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강-신 5장 12-15(안식일 지키기)1503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5장 12-15절입니다. 구약성경 269페이지입니다.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방금 읽었던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을 오늘날 현대를 살고 있는 유대인들 또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젊은이들이 만약에 어른한테 이 말씀을 들었다면 그들은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 안식일 안 지키면 어떻습니까?” 그렇게 나올 가능성이 굉장히 많아요. 안식일을 안 지키면 뭐가 달라집니까? 그 말에 아버지나 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답변을 준비해야 돼요.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을 경우에 현실적으로 이러이러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제시를 해야 되는데, “안식일을 안 지키면 그만이지. 뭐.”
왜냐하면, 그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자신이 없어요. 안식일을 안 지키므로 말미암아 태양이 사라진다든지, 별이 몇 개 떨어진다든지 이랬으면 좋겠는데, 안식일을 안 지켜도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뭐? 뭐? 없어?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세상은 자연스럽게 그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젊은 사람은, 그러니까 바쁠 때는 안식일을 안 지켜도 된다고 딱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죠.
옛날에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측이나 또는 고신 측에서는, 자녀들을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교회 나오라고 할 정도가 아니고 아예 일요일에는 공부를 못하게 했어요. 공부를 못하고, 물론 tv도 못 보게 하고 뭘 했느냐 하면 경건한 책들, 천로역정 같은 책들이나 성경책을 읽게 하고, 그리고 기도하고 자숙하는 날을 지켰습니다. 그러다가 자기들 생각에 그거는 무리다 싶었던 모양이에요. 자식한테 이기는 부모 없어요. 자식이 반발하니까 그때 어떻게 했느냐, “그럼 교회만 나와 도!” 이래 되거든요. “오후예배까지?” “으음~ 그것까지 말고 오전만 나와 도!” 이런 식으로 협상에 들어가죠.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대학만 들어가 도! 제발 니가 대학만 들어가면 안식일 지키는 것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 테니까 그것만 해 달라.” 그렇게 하죠.
어떤 분이 미국에서 장거리 전화를 하셔가지고 “목사님, 자식을 어떻게 키웁니까? 어떻게 복음적으로 키우면 됩니까?” 해서 한 삼십 분 동안 장거리 전화를 했었어요. “나는 예수님을 가르쳐 주고 싶은데, 애는 자꾸 거부를 나타내니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엄마가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것은 엄마의 취미생활에 강제 동원시키는 것밖에는 안 됩니다. 그리고 공부하라고 하는데 공부는 기초입니다. 복음하고 관계없어요. 기초만 단단하게 되면 지가 알아서 다 합니다. 기초 없으면 억지로 공부하라고 못하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자식을 어떻게 가르칠 것을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자식한테 뭘 배울 거냐? 주의 말씀을 어떻게 배울 것이냐를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끝. 가르칠 생각 하지 마시고 자식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새롭게 받아버리면 부모가 변화되고, 그 변화된 것에 의해서 자녀가 어떤 반응을 나타나겠지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자식은 부모하고 만나게 해주신 겁니다.
“안식일을 지킬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저는 안식일을 지킬 용의가 전혀 없습니다. 주일 지키지 않겠습니다.” 라는 이것이 기본으로 되어 있죠. 그런데 성경에 보면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면서 뒤에 토를 단 게 있어요. 여기 15절에 보면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이게 뭐냐 하면, “안식일을 기억하라” “왜요?” “터무니없이 구출되었으니까”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하셨기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겁니다. 상당히 정말 제가 미리 언급하지만 진짜 어려운 이야기에요.
하나님이 하셨기에 “예 고맙습니다.” 이게 아니고, 하나님이 하셨기에 “아이구 하나님 좋으신 분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니가 못한 것을 하셨기에 “안식일 기억하라. 안식일을 지키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이 되느냐 하면 이런 조건이 돼요. “하나님이 하신 게 뭐가 있다고? 하나님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라는 마음 상태에서 백날 안식일을 지켜봐야 그건 안식일을 지킨 게 아니라는 겁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조건이 뭐냐 하면 옛날 있었던 애굽에서 탈출하게 하셨던 그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같이 여기에 현존하고 있다는 것, 그게 조건이 돼요. 주님이 애굽에서 홍해를 갈라지게 했던 그 능력이 지금 동일한 능력으로 나를 살리고 있다고 인정할 경우에만 안식일이 기억되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돼요. 그런데 이걸 듣고 젊은 사람들이 “아이고 또 옛날 구닥다리 이야기 한다. 옛날 우연히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 지금은 안식일 안 지켜도 아무 일 없는데. 자꾸 아버지는 그걸 기억하라고 하니까 아버지한테 문제가 있구나.” 맞아요. 아버지한테 문제가 있어요.
