릴 수가 없었던 이들 작가 12명은
서로 돈을 추렴해서 소녀의 숙원을 풀어주었다.
야월 한라산[夜月 漢拏山]이란 이 책을 들고 고향에 돌아 온
오돌또기는 알 만한 사람에게 이 책을 나누어 주고 다녔다.
시집가라는 것을 끝내 뿌리치고 오빠로부터 학살을 당한 편인 예수
슬하로 귀의한 것은 스물 한 살 때였다.
‘예수꾼을 죽인 이 재수 누이가 예수를 믿는다.’는
역설의 배리[背理]속에서,
“ 정녕 오빠는 하나님의 사자이신 거다.
하나님을 팔아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들을 없애려고 보내신 거다.
오빠는 오히려 하나님 편이다“는 기도문을 평생 외었다.
아무리 하느님 편이라도 해도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는 죄를
굳이 묻고 하찮은 여자의 일생일지라도 그 속죄가 가능하다면
속죄케 해달라고 빌었다.
그 녀가 신에게 귀의 한 것도 또 그가 성처녀로서 평생을
살아 낸 것도 그 속죄 때문이었다.
오빠 이재수의 그늘에 또 다른 하나의 엘레지가 있어
왔다는 것을 오돌또기가 안 것은 스물다섯 살 때 일이었다.
일적화[一寂花]라면 성교란이 일어날 무렵의 제주 땅에서
모를 사람이 없을이 만큼 이름 높던 명기였다.
제주 목사가 대정고을을 자주 들렸던 것도 이 일적화를
소유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비록 신분이 관노일 망정 이 재수의 인품에 정이
끌려 있던 때라 성교란이 조금만 늦었던들 춘향이의 비극을
겪었을 뻔했던 것이다.
오돌또기도 이 일적화의 명성이나 그 고운 얼굴과 미끈한
몸매를 잘 알고 있는 터였다.
박광수 감독의 영화에서 이재수의
정인 숙화로 분한 심은하-
숙화의 원 모델이 일적화인듯하다.
------------------------
바로 그녀가 오빠 이 재수와 정을 나누었다는 그 명분으로
수절하고 있는 것을 알았을 때 오돌또기는 꿈만 같았다.
오돌또기와 일적화는 외딴 언덕 밑에 움막을 짓고
밭을 일구고 살았다.
외로울 때면 가야금을 튕기면서 고독을 달랬다.
이 두 여인은 정처없이 허황한 천지를 헤매고 있을
오빠와 영혼이 쉬어 갈 조그마한 발판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그들은 대정 고을에다 비석을 세우기로 하고 그 돈을
얻기 위해서 기나긴 구걸 행각을 나섰다.
파뿌리 백발로도 못다 풀 恨
방에서 자는 날보다는 노숙하는 날이 많았다.
이 두 여인은 제주 400리 길을 걸어서 푼돈을 모았다.
성교란에 죽음을 당한 후손들은 이 두 여인에게 시궁창
물을 끼얹기도 했다.
또 성교란에 가담했다가 가산을 빼앗긴 집 후손들은 구걸해서
짊어지고 다니는 곡물을 빼앗기도 하였다.
이 모진 일들을 속죄로 감수하며 2년 동안을 빌고 다녔다.
들판에서 잘 때의 베개라면서 꺼내어 보이는 것이
누덕누덕 해진 성서였다.
이 구걸 도중에 일적화가 병이 들었다.
그녀는 굳이 약을 마다고 했다.
그리고 영주산 해받이 좋은 양지를 손수 찾아서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 누울 자리를 파서 묻어 달라는 말과 가야금도 함께
묻어 달라는 말을 남긴 채 일적화가 약을 마다하고 또 손수
묻힐 자리를 찾아 누운 것은 이미 빌어놓은 돈을 아끼기
위해서였을 거라고 오돌또기 노성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가엾은 일적화를 양지에 묻고 나뭇가지를 얻어 십자가를 만들어서
꽂아 준 다음 오돌또기는 구걸행각을 혼자서 계속했다.
그리하여 제주 각 지방에서는 <오돌또기>란 옛 노래에
새 가사를 붙여 이 가엾은 여인의 맺힌 시름을
읊기까지 되 뇌였다.
‘언제나 한을 다 풀꼬, 오돌또기 할매야!
저승에 가서나 쉴꼬, 오돌또기 할매야!’
오돌또기는 대정 네거리에 오빠 이재수의 비를 세워놓고야 말았다.
비석을 세웠을 때는 이미 그녀의 머리가 희끗희끗 세어있었다.
이 노 성녀는 정방 폭포 앞에 보이는 섭 섬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옛날 저 섬에는 용이 되고자 하는 귀 달린 뱀이 살고 있었다.
용왕에게 정성 드린 공양으로 섭 섬에 숨겨둔 여의주
두 개를 찾으면 용이 되리라는 게시를 받았다.
이 섭 섬이 원귀가 자기에게 옮은 것 같다고 말했다.
비오는 날 밤이면 울기 마련인 이 섭 섬의 원귀와 같이 비오는
그 수많은 밤을 울어 살아야 했던 이 노성녀는 오빠의 유골을 찾는
일이 남은 여생에 꼭 해야 할 자기의 일로 여기고 있었다.
형장에서 교수되어 청패 묘지에 다른 두 제주도 민란
주모자와 함께 묻혔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으니 날더러
서울 가거든 청패 죄수 묘지를
알아 보아달라고 신신 당부를 하였다.
서울에 와서 살펴 보았더니 청패 죄수 묘지는 청파동의 고급 주택이
들어 있는 둔덕이었으며 1930년대에 무연고 분묘로서 처분되고
아무 흔적도 없었다.
