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솔, 『암스테르담 가라지세일 두번째』(문학과지성사, 2014)
글_노대원(문학평론가)
이 사람을 보라. 재능 있는 소설가가 여기 있다. 이 말이 판단이나 평가가 아니라 거의 ‘사실(fact)’에 가까운 진술이라는 것을, 김솔의 단편소설을 단 한 편만 읽어보아도 알게 된다. 이 시대 소설의 운명을 이야기하는 소설로서 김솔의 「소설 작법」이 이룬 성취는 박형서의 「아르판」(『끄라비』, 문학과지성사, 2014)과 필적할 만하다. 정교하고 현란한 소설적 구성에 있어, 김솔은 그보다 이미 한두 걸음 일찍 앞서 걷거나 뛰기 시작한 최제훈이나 정소현 등 선배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김형중의 해설 「김솔표 소설 공방」에서도 강조된 것이지만, 이 작가의 치밀함과 치열함은 분명 그의 소설 「소설 작법」과 「잠정적인 과오」에 나오는 ‘장인’적인 주인공들을 닮았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장인은 전통 문화와 기예를 수호하고 전승하는 정신주의적 실천가이다. 그 점에서, 김솔의 소설들은 장인들이 뿜어내는 아우라의 팔 할 정도는 이루고 있을, 긍정적 의미의 보수성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오히려 옛것에 대한 창조적 파괴, 혹은 창조적 반복을 감행하기 위해 새로운 공학적 설계도면을 작성하고 그 프로그램에 따라 철두철미 작업하는 언어의 엔지니어에 가깝다. 김솔의 소설은 보르헤스주의자의 손끝에서 탄생한 설계도면을 내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보르헤스가 누구던가? 김솔은 “이 책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게 읽어주는 걸 결코 허락하지 않겠다.”며 자신이 건축한 소설집의 문 앞에서 살똥스레 출입금지를 선언한다. 김솔의 「변신」의 한 대목을 인용하자면,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이자 노벨문학상 종신 후보였던 장님”으로 불리는 자인데, “이 문헌학자가 쓴 몇 권의 책들 속에는 몇 개의 도서관들이 통째로 압축되어 있어서, 그의 책 몇 권을 소장한 자들은 언제 어디서든 도서관을 세울 수 있다고 들었다.”(「변신」, p. 198) 그런 천재가 보르헤스다. 그를 자주 호명하는 까닭은 그를 예찬하고 숭배하기 위한 것이 틀림없을 테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이 탁월한 재능의 신인은 그의 위대한 선배 보르헤스에게 자신의 탄생 장면을 보여주는 것을 거부했다. 어째서일까. 우선, 자신의 문학적 영감과 발상이 많은 부분 이 눈먼 이야기꾼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자랑스레 뽐내는 말일 것이다. 동시에, 그는 문학적 아버지와 계보학적 접속으로만 자신의 문학을 한정짓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소설 작법」에서 가짜 명품 가방을 만드는 비루한 일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방 하나”(p. 66)를 만드는 고귀한 일로 바꾸는 노인의 장인적 숙명 의식과 역설적인 기품이야말로 그가 생각하는 소설(가)의 존재 방식이다. 김솔은 단순히 보르헤스의 추종자가 아니라 전혀 다른 도서관-우주의 창조주이고자 한다. 정확히 바로 그 점에서, 그는 보르헤스의 창조적 반복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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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솔의 소설은 영양분이 많은 고기를 넘길 때처럼 곱씹어 읽어야 한다. 그것이 현대의 장인을 대하는 올바르고 유일한 자세가 될 것이라고, 작가는 그의 소설들로 웅변한다. 표제작으로 삼을 만큼 뛰어난 단편소설인 「암스테르담 가라지세일 두번째」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두번째 읽거나 거듭 곱씹는 저작(咀嚼)을 통해서만 제대로 음미될 수 있을 것이다. 이성애 서사에 익숙한 독자들이 표제작을 뒤늦게야 익명 뒤에 가려진 동성애 커플의 서사로 재발견하도록 구성한다든가, 혹은 패러디와 주석, 교차 서술과 시간의 역행적 서술, 순우리말의 과잉 표현은 저마다 독창적인 저작(著作)을 위한 특수 공법이다. 이 공법들을 몸으로 통과하지 않고서는 그의 소설을 건널 수 없다. 김솔이라는 도서관의 미로를 여행하는 법은 그러하다.