아버지 본인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잔소리하는 아버지 본인이 하나님께서 날마다 새로운 능력으로 우리를 구출해내신다는 것을, 말만 그렇지 본인 행동은 전혀 따라주지 않으면서 자식들에게 안식일 지키라는 것은, 그것은 미신입니다. 일종의 주술이에요. 저주를 미리, 또는 알 수 없는 저주의 불안감을 자기 행함으로 커버cover하려는 종교적 시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그 안식일 지켜서 이스라엘 망했잖아요. 안식일을 안 지켜서 망한 것이 아니고 지켰는데 망해버렸어요.
근데, 그렇게 망한 그것이 주께서, 인간들은 안 지켜도 주님은 안식일을 충실히 지킨 결과물이에요. 니 안 지켰지? 하지만 나는 내 안식일을 외면할 수 없어. 나는 지킨다. 지켜서 한 것이 뭐냐, 이스라엘 망해버리고, 망한 이스라엘을 망한데서 능력으로 구출시키는 그 작업에 나섰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 보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하나만 기억하면 돼요. 우리는 안식일을 지킬 마음이 전혀 없다. 안식일을 지키나 안 지키나 세상은 전혀 영향 받지 않는다. 내가 안식을 지켰다고 해서 갑자기 세상이 내 위주로 잘 돌아가란 법은 없다. 나는 분명히 확신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지킬 이유도 없고, 근거도 없는데 주님께서는 착실하게 안식일 지키고 있다. 그 의도가 뭐냐?
그 의도를 우리는 알아채야 됩니다. 알아채야 돼요. 알아채는데 알아채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 방식이 뭐냐 하면, 시저스scissors, 가위가지고 원단을 잘라내는 거예요. 애들 공작시간에 가위가지고 원 그림을 색칠해놓고 나중에 자르잖아요. 점선은 접고 실선은 잘라서 원하는 모양 만들고 하죠. 주님께서는 안식이라는 가위를 가지고 잘라냅니다. 그러면 잘라내는데 뭘 잘라내는가? 시간이라는 바탕의 원단을 잘라내요. 그러면 왜 잘라내는가? 그 예는 간단합니다. 3월 28일부터 한국에 난리 났습니다. 왜? 프로야구가 드디어 개막을 했어요. 얼마나 긴긴 겨울 고대했습니까? 우선 스포츠 방송국 케이블부터 살게 되었고, 스포츠 신문이 살게 되었어요. 프로야구의 시절이 온 거예요. 이제는 봄, 가을까지는 인생을 재미나게 살 수 있습니다. 한국의 젊은 사람들이 스트레스 받은 거 프로야구 때문에 살 수 있어요.
그 사람들에게 날이라는 것은 안식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프로야구 개막하는 날이 중요한 거예요. 마치 아줌마들 곗돈 타는 날이 중요하듯이. 언제 오야가 돈 떼먹고 도망가지 않나 노심초사하지만. 항상 인간은 아침에도 이야기했듯이 자기 의미를 가지고 이 세상을 재단을 해요. 시간을 깔아놓고 중요한 사건과 중요하지 않는 사건을 가지고 그렇게 배열을 합니다. 그것이 뭐냐, 자기만의 세계, 영어로 시퀀스sequence라고 하는데 계열, 연쇄적으로 순서를 정해놓은 겁니다. 5월에는 이거하고, 7월에는 이거하고, 8월에는 이거하고. 계획을 짜놓아요.
광주에서 강의하면서 그런 이야기 들었어요. 광주 집사님한테 식사하면서 들었는데, “무슨 놈의 학교가 그렇게 행사가 많은지!!” 어느 학교라는 것은 신상에 문제가 되니 밝히지는 않겠습니다만. 왜 그렇게 행사가 많은지. 행사 정하는 것도 두 시간 동안 기도 누구 넣고. 더 이상 말하면 큰일 나겠다. 하여튼 간에 이 세상은 참, 일하는 실무자한테는 귀찮지만 학교입장에서는 그 날짜를 늘 신경을 쓰게 되는 거예요. 학교를 책임지는 자가 자기 시간을, 시퀀스sequence, 순서를 짜는 겁니다. 그게 자기를 위한 시간의 원단이에요. 원단인데, 주님께서는 그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안식일이라는 가위를 들고 그 원단을 자릅니다. 어떻게? 1234567 잘라버리고 1234567 하고 잘라요.