아무튼 오돌또기는 섭 섬의 원귀처럼 여의주를
못 찾고 지쳐 죽어야 할 것인가!
필자 주;
이재수의 난은 천주교에서 신축 교난[辛丑敎難]이라고 부른다.
양쪽에서 주장하는 이야기는 다르나 프랑스 신부 한명과
한국인 신부 한명이 제주도로 파견되어 올 때 이들을
잘 돌봐 주라는 지시가 고종으로부터 제주 목사에게 직접 내려
갔었다. 천주교 선교에 힘이 실린 것이다.
민란이 일어났던 그해 1월 제주도의 천주교 신자가
영세신자 250명 예비신자 700명 수준이었다.
지금의 서울 시내 작은 성당만한 교세였다.
그러나 여기에 제주도의 불량배들이 이 천주교에 떼거리로
입교하여 천주교를 등에 업고 행패를 부린 것이 민란의
폭발을 가져 오게된 주요 동기가 되었다.
세상 물정 몰랐던 조선인 보좌 신부와 프랑스 신부가 이 사실을
제대로 읽지를 못하고 방치한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부과하는 중앙정부 파견 감세관과
일방적으로 천주교회측만 편을 드는 무능한 제주 목사에게
쌓인 원한도 또다른 민란 폭발의 도화선이 되었다.
비슷한 사건이 반세기뒤에 제주에서 또 있었다.
제주 4.3폭동도 공산당 색출하라고 내려보낸
평안도 출신 반공 청년단체였던 서북청년단의
극심한 행패도 한 몫 했었다,
제주도는 이 때나 그 때나 외부 영향으로 힘든 재앙을
겪어야 했나보다.
본문에 제주성내의 아녀자들이 적극 호응했다고 했는데
다른 역사 기록에는 이들이 잠녀[해녀]들이라고 되어있다.
한국 역사에 여자들이 적극 들고 일어난 민란은 없었는데
제주 민란의 해녀 봉기는 한국 여성사회 발달사에서
주목해 볼 사실이다.
이재수는 이때 나이 20살이었다.
관노라고 되어있으나 이미 이 때는 갑오경장을 거치면서
노비제도가 다 폐지된 뒤였다.
통인이나 마부였다는 말이 있는데 통인[군수의 개인비서]
이면서 필요하면 군수가 탄 말의 고비를 잡고 마부로서
수행했을 것이라는 추리가 든다.
그가 지도한 제주 민란은 특징이 있었다.
천주교 자체에 대한 원한 보다도 교를 업고 행패를 부려댄
불량배들에 대한 응징이 봉기의 목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프랑스 신부를 해하지 않은 사실에서 알 수가 있다.
더해서 불량배 응징을 하자 토벌차 제주에 급파된
강화 진대 병사들에게 저항하지 않고 봉기군을 모두 해산하고
주동자 3명이 모든 책임을 지고 투항한 점이다.
끝까지 저항하거나 육지나 일본으로 도주할만했는데도
이들은 목숨을 포기하고 투항했던 것이다.
이들이 부대 해산과 투항전 세명외에는 아무도 처벌하지않는다는
조건을 교섭한 것도 유념할 대목이다.
기록을 찾아 보니 원래의 이재수와 같이 처형된 두명을 포함한
삼의사의 비가 유지들에 의해서 61년도에 대정읍에 건립돠어
있다고 되어있었다.
이 비가 이재수의 여동생 이순옥씨가 세웠을 것으로
생각되어 대정읍 사무소에 문의 해보니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앞 본문에 이재수가 제주를 떠나기전 여동생에게 천주교를
믿으라고 했던 것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너무 사람을 많이 죽인 자책감도 있었겠지만 자기가
떠난 뒤 천주교 신자들에게 당할 가혹한 보복 가능성도
걱정 안할 수없는 누이 배려에서 였을 것이다..
이순옥씨가 다녔을 서귀포 성당에 문의 했더니
신부님이 새로 부임한데다가 사무장 역시 여기에 관한
아무런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장두라 불리던 세명의 주동자들,이재수와 오을길, 강우백
세 명은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그 해 10월 교수형에
처해졌다.[영화와 같이 참수형을 당한것이 아니다.]
이들의 희생으로 제주도에서 더 이상의 처형은 없었다.
이 재수가 묻힌 죄수 묘지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청파동 언덕.
서부역 지나서 보이는 청파 중앙교회 언덕이 옛 죄수
묘지가 있던 언덕의 북쪽이다.
죄수 묘지는 있던 고급 주택가는 이 언덕 동쪽에 있다.
----------------------------------------------------------
제주에서 삼의사로 추앙받는 세 명이 묻혔다는 청파동의
묘지는 지금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어제 하루 종일 이규태씨가 말한 청파동을 찾아가
이 재수의 자취를 찾아 보았다.
동사무소, 경로당 오래된 가게등 여러 명에게 옛날
죄수 묘지의 위치를 찾았지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앞 사진 동쪽 사면 옛 고급 주택가
여기에 이재수가 잠들었던 죄수 묘지가 있었다니-
그 뒤 들어선 고급 주택도 다 없어지고 -크게 바뀌었다.
------------------------------------------------------
단지 청파동의 옛날 고급 주택지의 위치는 찾아내어
방문했지만 그곳도 이미 상당히 변모한 상태였다.
위치는 숙명여대와 서부역 중간의 언덕지대였다.
고급 주택들이 들어섰던 곳도 다세대 주택 지대로
변모했고 재개발로 어수선하다.
역사란 기록이나 구전이 없으면 불과 한두세대 만에 완전한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진다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