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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의 남천강을 바라보고 있는 오연정. 정자는 물론 주변 숲과 마당의 잔디 및 조경 등이 아주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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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존재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공적을 돌에 새기고 그것도 모자라 쇠에다 각을 하지만, 그 물건이 없어져버리면 흔적마저 사라지고 만다. 이는 아마도 그 정신이 스며있는 혼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경남 밀양시 교동 남천강변 산자락에 자리한 오연정(鼇淵亭)은 조선 명종 때의 문신 추천(鄒川) 손영제(孫英濟 : 1521~88)가 만년에 강학을 했던, 그의 혼이 소중하게 간직된 곳이다. 추천은 퇴계 선생을 흠모하여 도산서원 창건을 주도하였고, 당대의 학자들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나누며 의로운 일에 앞장섰던 호걸(豪傑)의 선비였다.
# 오연정 수차례 유실·복원
추천은 만년에 밀양 추천(鄒川) 강가 오연(鼇淵) 위에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는 추천이라 하고 정자이름은 오연이라 하였다. 사실 오연이란 이름은 지명을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고인들이 오봉서당(鼇峯書堂)에서 강도(講道)하던 제도에 은근히 뜻을 둔 것이라 한다. 오봉은 본래 신선이 사는 산으로 바다 가운데 떠있는 섬이다. 훗날 한림원(翰林院)의 별명이 되기도 하였다.
본래의 오연정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훗날 복원하였으나 1717년에 다시 화재를 당했다. 그 후 1771년 추천의 8세손 행남(杏南) 손갑동이 주창하여 복원하였고, 순조 연간에 사림들이 뜻을 모아 경내에 모례서원(慕禮書院)을 창건하였다.
그러나 대원군 때 훼철되고 일부 건물만 남았다가 1935년에 화재피해를 입어 요사채만 남게 되었다. 그 이듬해인 1936년, 자손들이 다시 기금을 모아 위치를 조금 올려서 복원하였다. 그 후 1997년에 문중과 당국이 힘을 합쳐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 현재 전국의 정자 가운데 가장 잘 정비된 곳 중의 하나로 꼽을 만하다. 지금은 추천의 15세손 손병목씨가 정원과 건물을 정갈하게 관리하고 있다.
#유교의 본거지서 다시 태어난 추천의 삶
추천의 행적과 문집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고 파괴되어 없어졌으나 200년 후 자손들과 도산서원, 소수서원 등의 노력에 힘입어 그 행적의 대강이 밝혀졌다.
퇴계 선생의 후손 이야순(李野淳)이 자신의 집안에 전하는 편지들을 근거로 하여 지은 행장의 기록이 가장 상세하다. 이야순은 추천이 도산서원을 창립한 것이 유극장(劉克莊)이 주자의 고정서원(考亭書院)을 세우고, 한보(韓補)가 주자의 자양서원(紫陽書院)을 세운 것과 공로가 같다고 서술하였다.
추천의 생졸년(生卒年)도 자세하지 않았으나 초간(草澗) 권문해의 문집에서 졸년(卒年)을 알아냄으로써 밝혀졌고, 추천이란 호도 후조당(後凋堂) 김부필의 문집에서 발견했다. 또한 시와 서(書) 수십 편을 발굴하여 추천문집이 발간되었다.
이병원(李秉遠)이 지은 모례서원 상향축문(常享祝文)에는 이렇게 전한다.
'도산에서 경전을 공부하였고(陶山執經), 오연에서 덕을 기르셨습니다(鼇淵養德). 도산사 창건을 선창하여 선현을 숭모하였으니(倡祠崇賢), 공로가 후학들에게 남아 있습니다(功在後學).'
추천 손영제는 두 아우 굉제(宏濟), 겸제(兼濟)와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그의 독실한 학행으로 인해 향교훈도(鄕校訓導)로 임명받아 여러 고을의 학생들을 교화시키니 선비들이 운집(雲集)하였다.
명종 16년(1561)에는 훈도(訓導)로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 예조·병조의 좌랑·정랑이 되었고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외직으로는 예안현감, 울산부사를 역임하였다. 초간(草澗)이 지은 만사(輓詞)에 의하면 다른 벼슬도 더 역임한 것 같으나 기록이 남아 있지 못하다.