시간을 123456 단위로 해서 7 단위로 잘라버려요. 왜,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안식일을 왜 지키는지도 모르고 그냥 눈에 보이는 것, 있는 것 가지고 계속 끌고 가려는 그 의미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탈출이라는 경험을 했잖아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한테는 탈출하려는 이유가 없다니까요. 아무런 탈출할 이유가 없어요. 잘 먹고 잘 사는데 왜 탈출해요? 이 좋은 데 벗어나서 어디로 간다 말입니까? 갈 데가 없는데. 죽으나 사나 이 땅에서 성공해야죠. 남아 있는 생각은 그것밖에 없어요.
그러면 성공하기 위해서는 뭐냐, 계획을 짜야 되지 않습니까? 계획을 짜려면 시간을 내가 내 손으로 관리해야 되고 내가 모든 개입해서 내 모든 계획을 내 손에서 정립이 돼야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애굽에서 살던 사람들의 시간관리입니다. 근데 하나님께서는 그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끄집어내었어요. 끄집어내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끄집어 나왔느냐?” “예. 나왔습니다.” “이제부터 내 법을 지켜라” “예. 무슨 법입니까?” “내가 천지창조 할 때 6일 일하고 하루 쉬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반복적으로니 삶 속에 집어넣어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걸 집어넣는다는 것은 자기만의 시간은 날아가 버리고 안식에 의해서 새롭게 시간표가 짜여 지는 토대위에 인생을 새로 깔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서 아까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젊은 사람들이 반발하죠. “안식일을 지킨다고 천지개벽이 일어납니까? 그거 왜 지켜야 되는데요?” 이렇게 한다면 “니가 그런 소리 하게 되면 안식일의 완성이 되는 날에는 너는 이제 죽었다. 안식일의 완성이 되는 날에 너는 이제 죽었다. 너는 구원에 참여하지 못한다.” 이렇습니다. 니는 안 지켜도 나는 지키는데, 안식일의 완성이 되는 날에는, 안식일의 의미를 깔아준 사람만 구원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전부 다 탈락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또 젊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뭐, 애굽에서 나왔으면 됐잖아요?” 라고 하죠. 이게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애굽에서 나왔으면 희희낙락 누리기만 하면 되지, 애굽에서 나왔는데 왜 또 안식일을 지켜야 됩니까? 아직도 남아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제대로 의미를 아는 사람은 다음까지 답변해야 됩니다. 안식일 남아있습니다. 안식일 완성 남아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고 신명기 오늘 본문에도 남아있습니다. 15절에 봅시다. “너는 기억하라 너가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애굽에서 끄집어내었다고 했습니다.
끄집어내어 놓은 곳이 어디냐 하면 바로 지금 신명기 말씀을 주신 광야입니다. 광야가 다입니까? 광야가 안식일의 완성입니까? 뭐, 사막 밑에 석유 캐려고 광야까지 끌고 온 겁니까? 광야가 안식일의 마무리가 아니에요. 다시 합시다. 처음에 안식일 할 때는 천지창조를 했다고 해서 거기에 천지창조 기념일을 집어넣었어요. 이것은 하나님의 천지창조 작업이 지금 진행 중이라는 뜻입니다. 마무리까지 계속 가야된다는 뜻이거든요. 그 마무리까지 계속 가면서 천지창조이야기는 빠지고 15절에 이스라엘을 통해서 애굽에서 종 되었던 너를 건져내었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새로운 의미가 추가가 됩니다.