때로 이 진귀한 작가는 의미로 충전된 독서의 장애물을 설치해두거나 보물찾기 놀이를 하듯 암초를 매설해두기까지 한다. 이를테면, 「잠정적인 과오」의 243쪽에서 244쪽에 이르는 페이지에는 두 개의 오탈자가 발견된다. (다른 독자들도 찾아보기 바란다.) 다른 소설의 페이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편집상의 실수이다. 평범한 소설이라면 그저 그렇게 지나쳐버렸을 것이다. 김솔의 소설에서는, 그러나, 주의 깊게 물어야 한다. 이것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배치한 미필적 고의인가? 아니면, 소설에서 ‘오탈자’라는 단어를 읽고 그 의미가 머릿속에서 활성화된 한가로운 한 독자의 눈에 의도치 않은 실수가 걸려든 것일까? (소설의 ‘페이지’가 아닌 소설책의 표지에서는 어떤 오류가 발견된다. 이 또한 ‘잠정적 과오’일까?)
“망망대해에 갑작스레 나타난 오탈자(誤脫字)와 이물이 부딪힌 뒤 가라앉기 시작”(p. 226)하는 선박이 처한 불가항력적인 운명 앞에서, 나는 저 ‘치명적인 오탈자’(?)를 추적하고 주석을 달지 않을 수 없었다. 국립국어원 온라인 소식지 <쉼표, 마침표.>에 실렸던 이 소설의 저본 「죽은 단어들의 무덤사전」에서는 소설집에서의 오탈자는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오탈자가 암초처럼 걸려 있는 어떤 문장은 발표작을 고심해서 다듬은 뒤에 소설집에 실은 흔적이 역력하다. 거기서 우리는 ‘잠정적인 과오’의 소설적인 체현(體現)을 본다.
테마와 모티프의 정밀한 스타일로의 체현은 이 작가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말해준다. “말의 몸인 글과 글의 마음인 말이야말로 한 인간을 정의하는 모든 것이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2003년 줄리엣 세인트 표류기」, p. 309)라는 문장은 작가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김솔의 ‘말의 몸’은 그를 ‘소설가’로 정의한다. 가령, 김솔의 산문들은 기묘하게도 산문보다는 픽션을 읽고 난 뒤의 느낌을 선사한다. 어느 글에서 그는 아이디어를 기록하기 위해 집안 곳곳에 녹음기를 둔다고 했다. 이 기술적인 노력에 대한 표현에서 장인적, 엔지니어적 치열함을 엿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한데 꿈을 채집하려는 그의 몸짓에서 어쩐지 소설의 허구적 상상력이 감지되지는 않는가.
이 책에 실린 「작가의 말」 역시 독특하게도 소설가로 등단하기 몇 년 전 벗에게 보낸 서신으로 갈음하고 있다. 이 서신은 “자살과 뼈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쓴 단편소설의 흔적을 구하기 위한 저자의 요청이 담겨 있다. 이 사라진 이야기는 이 소설집 어딘가에 배치된 특정한 소설을 지칭하면서, 동시에 그 이야기의 부재로 해석될 수도 있다. 과거로부터 현재로 도착한 이 서신은 ‘작가의 말’이라는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는 (잉여의) 곁텍스트(paratext)를 삶과 허구를 착종시키고 교란시키는 소설의 마술에 복무시킨다. 작가의 삶을 담되, 그것은 사실적인 기록이 아니라 이채로운 허구의 창조에 가까웠다. 소설가의 삶이란, 소설 속의 삶이고 삶 속의 소설인 까닭일까. 김솔이라는 도서관-우주를 여행하는 모든 이들은 그 질문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