#퇴계 선생을 너무 흠모했던 추천
추천은 예안현감으로 부임하자마자 학교를 보수하고 교육에 힘쓰면서 제일 먼저 퇴계 선생을 찾았으나 당시 퇴계 선생은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기사년(1569) 3월에 드디어 퇴계 선생을 뵙고 제자의 예를 올리게 된다.
학문과 정치에 대한 노비지화(爐 之化: 풀뭇간에서 쇠를 녹여 연장을 만들듯 대선생의 교화를 입음)를 받고 당시 도산서당에 속한 농운정사( 雲精舍)와 천연대(天淵臺) 사이를 수없이 돌면서 사색과 탐구에 몰두하여 인생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그 후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추천은 몸소 염하고 입관하는데 참여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제문을 지어 애도하였다.
'아! 늦게 태어나 고루(孤陋)한 사람이, 도 있는 분에게 친근함을 얻었습니다(嗚呼, 晩生孤陋, 獲親有道). 높은 산 같은 덕과 큰 길 같은 도는, 지니고 있는 떳떳한 본성에서 좋아하는 바입니다(高山景行, 秉 攸好). 의심으로 통하지 못하는 곳을, 점괘 풀 듯 어리석음을 계발하여 주셨습니다(有疑不通, 如筮發蒙). 하늘은 선생 한 분을 남겨 놓지 않아, 덕성 이룸을 완성할 수가 없습니다(天不 遺, 考德無終). 대들보가 무너지고 철인이 쇠하니, 혈기 있는 생명은 모두 애통해하는 바입니다(梁頹哲萎, 含血所痛). 더구나 저 같은 소자는, 진실로 선생을 의지함이 중대하였습니다( 我小子, 實依爲重). 눈물이 쏟아지듯 흘러도, 선생의 모습은 아득하기만 합니다(有隕如瀉, 儀形杳邈). 한 잔의 술과 하찮은 제수로, 받들어 올리오니(單杯薄具, 奉獻明酌), 부디 혹시라도 흠향하시고, 저의 충정을 살피소서(庶或享之, 鑑我衷曲).'
# 봉급 털어 도산서원 창건 발의 주도
추천은 후조당(後凋堂) 김부필, 일휴당(日休堂) 금응협, 월천(月川) 조목, 성재(惺齋) 금난수, 매암(梅巖) 이숙량, 초간(草澗) 권문해 등 당대의 학자들과 도의지교를 맺고 서로 학문을 토론하며 이택지익(麗澤之益: 벗이 서로 도와 강학하며 덕을 닦음)을 삼았다.
특히 설월당(雪月堂) 김부륜과 막역한 관계였다. 퇴계 선생에 대한 정성과 학문에 대한 열정이 누구보다 지극하였다.
추천은 방백(方伯:감사)인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에게 도산사(陶山祠)를 창건하여 퇴계 선생을 추모할 것을 정식으로 건의하고, 자신의 봉급을 털어 도산사 창건모금운동을 벌여 모든 이의 참여를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도산사가 창건되었고, 훗날 도산서원으로 사액(賜額)되었다. 당시 사액의 명이 내려왔을 때 추천은 관직에서 휴가를 얻어 며칠 귀가한 때였으나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여 도산까지 400리길을 주야로 달려가서 하례하였다. 당시 설월당이 주자의 부친 위재(韋齋)가 민중( 中)에서 벼슬살이하다가 우계(尤溪)에서 살게 된 고사를 들어 예안에 눌러 살기를 매양 권유하였으나 추천은 밀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고향에 있는 학자 조암(操庵) 남문필과 스승의 학문을 강학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동네이름을 모례(慕禮)라 하고 냇물을 추천(鄒川)이라 하였다. 곧 모례는 퇴계 선생 계셨던 예안(禮安)을 사모한다는 의미이고, 추천은 공자·맹자가 태어난 추(鄒)나라와 노(魯)나라를 상징함이었다.
추천은 벗을 돕는 우정 또한 각별하였다. 월천과 성재가 상(喪)을 당해 형편이 어려워 곤란을 겪자 널을 제작할 나무를 부조하였다. 약봉(藥峯) 김극일이 지은 송계(松溪) 신계성의 여표문(閭表文)에'…그 계획을 도운 자는 손 선생 영제'라고 한 것 등을 보면 추천은 당시 호걸풍의 선비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