그만큼 추가가 되었다는 말은, 점점 더 완성의 때가 가까웠다는 뜻이거든요. 이 안식의 때가 추가가 되면서 신약에 오게 되면 “내가 곧 안식일의 주인이다”가 되어버려요. 예수님께서. “내가 곧 안식일의 주인이다”이래 돼버립니다. 그럼 제자들이 “완성이라면 그럼 뭐하시는데?” “나는 자비를 베풀 자에게 자비를 베푸느니라” 주님으로부터 자비를 받게 돼 버리면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홈빡 다 받은 게 돼요. 제가 광주 이번에 강의하면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 같아서 겨자씨가 처음에는 작아 보이지만 나중에는 큰 나무가 되어서 온갖 새가 깃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해석이 매우 힘든 이유는, 우리가 겨자씨가 관찰 대상 같으면 겨자씨의 성장과정이 우리 눈에 목격이 되는데, 그렇게 해석하면 이게 안 돼요. 그 본문 해석을. 왜냐하면 겨자씨 안에 하늘나라가 들어있다면 그 겨자씨 안에 우리가 같이 빨려 들어가야 하는 거예요. 마치 하수구에 빨려 들어가듯이. 손에 끼는 골무를 사용해서 옷감에 바늘 집어넣듯이. 그 대목 하면서 예를 든 것이 고추 반 갈라서 씨 빼고 그 안에 고기다진 것, 두부, 야채 다져서 속을 만들어서 그 안에 집어넣듯이. 이걸 오랫동안 예를 들었어요. 먹고 싶어서. 그걸 기름에다 튀겨내는데 맛있어요. 깻잎에다 해도 되고 고추에다 해도 되고.
지금 우리는 관찰하기를 원하는데, 관찰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겨자씨만한 속에다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게 되면 우리는 관찰의 대상이 안 됩니다.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는 거죠. 나중에 눈 떠보니까 어느새 천국이에요. 꼭 프로포폴Propofol 맞고 수면내시경하는 것 같아요. 우리 이종* 집사님이 계속 하라고 해서 저도 가끔 수면내시경 하거든요. 우리 이종* 집사님은 나만 보면 하여튼 검사하려고 덤벼들어요. 내 속을 한번 후벼 파야 되나 봐요. 수면내시경 검사하는데, 나는 오기가 있어가지고 내가 최면에 걸리나 봐라 해서 나는 안 걸리려고 정신 바짝 차리고 있는데 깨보니까 벌써 수면실에 누워있어요. 아!! 고 순간을 놓쳐버렸어요. 수면내시경 순간을. 구원이라는 건 그런 겁니다.
이미 검사 다 끝나서 검사 해놓고 뒤돌아보니까 위에 뭐가 많고 헬리코박터균이 많고. 집사님이 “목사님. 헬리코박터균이 많아 나중에 약 드셔야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나의 행함도 없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처리했다 이 말이죠. 지금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우리가 못 지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프로야구 개막했어요. ‘안식일 어서 오너라. 안식일 어서 오너라.’ 이런 인간 없습니다. 그런 사람 없어요. 자기 스케줄 따로 있어요. 그 스케줄에 신경 쓰기 바쁘지 언제 이거, 학교는 언제 졸업하지? 뭐 이런 거. 그런 거에 바쁘지. 언제 안식일 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 구원에 대해서 관심조차 없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니 시간을 뭔가 자를 때에 비로소 니가 느끼면 되는 거예요. 내 시간을 자를 때에. 그 자르는 기준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시편에 나옵니다. 시편 118편 23절부터 24절까지 제가 한번 읽어드릴 테니 여러분들이 해석이 가능한지 보세요.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이 날에. 주님이 기뻐하고 즐거워한 날이 따로 있어요. 이거는 우리 머리속에서 나온 날이 아니에요. 우리는 내가 성공하고 내가 잘남을 만방에 나타날 때 그렇게 즐거워요.
아까 쉬는 시간에 같이 여기서 영화이야기 주고받고 했는데, 여러분들이 영화나 음식 할 때 혼자서 안 보고 혼자서 안 먹습니다. 대부분이 누구 하나 들러리라도, 돈 주고라도 누구 하나 데리러 와야 밥맛이 나고 영화 맛이 나요. 왜냐 하면은, 인간은 남에게 보여주는 인생이 아니면 안 삽니다. 꼭 티를 내는 목표로, 티를 내는 목적으로 인간은 살아요. 그걸 가지고 ‘목적으로 이끄는 삶’이라고 합니다. 보란 듯이 사는 거예요. 날 보여줄 뭔 대상이 있어야 돼요. 우리의 시간관리 전부가 남보라고 하는 시간관리입니다. “나 어때? 나 어때?? 나 잘났지? 딴 데 보지 말고 날 보라니까!” 이런 식으로. “딴 데 보지 마! 날 봐! 나 지금 멋있지?” 이런 겁니다. 옷 입는 것 모든 것이 남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서 우리는 행동에 나서는 거예요. 남이 없으면 내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그 남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고 나의 가치를 위해서, 나에게 박수치고 칭찬할 수 있는 대상들이 ‘친구’라는 이름으로 있는 겁니다. 그게 우리 시간 스케줄이에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딴 것은 보지도 않고 나름대로의 주께서는 보여 줄 날이 있어요. 그 날은 아무것도 우리가 행한 것도 없는데, 이미 천국에 와서, 천국의 부귀영화를 같이 누릴 수 있는 그 날을 주께서 준비하셨습니다. 그게 내밀하게, 은밀하게 안식일이라는 계명을 통해서 계속 진척되어 온 거예요. 그렇다면 안식일은, 주께서 하는 모든 일에 안식일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뭐냐 광야인데, 광야는 뭐냐 하면, 애굽에서는 만나가 없었어요. 근데 광야는 만나가 있는 곳입니다. 그 다음에 광야를 벗어나면 만나가 멈추는 곳이에요. 만나가 없던 곳에서, 만나가 있던 곳으로 와서, 만나가 멈춘 곳으로 와야 이제 성공이 된 거예요.
그러면 없던 만나를 있게 한 것은 사람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식으로 인생 살아서는 하나님이 약속한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안식에 들어가는 인간으로 바꾸기 위해서 만나를 줘버립니다. 만나를 줘버리면 이것은 자동적으로 뭐냐 하면 전부 다 안식하는 날이 돼버려요. 왜냐 하면, 아무것도 할 게 없으니까. 강제로 안식일 지키는 거예요. 뭐, 텃밭이 있고, 뭐, 채소를 가꾸면 좋겠는데, 광야라는 것은 내가 나를 먹여 살릴 수 있는 것이 일체 허용되지 않는 세상입니다. 물 찾는 것도요, 도구를 이용해서 찾는 게 아니에요.
일부러 물 없는 곳에 가서 물 없다고 나자빠질 때에 반석을 뚫어서 물 내게 하십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현재 기존에 있던 너가 사라지지 아니하면 약속의 땅에 갈 수 없는 겁니다. 기존의 내가 알던 세계가 없어지지 아니하면....., 그러면 어떤 세계 말입니까? 어떤 세계를 알아야 돼요? 니 밑바닥을 장식하고 있고 진행하고 있는 안식일 세계. 그러면 그 세계는 뭡니까? 창조의 반복이 돼서 완성이 되는 세계. 1234567, 1234567, 왜 육일 입니까? 내가 육일 만에 천지를 창조했거든. 왜 칠일입니까? 천지창조를 완성한 날이거든. 주님의 세상이지, 니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의 존재 의미가 주님의 의미 안에 종속된 사람만 주의 나라에 갈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려면 내가 주인공 되는 세계는 이것이 실패로 끝나야 돼요. 그 작업이 바로 광야입니다. 그러면 만나를 줬다는 것은, 만나만 쳐다보면 살면 되는데, 왜? 광야가 끝나고 난 뒤에- 만나를 늘 주던, 죄 지어도 주고, 죄 안 지어도 주고- 그렇게 주던 만나가 왜 끊어지느냐? 만나라 하는 것은 인간의 생식기능, 음식을 먹는 기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애굽에서 주던 양식은 아니지만 어쨌든 간에, 싹 먹고 삼킬 수 있는 것은 만나에요.
그렇다면 만나마저도 안 준다는 이 말은, 이 몸 자체가 이제는 음식 먹어서 사는 그런 몸이 아니고 다른 몸이 되어야 산다는 거죠. 그것이 바로 약속의 땅입니다. 그걸 약속의 땅에서 이루지를 못하고요. 예수님 세계에서,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이루어집니다. 너는 죽고 내가 너를 살리리라. 복음으로 살리고, 용서로 살리고, 하는 겁니다. 제가 아까 기도할 때도 했지만 이 세계는 돈의 세계가 아니고 법의 세계고 그리고 말씀의 세계입니다. 주님의 세계인데, 주님의 세계라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괴롭고 힘들다 하는 것은 애굽에서 있었던 버릇 때문에, 돈이 없어서 힘들고 어렵고 괴롭다고 자꾸 해석을 하는데, 그거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만나가 없어서 힘든 게 아니에요. 뭐냐 하면, 복음의 기쁨이 없어서 우리가 늘 자신을 불행하게 봅니다. "복음의 기쁨" 복음의 기쁨으로 사는 것, 그게 하늘나라입니다. 로마서 14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고 의와 희락과 평강이라. 성령 안에서 주는 의와 희락과 평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세계를 허락하기 위해서는 바로 우리의 기존에 있는 이 시간 자체를 주께서는 재단을 해서 토막을 내야 하거든요. 그 토막을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거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꿈에, 저는 그런 꿈을 많이 꿉니다만, 꿈에 자꾸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꿈을 많이 꿔요. 꿈속에서 시원하게 볼일 보자 하면 시원하게 볼일 봐요. 이젠 자자. 자도 되는데 또 잠이 안 오고 화장실을 갖다 와야 돼요. 근데 해결책은 간단해요. 꿈을 강제로 깨고 그냥 화장실을 갖다오면 돼요. 갖다 오면 사라지는데, 가기는 싫고 고만 갖다 온 것으로 대체하려고 자꾸 꿈속에서 화장실을 백번이고 들락날락거리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 하면은, 주님의 안식일 완성이 가상이 아니고 실제 현실입니다.
현실인데, 우리는 자꾸 예수 믿는 꿈을 꿔요. 예수 믿는 꿈을. 예수 믿는 꿈을 안 꾸면 되는데, 우리가 예수 안 믿으면 되는 거예요. 오늘 아주 파격적인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예수 안 믿으면 되는데 자꾸 예수를 믿겠다 하는 것은, 자꾸 예수 믿는 현실을 내가 만들어내려고 하는 거예요. 혹시 행운이 오지 않겠는가? 혹시 복을 받지 않겠느냐? 현재 받은 복도 감당 못 합니다. 받은 복도. 머리카락을 세시고, 우리의 발걸음과 머리카락, 이 모든 것은 주님의 안식일의 효과를 보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웃고 즐길 때 그 발밑에는 주님께서 수모당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의 희생과 수모 위에서 우리는 웃고 즐기고 있는 거예요. 따라서 웃고 즐기자는 현실을 만들자는 말이 아니고 주님의 수모를 알게 되면 이미 우리는 현실 안에 이미 들어와 버린 거예요. 따로 꿈꾸는, 예수 잘 믿는 현실을 만들 필요가 없어요. 그냥 사세요. 애가 애 먹이면 그냥 사시고, 그냥 사시면 되는 거예요. 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대로, 그냥 사시면 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물론 내 양심은 그걸 지적해요. 하지만 주님은 지적을 하지 않습니다. 니가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주님은 입 다물고 아무 지적을 하지 않습니다. 니한테 잘하는 것이 뭐가 나오겠다고 너한테 주문을 하겠느냐? 주문 안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니가 모래위에서 너무 니 자신을 방치시키지 마라. 안식일의 완성의 소리가 안 들리느냐? 홍수가 오지 않느냐? 홍수가 오면 모래위에 지은 집은 무너진다. 지금 소리를 들어라. 안식일의 완성이 되는 소리. 다시 말해서 온 천지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뀌는 그 솜씨는 주님이 스스로, 주님만이 안식일을 지켜서 오는 그 결과다 말이죠. 그걸 듣게 되면, 그 소리를 들으면서, 지금은 그 소리를 들으라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 나름대로의 모든 계획에 주께서 시간의 차질을 유발시킵니다.
요거대로 돼야 되는데. 내일 되면 이거 계획대로 해야지. 또 안 되네. 계획 세워야지. 만날 계획 세웠다고 벌벌 떨고 계획 세우고 난 뒤에 또 안 돼서 허무를 느끼면서 벌벌 떨고. 진짜 바보 같아. 미리 땡겨서 걱정한다고 걱정하고. 다 하고 난 뒤에 에게? 이 정도야? 이게 내가 기대한 기쁨의 전부야? 아이고 허무해라. 이도저도 허무해. 애들 대학교 들어갈 때는 등록금 걱정하고. 대학 졸업하고 난 뒤에는 이제는 취직 걱정해야 하고. 취직하고 난 뒤에는 또 결혼시킨다고 걱정하고. 결혼하고 난 뒤에는 아기 누가 봐줘야 하나 하고 걱정하고. 이거는 자기가 시간 스케줄을 그렇게 하는데, 그럴 때마다 완성이, 이미 그 애가 애먹이는 것도 완성으로 여기시고 애들한테 배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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